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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6-01-05 2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나도 잠시 기장, 송정 바다를 멀찍이 바라볼 기회가 있었다. 바람이 꽤나 일었는지 철썩철썩... 부서지는 물거품이 마치...

이탈리아 작은 섬(뭐라더라.. 외국 이름 못 외운다 --;)의 바다도 봤다. 파울로 네루다가 산책하며 일포스티노와 함께 '메타포'를 이야기하던.. 아버지의 그물은 서럽다던 우편배달부. 바다... 꼬뮤니스트의 집회현장에서 어처구니 없이 그는 죽고 시인은 붉어진 눈망울로 다시 그 바닷가를 혼자서 걷고 있었다.

느티나무 2006-01-06 05: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지금 제가 읽고 있는 책 이야기를 하고 계시네요.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요즘은 어디에 계신가요? 해콩님!

해콩 2006-01-06 1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곳에서만 살아있어요. 바다 속을 아주 천천히 유영하는 중이죠. 한동안은...
느티나무님이 가까이 계셔서 늘 든든해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
일포스티노=우편배달부.. 영화도 좋아요? 테입 빌려드릴깝셔? 책은 어떤가요?

느티나무 2006-01-17 0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옛날에 그 영화 보다가 실패한 경험이 ^^;; 하기야 영화보면서 조는 건 병이지요. 전 왜 그렇게 그 의자가 편안한거죠? 든든한지는 잘 모르겠어요... 제가 뭘 했길래요? 그래서 다행, 불행 둘 다 아니지요.
건강하게 지내다 봅시다. 유영을 열심히 하면 잠수 능력이 팍팍 늘겠네요^^
 

 "지율스님, 아픈 생명의 숨을 불어 보냅니다" 

  [기고] 높이 나는 새처럼, 빛나는…

   

   다 큰 사람이 아이처럼 우는 초상집

 

  언젠가 그이와 함께 산에 올랐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문득 궁금하여 그이에게 물어본 말이 있습니다.

 

  "나무가 죽는 것 말예요. 고목이 되어 땅에 쓰러지고, 벌레들한테 살이 뚫리고 퍼석퍼석해지는 것이 나무의 죽음이잖아요. 그런데 왜 끔찍하지 않고 멋스러워 보일까요?"

 

  겨울산이었습니다. 산길에는 진행되고 있는 나무의 그런 죽음이 심심찮게 보였습니다. 사람의 죽음은 왜 끔찍할까요? 우리는 시체를 보는 것만 해도 겁이 나지 않습니까? 하는 의문도 담긴 말이었습니다.

 

  "어떤 눈으로 보느냐에 따라 다르겠지…. 벌레도 마이크로 현미경으로 보면 웅장한 움직임이 있지 않나요?" 하고 그이가 말했습니다. 제가 다시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시체로 썩는 것도 어떤 눈이냐에 따라 멋스러울 수 있다는 것인가요?"

 

  그이가 잠깐 생각하더니 말했습니다. "초상집에 가면요, 대문에 들어설 때 기운이 좋아요. 참 맑아요. 알던 사람이 죽었거든요, 또는 피붙이가 죽었거든요. 어른이, 세상의 온갖 욕망에 시달리던 다 큰 사람이 아이처럼 운단 말이에요. 죽었다고, 사람 하나가 세상에서 영원히 없어졌다고 우는데, 사람이 자기 속에 가진 가장 맑은 것이, 훼손되지 않은 것이 밖으로 나온단 말이죠. 저는 우는 사람들이 참 이뻐 보였어요."

 

  관념적이었던 제 질문을 현실적인 앎과 느낌의 땅으로 옮기던 그이의 이야기를 저는 오래 간직하고 싶었습니다.

 

  사내의 꿈을 꾸는 비구니

 

  언젠가 산에서 나눈 다른 이야기도 생각납니다. 좀 엉뚱한 이야기일지 모르지만요.

 

  그이는 평생 독신으로 살고자 결심한 사람입니다. 남자한테 여자의 마음 같은 거 주지 않겠다고 앳된 처녀 시절 부처님과 약속을 했다고 해요. 그런데 진정으로 그 약속을 지키기란 쉽지 않답니다. 도시를 떠나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지만, 도적 같은 사내가 있었답니다. 꿈 속을 찾아오는….

 

  꿈에 사내가 나타날 때, 그이가 꿈속에서 어떤 장소에 있든, 자기가 바라보지 못하는 쪽에서 사내가 와서 어깨를 잡거나 뒤에서 안기도 한답니다. 그럴 때, 아, 왔구나…, 하고 알아채지만, 어쩐 일인지 사내의 손을 뿌리치지 못했다고 합니다.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손길이 무척 따뜻하였기 때문에….

 

  "그 사람이 누구였는데요?" 제가 물었습니다. "몰라요. 얼굴을 볼 수 있어야지. 난 겁이 나서 돌아보지도 못하는데…."

 

  꿈에서 깨면 분통이 터지지만, 다시 한번만 더 꿈에 나타나라, 아주 혼쭐을 내놓을 거야, 씩씩거리며 잠이 들 때도 있지만, 그럴 때는 어찌 낌새를 아는지 몇 달 소식이 없고, 그러다 아예 꿈을 잊어버리고 있으면 또다시 나타나 어깨나 팔을 지긋이 잡아오고, 번번이 꼼짝을 못하는 일이 계속되었다고 합니다.

 

  "최근에도 그런 꿈 꾸셨어요?" 그건 아니라고 했습니다. 어느 날, 그이의 속에서, 매듭이 풀렸나 봅니다. 풀린 것은, 꿈의 매듭이 아니라, 현실 속의 정진과 성장과 깨달음의 매듭이었겠지요. 매듭이 풀린 뒤, 어느 밤 사내가 꿈에 나타났고, "나한테 이러지 마!" 하고는 앙칼지게 손을 뿌리쳤답니다. 그리고 눈을 부릅뜨고 그를 돌아보았답니다.

 

  모르는 얼굴이었다고 해요. 그 후 다시는 사내의 꿈을 꾸지 않았다고 그이는 말했습니다. 수행은 힘든 것이구나, 꿈 하나도 받아들이기에 따라 도끼 같은 것이구나, 싶었습니다. 이 이야기도 저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기겠습니다.

 

  사람의 나이를 알려주는 '손'

 

  그이를 처음 만난 날도 생생히 기억합니다. 제 비망록에 적어놓았는데, 2002년 2월 9일의 일입니다. 그이는 걸어서 서울로 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천안 외곽의 한 다방에서 만났습니다. 그날 다른 한 분도 그이를 맞이하러 천안 시내에서 나와 있었습니다. 그는 어떤 환경단체의 사무장이었는데, 후줄근한 잠바 차림에 키가 아주 컸습니다. 장발이었고요.

 

  우리는 둥근 탁자에 앉아 이야기를 나눴고, 분위기는 무거웠습니다. 세상이 당신들만의 것이냐, 당신들이 부산까지 빠르게 왔다갔다 하려고 왜 죄없는 산하를 해치는 짓을 하느냐, 생명의 산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왜 상처와 고통을 주느냐. 그이는 서울사람들한테 따지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산을 지킬 수 있다면 감옥에 가는 것도 두렵지 않다고 그이는 말했습니다.

 

  이야기가 끝나갈 무렵, 그런데 사람의 말이란 것은 만나는 자리의 주제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는 서로 나이를 묻게 되었습니다. 그이는 나이를 밝히려 하지 않았습니다. 아유, 뭘 그런 걸 물으세요, 처음 만난 사람한테 어떻게 나이를 가르쳐주나요, 하는 투였습니다. 평생 부처님 되는 공부를 하겠다고 한 사람도, 여자는 여자인가봐, 하고 저는 속으로 웃었습니다. 그런데 천안에서 마중나온 분이 자기는 갓 서른을 넘겼다고 했을 때, 그를 처음 볼 때 마흔쯤으로 본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의외의 큰 발견이라도 한 듯 과하게 놀라는 저를 가만히 지켜보던 그이가 말했습니다.

 

  "얼굴만 보면 속아요. 손을 보셔요. 손은 못 속여요. 저는 이분 처음 볼 때 손 보고 나이를 알아봤는데요." 그럴싸하게 들리는 말이었는데, 왠지 저는 그이가 깍쟁이같이 느껴졌습니다. 끼어들어 아는 체 하는 것이, 산속에 오래 살았어도 인생의 온갖 잡다한 지혜를 많이 알아요, 하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그이의 손으로 시선을 주었습니다. 재주가 많아 보이는 작고 날렵한 손이었습니다. 그이는 얼른 탁자 밑으로 손을 내립니다. 손을 숨기는 모양이 장난기가 가득하였습니다. 제게는 이런 작고 예쁜 그이의 기억들이 많습니다.

 

  지율이 마지막까지 믿는 것

 

  그이를 일러 누군가는 "우주에서 제일 깡다구가 센 사람"이라 하더군요. 백일 동안 단식 수행을 하면서도 자기를 잃지 않는 것을 보고 그리 생각한 모양입니다. 사실 그이는 천하의 바보입니다.

 

  18살에 머리를 깎고 산에 들어갔다가 2년 만에 환속을 했다고 하지요. 그 후 4년 정도 이 나라 강산을 원 없이 유람하였다고 해요. 그리고 다시 머리를 깎고 20년 가까이 산에서 살았다고 합니다. 그이가 이번에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은 생명의 산을 해치지 말라고 외치기 위해서였지요. 그이는 세상물정을 잘 아는 사람이 아닙니다.

 

  제가 알기로, 그이는 자기 눈앞에 나타나는 사람들을 무턱대고 믿었습니다. 처음 상대한 사람들은, 산을 직접적으로 해치려 하는 당사자였습니다. 즉 철도를 개설하려는 자들입니다. 서울에 있는 그들에게 따지러 가는 길에 저를 처음 만났을 때도 이렇게 말하더군요. "우리 산에 와보신 적이 있나요? 부산에 사시면서 아직 안 와 보셨어요? 꼭 와보세요. 정말 아름다워요. 터널공사를 하려는 분들도 막상 우리 산에 오셔가지고는 햐, 이 산을 뚫어야 하나, 하고 영 못 내켜 하셨거든요." 그만큼 산이 아름답다는 말이면서, 지도와 설계도만 보고 철도를 만들려고 해서 그렇지 직접 산에 와 보게 된다면, 공사판 사람들도 인간일진대, 인간이라면, 그 아름다운 산을 차마 해치지는 못할 거라고 그이는 믿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선의와 진심을 믿는 것, 그런 바보 같은 믿음이 그이를 겁없이 세상에 나오게 하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나라의 임금'이 되겠다는 사람이 산을 해치지 않겠다고 종이에 써서 약속한 것도 그이는 믿었습니다. 그런 종이쪽지의 약속을 "공약(公約) 아닌 공약(空約)"이라고 해서 의심부터 하는 게 세상사람들의 습성인데, 그이는 '임금'이 하는 약속인데 그 약속을 믿지 않으면 대체 누구의 약속을 믿냐고 구원처럼 반겼습니다. 그이는 자신의 손을 잡아준 정치인의 선의와 정의감을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후에도 그이는 믿었습니다. 환경단체 사람들이 나타났고, 그들의 선의와 의지를 믿었습니다. "나처럼 목숨 걸고 산을 지키주실 거야" 하고 천군만마를 얻은 것처럼 기뻐했습니다. 그이는 계속 믿었습니다. 정론직필을 말하는 신문과 방송 기자들이 가졌을 정의감, 투철할 것이 틀림없을 그들의 직업정신을 믿었습니다. 그이는 서슬퍼른 법관을 믿었습니다. 지조 있는 법관, 마지막 정의의 보루가 굳건히 있으니, 이젠 괜찮다며 "우리 판사님, 우리 판사님" 하고 수없이 뇌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그이는 최선을 다해 믿었습니다.

 

  세상사람들인 우리는 그 믿음이 답답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이의 믿음은 차례로 깨어져 갔습니다. 결국 그이가 믿을 것이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없게 되고 맙니다. 아니 마지막으로 남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천하에 홀로인 자기 자신입니다.

 

  보름 동안 먼지를 뒤집어 쓴 초콜릿

 

  그이와 심하게 다툴 때가 생각납니다. 그 이야기도 하고 싶습니다. 작년 겨울, 저는 그이의 단식 수행을 말려보려고 상경하였었지요. 그 때가 백일 단식수행 중 40여 일이 지났을 때입니다.

 

  우리는 한참을 옥신각신하였습니다. 마침내 저는 "제발 그만 하시라고 하는 제 마음을 모르겠습니까? 왜 몰라줍니까?" 하고 얼굴이 벌겋게 되어 소리치고 말았습니다. 가시돋친 반문이 돌아왔습니다.

 

  "피를 나눈 여동생도 제 결정을 따릅니다. 당신이 뭔데 하라 마라예요? 목숨이라도 걸지 않으면 안 되는 제 마음은 모르시겠어요?" 제 고약한 성질이 폭발하였습니다. 저도 모르게 벌떡 몸을 일으키고 만 것입니다. "더 이상 드릴 말이 없습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두 다리로 서니 저의 시선은 순간 높은 위치가 되었습니다. 앉은뱅이 탁자에 바짝 붙어 앉은 그이가 내려다 보였습니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마음은 허물어지고 말았습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하는 거친 제 언사에 "가세요! 그런 말 하려거든 다시는 오지 마세요!" 하고 그이가 더 격하게 나올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노트북에 눈을 준 채 새근새근 숨만 쉬고 있는 겁니다. 작은 몸피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습니다.

 

  막되게 굴었어도, 아, 이런 나를 내치고 싶지 않으시구나…. "가세요!" 하고 성질을 부리지도 못 하시는 그이가 안타까웠습니다. 그만큼 단 한 사람의 도움도 아쉬운 형편이었습니다. 저는 힘없이 주저앉아 한숨을 쉬며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느새 목소리는 부드러워져 있었습니다.

 

  "내일 일정이 어떻게 됩니까? 제가… 몇 시에 다시 찾아오면 됩니까?" 제 말이 엉뚱한지 그이는 힐끗 저를 보았습니다. "누가 옳은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혹시 압니까. 오늘밤 자다가 하느님 꿈이라도 꾸고 계시를 받고 각성을 해서 내일 다시 와 제발 단식 하십시오, 계속 하십시오, 마음껏 하십시오, 하고 응원할지 어떻게 압니까."

 

  유머가 있는 말에 그이는 미소를 짓더군요. "저는 절대 죽지 않아요. 산이 살아 있는데 제가 왜 죽습니까. 산이 살아 있는 한, 저는 죽지 않아요. 제가 지금껏 이리 싸워 온 것도 다 산이 주는 힘이 있어 할 수 있었어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방의 천장을 망연히 올려다보고, 그런데, 저는 불쑥 딴말을 하고 말았습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저하고 약속을 해요." "무슨 약속…?" "단식을 계속하되… 오늘부터 곡기를 취하세요. 하루에 한 끼 정도만 곡기를 취해주세요. 그러니까 단식을 계속 하십시오. 그러나 곡기를 취해주세요. 이 약속만 하시면, 저는 안심하고 집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그이는 다시 노트북에 눈을 돌렸습니다. 제가 하고도 "이 무슨 악마의 말인가?" 하고 순간 당황했습니다. "아, 혹시 이미 그렇게 하고 계신 겁니까?" 당혹감을 지우려, 이미 그러고 있다면 천만다행이라고 어색하고 과장된 너스레를 떨어보았습니다.

 

  그이가 마침내 말했습니다. "저기…책상 위를 보실래요." 여러 잡동사니가 놓인 낡은 책상이 방구석에 있는데, 데스크탑 컴퓨터의 모니터 밑에 초콜릿이 한 개 있었습니다. 시중에 나와 있는, 아몬드가 들어 있는 초콜릿입니다. 그이가 아주 어려운 말을 해주었습니다.

 

  "보름 전에 제가 이 집에 올 때… 있었어요. 아는 사람 편으로 잠시 비어 있는 이 방을 빌렸고, 내일은 다른 데로 가야 합니다. 집주인한테 급한 사정이 생겨서…. 아무튼 혼자 이 방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요. 저게 눈에 들어오지요. 물론 제가 취할 수 있어요. 그러나 저렇게 있어요. 치우지 않습니다. 저 자리 그대로 먼지를 쓴 채 처음 들어온 날부터 지금까지 있어요. 제 눈에 들어옵니다. 그러나 저는 치우지 않아요. 아시겠어요?"

 

  결국 이루지 못한 지율의 옛 이야기

 

  단식을 하되, 숨어서 곡기를 취해달라는 말에 그이는 제 의심의 깊은 곳을 짚으며 그렇게 말했고, 그때가 작년 겨울이었고, 그리고 제가 그이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지난 추석 무렵입니다. 어떻게 연락이 닿아 부산 식물원 앞으로 갔습니다. 그이는 어느 허름한 가정집 2층에 있었고, 충주에 산다는 여동생이 와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동생은 고속버스를 타러 집을 나서는 길이었습니다. 주말에 언니를 보러 왔고, 다시 시댁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죠.

 

  여동생이 돌아간 뒤, 우리는 오랜만에 밀린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겐 연초에 구두로 한 약조가 하나 있었습니다. 제가 그이를 만나러 간 것도 그 때문입니다. 약조는 이렇습니다.

 

  "공동조사가 시작되더라도, 저와 때때로 만나, 당신께서 어떻게 살아 왔는지, 소녀 시절, 처녀 시절은 어땠는지, 어쩌다 불문의 길에 들었는지, 그런 인간적인 이야기들을 해주십시오. 그것을 잘 풀어 대법원 판결이 나오기 전에 단행본으로 내서 사람들한테 읽히고 싶습니다" 하는 것이었죠. 시중의 한 출판사와도 이미 이야기가 돼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흥미 위주로 저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것은 어울리지 않아요. 보다 이 사회의 거시적인 미래에 대한 묵직한 이야기를 해야 하지 않겠어요?"라며 반대하더군요. 저는 설득했습니다. "청정한 산을 함부로 해치는 지금의 일처럼, 지금 이 사회에서 그런 일이 생기는 것도 다 세상과 인간사를 어리석게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요? 지혜로 밝아지면, 이런 문제가 안 생기고, 생기더라도 보다 부드럽게 해결되겠죠. 그런데 어떻게 하면 그런 지혜가 생기죠? 세상을 밝게 알려면 어째야 하죠? 저는, 단 한 사람에 대해서라도 아주 깊게 제대로 이해하면 그런 지혜가 생겨난다고 생각해요. 지혜는 사람 하나를 이해하면서 흘러나와 자연스레 세상 전체로 향해 퍼질 것 같아요." 그이를 놓고 세속에서 엄청난 오해와 불신이 있습니다. 그러니 그것만 제대로 밝혀놓아도 결국 세상을 보는 사람들의 눈을 밝게 하는 거라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그 말에 그이는 "알겠습니다" 하고 승낙하셨지요.

 

  연초의 그 약조가 몇 개월째 밀리고 있었고, 사실 그것은 제 개인적인 사정 때문이었는데, 아무튼 지난 추석 무렵에야 제가 불쑥 나타나선 "더는 늦출 수 없습니다. 저와 조용한 콘도에 열흘 가량 투숙합시다. 그리고 정말 치열하게, 또 솔직하게 이야기를 나눠봐요"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이는 제 말을 일언지하에 거절하였습니다. 지금 상황이 어떤데, 더이상 손을 쓸 수 없는 최악인데, 책은 무슨 책! 짜증이 잔뜩 어린 말이었습니다. 단 1초도 생각하지 않는, 즉각적인 거부의 말을 듣고 저는 당황했을 뿐 아니라 마음이 상하고 말았습니다.

 

  "그러지 마시고, 제가 말씀드린 것을 잘 생각해 보세요." 저는 등을 돌려 방에서 물러나왔습니다. 현관에서 신발을 신고 베란다 창에 손을 짚고 담배를 피웠습니다. 그리고 여러가지를 돌이켜 보았습니다. 말대로 그이의 산이 '최악의 상황'인 것에 저도 동의하고 있었습니다.

 

  산의 운명을 둘러싼 결정적인 문제가 이제 그이의 손을 떠났다! 하고 저는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환경공동조사에서 그이는 빠져나와야 했고, 조사는 전공이 다양한 '전문가'들에 의해 진행될 것이고, 조사가 끝난 뒤 보고서 작성에도 그이가 끼어들 여지는 없었습니다. 양측의 조사결과를 놓고 전체 회의를 하겠지만 결론이 나지 않는다면 모든 보고서는 대법원에 제출하게 돼 있고, 산의 운명을 다시 '대법원 판사'들이란 전문가들이 결정을 하게 돼 있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서 근거를 하나하나 다 대기는 힘들지만, 전문가의 손에 맡겨진 산은, 그이의 비원과는 정반대의 결론에 이를 것이라고, 아니 전문가의 손에 맡겨진 순간, 산의 운명은 끝났다, 천재지변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는 한, 산을 뚫고 철도를 내는 일은 기정사실이다, 라고 저는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아마 그이를 뺀 세상 모든 사람들이 오래 전부터 이렇게 판단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산에 아주 장대한 콘크리트 터널이 뚫리더라도, 그이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도 곁에 남게 하자, 사람들에게 그이의 속깊은 이야기를 소상히 알게 하자, 같이 미래의 실천을 위해 힘과 마음을 모을 사람들, 이들의 존재 말고는 다른 유의미한 그 무엇도 없지 않은가, 그럴 수 있는 한 권의 책, 그러나 이 제안을 그이는 일언지하에 거절합니다.

 

  저는 다시 방으로 돌아와 작별인사를 했습니다. 그이는 다음날부터 낙동강 순례를 떠날 거라고 합니다. 누구와 가냐고 하니 혼자 간다고…. 아마 당신 마음의 소리를 들으러 가는가 보다, 하고 저는 생각하였습니다.

 

  그날 한번도 그이의 밝은 표정을 보지 못했습니다. 말 곳곳에서 끙끙 앓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몸이 정말 많이 안 좋으시구나, 하고 저는 짐작할 뿐이었습니다. 저는 다시 한번, 생각해보세요, 말하고는 방에서 물러나왔습니다. 그것이 그이를 본 마지막 날입니다.

 

  석 달 만에 접한 지율의 소식

 

  그후 석 달이 지나 인터넷 뉴스로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이는 "12월 8일에 경기도 여주 신륵사를 떠나 여동생이 사는 충북 충주로 향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여동생 집에 오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는 것이고, 여동생은 기자에게 "아무런 연락을 받지 못했다. 나도 언니가 신륵사를 떠났다는 사실을 오늘 아침에야 알게 됐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언니와 나눈 마지막 통화에서 여동생은 "잠을 자지 못할 정도로 많이 아프다. 음식을 못 삼키겠다"고 몸상태를 전하는 언니의 말을 들었다고 했으며, "9월 중순께 부산 사무실을 떠나 지금까지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자연순례를 하고 있는 것으로 나는 안다. 보름 전 서울에서 만났을 때도 특별히 당부한 말은 없었다. 현재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지 않지만 향후 해야 할 말이 있을 때가 되면 언니는 분명히 (앞에 나와) 말과 행동을 보여줄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제가 읽은 기사의 마지막에는, 그이가 "터널공사 과정에서 업무방해 혐의로 시공사로부터 고소돼 검찰에 불구속기소됐지만 울산지법에서 열린 재판에 참석치 않고 자취를 감춰 현재 법원으로부터 구금영장이 발부된 상태"라고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일 주일쯤 지났습니다. 신륵사에 있을 때의 그이 모습을 찍은 사진 한 장이 뉴스에 나왔습니다. 몸무게가 30Kg쯤이라고 하는데, 삭정이와 같은 몰골이었습니다. 말을 하다가도 의식을 잃거나 동공이 풀리기도 한다는 것이고, 신체기능 중 콩팥 기능은 거의 정지 상태라고 하고, 하반신을 쓸 수 없을 정도라는 것입니다. 음식을 씹어먹을 수도 없겠지만, 그래도 물을 마실 터인데, 그렇다면 소변을 다른 누군가가 받아주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제가 그이를 마지막으로 본 추석 무렵 이후, 그이는 단식 수행을 시작했다는 겁니다.

 

  왜 숨어서 단식수행을 했을까요? 저는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그런데, 계속 숨어서 하지 왜 결국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을까요? 그 이유도 저는 알 것 같습니다. 지금은, 그것에 대해 말할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신문이 알려주는 소식이 아닌, 여동생이 직접 그이의 소식을 담은 편지를 보내온 것은 바로 그제의 일입니다. 저한테만 보낸 게 아니라 '초록의 공명'에 뉴스레터를 신청한 모든 이에게 보낸 편지였습니다.

 

  "오늘은 경북의 작은 토굴에 머물고 있는 스님 언니를 만나고 왔습니다. 차마 안아볼 수도 없었습니다. 기운이 쇠진해져 30Kg 남짓한 몸은 마비가 오고 눈은 침침하지만 틈틈이 정신을 가다듬고 기도 정진하며 보내는 이 시간들이 4년간 산을 지키자고 싸워온 시간 중에 가장 호강스러운 하루하루라는 말에 가슴이 미어지듯 아팠습니다. 그동안 도와주신 분들도 많고 좋은 분들도 너무 많았는데 걱정만 끼치고 감사하다는 인사를 못 드리고 살았다고 하셨습니다. 고맙다는 이야기를 대신하여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함께하는 마음을 나누어 주세요. 기도하여 주세요."

 

  "녀석들아, 그래, 나 안 죽었어."

 

  불을 끄고 따뜻한 이부자리에 들어가 누우니, 방안 허공으로 까마득히 먼 옛날만 같은 어느 하루가 떠오릅니다. 산에서 그이와 하루를 보냈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날 산행은, 그이가 처음으로 긴 굶주림을 겪고 난 뒤, 회복기의 몸일 때였습니다. 2003년 초여름께입니다. 그이도 몇 달 만에 산에 오른다고 했습니다.

 

  산에서 우리는 비를 만났습니다. 한군데 더 둘러볼 곳이 있었지만 취소하고, 급히 하산길에 들어섰습니다. 산은 물기에 푹 젖어 버렸습니다. 저는 서툰 산행인이라 걸음이 자꾸 허적거리는데 그이가 뒤에서 몇 번이고 "조심해요!" 하고 외쳐야 했습니다. 작은 개구리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의아했습니다. 내 인생의 수많은 지난 날에 그래도 몇 번은 비가 오는 산에 있어 보았는데, 이렇게 산길로 뛰어드는 개구리의 잦은 출현은 처음이었습니다. 엄지보다 작은 개구리입니다. 등은 녹색이고, 배가 빨갰습니다. 등의 우툴두툴한 것에 독이 있는 것도 같습니다. 혹시 개구리들이 비가 와서 신이 났고, 그래서 지금 생명의 약동을 표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얘네들, 갑자기 왜 이래요?" 사람 발길에 밟혀 죽을지도 모르고 말입니다. 그이는 웃습니다. "비가 온다고 신이 나서 이럽니까?" 사람 발길에 밟혀 죽을지도 모르고, 또 한번 생각했습니다. 그이가 웃으며 말했습니다. "오랜만에 왔다고 나한테 지금 인사하는 거야. 그래, 착하지. 아, 조심해요!"

 

  결국 산의 미세한 움직임에 눈이 밝은 그이가 앞장서고 저는 뒤에 섰습니다. "녀석들아, 그래, 나 안 죽었어, 많이 기다렸어?" 폴짝거리는 개구리한테 그이는 연신 인사말을 던지며 하산하는 것인데, 뒤에서 따라가면서 모습을 보자니 정말 개구리들이 뛰어나와 인사를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날의 그이 모습이 캄캄한 방 안에서 너무 아름답게 떠올랐습니다.

 

  당신의 영혼을 생명붙이들은 사랑합니다

 

  산에서 본 개구리 이야기를 하나 더 해야겠습니다. 이것만 하고 이 글을 접겠습니다. 지난 초여름 어느 날, 아침 일찍 산의 계곡으로 올라갔다가 본 개구리 이야기입니다.

 

  산 중턱의 절을 지나 등산로를 5분 가량 올라가다 우리는 별 생각없이 계곡 안으로 들어갔습니다.(참, 그날의 동행인은 그이가 아니라 사진을 찍는 기자 한 분이었습니다.) 큼직한 바위 곳곳에 웅덩이가 있고, 물이 고여 있는데, 한 웅덩이 가까이 갔을 때 무엇인가 물 속에서 쏜살같이 움직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수십 마리의 까만 "올챙이!"들이었습니다.

 

  웅덩이의 수면은 이내 잠잠해졌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웅덩이 주변에서 계속 서성거렸습니다. 그러자 개구리 한 마리가 두 눈을 빼꼼 내미는 것입니다. 역시 엄지만한 크기인데, 제가 예전에 밟아버릴 뻔한 것과 같은 종일 겁니다.

 

  우리 새끼들이 왜 이러나, 하고 어미가 정찰을 나온 것이겠지요. 기자가 개구리를 향해 카메라를 가져갔습니다. 큰 그림자가 자기를 덮치자 개구리는 놀랐는지 수면 위로 나와 폴짝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기자가 따라가며 셔터를 눌렀습니다. 그러는 새 다른 쪽 수면에서 한 마리가 새로 나타났습니다. 역시 수면 위를 폴짝거립니다. 기자가 이놈 저놈 따라가며 계속 셔터를 눌렀습니다.

 

  그러고 있는데, 어느 순간, 개구리는 물 밖으로 뛰쳐 나왔습니다. 그리고 바위를 타오르기 시작합니다. 다른 한 마리도 그와 똑같은 행동을 합니다. 아무래도 이상했습니다. 왜 컴컴한 물 속에 숨지 않을까. 웅덩이에는 지난 겨울의 나뭇잎이 많이 있습니다. 올챙이들이 이미 밑에 숨어들었고, 어미 개구리도 거기 숨으면 딱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위 위로 자기를 노출시키는 것입니다. 그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짓입니다. 만약 우리가 사람이 아니라 개구리의 포식자라면 당장 먹잇감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문득 소스라치듯 놀랐습니다. 언젠가 들은 적 있는 바닷속 물고기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어떤 물고기는, 사나운 포식자가 오면 알이나 새끼한테서 떨어져 포식자 앞으로 뛰어든다는 것입니다. 저를 잡아먹어요, 배를 채우세요, 새끼들은 건드리지 말아 주세요.

 

  눈앞의 개구리도 그런 놀라운 모성의 이치에 따라 행동한 것입니다. 아니, 물론 다른 여러 해석도 가능하겠지만, 저는 그렇게 믿고 싶었고, 개구리의 행동에 마음껏 놀라고 싶었습니다. 그 짧은 시간에 일생일대의 결정을 내렸다는 것이 놀랍고, 아니 언제든 새끼를 위해 그런 행동에 돌입할 수 있는 그들의 본성이 놀라웠습니다. 등에 혹이 울룩불룩한 개구리가 불보살처럼 빛나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왜 산에 사는 작은 개구리와 같은, 생사에 초연한 사랑의 능력이 없는 것일까요. 아니, 있었는데, 어느 시간대에서 어쩌다 그것을 잃어버린 것일까요.

 

  그제 밤, 그이의 여동생이 제게 보낸 편지 말미에 붙어 있던, 짧은 글이 떠오릅니다. 언제 그이가 쓴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 경북의 어느 토굴에서 있다는 그이의 심사를 짐작할 수는 있었습니다.

 

  천성의 정상에서

  해오름을 보았습니다

  어둠에 갇혀 있던

  생명들을 향해 빛이 온화하게

  번져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고요한 바다를

  황금빛으로 물들이고

  구름 위로 날아가는

  한 조각 빛을 보았습니다

  아침마다 들창으로 찾아오던

  밝은 빛들이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빛들을 안고

  높이 나는 새처럼

  밝고 가벼운 마음으로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초록의 공명―지율 합장.

 

  마지막으로 그이에게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세상 인간들이 모두 "이제 그만 하라고, 죽음으로 사람들을 협박하는 것에 재미붙였냐고, 차라리 그만 죽어버리라고" 손가락질을 한다고 하여도, 산의 작은 개구리들은, 아니, 말이 없는, 말을 모르는 이 세상의 모든 생명붙이들은, 당신한테, 살아요, 우리 같이 살아요, 하고 아픈 생명의 숨을 불어 보내고 있습니다. 높이 나는 새처럼, 빛나는 당신의 영혼을 생명붙이들은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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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01-04 1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갑니다.

숨은아이 2006-01-04 1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요. 이 글 읽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해콩 2006-01-05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점심을 먹으면서 힐긋 본 신문에 짧은 기사가 났더군요. 그동안 안동 어느 토굴에서 혼자만의 외로운 단식을 계속하시던 지율스님께서 오늘 내일 대구에 있는 모병원으로 옮겨지실 거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저 관심 조금 가지고 글 퍼나르고 띄엄띄엄 맘 아파한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다는 죄책감... 아울러 다른 문제에서도 이렇게 덜 적극적으로 살면 안될텐데... 하는 반성.. 올해는 정말 '마음을 나누는 좋은 선생님'이 함 되어봐야할텐데...

'물만두'님 오랜만이예요.. ^^ 그동안 안녕? 새해에도 늘 그렇게 팔랑팔랑 춤추듯 경쾌하게 사셨으면..
'숨은아이'님도 안녕하시죠? 글 읽어주시고 또 퍼가시어 널리 전파시켜주시니 제가 감사하죠..

호랑녀 2006-01-04 16: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퍼갑니다.
읽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해콩 2006-01-05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랑녀'님도 새해 늘 건강하시고 복 많이 지으세요~

해콩 2006-01-10 0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깊고 어두운 강가에서] - 부산지부 게시판에서 펌

2006년 1월 7일 토요일 11시, 서울행 열차를 탔습니다. 여섯 명이 함께 탔습니다. 지율 스님의 근황을 몰라서 마음 태우고 있던 중에 병원으로 이송되었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결국은 경기도 고양시 동국대학교 일산병원에 거의 강제로 입원을 하시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지 도통 어지럽기만 했습니다. 병원을 방문해도 스님을 만날 가능성을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그냥 있을 수도 없었지요. 병원 앞에서 조용히 촛불제라도 하자고 의견을 모았습니다. 급히 현수막을 만들고 연락을 하기도 했습니다.

오후 4시가 넘어 병원에 도착을 했습니다. 거대한 병원입니다. 1층 로비에 들어섰을 때 막 지나가는 사람이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는 김 선생님의 말에 그 분들을 불렀습니다. 전혀 기대를 하지 않고 갔지만 다행인지 아닌지 스님을 뵐 수가 있었습니다. 스님은 피골이 상접한 상태였습니다. 김 선생님이 스님의 손을 잡고 꼭 안으셨습니다. 슬픈 와중에도 그 모습에서 ET와 소년이 가슴으로 교감하던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가까이 오라고 손짓을 하셨고 제 손도 꼭 잡아주셨습니다. 뭐라 말할 수 없는 분위기 속에서 그래도 뵐 수 있었다는 것을 위안으로 삼았습니다. 촛불제는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대신에 스님의 뜻을 따라 많은 사람들과 함께 그 뜻을 공명하는 방법을 찾기로 했습니다.

어떤 분이 이런 말씀을 했지요. 스님을 보면서 '오이디푸스 왕'의 딸인 안티고네의 운명을 생각했다고. 소포클레스가 쓴 비극 <오이디푸스 왕>에서 오이디푸스는 운명이 내린 죄과로 장님이 되고 방황을 하게 되지요. 방황하는 그 아버지를 돌보던 딸, 안티고네는 독재자 크레온 왕의 명령을 어깁니다. 국가의 적이라 낙인찍혀 왕이 까마귀밥이 되도록 명한 오빠 폴리네이케스의 시체를 묻어 주는 쪽을 택했지요. 그리고 왕의 명령에 불복종한 벌로 그녀는 목숨을 내놓야 했습니다. 산 채로 매장당하는 형을 선고받은 그녀가 자유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법을 어기고 오빠를 묻은 바로 그 장소에서 스스로 목을 매었습니다. 그녀는 국가가 아니라 인간과 형제의 도리를 택했습니다. 인간에게 붙어다니는 온갖 저주 중에서 가장 무서운 저주는 '어리석음'이라는 것을 이 비극은 극명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스님을 뵐 기회가 다시 있었습니다. 부산에서 수녀님도 오셨습니다. 우리는 부산으로 내려왔습니다. 차 안에서 冊을 읽었는데 떠오르는 말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인간 예수에게 말했습니다. "그대가 신이라면 스스로를 구하라!" 예수가 대답을 했습니다. "만약 내가 나 스스로를 구한다면, 그대들은 몰락하리라. 내가 나 자신을 잃고 나의 생명을 희생하는 것은 그대들을 구하기 위함이다."

스님이 여러 분에게 드리는 글입니다.


<깊고 어두운 강가에서>


이제 다시 어두운 강가에 서서

밀항하듯 탈영하듯 떠나야만 하는 시간이다.

수없이 건너 왔던 강을 또 혼자 건너야 한다.


수심을 알 수 없는 저 어두운 강에 몸을 던져야

이 강을 건널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두려운가.

이제 저 강은 나를 건네줄 수도 있고

내 생명을 앗아 갈 수도 있다.


이슬픔과 두려움에 아랑곳없이

나는 다만 깊고 어두운 천성의 강에

던져지는 자맥질일 뿐이다.

-지율합장-
 

[전교조 부산지부 게시판 펌]

교육청 게시판(중등교육과)에 쓴 박대환선생님의 글..

 

'공자'는 대동 사회에서 공평한 분배와 평등을 가장 우선적 개념으로 두고 있습니다. 물론 오늘날 이러한 의미를 바로 적용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우리가 말하는 불평등이 어떤 특정한 분들의 일방적인 입장이 되어서는 아니될 것입니다.

'존 롤스'의 입장을 빌린다면 우선

1) 불평등의 조장이 사회 발전에 도움이 된다
2) 불평등에 대한 구성원의 합의이다.

이 2가지 요소가 전제되지 않는다면 우리 사회의 정의의 개념과는 하등의 상관이 없는 누군가를 위한 불평등입니다. 인사는 교사 누구에게나 동등하게 기회를 부여하여야 하며, 또한 특정한 조건에 대한 배려라 하더라도 다수의 동의가 수반되었을 때 은혜의 차원이 아니라 배려의 진정한 의미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현 인사 제도에 있어 문제점

1) 선배정과 전보 유예의 가장 잘못된 부분은 인사의 평등권을 가로 막는 것입니다.
- '국가 인권위원회'의 회신에서 인권의 문제로 인정함

2) 선배정과 전보 유예가 교직 사회의 발전에 도움이 되고 있습니까?
- 취지는 충분히 인정한다 하더라도, 취지보다 부작용을 낳을 소지가 더 많음

3) 선배정과 전보 유예의 조항이 구성원의 합의에 의해서 만들어졌습니까?
- 그런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교장들이나 부산시 교육청에서 일방적으로 정한 규정이 아닌가요.

4) 이 제도의 시행에 있어 교직 사회의 구성원이 제대로 참여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있었습니까?
- 이전에는 없었으며 작년에 있었다 하더라도 전혀 홍보가 되지 못함

최소한의 보완을 위한 장치로서 인사 위원회를 두고 있다고 하지만 일선 학교에서 제 역할을 하고 있는 지는 확신이 가지 않습니다. '인사위'가 전체 교사의 입장을 수렴하지 못하여 교장들의 들러리로 전락하였을 때 그 피해는 모두 전 교사에게 돌아갈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 제도의 선의의 피해자가 누가 될 것이냐 하면 성별에 있어서는 남교사보다 여교사, 경력에 있어서는 고경력 교사보다 저경력이거나 나이 어린 교사, 성향면에서는 아부형 복종형 보다는 저항형 문제 제기형 교사가 우선 피해자가 될 것입니다.

어떤 사회든 공동체가 믿음을 전제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선 바른 제도와 구조를 세웠을 때 공동체의 믿음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황우석 교수의 슬픈 영웅을 보면서도 이해가 되시지 않습니까? 우리 나라의 검증 되지 않는 논문 제도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짜집기 논문, 대리 논문으로 승진 점수나 채우고,연구 학교 시범학교 결과 발표에 전혀 공적이 없는 교사들을 공동 연공 서열로 올리고 하는 것이 교직 사회에 믿음이 없어서 그럴까요?

개인의 이해 관계가 개입되었을 때 대체로 누구나 이기적이 되지 않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보충 수업, 자율 학습, 모의 고사, 인사 제도 셀수 없는 많은 제도에 학생을 위해서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십자가 뒤에서 거미줄을 치는 더럽고 치졸한 교사가 제도의 줄타기를 통해 이기를 누릴 수 없도록 해야하는 것이 바로 교육청이 해야 할 역할일 것입니다. (선배정과 전보 유예의 줄타기를 하는 사람은 계속 그렇게 합니다.)

내일을 크리스마스입니다. 이 땅에 사랑을 실현하기 위해서 오신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지만 그 분의 진정한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는 정말 어려운가 봅니다. 여리고 도상의 레위인이나 성직자는 지금도 많지만 이웃의 아픔을 함께 하는 선한 사마리아인은 멀기만 합니다. 그러나 부산시 교육청에는 이런 선한 사마리아인들이 많이 계실 것이라 굳게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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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6-01-03 1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사위원회'는 법적으로 '자문'기구일 뿐이고 인사권은 교장의 고유한 권리"!!
'인사의 공정성과 투명성'에 대한 의무에 대해서는 실수로라도 절대로 언급하는 법 없는 우리 '장'님 직원회의 석상에서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시어 일갈!!

인사규정안을 개정하기 위해 규정안의 부칙이 요구하는대로 전체 재적 교사 1/5이 발의했더니.. '(인사위원회) 위원장과 재적 교사의 1/5의 요구로 개정을 발의할 수 있다"는 문구를 '위원장과 인사위원회 재적 교사 1/5의 요구로 개정을 발의할 수 있다'로 해석해야한다고 기세등등하게 무효를 주장하는... 참! 이런 해석결과는 교육청의 조언이라네..ㅋㅋ (참고로.. 이렇게 해석할 경우... 우리 학교 인사위원은 모두 10명이니까.. 그 1/5이면 인사위원 꼴랑 두 명! 결국 위원장 한 명, 혹은 인사위원 두 명만 모이면 개정을 발의할 수 있으나 80명에 가까운 다른 교사들은 인사규정안에 대한 불만이 있어도 개정조차 절대로 발의할 수 없다는 현실!! 그리고 위원장이 인사위원 모두를 대표하는 성격 아닌가.. ㅋㅎㅎㅎ 상식을 벗어난 이런 해석에 대해 교육청에 질의했더니 그 대답이 또 가관.. '단위 학교에서 사이좋게 의논해서 결정하셈~' 이런 상식적인 문구 해석에 있어서도 책임을 회피하는 아름다운 자세를 보이는... 글 분들은 늘 기대에 부응하신다.)

결국, 우리 학교는 '고유한 권리'를 끝까지 고수하시는 장님의 의지대로 전보유예교사가 보직(2,3학년 부장까지 맡게 되는 공정하고 투명한 인사가 진행되고 있다. 올해만, 딱 올해까지만 전보유예교사에게 보직을 맡긴다고 철석같이 약조하셨다고? 짧은 내 경험으로도 학교에서 '내년'이란 없다. 내년에는 내년의 변명과 핑계가 있을 뿐.. 내년의 싸움이 우리를 기다린다는 현실과...

글샘 2006-01-03 2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배정과 유예같은 '온정주의'가 충분히 작용할 수 있는 미풍 양속은, 그 온정을 받을 수 있는 소수와 평생 그 온정을 받을 수 없는 절대 다수가 대조되기 때문에, 반상이 어울려 사는 것만큼이나 민감한 부분입니다.
양반 입장인 관료들 입장에선, 자기 편을 하나라도 만들어 두고자 하고, 개선을 요구하는 입장에선 관료들 편만 드는 선배정과 유예는 필요없단 입장이지요.
제도를 없애기 보다는, 학교 내에서 민주적으로 의견 교환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담임 배정이 비교적 민주적으로 이뤄지는 배후에는 수십 년간의 싸움이 있었으니까요. 바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관리직으로 대거 진출하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합니다.
 

좌경 몰려 해고 20년만에 복직 '인간 드라마'
■ 한진重 박영제·이정식씨 '특별한 새해'
2006/01/01 012면 10:21:56  

사진 설명: 20년만에 복직하는 해고 노동자 박영제씨가 노동조합건물 자리였던 주차장을 찾아 상념에 잠겨있다. 강선배기자 ksun@
박영제(48)씨와 이정식(47)씨는 그 누구보다 특별한 새해를 맞는다. 20대 청년 시절에 쫓겨났던 옛 직장에 다시 돌아가기 때문이다. 꼭 20년만의 일이다. 팔팔했던 청년 노동자들은 어느덧 세월에 꺾여 이제 정년을 얼마 안 남긴 '늙은 노동자'가 되고 말았다. 두 사람은 새해 휴무가 끝나는 오는 3일부터 한진중공업 부산 영도공장으로 복직한다.

지난 1981년 한진중공업의 전신인 옛 대한조선공사에 동기로 입사해 선각부에서 선박틀을 조립했던 두 노동자. 누구보다 성실했던 이들은 입사 6년차인 1986년 8월 해고됐다. 암울했던 시절,노조원보다 회사의 이익에 더 충실했던 노조와 회사를 비판했기 때문이었다.

박씨와 이씨는 당시 같은 부서 동료였던 현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김진숙(46·여) 지도위원과 함께 '노조 대의원대회를 다녀와서'라는 유인물 1천여장을 만들어 회사에 뿌렸다. 회사의 열악한 노동조건과 어용 노조의 문제점을 비판한 호소문 형식의 문건이었다.

당시만 해도 노동자들은 식당도 없이 탈의실에 쪼그려앉아 너무도 형편없어 '개밥'이라 불리던 도시락으로 점심을 때워야 하는 등 제대로 된 처우를 받지 못했었다.

회사와 노조가 발칵 뒤집혔다. 회사측과 노조,정보기관의 거센 탄압이 이어졌다. 회사는 '사내에 불온 좌경세력이 은밀히 활동중'이라는 말을 퍼뜨리며 정지작업을 하더니 결국 이들 모두에게 해고통지서를 날렸다. 회사명예를 실추시키고 상사명령에 불복종했다는 이유였다.

졸지에 직장을 잃은 이들은 기꺼이 고난의 길에 맞섰다. 머리띠를 두르고 매일 회사 앞을 찾아 출근투쟁에 나섰다. '부당해고 철회'와 '노조 민주화'를 외치며 1년을 싸웠지만 결과는 무심했다.

결국 이들은 각자의 길을 찾아 나섰다.

생계를 위해 잠시 보일러공과 용접공으로 전전하던 박씨는 결국 노동투사의 길로 접어들었다. 1988년말 부산지역노조연합회 상근 사무차장을 시작으로 지난 3월 민주노총 부산본부 총무국장직을 떠날 때까지 20년 가까이 노동운동을 하며 부산지역 노동운동계의 버팀목이 돼왔다.

이씨는 공사 기술을 익혀 그동안 전국의 공사장을 돌며 생계를 이어왔다.

후배 노동자들과 함께 끝이 없을 것 같던 복직투쟁을 벌여오던 이들은 지난 2003년 10월 한진중공업 김주익 노조위원장과 곽재규 조합원의 잇단 희생의 결과로 마침내 그 해 11월 단계적 복직이 결정됐다. 그러나 이 때도 회사측은 김진숙씨만은 절대 못 받아들이겠다고 버텼다.

"두 동지의 죽음으로 일자리를 되찾게 된 것이라 복직이 됐어도 마음은 무겁기만 합니다. 동지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현장에서 더 열심히 일하겠다고 마음먹고 있습니다."

'늙은 노동자' 박씨와 이씨는 조심스럽고도 비장하게 다짐했다. 이현우기자 hooree@busa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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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콩 2006-01-01 1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교조 부산지부 게시판 펌] 20년 만의 복직 - 김진숙

영제 형.정식이 형의 복직이 일년 여 전에 결정이 되고,그 시간동안 때때로 가슴속을 구르는 말들이 있었고,그 말들을 언젠가 글로 옮기게 된다면 전교조 부산지부 게시판일 거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굳이 이유가 필요한 건 아니겠으나 이제사 묻게 됩니다.왜 거기일까.하필..
부채감..20년 세월동안 내가 지녀 온 부채감을 헤아려 줄 사람들이 거기에 가면 가장 많지 않을까 하는 막연하나 확실한 추측.
이 글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아마도 '부채감'이 될 거라는 예감.

그 때..17년 전.. 세상 그 많은 사람들이 탈퇴자와 해직자로만 오로지 인류를 구성했던 시절. 한쪽은 외로워도 슬퍼도 내놓고 울 수도 없었던 캔디가 되고,또 한쪽은 기운 센 천하장사 무쇠로 만든 마징가제트처럼 느닷없이 살아야 했던..그 때.

옥이라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모든 남자들은 다 짭새들로 보이고,버스에서 내릴 때도 맨 마지막에 내리고,바로 앞에 목적지를 두고도 빙빙 돌아 다녀야 했고,다방을 가건 식당을 가건 뒷문과 퇴로를 확인하고야 자리에 앉을 수 있었던 수배시절,제게 옷을 주고 밥을 주고 잠자리를 주던 친구였습니다.

"니보덤 똑똑헌 사램덜 말캐 다 빠짔는데 니가 와 거 들어가 이 난리버꾸를 직이노? 전교조 안해도 니만 깨깟게 하고 아아들 한테 돈 안받고 지금 맨치로 그라먼 될 거 아이가? 오늘 학죠 가거들랑 내는 피치못할 집안 사정도 있고 이래 이래 해가 인자 빠질랍니다 그라고 오이라이.어이?"
몇 번 씩이나 되풀이되는 어머니의 성화로 불편한 아침이 시작됐고,"그래하고 왔나? 니가 우짤라꼬 이라노? 이라기를.어이? 아무캐도 집터를 잘 못 잡았기나 조상 무덤을 잘 못 썼기나 구신이 곡절을 한 기 아이먼 이랄수가 읎다.이기 무신 곡절이고.곡절이" 퇴근하는 딸내미를 기다리며 대문 앞에서부터 시작된 어머니의 장탄식이 자정을 넘어서 "니가 질게 이라먼 내가 마 팍 죽어삘끼다" 하는 협박으로 뒤숭숭한 꿈자리까지 이어지곤 했습니다.

교장이나 교감한테서 집으로 전화가 온 날은 그 강도와 빈도가 훨씬 심해졌고,그런 공간에선 더이상 전교조가 추구하던 이상이 해맑지도 않았고 참교육의 꿈이 뽀얗지도 않아,가족 모두가 등을 돌리고 앉아 각자의 신경세포를 줄톱으로 날카롭고 뾰족하게 갈아 전교조가 드리운 암운을 무찔러대는 게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습니다.

어느 날.여름방학 시작 무렵이었다고 기억됩니다. 더는 피할 수 없었던 교장의 전화를 이 친구가 받을 수 밖에 없는 날이 있었고,방학 중 학교로 향하는 이 친구의 곁을 동행했던 날이 있었습니다. 힘이 되고자 했다기 보다는 내가 이러고 있는데 니가 탈퇴를 해? 솔직히 그런 마음이었죠. 그 친구가 교장실로 들어간 후 저는 남여중 운동장 한 가운데서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던 한 여름 햇살을 고스란히 받으며 나무처럼 몇 시간을 서 있었습니다. 그 친구가 당할 고통의 시간들을 그렇게라도 나누고 싶었던 의리의 차원이 아니라,그 친구가 탈퇴서를 쓰고 나온다면 추상같이 들이 밀 원칙같은 게 필요했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점심도 굶고..사위어가던 햇빛 탓이었을 테지만..흔들리며 저만치 계단을 허깨비처럼 걸어 내려오던 친구.. 그날의 태양은 서산으로 진 게 아니라 그 친구의 눈 속에서 서럽게 지고 있었고..

땅만 보고 걸으며..영도다리 위에서 그 친구 걸음을 멈추고.. 그때도 저는..탈퇴했다는 말을 듣게 되면 제가 해야 할 비판이나 충고 종류의 수칙같은 말들만 가슴속에 잔뜩 재놓고 있었습니다. 이미 검어진 바다는 장마 진 여름날 툇마루에서의 낮잠처럼 끈적이며 혼곤히 뒤척이는데.."죽고 싶어" 옥이는..그 바다를 보며 그렇게 말했습니다.

게으른 도시의 바다마저 당혹스러워 했을 그 절망 앞에 제가 지닌 것의 전부였던 주옥같은 원칙들은 별안간 사소하기 짝이 없어졌고 그 후 우리는 마주 보는 일, 웃는 일을 도무지 할 수가 없어서.. 헤어졌습니다.

10년..합법화되고..마침내 학교로 돌아가는 선생님들을 보면서 저는 그 갈채 뒤에 숨죽인 수많은 옥이들을 생각했습니다. 느닷없이 끌어안고 살아야 했던 그이들의 부채감에 대해.. 막상 복직하는 당사자보다 사실은 더 기뻤을터이나 내놓고 기색하는 것조차 조심스러웠을 그이들의 마침내 안도감에 대해.. 그 안도감을 얻기 까지.. 정문 앞에서 끌려 나가던 동료들을 창문 너머로 지켜볼 수 밖에 없었던 무수한 자괴감에 대해.. 피켓을 들고 서 있는 동료들을 밖에 둔 채 들어가서는 수많은 시간들을 죽고 싶은 채 살아있어야 했던 열패감에 대해.. 그리고..비겁이라는 감옥을 제 손으로 짓고 제 발로 그 안에 들어가 10년을 장기수로 복역해야 했던 그 분들이 그 감옥에서 이제는 출감하기를 진심으로 바랬습니다.

그리하여 따뜻한 밥상 앞에서 더 이상 목 메이지 않기를.. 누군가가 두들겨 맞는 시위장면을 보더라도 더 이상 채널을 돌리지 않기를.. 빨래를 걷다말고 멍하니 하늘을 바라다보는 일이 없기를.. 아이들에게 정의라는 단어를 말할 때 도리같은 단어를 말할 때 공연히 창밖을 바라보는 일이 더 이상은 없기를..



한진중공업 해고자로 만 20년을 견뎠던 박 영제 형,이 정식 형이 새해 1월 1일 복직을 합니다. 그 형들이 단지 저 때문에 해고됐다고 말하면 그 분들의 신념이나 자존감들을 폄훼하는 일이 될 수도 있겠으나 그러나 그것과는 상관없이 20년 세월 제가 지니고 있었던 건 분명 부채감이었습니다.

말당을 키운 건 8할이 바람이었을지 모를 일이나 저를 여기까지 꾸역꾸역 떠메고 온 건 9할이 사실은 부채감이었습니다. 저들이 저 자리를 지키고 있는 한 내가 먼저 떠날 수는 없는.. 그러면 어디가서 뭔 일을 하고 살더라도 필시 응징을 당하고야 말 것 같은..

이제 와 말이지만..떠나고 싶은 날들이 얼마나 많았는데요.이제는 정말 벗어나고 싶었던 순간들이 얼마나 시시때때 였는데요. 그래서 제가 막 못되게 굴어도,고랑을 파고도 남았을 상처들을 주었음에도 날 한번 세우지 않던 그들의 둔함이 쇠심줄 같던 늑수긋함이 권태기처럼 지긋지긋했던 날들이 또 얼마나 많았게요. 제발 내일 아침에는 저들 중 누구 하나라도 안 나타나기를..힘들어서 더 이상은 못하겠다 취중이라도 선언해주기를 얼마나 빌었는데요. 차마 먼저 가겠단 말은 못하고 그걸 빌미로라도 그만 떠나고 싶을 만큼 고단했던 날들.

질풍은 일언반구도 없이 외부로부터 불어 닥쳤고,의지와는 별개로 노도가 되어 내달려야 했던 우리들의 청춘. 제가 스물여섯,정식이 형 스물일곱,영제 형 스물여덟.. 그래서 저는 청춘이 참 싫습니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지레 여기 저기 쑤시고 아픈 대공분실..
그리고 세 번의 부서이동..대기발령..해고...
그리고 출근투쟁..
머리띠를 매 본 적도 없었고,남들이 맨 걸 본 적도 없었고,복수에 빛나는 총탄 같은 물건이 세상에 있는 줄도 모르던 천둥벌거숭이 때였습니다.
우린 저길 들어가야 한다고..저기 화이바도 있고 안전화도 있고 작업복도 있고 공구통도 있고 수건도 빨아야 하고 쥐가 안먹게 비누 뚜껑도 챙겨야 한다고..들어가게 해달라고..경비 아저씨들 팔에 대롱대롱 매달리는 게 그 때 우리들의 출근투쟁이란 거였고,싸우러 간 놈이 경비 아저씨를 보면 저절로 인사를 하게 되던 오래된 노예의 습성조차 부끄러운 줄 모르고 자행하던 때였는데,지금 생각하면 웃기도 민망한 그 남루한 출투에 대한 대접은 너무나 심오했습니다.

어용노조 간부들 수십 명,회사 관리자들 수백 명,경비들 수십 명,그걸로도 우리 세 사람의 막강한 힘을 감당할 수가 없어,국가기간산업을 불순분자의 준동으로 부터 사수하기 위한 공권력 수백 여 명,그리고 닭장차들.

많이 맞았습니다.수천 대도 더 맞았고,수백 번도 더 짓밟혔습니다.매일 아침마다..
배나 허벅지처럼 표면적이 넓은 부위엔 발자욱이 그대로 멍자욱으로 찍혀 있는 날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맞으면서도 그때는 욕 한마디 할 줄 몰라 "왜 퍄! 왜 자꾸만 퍄!"만 입술에 침버캐가 허옇게 말라 붙도록 되풀이 했던 진짜 촌스런..

어느 날 밤엔 회사 앞에서 식당을 한다는 아주머니가 일부러 제 자취방까지 오셔서,"그래 뚜디리 맞아가매 말라꼬 맨날 오노.어데 치직할 데 없이모 내가 치직 시키주꾸마.지발 낼버턴 오지 말그라.너거 그라는 거 아칙마다 보머 하로 왼종일 심장이 고마 벌렁거리싸서 살수가 읎다.그라다 죽어삐모 누가 알아줄끼고.니야 죽어삐모 고마이라 생각카겠지마 맞아 죽으모 저승인들 지대로 가겄나.억울해가 우예 가겄노.그 몸띠로 저승이나 찾아 가겄나.느그도 부모가 기시고 헹제가 있일 거 아이가.부모 헹제간이 그 꼴로 밨다 캐바라.그 가심이 으떻겄노.천갈래 만갈래 안 째지겄나.지발이지 한 날이라도 더 산 내 말 듣고 다시는 오지 말그라이.어디 먼디로 가가 안보고 살모 고마 이자삐고 살아진다" 신신당부를 하고 가시기도 했고,언젠가 부터는 아예 집 밖을 나오지 못하게 집 주변을 겹겹이 둘러싸고도 남아 산복도로 위에 까지 진을 친 그들을 보며,주인 할머니는 "저 사램덜은 쥐두 새두 몰르게 사램을 쥑이"하는 말씀을 "저짝 뻘갱이덜 보덤 이짝 퍼랭이덜 허구 양코배기덜이 더 쥑였어.그 늠덜은 들어올 때 쥑이구 나갈 때두 죄 쥑이구덜 나갔어" 목소리를 낮추시고 애무완이라는 총의 방아쇠를 당기는 시늉까지 하시던 '육요즌쟁'때 얘기만큼이나 은밀하게 하셨습니다.

그런 말들이 아니어도 충분히 무서웠습니다.
꿈에서 조차 울었던 시간들..
머리 밑이 아파 베개를 벨 수도 없었고 머리에 손이 가면 암환자처럼 한 웅큼씩 묻어나던 머리카락들..
밤마다 떨어진 단추 다시 달고 튿어진 바지랑 남방을 일과처럼 꿰매고 자리에 누우면..공포만이 저 혼자 밤을 새워 땅을 갈아 씨를 뿌리고 잎을 틔우고 울울창창한 숲을 이루어 비옥한 영토를 늘려가던 밤들..
미네르바의 부엉이처럼 밤이 이어지기를 간절히 빌었던 시간들..
그래도..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야 했던 건..오로지 그들이 거기 오기 때문이었습니다.
단 한번도 위로 같은 걸 서로에게 해준 적은 없으나 나만 당하는 사변이 아니라는 유일무이한 위안..

쓰다가 생각난 일..
매일 아침 만나 거의 하루종일 붙어 다녔는데,어느 날 두 사람이 모두 안보이던 날이 있었습니다. 대공분실..그냥 덮어놓고 무작정 거기가 가장 먼저 생각나던 그런 시절이 분명 있었습니다. 두 번을 다녀왔지만 보자기 덮어쓴 채 오갔던 길이었습니다. 극도로 공포스런 상황에선 오감이 참으로 예민해지는 경험을 그 때 했습니다.

감으로만 더듬어 찾아갔는데..거기에..그 곳이..있었습니다. 좌천동에 있는 간판엔 버젓이 한국해양개발공사라로 써있는..군인들이 총들고 서서 해양을 개발하는.. 박 영제 내놓으라고..이 정식 내놓으라고..혼자 미친 듯이 소리 소리를 지르며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그 건물을 빙빙 돌았습니다. 걷잡을 수 없는 분노 때문이기도 했지만,그런 곳에서 혼자 당하는 일들의 두려움..들을 알기에.. 직접적으로 육신에 가해지는 위해 보다 여기서 이러다 혼자 죽게 되는구나.. 내가 여기서 이렇게 죽는 걸 세상 사람 아무도 모르겠구나.. 저들 말대로 송도 앞바다에 돌멩이 매달아서 던져 버리면 정말 감쪽같이 아무도 모르겠구나..하는 절망이 훨씬 크다는 걸 알기에,형들에게 내가 여기 있다는 걸..그러니 형들이 그렇게 죽게 되더라도 아무도 모르는 건 아니라고..세 사람을 한꺼번에 감쪽같이 처리하긴 아무래도 어려운 점이 있을테니까..

사지를 번쩍 들려 안으로 끌려 들어가선 살아있는 입부터 방성구로 채우고 또 맞았습니다. 이번엔 겁대가리 없다고.. 내 발로 걸어 찾아간 곳에서 여기 왔다갔다는 사실을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않는다는 각서에,이미 힘이 빠져 늘어진 제 손가락을 끌어당겨 그들이 지장을 찍는 절차까지 일점의 차질도 없이 마무리 한 후에 보자기를 덮어씌운 채 그들이 저를 데려간 곳은 산복도로 위도 아니고 태종대도 아닌 이번엔 영도 경찰서였습니다.

아..ㅆㅂ,이번엔 강력계 새끼덜이 줘팰랑갑다.하고 부려졌는데..
다행히(?) 형들은 그 곳에 있었고..벅찬 것도 아니고 감격스러운 것도 아닌 참 복잡한 조우를 하면서.. 생각했습니다. 우린 결국 아무도 떠나지 못하겠구나.


그렇게 20년 이었습니다.


중풍으로 쓰러지셔서 대소변 받아내며,모임을 하다가도 집으로 달려 가 진지를 챙겨드리고 다시 나오던 참 착하고 무던한 아들 영제 형의 홀 어머님도 돌아가시고..
저를 보시자 거동도 잘 못하시는 몸으로 벌떡 일어 서셔서는 지팡이로 제 등짝을 후려치셨던 정식이 형 아버님도 돌아가시고..
저만 보면 "어이예이.우리 식이 좀 놔주게이.우리 식인 멕여 살릴 식구가 많다이.그러니 고만 놔주게이" 간절히 애원을 하셨던 정식이 형 어머님도 돌아가시고..
뻑하면 수배중이던 딸 때문에 입원을 해도 경찰들이 진을 치는 바람에 남 부끄러워 입원도 못하신다며 7년을 누워 계시면서도,몇 년 만에 한번 씩 바람처럼 왔다가는 딸에게 "복직했냐?" "은제허냐?"를 제일 먼저 물으시던 우리 아버지도 돌아가시고..

20년은 그렇게 긴 세월이었습니다.


수백 번이고 장담하건데 그 형들이 없었으면 저도 없었습니다.
네가 앞으로 가야 할 길이 이런 길이란다.누군가 미리 일러 줬더라면 단 한 발짝도 떼지 못했을 길을 그 형들의 등에 업혀 여기까지 왔습니다.
생계를 책임지고 있으면서도 그 역할을 암만해도 수행할 수 없었던 죄책감 때문에,버스를 타면 따라 타고 택시를 타고 같은 차에 따라 타는 미행도 아닌 아예 동행들을 견딜 수 없어 집을 나와 전포동에서 영도까지 토큰 하나가 없어 영도까지 뛰어다녀야 했던 날들.. 새벽 유인물을 뿌리러 달려가다가 어느 집 대문간에 내놓은 사자밥을 주워 먹으며 진종일 굶은 전날의 허기를 메꾸던 날들.. 해일만 날마다 일던 그 바다를 형들이 만든 뗏목에 얹혀 건너 왔으면서도 막상 빛나야 할 자리에서는 저는 혼자만 빛나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그런 만큼 형들은 가려져야 했습니다.

자아비판과 상호비판이 해고자 끼니 보다 빈번했던 시절에도 형들은 그에 대한 불평 한 번 없었기에 저는 서슴없이 오만할 수 있었고 우쭐하기에 망설임이 없었습니다.
그 오만함과 방자함에 대해 일말의 가책도 제가 느끼지 못할 만큼 무던하던 형들..
그 때는 그 무던함의 가치를 잘 몰랐습니다.


그 형들이 복직을 합니다.
그 때 우리가 아저씨라고 불렀던,세상에 못 만드는 게 없었고 못하는 게 없었던 그 하늘같던 아저씨들의 나이를 훌쩍 넘어선 정식이 형이 마흔여덟,영제 형이 마흔아홉..그 나이에 이르러서야 복직을 합니다. 그렇게 들어가고 싶어 산복도로 위에서 수천 번도 더 내려다 본 공장엘 이제야 들어갑니다. 길에서 마주치는 날이면 온종일 가슴에서 냇물 흐르는 소리가 나곤 했던..저걸 언제 다시 타보게 될까..그 통근버스를 타고 출근이란 걸 하게 됩니다. 세 사람 잡겠다고 영도다리에서 부터 버스며 택시들을 일일이 세워 이 잡듯 뒤지곤 하던 그 영도다리를 버젓이 건너 출근을 하게 됩니다.
아무리 버둥거려도 한 뼘도 들어갈 수 없었던 그 정문을..걸어서..들어가게 될겁니다.


20년 동안..뭐가 달라졌냐고 하지만..
쥐똥이 콩알처럼 섞여 나오던,여름이면 쉬고 겨울이면 살얼음이 덮이던 도시락이 아니라,30억을 들여 새로 지은 식당에서 밥을 먹게 될겁니다.
일 년에 단 한 벌뿐이던,여름이면 허연 소금꽃이 수백송이 피고 지기를 반복하던 빵구 난 작업복이 아니라,사시사철이 구분되는 작업복을 입게 될겁니다.
추운 날 바다에 빠져 죽은 동료의 죽음에 대해 옷을 많이 껴입어서 죽었다는 목격자 진술서에 도장을 찍고는 그 죽은 이의 집을 피해 빙 둘러 다니는 일도 이젠 없을 겁니다.

그리고..
빨갱이들 곁에 오지도 못하던 아저씨들이 먼저 와 악수를 청하게 될 것이고,블록에 함께 앉아 담배를 나눠 피우는 소원도 이루게 될겁니다.
억지로 금치 당했던 작업복이며 안전모며 안전화며 명찰이며 출근카드며 공구통들에 새로 생긴 사번을 새기게 될 것이고 박 영제,이 정식이라는 이름들을 아주 매매 써넣게 될것입니다.


배가 아주 안 아픈 건 아니오나..
그보다는 20년 동안 두레박처럼 매달려 걸핏하면 쿠당탕탕 가슴 속 여기 저기를 부딪곤 하던 육중하고 녹슨 쇳덩어리 하나가 후두둑 더께앉은 녹찌꺼기를 분주히 날리며 비로소 철거되는 기쁨이 훨씬 큽니다.
내가 그런 게 아니야..나 때문에 그렇게 된 게 아니야..내 잘못이 아니야..골백번도 더 중얼거렸던 업장같기만 하던 그 길고 둔중하던 부채감을 이제야 내려놓습니다.

며칠 전 "20년만에 역사적으로 유래가 없는 대단한 복직인데 잔치는 못하더라도 하다못해 정문 앞에서 조합원들께 인사라도 해야지요" 하던 제 말에 "뭘 그래까지 하요" 하시던 영제 형.

세 사람이 같이 서서 인사를 하다가 두 사람은 들어가고 한 사람은 밖에 남겨지는..
내가 비로소 내려놓는 그 만성적이고 고질적인 부채감을 형들에게 고스란히 되지우는 게 아니길 바랄뿐입니다.

그리고..
박 창수..김 주익..곽 재규..그들에 대한 부채감도 20년 아니 40년이 걸리더라도 이렇게 내려 놓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새해 복들 많이들 나누시고..내내 건강하시고 행복하십시오.

해콩 2006-01-01 16: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느티나무님의 궁금증을 시원히 풀어드릴 김진숙씨가 전교조에 그토록 애착이 많은 이유와 아무도 몰래 살짝 걱정했던.. '혼자 남겨질 자의 아픔'이 기우였음을 증명하는 가슴 짠한 글... 새해 아침부터 그야말로 '짠'해지는 글...

나로서는 '그 시절'에 태어나지 않은 것은 정말 행운이다. 상상만으로도 저 지독한 부채감을 감당할 자신이 없는 것이다.

아주 조심스럽게 그리고 부끄럽게 고백하자면 '전교조'에 가입한 것.. 나 역시 부채감이 있었다.. 아주 소심한 부채감..

의심없이 어른들보다는 더 정의로울 거라고 믿어온 우리 아이들에게도 그런 '부채감' 자극할 수 있다면.. 그럴 수 있다면... 좋겠다... 오만일까?

심상이최고야 2006-01-01 2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까지 본 댓글 중에서 가장 길었어요. ㅋㅋ
샘의 글을 읽고 보니 새벽이 떠오릅니다.

여울 2006-01-01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해콩님 댓글을 보고 사실 오해를 했네요. 김진숙님의 글이라 생각하지 않고, 어~ 나이가 맞지 않는데 하면서도 그렇게 읽었어요.(댓글에 자신의 글을 쓰셔서...ㅎㅎ) 맘도 많이 아프고, 절절하여 한참이나 자신이 부끄러워지는 글이었답니다.

해콩님 올 한해도 멋지게 보내시기 바랍니다. 홧팅!!!! 힘!!!!

해콩 2006-01-03 0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심상님... '새벽이 떠오른다'는 표현 너무 좋아요~
여울님... 제 나이를 아시는지.. 긴장...^^; 저도 생각보다 많이 먹었답니당ㅋㅋ 김진숙씨의 글은 항상 '나'를 돌아보게 만들어요. 참 대단한 필력!! 삶에서,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글이라 그렇겠죠?
심상님도, 여울님도, 우리 모두 몸과 마음 건강하고 작은 것에 행복한 한 해 되기를...

비로그인 2006-01-04 0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문에서 저 기사 보고...김진숙 씨 글은 왜 늘 이렇게 슬프고 부끄러울까요... 두 글 다 퍼갑니다.

해콩 2006-01-04 1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슬프고 부끄럽다' 이 표현이 딱이네요.. 슬픔과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는.. 그런 사람들이 많았으면 좀더 좋은 세상이 될 것 같죠? 반가워요 '이유'님 ^^
 






씩씩한 그녀 조제..

보고나면 "그래 씩씩하게 살아야지!" 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는 영화라기에 그야말로 기를 쓰고 봤다.

그런데.. 다보고 나니 그 씩씩함에 눈물이 나더라. 애써 태연하고 씩씩한 조제의 모습에 가슴이 먹먹해 지더라.. 둘의 진실한 사랑, 그럼에도 흘러가는 세월 앞에 변해가는 감정을 인정하고 따뜻하게 감싸안는 감독의 시선과는 상관없이 나는 마음이 너무 아프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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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구타가와상 수상작가인 타나베 세이코의 단편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으로, 평범한 대학생 츠네오(츠마부키 사토시)와 다리가 불편한 지체부자유 소녀 조제(이케와키 치즈루)와의 귀엽고도 애틋한 연애 이야기. 스토리와 화면 모두 대단히 인상적이다.

 섹스를 할 여자는 있어도 사랑하는 사람은 없는 대학생 츠네오는 어느 날 길에서 소아마비로 걷지 못하는 다 큰 손녀딸을 유모차에 태우고 다니는 노파를 만난다. 계란말이를 잘 만들고 방 안에 갇혀 주워온 책들을 읽는 것이 유일한 낙인 손녀딸의 이름은 프랑수아즈 사강의 소설 주인공 이름에서 따온 조제. 다 쓰러져가는 허름한 집에서 할머니와 둘이 사는 그녀와 친구가 된 츠네오는 동정심과 애착 사이에서 점점 그녀에 대해 특별한 감정을 갖게 된다. 캠퍼스에서 가장 예쁜 여자 후배가 츠네오에게 호감을 보이지만, 화려한 외모도, 건강한 다리도, 변변한 집도 없는 생활보호대상자 장애인 조제에게는 훨씬 더 특별한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사랑은 한동안 장애와 세상의 모든 고정관념, 제약을 뛰어넘어 아름답게 꽃피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늘 조제를 업고 다녀야 하는 츠네오는 점점 자신의 등에 업힌 그녀가 무겁다고 느끼기 시작한다.

 연출의 변.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러브 스토리인 동시에, 사랑이 어떻게 한 소녀를 변화시켜나가는지 그 과정에 대한 이야기이다. 조제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판타지를 만들어내지만, 그 환상은 곧 깨져버리고 현실이 어떤 것임을 깨닫게 된다. 그 현실 속에서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가장 큰 행복과 가장 큰 절망을 발견하지만, 그녀가 절망을 느낄 때 그녀의 약함 뿐 아니라 그녀의 힘과 용기 또한 모습을 드러낸다. 나는 대사가 아닌 여배우의 외양으로, 추상적인 것이 아닌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그녀의 힘과 용기를 표현하고자 했다. 또한 관객들이 그것을 실제로 일어나는 일처럼 느끼기를 원했다. 난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 너무 많은 감정의 기복이 있는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내 목표는 영화가 관객들로 하여금 마치 그들이 그 이야기를 처음부터 함께 겪으면서 시작한 곳으로부터 이만큼까지 왔다고 느끼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런 종류의 느낌이 영화 속 캐릭터들에게 더 어울린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내 감상이 유치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이 영화를 만들면서 사랑을 묘사하는 것은 사람의 성장을 묘사하는 것이고 또 삶을 묘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 감독 이누도 잇신"

 부천판타스틱영화제 소개글. 일상에 대한 애정어린 묘사와 독창적인 캐릭터로 진부함을 뛰어넘어 사랑을 재정의하는 아름다운 러브스토리. 도입부에 한 장 한 장 펼쳐지는 스냅사진처럼, 이 영화는 츠네오라는 한 청년의 아주 특별했던 사랑에 관한 바래져 가는 기억의 회상이다. 마치 조근조근 동화책을 읽어주는 것처럼 펼쳐지는 두 사람의 자잘한 기억들은 쉽게 잊혀지지 않는 애틋함과 감동을 선사한다. 제목에 드러난 동물들 또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호랑이’는 조제가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로, 츠네오를 만난 후 동물원에 함께 가서 처음으로 호랑이를 가까이서 대면하는 조제의 모습은 자신의 장애가 각인시켜 놓은 세상에 대한 두려움과 폐쇄 본능을 극복하게 해 주는 사랑의 힘을 상징한다. 또한 ‘물고기들’은 방 안에 갇혀 사는 조제가 자유롭게 세상을 헤엄쳐 다니고 싶은 욕망을 투영시키는 대상이면서, 동시에 사랑이 끝난 후 묵묵히 생활을 이겨내는 강인함의 상징이기도 하다. 환상에 젖어 물고기처럼 사랑 속을 헤엄치던 조제가 다시 이를 악물고 혼자 생선을 구워먹는 장면은 쓸쓸하지만 진솔하게 삶의 모습 그대로를 보여준다.

 

written by 홍성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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