태양은 다시 떠오른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80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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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헤밍웨이를 접한 것은, (어렸을 때 어린이용으로 읽은 노인과 바다를 제외하면) 토요명화극장에서 해 줬던 무기여 잘 있거라를 볼 때였다. 소설을 영화화하는 많은 작품이 그렇듯 급격한 전개와 지금 보기에는 상당히 느끼한ㅎㅎ 대사들 때문에 처음에는 어색한 기분이 많이 들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하지만 결국 새벽 1시가 넘을 때까지 흥미진진한 줄거리와 아름답고 섹시한 배우들, 영화가 전하는 삶과 죽음에 대한 장엄한 메세지에 넋을 놓고 바라봤더랬다. 모든 작가들에게는 저마다의 매력이 있다. 헤밍웨이에게서 내가 느낀 매력은 거칠고 쾌락을 즐기는 것 같으면서도 어딘가 염세적이고 이지적인, 고독하지만 멋있는 아저씨 같은 매력이다. 지금 보니 우디 앨런이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헤밍웨이를 정말 잘 표현한 것 같다. 정말, 완전 딱 그 이미지.

 

『무기여 잘 있거라』와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에는 헤밍웨이의 자전적 요소가 많이 들어 있다고 한다. 헤밍웨이 삶의 굴곡은 그의 작품에서도 물결치며 나타난다. 특히 전쟁이라는 테마는 개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는 만큼 등장 인물의 성격, 행동에 큰 영향을 주며 작품 전체의 분위기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 또 다른 테마로는 투우가 되겠다. 작가 연보에도 나와 있듯, 헤밍웨이는 투우를 보기 위해 스페인으로 4 차례 여행을 갈 만큼 그 자신이 투우 아삐시오나도이다. (스페인 투우 아삐시오나도들이 미국인 투우 아삐시오나도를 대하는 장면의 묘사는 참 유머가 넘친다. ) 2부의 배경에 해당하는 축제에서 중심을 차지하는 투우에 대한 묘사는 헤밍웨이의 투우에 대한 애정과 철학을 잘 보여준다. 경험을 기반으로 쓴 만큼 생동감과 현장감이 잘 살아 있다. 그래서 두 번째 책을 읽을 때에는 처음 읽을 때 훑듯이 읽은 것과 달리 전쟁과 투우를 통해 헤밍웨이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를 고민하며 다시 읽어 보았다. 책의 앞 장에 적힌,

당신들은 모두 길을 잃은 세대요.”-거트루드 스타인의 대화 중에서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해는 뜨고 해는 지되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아가며 이리 돌고 저리 돌아 그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 -『전도서』

이 두 글귀에도 유의하며 읽었다. 헤밍웨이의 소설을 잘못 이해했다가는 헤밍웨이가 시크하고 터프하게 비웃음을 찍 날리는 게 꿈에 나올 거 같아서; 여전히 완벽하게 이해했다고 확신할 수는 없고, 그냥저냥 발 뻗고 잘 수는 있는 정도인 듯하다.


전쟁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허무주의이다. 전체의 영광과 거룩한 목표로 포장되고 선전되지만 전쟁은 그 시작이 급격한 만큼 끝도 급격하다. 온 몸과 정신을 바쳤던 전쟁이 끝나고, 일상생활로 되돌려 진 개인이 마주하는 것은 평화 안에 감추어진 허무함이다. 피와 총 소리로 얼룩진 전쟁터에서 삶의 리듬은 곱절로 빨라지고 매일 아침마다 목숨을 새로이 걸어야 한다. 그 리듬의 속도가 갑자기 늦춰지고 조심해야 하는 것은 잠결에 침대 모서리에 발을 찧지 않는 것 뿐이 된다면 그 간격의 공허함은 얼마나 클까. 만약에 전쟁에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한 것을 바쳤다면 허무함은 배가 될 것이다.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의 주인공 제이크 반스는 전쟁 중 부상으로 성기를 다쳐 성불구자가 되어 돌아 온다. ‘체 말라 포르투나!’ 그는 남성성을 전쟁으로 인해 잃고 만 것이다. 이는 일상생활의 리듬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는 중요한 하나의 매개체를 잃은 셈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이 '상실'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들처럼 일상에 섞여든다. 그리고, 그의 상실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도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는다. 전쟁 후 누구나 하나 씩 '상실'을 '가지고' 있는 마당에 그 정도는 큰 결점도 아니다. 여기서 할 수 있는 말이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가 아닐까? 전쟁이 끝났지만 삶이 끝난 것은 아니다. 허무감도 상실감도 이어지지만 삶도 이어지기에 그는 살아나가야 한다. 그때 그가 택한 새로운 삶의 방식이 투우로 대변되지 않나 싶다.

 

투우

를 살펴보기 전에, 산 페르민 축제의 성격에 대해서도 중요한 밑줄을 쫙쫙 그어야 할 것 같다. 빰쁠로나에서 열리는 이 축제는 그 지역의 성인을 기리는 종교적인 축제로 일 주일간 지속되며, 이 때 그 유명한 ‘corrida de torros’와 투우가 열린다. 가게의 문은 모두 닫히고, 술집과 카페는 관광객과 현지인이 모두 축제 분위기 속에서 음식과 술을 나눈다. 바로 서 있던 것은 뒤집히고 뒤집혀 있던 것은 바로 선다. 경제 관념조차 뒤죽박죽이 되어 호텔의 식사 값이 두 배로 오르고 가만히 앉아 있는 손님에게 바로 주문을 요구하면서도 난생 처음 보는 사람의 술 값을 자기가 계산하기도 한다. 축제의 활기와 즐거움 아래서 모든 것은 용인된다.

이러한 무질서 속에서 홀로 우뚝하게 서 있는 것이 있다. 황소를 마주하는 투우사의 곧은 몸이다. 축제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투우 경기에서, 만원이 된 열기 가득한 경기장에서 투우사는 정직하게 죽음에 대한 위험에 자기 스스로를 내던지며 비극의 달콤함을 관객들에게 선사한다. 관객들도 가짜 기교를 보이며 거짓으로 연기하는 투우사보다, 진정으로 황소와 목숨을 둔 투우를 보여 주는 투우사에게 흰 손수건을 던지며 환호한다. ‘삶을 철저하게 사는그 자세를 찬양하는 것이다. 살아가면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배우냐 보다, ‘어떻게 사느냐라고 제이크는 독백한다. 어떻게 사느냐를 알게 된다면 자연스레 배우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결국 제이크가 바랐던 것은 삶을 치열하게 사는 것이 아닐까? 마치 투우사처럼.

 

전쟁은 그 손이 닿은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 개인은 전쟁 전의 삶으로 돌아가려 해도 돌아갈 수 없다. 이미 그 자신이 변했기 때문에. 그렇다면 새로운 리듬에 맞춰 적응해야 할 뿐이다. 무엇을 얻었고 무엇을 잃었는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다만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 허위와 가짜가 아니라 진실되게. 그런 의미에서, 마지막 장면에서 제이크 반스가 레이디 애슐리와 함께 택시를 타고 가는 장면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치러야 할 대가를 치루며 레이디 애슐리의 곁에 계속해서 머물렀던 제이크는 결국 그녀가 그를 필요로 할 때, 그녀에게 사랑하는 제이크라고 적은 전보를 보내고 달려가 그녀를 안아주게 된다. 그는 눈물을 흘리며 퇴장한 로버트 콘처럼 자기연민에 빠진 짝사랑을 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물론 그가 브렛과 결합할 수 있으리라 보지는 않는다. 하지만 브렛에게 제이크는 위기에 빠졌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사람, 가장 위로 받고 싶은 사람으로 다른 남자들과 헤어지듯 그와 헤어지지 않고 계속해서 관계를 이어나가고 픈 남자일 것이다. 거기에 더 이상 화냥년이 되고 싶지 않다는 브렛의 고백으로 보아, 앞으로 제이크가 그녀 곁의 어설픈 다른 남자의 존재로부터 고통 받을 일은 없으리라 생각한다. 그것이 제이크가 치열하게 삶으로써 얻어낸 삶의 즐거움이 아닐까. 연인이 될 수 없다면 영원히 친구로 곁에 머물게 해달라는 남자의 애틋한 마음에 대한 보상말이다. 


하지만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고 말해도 그것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알기란 어렵다.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면, 잘못된 방식으로 하고 있다면 어떡하지? 라는 걱정이 맴돈다. 힘의 강도만큼이나 방향도 중요하기에. 현재의 나도 그렇다. 앞으로 놓인 인생, 지금까지 살아 온 인생을 살피는 자기 성찰은 항상 불안함과 모호함을 불러 일으킨다. 나는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이 맞는가?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그래서 생각을 조금 뒤틀어 보았다. 그래도 '치열함'이 더 중요하다면 어째서일까 하고. 투우로 되돌아가서, 투우사가 잘못될 것이 두려워서 황소를 안전한 놈으로 고르고, 거짓된 묘기를 부린다면 결국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할인된' 영광 뿐이다. 잘못된 방향으로 달려 가더라도, 그래서 막다른 벽 앞에 부딪히는 대가를 치르게 되더라도 그 대가만큼 삶에서 얻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머뭇거리다가 아무 것도 잃지도 얻지도 못하는 삶보다는 나을 것이다. 하다못해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는 교훈이라도 얻게 될테니까. (로버트 콘은 다시는 그런 맹목적이고 바보같은 사랑은 안 하겠지..) 방향을 잡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제자리에서 맴도느니, 치열하게 살아나가는 방식을 택하라. 그러면 얻는 것이 있을지니! 라고 헤밍웨이의 목소리를 빌려 내가 나에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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