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양장)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윤성원 옮김 / 문학사상사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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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분 안에 읽을 수 있는 이야기

*

얘는 애가 너무 냉해.”

뭉치가 날 비스듬히 쳐다보며 말했다. 그 비스듬한 시선에는 애정 속에 비난이 섞여 있었다.

아니야~”

나는 굳이 말끝을 애교스럽게 올리며 대답했다. 무미건조한, 냉정한 사람이라는 평가에 기분 좋아할 유형의 사람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니긴. 넌 우리 없어도 잘 지낼 걸?”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인 적극적이고 활발한 뭉치는 따뜻한유형의 인간이다. 독설과 포옹을 번갈아 사용하며 주위 사람을 다독인다. 나는 지금 독설을 맞은 것이다. 독설이 아픈 이유는 그것이 목표에 명중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조금 아팠다.

 

*

나는 혼자 있는 게 좋아.”

D군이 말했다. 시선은 먼 곳을 향해 있었다. 마치 지금도 혼자 있는 것처럼.

나도.”

나도 따라서 먼 곳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하지만 나는 혼자 있는 것처럼 말하진 못했고, 그래서 D군은 시선을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너는 아냐. 넌 주위에 사람들 많은 걸 좋아하잖아.”

그 시선에는 판단이 담겨 있었다. 매일 옷을 바꿔 입는 연속극의 가난한 여주인공을 바라보는 눈빛이었다.

아닌데..”

나는 고독을 싫어하고, 항상 즐거움을 좇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싫었다. D군은 나의 대답에 어깨를 으쓱하더니 손에 들고 있던 밀크티를 들이켰다. 내 대답은 밀크티와 함께 창자로 내려갔을 것이다.

 

*

뭉치와 D군은 대화가 끝난 후에 둘 다 나의 손을 잡고 걸었다. 그리고 전과 다름없이 나와 연락을 주고받았다. 나는 동일한 존재였지만 만약 뭉치와 D군이 만나서 나라는 여자아이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면 둘은 괴리를 느꼈을 것이다. 나의 손을 각각 맞잡고 있던 그들, 그들은 결코 나의 다른 손까지 잡지는 못했다.


* 차마 다시 읽기도 뻘쭘한 글.. 가장 맘에 들었던 글이기도 하면서 너무나 설익고 서툴어서 이런 공개적인 장소에 올리기는 상당히 망설여 지는 에세이. 튼 이거 말고도 여러 편을 썼다가 최종적으로 올린 것인 만큼 애정이 크기도 하다. 하지만 역시 난 소설가와는 거리가 멀다고 다시 생각하게 된 계기이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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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김영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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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라는 이름이 덮어버리는 것들에 대하여

퀴즈. 이들 중 진짜 사랑에 빠진 사람을 고르시오.

①개츠비②톰③데이지④머틀⑤윌슨⑥닉

 

어렵다면 다시.

 

이들 중 진짜 사랑에 빠진 커플을 고르시오.

개츠비-데이지-데이지-머틀-머틀-조던

 

 

만약 교수님께서 이런 퀴즈를 내셨다면 나는 그 퀴즈를 포기했을 것이다. 애초에 질문이 잘못되었다. ‘진짜 사랑이란 무엇인가? 영화 소개만 봐도 이 진짜 사랑의 모호함을 알 수 있다. 진정한 연인들의 이야기라는데 어찌 그렇게들 사랑의 모습은 다양한지. ‘Love me if you dare’, ‘베티 블루’, ‘첨밀밀’, ‘봄날은 간다’, 그리고 ‘everyone says I love you’ 등등 영화들에 나타나는 사랑의 양태는 너무나도 다양하고 달라 보인다.

 

 

사랑인간으로 바꿔보아도 마찬가지이다. 수 없이 다양한 인간 군상에서 우리는 진정한 인간에 대해 자주 이야기하지만 들어보면 진정한 인간은 스티브 잡스가 되기도 하고 도스토옙스키가 되기도 하고 히로시마 인간이 되기도 하다가 싸이가 되기도 한다. 뭐지? ‘진정성’, ‘genuine’이 너무 남용되고 있는 것 아닌가?. 절대적 진리가 여러 개 일수 있다면 그것은 애초에 절대적 진리라고 할 수 없다.

 

 

나는 절대적 진리를 부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절대적 사랑, 진짜 사랑도 부정하지 않는다. 위대한 개츠비에서 인물들은 저마다 사랑이라는 모호하고도 위대한 장막에 몸을 숨기고 속삭이지만 그로 인해 진정한 사랑 자체의 의미가 퇴색되어 버렸다. 결국 누군가는 연기를 하고 있다는 말이다. 더 큰 문제는 자신이 진짜 사랑을 연기하면서 연기하는 것 조차 모르고 있는 것이다. 톰과 데이지는, 사랑이라는 미명 하에 난장판을 만들어 놓고 무책임하게 떠났다. 그럼 남은 당한 사람들은 진정한 사랑을 하고 있었는가? 가장 비극적인 인물로 그려지는 개츠비 역시 피해자라고 보기에는 어렵다. 개츠비가 좇고 있었던 것은 데이지가 상징하는 상류층과 그 상류층으로부터 사랑 받는 자신의 모습이었지 데이지라는 인격이라고 볼 수는 없다. 애초에 데이지는 돈으로 가득 찬사람이므로. 개츠비는 데이지를 향한 사랑 의해 파괴된 것이 아니라 명예에 대한 욕심으로 파괴된 것이고 데이지는 하나의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진정함이 주는 위력에 좀 더 주의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만큼 사람의 눈을 멀어버리게 하는 것도 없을 것이다. 위대한 개츠비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진정한 사랑과 같은 달콤한 말로 맹목적으로 자신의 욕망을 덮어버리고 정당화하는 모습은 위험하다. ‘진정성을 강조하면 할수록 그것은 자신의 공허함을 반증할 뿐이다.

 

 

* 쓰고 나서 약간 내가 무슨 소릴 하고 있는 거지.. 라는 의문이 든 에세이. 원래 쓰려고 했던 말은 여전히 손끝에서 머물고 물리적 내리치는 힘에 의해 화면에 변형되어 나타나는 글자는 도통 이데아의 그림자뿐이 되지 않는 기분이었다. 소설의 내용과 얼마나 연관이 되는 지도 사실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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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마 노트 오에 겐자부로의 평화 공감 르포 2
오에 겐자부로 지음, 이애숙 옮김 / 삼천리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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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안에는 무엇이 있나요?

 

히로시마 노트의 무게는 굉장하다. 무덤덤하게 써 내려간 오에 겐자부로의 글자 하나하나에는 인간의 위엄이라는 무게가 실려 있다. 저승사자의 명부에 적힌 것 마냥 사람들의 이름 하나하나를 접할 때마다 섬찟섬찟 놀라게 된다. 내 이름이 적혀 있을 수도 있었겠구나, 하는 상상은 하기조차 싫다. 내 안의 히로시마 인간은 이 노트를 직시하라고 명하고, 내 안의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은 이 노트를 한시라도 빨리 잊으라고 명했다.

 

잊는다는 것. 고통을 잊는 것과 참는 것은 다르다. 고통을 잊기 위해 사람들은 술을 마시고, 유흥에 빠지고, 마약을 한다. 고통을 참기 위해 사람들은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보다 냉정하고 철저하게 인식한다. 그리고 고통을 받는 사람들에는 어떠한 조건도 없다. 피해자도 가해자도 고통 받을 수 있으며, 부유한 자도 가난한 자도 고통 받을 수 있다. 언제 어디서 불쑥 찾아올지 모른다는 의미에서 고통은 평등하다. 그렇다면 문제는 고통을 망각할 것인가, 품고 갈 것인가가 된다.

 

인간은 인간이라고 해서 무조건 존엄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인간성’, ‘휴머니즘’은 인간의 위대함에 대한 것이 아니라 위대한 인간에 대한 단어이다. 그리고 그 위대한 인간은 바로 고통을 품고 살아가며 '지나치게 절망하지도 희망을 품지도 않는 현실적인 인간‘이다. 세상 속에 떨어진 피조물에서 인간성을 지닌 ’정통적 인간‘으로 살아가는 방법은 고통에 대해 인내하는 것이다. 고통을 인내하는 그 도덕관념에 바탕에는 세상에 대한 사랑이 깔려 있다. 비참하고 억울한 현실일지라도 현실 자체를 거부한다는 것은 현실에 속한 자신과 또 타인을 거부한다는 의미가 된다. 인간은 어쩔 수 없이 현실 속에 존재하며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존재한다. 보편적인 인간, 세상의 한 구성원으로의 인간이라는 인식은 고통을 공유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타자의 아픔에 공감함으로써 자기 치유는 시작되고 고통은 참아낼 수 있는 것이 된다.

 

우리 모두에게는 타인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리고 보편적인 인간으로서, 그 아픔에 대한 책임의식 역시 느낄 수 있다. 히로시마 노트를 읽으며 그들의 고통에 인간적인 존경심을 느끼고 한 편으로는 책임감마저 느낄 수 있는 것은 내 안에도 히로시마 인간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린 사람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그들을 나몰라라한다는 것은 나 역시 고통으로부터, 현실의 부당함으로부터 도망가려는 것이며 이는 곧 보편적 인간으로서의 나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 침묵할 권리는 히로시마 사람들에게만 있다. 그들의 외부에 있는 우리는 그들의 고통에 침묵할 권리가 없다. 적어도 ‘모럴리스트’가 되기 위해서라면.


* 이때 즈음 나의 가치관이 확립되었었다. 인간이라면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해선 안 된다 라는. 오에 겐자부로가 히로시마 노트를 통해 보여준 '모럴리스트'는 바로 그런 인간이다. 담백한 문체 하나하나에 실려 있는 무게감이 엄청 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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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앞의 생 (특별판)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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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흉한 로맹 가리씨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을 음흉하다고 한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본심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은 음흉하다. 그런 의미에서 로맹 가리는 음흉하다.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 속에 숨어 수 많은 평론가와 독자들을 물 먹인 그에게서 관음증적인(?) 취미를 엿볼 수 있다. ‘로랭 가리는 절대 이런 작품을 쓸 수 없다!’고 외쳤던 평론가들을 바라보며 그는 속으로 얼마나 코웃음을 쳤을까. 익명성의 맛을 1975년에 깨우쳤다니 그는 진정으로 21세기형 인간이었음에 틀림없다. 그 시대에 벌써부터 아바타를 창조해낼 정도로 미래지향적이었던 그가 수 십년 후에 인터넷이라는 사이버 세상이 펼쳐진다는 것을 알았다면 무릎을 치며 통탄했을 것이다. 젠장, 좀만 더 늦게 태어날 걸!하고.

 

한 편으로는 에밀 아자르라는 분신을 만들어낼 수 밖에 없었던 그의 절박함이 이해가 간다. 자아 정체성이란 자아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자아가 존재하려면 동시에 타자의 존재가 전제되어야 한다. 이 세상에 나 하나만 있었다면 아마 나는 그 세상 자체였을 것이다. 하지만 타자가 존재함과 동시에 경계가 그어지고, 자아 정체성은 만들어 진다. 타자가 바라보는 나가 자아 정체성에 포함되는 것이다. 로맹 가리는 평론가들이 만들어 내는 자신의 정체성이 상당히 맘에 들지 않았음에 분명하다. 잘못 이해되는 연애 편지 마냥 자신의 의도한 바를 파악해 내지 못하고 엉뚱하게 읽혀지는 소설들이 불쌍했을까? 그는 로맹 가리라는 이름에 얽매이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이해되는 소설을 쓰기 위해 에밀 아자르라는 분신을 만들게 된다. 아무래도 대중과 소통하는 위치에 있을수록 자아와 타자가 만들어 내는 정체성 간의 괴리는 심해지는 것 같다. 아이유 사건만 봐도 그렇다. 아이유는 대중이 만들어낸 순수하고 아무 것도 모르는 소녀라는 정체성에 얽매인 나머지 남자를 만나 사랑을 하고픈 자신의 정체성은 숨겨야만 했다. “에이, 아이유가 그럴 리가 없어!” 에이, 로맹 가리가 저런 작품을 어떻게 써?”는 상당히 비슷하지 않은가.

 

에밀 아자르가 사실은 로맹 가리라고 밝혀졌을 때 아마 사람들은 아이유에게 배신당했다고 느끼는 삼촌팬들 마냥 분노했을 것이다. 미친 것 아니냐며 손가락질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책 앞장에 나와 있듯, “미친 사람들만이 생의 맛을 알 수 있. (이건 딴 얘긴데 그런 의미에서 나는 아이유를 응원한다. 인생 쓴 맛을 충분히 보았을 테니 사람들이 손가락질한다고 너무 좌절하지 말고 앞으로 자신의 욕구에 솔직해지고 당당해졌으면 좋겠다.) 아무튼, ‘자기 앞의 생도 경계선 밖으로 내팽겨쳐진 미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하지만 이 책을 읽는 동안 미친 소년인 모모의 말에 비난을 던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적어도 나는 모모의 말에 귀 기울이며, 그를 동정하기도 하고 그에게 감탄하기도 했다. 왜냐면 모모에게는 그 세계가 바로 정상이고, 창녀들에게서 아이를 빼앗고 동포애라는 구실로 다른 민족에게 테러를 가하고 자연의 법칙에 거스르며 인간을 고문시키는 그 세계가 비정상이기 때문이다. 부모님이 있고 교육을 받으며 국가의 보호를 받는 사람들은 모모의 세계를 알지 못한다. 모모는 불행하다고 하지만, 그 불행은 아마도 이 세상을 너무나 많이 알기 때문에 생긴 불행이다. 그렇다면 그것을 진정 불행이라고 할 수 있을까?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그 경계선 안에 속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비정상이라고 내모는 것이 진짜 정상이고 행복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인간은 존엄해야 하고, 소중해야 하고, 존중 받아야 하고, 어쩌구 저쩌구.. 세상에 있는 온갖 아름다운 것들을 생각해볼 때 그건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자기 앞의 생, 에밀 아자르, 문학동네 63p) 그냥 생은 그 자체로 생이다. 굳이 나누고 분류하고 정의하고 비교함으로써 불행과 행복을 만들어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쓰면서 가장 재밌었던 에세이. 막판에 가서는 흥분하기까지 했다. 저때 접했던 책이나 영화, 뉴스들이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의 허구성을 날카롭게 비난하는 경우가 많았었다. 거기에 자극받아서 맞아, 사실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관습이나 규칙은 전부 인위적이고 허구적인 것에 지나지 않아! 라고 혼자 속으로 분노했었다. 그 뜨거운 김이 에세이에도 나타났던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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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폐범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49
앙드레 지드 지음, 원윤수 옮김 / 민음사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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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소설

시작부터 흥미진진하다. 베르나르라는 소년이 가출을 결심하고 있다. 그에 대해서는 여타 설명도 없고, 그에게 가족이 있다는 것 역시 짐작으로만 알 수 있을 뿐이다. 어째서 그가 양부로부터 사랑을 못 느꼈는지, 어쩌다 그의 어머니는 사생아를 낳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도 없다. 그렇게 사건은 난데없이 시작되고 자기 스스로 굴러간다. 소설 등장인물들의 개별성이나 특별함을 나타내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그렇기에 갑작스런 서술자의 등장도 당황스럽다. 실컷 이야기에 빠져들 즈음, 서술자는 독자의 귀를 잡아당기며 나타나, "이건 소설일 뿐이야!"라고 말한다.

 

주저리주저리 간섭을 늘어놓는 서술자의 존재와 '독자'라는 단어의 언급에 독자는 자신이 인생의 단막극을 지켜보는 관객이 된 기분을 느낀다. 완전히 소설에 몰입하지 못하고 소설이 던지는 의문에 놀라고 고민하게 된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독자는 거대한 과제를 직면하게 된다. 이 소설의 서술자는 대체 누구인가? 에두아르가 구상 중인 위폐범이라는 소설이 바로 이 위폐범들이라면, 서술자는 에두아르인가? 하지만 소설에 나와 있듯 에두아르는 서술자를 '대변하는' 인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 역시 창조된 인물인 것이다. 그렇다면 서술자가 창조한 위폐범들 안의 창조된 에두아르가, 또 다른 위폐범들을 창조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위폐범들 안에는 또 다른 에두아르와 또 다른 위폐범들이 존재할 수도 있고, 반대로 서술자 역시 누군가에 의해 창조된 위폐범들 안에 존재하는 독자적인 상상체일 수도 있다. 이런 식으로 추리해 나가다 보면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의 그 말씀이 바로 소설의 서술자의 시초가 될 수도 있게 된다. 이러한 의문들은 독자가 독자의 위치에서, 주어진 문제들을 해결하며 소설을 다시금 재구성하게 만든다.

 

내가 생각한 '위폐범들'의 의미는, 속고 속이는 행위로 나타날 수 있는 비극에 대한 경고이다. 544p에 달하는 소설 중에서 정작 위폐가 등장하고 위폐를 통용하는 과정은 그리 비중이 크지 않다. 세 꼬마들이 경찰로부터 경고를 받고 위폐를 사용하는 것을 그만두었을 때에도 소설은 끝나지 않는다. 어째서? 바로 그 꼬마들이 지니고 있던 욕망, 남을 속이며 얻는 희열에 대한 욕망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설은 보리스의 죽음에서 이야기를 끝낸다. 자기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는 '병'을 지니고 있던 가엾은 소년 보리스는 이 모든 속이고 속이는 위선적인 행위를 상징하는 관념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관념의 종말을 의미하는 한 발의 총성은 남을 속이고 자신을 속이고 진실을 거부하는 모든 욕망에 대한 경고로 울려 퍼진다. 이 외에도, 소설 속에서 가장 사적이고 가장 진심에 가깝다고 할 수 있는 일기가 등장하고 등장인물들이 조금은 뜬금없이 일장 연설 조로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는 모습들은 보다 진실에 가까워질 것을 요구하는 소설의 장치들이라고 생각한다.

 

주저리주저리 말했지만, 이 역시 나의 해석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보편적인 인간과 사회의 양태를 독자에게 보이며, 자기 나름대로 소설의 의미를 재구성해보게끔 하는 것이 바로 이 소설의 매력인 것 같다. 이 소설은 독자가 없으면 완성될 수 없는, 독자마저 하나의 주인공으로 상정하는 그야말로 진짜 소설인 것이다. 작가 위화는 천 만명이 읽으면 그 소설은 천 만가지의 소설이 되며, 작가마저도 그 소설의 독자가 되어 또 다른 소설을 만들어낸다고 하였다. 앙드레 지드가 자신의 유일한 '소설'이라 칭한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 가장 인상 깊었던 책 임에도 불구하고, 에세이로 쓰는 순간 내가 책의 의미를 완전히 왜곡시켜 버린 것 같아 찜찜했던 기분이 들었었다. 자세히 설명하려 하면 할수록 산으로 가는 듯한..그만큼 치밀하게 독서를 하지 못했다는 뜻일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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