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폐범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49
앙드레 지드 지음, 원윤수 옮김 / 민음사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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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소설

시작부터 흥미진진하다. 베르나르라는 소년이 가출을 결심하고 있다. 그에 대해서는 여타 설명도 없고, 그에게 가족이 있다는 것 역시 짐작으로만 알 수 있을 뿐이다. 어째서 그가 양부로부터 사랑을 못 느꼈는지, 어쩌다 그의 어머니는 사생아를 낳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도 없다. 그렇게 사건은 난데없이 시작되고 자기 스스로 굴러간다. 소설 등장인물들의 개별성이나 특별함을 나타내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그렇기에 갑작스런 서술자의 등장도 당황스럽다. 실컷 이야기에 빠져들 즈음, 서술자는 독자의 귀를 잡아당기며 나타나, "이건 소설일 뿐이야!"라고 말한다.

 

주저리주저리 간섭을 늘어놓는 서술자의 존재와 '독자'라는 단어의 언급에 독자는 자신이 인생의 단막극을 지켜보는 관객이 된 기분을 느낀다. 완전히 소설에 몰입하지 못하고 소설이 던지는 의문에 놀라고 고민하게 된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독자는 거대한 과제를 직면하게 된다. 이 소설의 서술자는 대체 누구인가? 에두아르가 구상 중인 위폐범이라는 소설이 바로 이 위폐범들이라면, 서술자는 에두아르인가? 하지만 소설에 나와 있듯 에두아르는 서술자를 '대변하는' 인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 역시 창조된 인물인 것이다. 그렇다면 서술자가 창조한 위폐범들 안의 창조된 에두아르가, 또 다른 위폐범들을 창조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위폐범들 안에는 또 다른 에두아르와 또 다른 위폐범들이 존재할 수도 있고, 반대로 서술자 역시 누군가에 의해 창조된 위폐범들 안에 존재하는 독자적인 상상체일 수도 있다. 이런 식으로 추리해 나가다 보면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의 그 말씀이 바로 소설의 서술자의 시초가 될 수도 있게 된다. 이러한 의문들은 독자가 독자의 위치에서, 주어진 문제들을 해결하며 소설을 다시금 재구성하게 만든다.

 

내가 생각한 '위폐범들'의 의미는, 속고 속이는 행위로 나타날 수 있는 비극에 대한 경고이다. 544p에 달하는 소설 중에서 정작 위폐가 등장하고 위폐를 통용하는 과정은 그리 비중이 크지 않다. 세 꼬마들이 경찰로부터 경고를 받고 위폐를 사용하는 것을 그만두었을 때에도 소설은 끝나지 않는다. 어째서? 바로 그 꼬마들이 지니고 있던 욕망, 남을 속이며 얻는 희열에 대한 욕망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설은 보리스의 죽음에서 이야기를 끝낸다. 자기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는 '병'을 지니고 있던 가엾은 소년 보리스는 이 모든 속이고 속이는 위선적인 행위를 상징하는 관념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관념의 종말을 의미하는 한 발의 총성은 남을 속이고 자신을 속이고 진실을 거부하는 모든 욕망에 대한 경고로 울려 퍼진다. 이 외에도, 소설 속에서 가장 사적이고 가장 진심에 가깝다고 할 수 있는 일기가 등장하고 등장인물들이 조금은 뜬금없이 일장 연설 조로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는 모습들은 보다 진실에 가까워질 것을 요구하는 소설의 장치들이라고 생각한다.

 

주저리주저리 말했지만, 이 역시 나의 해석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보편적인 인간과 사회의 양태를 독자에게 보이며, 자기 나름대로 소설의 의미를 재구성해보게끔 하는 것이 바로 이 소설의 매력인 것 같다. 이 소설은 독자가 없으면 완성될 수 없는, 독자마저 하나의 주인공으로 상정하는 그야말로 진짜 소설인 것이다. 작가 위화는 천 만명이 읽으면 그 소설은 천 만가지의 소설이 되며, 작가마저도 그 소설의 독자가 되어 또 다른 소설을 만들어낸다고 하였다. 앙드레 지드가 자신의 유일한 '소설'이라 칭한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 가장 인상 깊었던 책 임에도 불구하고, 에세이로 쓰는 순간 내가 책의 의미를 완전히 왜곡시켜 버린 것 같아 찜찜했던 기분이 들었었다. 자세히 설명하려 하면 할수록 산으로 가는 듯한..그만큼 치밀하게 독서를 하지 못했다는 뜻일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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