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두>를 명절 연휴에 읽고 짧게 글을 썼었는데, 얼마 전 책모임에서 함께 이야기하면서 다시 더 쓰고 싶어져서 써 본다.
단발머리님이 에이드리언 리치의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를 추천하셨었고, 다락방님이 <자두>에 대해 쓰신 글을 읽고 <자두>를 쓴 작가 이주혜님이 에이드리언 리치의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 의 역자이며, <자두>라는 소설이 이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의 번역 후기로 시작한다는 에피소드를 알게 되고나서 <자두>가 궁금해졌었다. 왜 본인이 번역한 다른 책의 역자 후기를 소설에 썼을까 하고..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는 아직 안 읽었고 ^^; <자두>를 먼저 읽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번역자이자 시아버지의 간병을 하는 며느리다. 그래서 작가가 실제로 번역한 책의 역자 후기가 소설 속 주인공의 역자 후기인 것처럼 연결되어서, 잠시 이게 사실인가? 어디까지가 사실인가 하는 물음 그리고 호기심을 갖고 책을 읽었다. 이 시작 부분이 처음에는 단순히 작가가 에이드리언 리치의 책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영감을 얻은 것을 언급하는 것인가 생각했지만, 책을 다 읽고나니 이 첫 부분은 전체 이야기와 연결이 되며 매우 의미심장한 시작이었다.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일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의 죽음, 또 가까운 사람의 죽음이 가장 두렵고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지 않은가 싶다. 나의 죽음은 막연해서 두렵고, 다른 사람의 죽음은.. 내가 아는 한 존재가 이 세상에 더이상 존재하지 않아서 만날 수 없다는 것이 두렵고. 이 소설에서는 사람들이 평소에는 잘 감출 수 있었던 속마음이 두려움의 대상인 죽음 앞에서 드러나는 것을 이야기한다.
이 소설이 한국 여성의 이야기이고, 가부장제하에서 여성이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를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공감이 잘 되었다. 사실 이런 이야기는 흔한데, 보여주는 방식, 또 보여주고 난 다음 제시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초반 역자후기에서 작가는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의 저자와 또 다른 시인 엘리자베스 비숍의 이야기를 언급한다. 이 두 여성은 만난 적은 있지만 서로 잘 아는 사이는 아니었다고 한다. 그런데 한 번 뉴욕에서 보스턴까지 함께 차를 타고 온 적이 있었고 그들의 공통적인 경험 - 배우자 혹은 연인을 자살로 떠나보낸 - 을 공유하며 이해받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처럼 이야기를 나눴다고 한다.
그날의 대화는 내가 엘리자베스 비숍과 나눈 단 한 번의 친밀함이었고
단둘이 보낸 거의 유일한 시간이었다.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 에이드리언 리치, 이주혜 역
소설 안에서는 시아버지를 간병하는 며느리 (은아), 그리고 간병인 (황영옥)이 서로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는 상태에서 위로를 주고 받는다. 잘 모르는 타인이 가깝다고 생각했던 가족보다 더 위로가 된다는 것, 아니 오히려 가족에게 상처받은 것을 위로해준다는 것이 '가족 이데올로기' 라는 말을 떠올리게 했다. 가족이 뭐길래.. 가부장제라는 것은 왜 이렇게 인간을 구속할까.
남성도 가부장제에 의해 구속받는 점이 있겠지만 내가 여성이다보니 여성의 상처에 더 민감하고, 아마 작가도 마찬가지겠지. 그래서 작가는 예전처럼 강하지는 않은, 대놓고 이야기하지는 않는, 그러나 결정적인 상황에서는 드러나는 가부장제의 상황을 '죽음'을 매개로 보여준 것 같다. 여성은 어디까지 참을 수 있고 어디까지 타협할 수 있는가. 비혼 비출산을 선택했거나 선택할 수 있는 여성들과 달리 이미 결혼제도 안에 있는 사람으로서 어떤 태도를 가지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는 나의 계속되는 고민이다. 어려운 문제이고 내가 이미 가진 것을 포기하지 않고서는 답을 찾을 수 없는 문제인 것 같다. 가장 포기하기 어려운, 차마 포기할 수 없는 것은 아이와의 관계인 것 같다. 그래서 '모성' 에 대해 이야기한 에이드리언 리치가 궁금한데 또 선뜻 읽지를 못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살아가야 하는 상황에 어떤 희망이 있다면, 작가가 소설의 도입부인 '역자 후기' 에서 보여준 여성 간의 연대인 것 같다.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에는 '강제적 이성애와 레즈비언 존재' 라는 글이 실려있는데, 안 읽고 이런 말 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맥락을 오해하지 않았기를 바라며 (단발머리님 글에서 전에 좀 주워읽기도 했으니) 대충 내용을 적어보자면, 이 글에는
이성애가 여성에게 문화적으로 강요되는 측면이 있다는 내용이 나오고, 에이드리언 리치는 이성애자 여성 그리고 이성애자가 아닌 여성들 모두가 성애를 뛰어넘은 '레즈비언 연속체' 로서 연대할 수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레즈비언이라는 단어를 이렇게 사용해도 되는 것인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에이드리언 리치가 사용한 '레즈비언'의 개념은 성애와의 관련성을 배제한 조금 다른 개념인 것 같다.
성애적인 구심력에서 자유로운 여성연대/유대의 광범위한 동심원들을
에이드리언 리치는 '레즈비언 연속체' 라고 불렀거니와
<자두>의 '나'와 황영옥 사이의 말없는 대화야말로 그 동심원들의 가장 외곽이면서 동시에 구경일 것이다.
<자두> 해설 중, 150쪽
소설에서 '나'는 황영옥 씨와 깊은 대화를 나눈 적이 없지만, 딱 한 번 그녀가 우는 것을 본 적이 있고 그 상황을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나중에 그녀에게 감사 인사를, 안부를 전하고 싶을 때 그 상황이 담겨있는 말 한 문장을 적어 엽서를 보낸다.
나는 요즘 알라딘 서재에서 성애적인 구심력에서 자유로운 여성과의 유대를 발견하고 있는 것 같다.
일단은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를 (강제적 이성애와 레즈비언 존재>라도) 읽어야겠고,
이주혜 작가님을 계속 지켜보기로 했다.
방금까지 제가 존재했던 공간에 저만 쏙 빠져 있었습니다.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제가 없는 제자리를 사진으로 찍었습니다. 손바닥만 한 화면으로 다시 보는 풍경은 낯설었습니다. 그리고 한번 빠져나온 공간과 시간은 어떤 기도를 동원해도 고스란히 복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없이 웅변했습니다. - P11
작업 내내 저는 이해에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시달렸습니다. 애초에 타인의 생각을 정확히 이해하는 게 가능 한가 하는 철학적인 질문까지 떠올랐습니다. - P15
쩍 금이 간 풍경은 이제 산산이 깨져 버렸고 우리는 바닥에 흩어진 유리 조각을 치울 새도 없이 걸음마다 발을 베었습니다. 앞으로 어떤 나날이 기다 리고 있을지 상상만 해도 무서웠습니다. - P38
지금 생각하면 시아버지의 방식은 좀 치사한 데가 있었습니다. 아무렇지 않게 아기 이야기를 꺼내놓고 갑자기 제 눈치를 보며 입을 다물어 버리거나 어색하게 화제를 돌렸습니다. 그러면 저는 죄도 짓지 않았는데 용서를 받는 더러운 기분이 들고 말았습니다. - P91
우리는 잠시 아무 말도 없이 담배 한 대를 피웠습니다. 어느 순간 서로 눈이 마주쳤고 우리 두 사람은 동시에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저는 아직 눈물이 마르지 않은 얼굴로 웃었습니다. 절대로 웃고 싶지 않은 기분이었지만 그렇게 웃고 나니 조금 힘이 나는 것도 같았습니다. 그날 우리는 옥상에서 단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습니다. 말 한마디 없이 담배를 두 대씩 피우고 잠시 숨을 고르고 병실로 돌아 왔을 뿐입니다. 어떤 말도 나누지 않았지만 모든 것을 말 해버린 기분이었습니다. 영옥씨도 그랬는지는 모르겠습니다. - P105
시아버지는 섬망 증세가 심할 때의 자신의 행동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고모가 문병을 왔던 것도, 자두를 찾았던 일도, 감색 양복을 자꾸 도둑맞았다고 우겼던 일도, 영옥씨의 머리채를 휘어잡았던 일도 전혀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세진은 그런 시아버지를 딱한 눈빛으로 바라보았지만 저는 시아버지가 정말로 기억을 못하는 건지 그런 척하는 건지 의심스러웠습니다. 시아버지는 기억하지 못했고, 세진은 기억을 지우고 싶어했지만, 저는 그 여름의 한달을 절대로 잊지 않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잊으려야 잊을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 P114
장례식장이란 원래 말이 되지 않는 말들이 향 연기처럼 제멋대로 피어올라 허공을 떠다니는 곳임을 이때 배웠습니다. 그 중 어떤 말들은 옷과 머리칼에 깊이 배어 쉽게 빠지지 않는 향냄새처럼 뇌리에 진득하게 들러붙어 버린다는 것도요. - P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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