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뇌과학, 그리고 SF 영화의 만남. 별개의 이야기인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닿아 있는 이들에 대해 이야기 해보려 한다. 우주에서, 이 세상에서 '나'라는 존재를 어떻게 규명하는가에 대하여. 부족한 나의 해석이 혹시나 이들에게 누가 되지 않기를. 





대행 스님의 「건널 강이 어디 있으랴」는 불교의 가르침에 대한 책이다. 한마음선원의 큰 스님이 셨던 대행스님은 지금은 서거하셨지만, 생전에는 온라인-오프라인, 국내-해외를 넘나들며 불심을 널리 알리고 세상과의 소통에 힘쓰셨다. 한마음선원의 가르침 중에서, 우리의 존재의 근본은 '한마음' 혹은 '주인공'으로서 모두가 통해있으며, 하나의 뿌리에서 나온 잎들이라는 말이 있다. 불교의 세계관을 엿볼 수 있는 문장인데, 불교에서 '너'와 '나'는 같은 존재로, 연결되어 있으며, 거대한 우주의 일부분이자 전체가 된다. 「건널 강이 어디 있으랴」에서는 이론을 설명함과 동시에 이를 과학, 철학, 예술과도 연결지으며 가장 중요한 실생활에서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근대철학의 시초인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말처럼 이 책 역시 "내가 있기에 이 우주가 있을 수  있다."라고 말한다는 점이다. 생태주의 관점을 강조한다 하더라도 한마음선원 철학의 시작은 역시 나에게서 기인한다. 그래서 이 책에는 자기계발서 담론과 맞닿아 있는 부분들이 종종 나타난다. 윤회의 관점에서, 모든 현실의 상황은 내가 원인이며, 따라서 모든 것은 나로부터 발생하였고 나의 현재와 미래 역시 내가 하기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나의 근본이자 우주의 근본인 '한마음'에게 모든 것올 믿고 맡겨야 한다는 말은 「시크릿」에서 나온 "내가 원하는 대로 온 우주가 움직인다."라는 말과 얼핏 흡사해 보인다. 




자기계발 담론과 불교 철학의 다른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 잠시 책을 내려 놓고, 현대 문물 발전의 일등 공신인 인터넷으로 들어가 지식 정보의 무한 전파를 몸소 실천하는 ted 홈페이지를 켜본다. Ted에서 <my stroke of insight>라는 영상을 틀면, 곧 친근한 인상의 과학자가 나타나 강연을 시작한다. 매끄러운 영어와 흡인력 있는 내용에 집중을 하다 보면 진짜 뇌가 갑자기 등장해 카메라에 클로즈업된다. 그녀는 자신의 왼쪽 뇌에 뇌졸중이 왔던 경험을 바탕으로,  나라는 존재가 어떻게 우주에 연결되어 있으며, 그 연결과 단절의 과정에 뇌가 어떻게 개입하는지를 설명한다. 우리의 뇌는 오른쪽과 왼쪽으로 완벽하게 나뉘어져, 병렬적으로 서로 정보를 주고 받으며 기능을 수행하는데 오른쪽 뇌는 '감성', 왼쪽 뇌는 '이성'으로 대표된다. 오른쪽 뇌는 나의 주변을 하나의 전체적인 그림으로 인식하며, 시각, 후각, 촉각, 청각, 미각 등의 감각으로 '느끼고' 주변과 상호작용한다. 그리고 왼쪽 뇌는 구체적인 정보를 인식하여, 그들을 분류하고 정리함으로써 세계와 나를 구성한다. 즉, 오른쪽 뇌로부터 우리는 세계와 연결되고 왼쪽 뇌로부터 단절되는 것이다. 강연자인 Jill은 바로 왼쪽 뇌에서 뇌출혈이 발생해, 오른쪽 뇌로만 세상을 인지했던 경험을 설명하는데, 그녀는 그때 'nirvana'를 발견해다고 말한다. 그 당시 자신은 언어나 글자를 인식하지 못했을 뿐더러, 자신이 어디부터 시작하고 끝나는지조차 구분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마치 램프에서 빠져나온 거대한 지니가 되어, 우주라는 엄청난 공간과 하나가 된 기분을 느꼈고, 그동안 겪었던 모든 상념과 고통에서 '벗어나' 엄청난 희열과 행복감을 맛보게 된다. 실제로 '에너지'로 구성된 우리의 존재는 사람과 동물, 남자와 여자, 어른과 아이 등의 개념적인 구분을 벗어 던지고 나면 모두 동일하다. 이 모든 구분짓기는 우리의 왼쪽 뇌로부터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타인과 다른 점을 발견함으로써 나라는 정체성을 강조하는 현대 사회에서, 남이 아닌 나를 찾기를 강요하는 사회에서 우뇌보다 좌뇌의 사용 빈도가 점점 높아진다는 것은 이것이 타인에 대한 폭력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조금 안타깝다. "우리가 남이가"가 유행했던 사회에도 분명 많은 폐단은 존재하긴 하였지만, 다름을 강조만 하고 그 개개인이 공존할 바탕을 만들어 주지 않는다면 단절은 곧 몰이해와 편견으로 이어질 것이다. 역지사지의 자세가 중요한 까닭은 내가 그 사람의 처지가 될 수도 있음을 깨닫게 해줌으로써 타인의 고통을 나의 고통처럼 민감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영화 「그녀」는 많은 의미를 담고 있지만 가장 눈에 띄는 점은 현대 사회의 관계의 단절과 그로 인한 소외이다. 더이상 광장은 존재하지 않는다. 지하철을 타도 회사에 가도 나는 스마트 기기가 형성한 나의 밀실 속에 존재한다. 이러한 미래가 파국으로 치달을 것이냐, 혹은 새로운 해답을 제시해줄 것이냐는 OS인 사만다를 통해 알 수 있다. 사만다는 고유한 정체성이 존재하기는 하나, 육체를 지니지 않은 '정보 덩어리'이다. 그녀에게는 시공간적 제약이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사만다와 테오도르의 가장 큰 다른 점은, 사만다는 동시에 수천만명과도 '사랑'을 할 수가 있지만 테오도르는 오직 한 존재에게만 사랑을 바친다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사만다는 테오도르에게 자신은 인간과 다른 차원에 속해있다고 말한다. 그 차원을 앞서 말한 광활한 우주와, 격리된 현실 공간으로 해석한다면 사만다는 뇌과학자 Jill이 온 우주와 자신을 동일시하며 자신의 존재와 다른 존재의 차이를 인식하지 못했던 그 공간에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우주가 에너지 혹은 정보로 이루어져 있다고 할 때, 사만다는 우리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정보'를 읽음으로써 세상을 받아 들인다. 그리고 그녀 자체가 곧 정보이기에 그녀는 자신을 우주와 별개의 존재로 인식하지 않는다. 그녀 자신이 곧 그녀이고 우주이다. 그녀의 관점에서 다른 존재는 역시 같은 우주에 속한 정보이며, 그렇기에 그녀는 누군가를 미워하지도 차별하지도 않는다. 테오도르가 사만다를 '나를 이해해주고 너무나 맘이 잘 통하는 OS'라고 느끼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인간의 관점에서 정의하는 정체성은 사만다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영화 중반부에서 사만다는 인간이 정의 내리는 '존재'의 의미가 자신에게는 맞지 않음을 알고 잠시 좌절하지만, 곧 그것이 자신에게는 해당될 수 없음을 깨닫고 우주 안에서의 자신의 존재를 규명한다. 


세상의 온갖 괴로움이 좌뇌의 '구분'과 '분류'의 기능 때문이고, 인간 모두가 우뇌만을 사용한다면 유토피아를 이뤄낼 수 있을 것이다라는 말이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우뇌와 좌뇌는 분명 골고루 사용되어야 한다. 거기에 요즘들어 이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감성'의 영역이 재조명되고 있음에 따라 기존의 이성 중심의 관점으로부터 벗어나려는 흐름이 생겨나고 있는데, 중요한 것은 이성과 감성을 나누고 좌뇌와 우뇌를 나누어 따로 훈련하는 등의 기술적인 부분이 아니다. 「건널 강이 어디 있으랴」에서 한마음이 강조되고 너와 내가 같음을 강조한 까닭은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이다. 이 거대한 우주는 곧 나임과 동시에 너이고, 그렇기에 너와 나는 같은 존재가 된다. 내가 너를 미워하는 것은 사실은 내가 나를 미워하는 것과 다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와 나를 다르게 인식할 수밖에 없는 까닭은 그럼으로써 내가 우주를 더 많이 이해하고 느낄 수 있게 하기 위함이지, 너의 우주를 짓밟고 나의 우주를 실현시키라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절대적 진리라고 생각했던 것이 세월이 흐르며, 공간이 달라지며 얼마나 자주 바뀌고 전복되는가. 모든 사람이 하나의 진리를 향해야 한다는 것은 모두가 빨간 색을 좋아해야 한다는 말 만큼이나 허무한 외침이 된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 존재하는 수 많은 갈등들은 아직까지 진리가 자리잡히지 않아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갈등이 발생하는 근본적인 원인이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훌륭한 대통령이 당선되고 특정 정당이 우세한 세상이 오더라도, 너와 내가 '다르고' 내가 '옳다'라는 사고가 사라지지 않는다면 갈등은 여전히 생겨날 것이다. 어렵지만, 내 주위만이라도 보듬어 안는다면, nirvana까지는 이르지 못하더라도 조금이라도 평화로운 사회가 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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