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를 위한 스테이크
에프라임 키숀 지음, 프리드리히 콜사트 그림, 최경은 옮김 / 마음산책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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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 책을 알게 된건 김영하의 '랄랄라 하우스' 때문이였다.

'랄랄라 하우스'안에 책 얘기가 많아서 그 계기로 많은 작가를 알게 되었는데 그때 눈여겨 두었던 작품에 이 책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책을 검색해 보니 절판된 상태였다.

절판이면 책을 구할 수가 없다. 상황이 그러하였기에 이 책에 대한 정보가 부족함에도 무한한 애정이 쏠렸다.

절판 되어서 구할 수 없다라는 사실때문이였다. 다른 사람들은 도서관가서 빌려 보라고 하였지만 빌려보는 책과 사서 보는 책은 엄연해 다른 법.

그렇게 방치할 수 밖에 없었는데 이 책이 다시 나왔다.

재발행이 된것이다.

아아.. 또다시 솟아오르는 소유욕과 읽고 싶은 욕망은 주체할 수 없었다. 그 욕구는 너무나 넘쳐 책을 마주하고 나서야 이 책이 풍자의 성격을 뛴다는 것을 알 정도로 책에 대한 애정만 넘쳤다.

뭐 그런게 책 파도타기의 매력이 아니겠냐며 스스로 위로하며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300페이지의 얇지 않은 두께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순식간에 읽어 버렸다. 흡인력 강한 가벼움과 유머를 포함하고 있었지만 단순히 재미있다라고만 생각하며 넘길 수 없는 풍자가 있었기에 많은 공감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약간의 오버와 정서의 다름은 이질감을 주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키득거렸던 것도 사실이다.

특히나 동물 애호가인 '잘나신' 아내의 영향 때문인지 책 속의 사건 속에는 동물들이 많이 나온다.

개, 고양이,쥐, 앵무새 등 동물들로 통한 에피소드와 은근한 비유는 때론 통쾌하게 때론 씁씁하게 그려진다.

 

에프라임 자신의 가족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생활속의 사건 사고는 그렇게 그려나가고 있었다. 너무나 솔직하게 너무나 유쾌하게 그려나가는 그의 생활은 너무하다 싶을 정도의 걱정이 들기도 했다.

저러다가 가족간의 화합이 깨지는것은 아닌가(화합이 이루어지는 것같아 보이지도 않았지만..) 하고 말이다.

그러나 그들은 독특한 유대감으로 가족이라는 틀을 형성해간다.

살면서 느끼는 괴뇌들 회의감들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라는 생각을 갖게 해주면서 점점 그들에게 빠져가고 있었다.

 

그들에게 빠져들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저자의 독특한 감각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의 문체의 영향이 컸다. 똑같은 이야기를 하더라도 좀더 색다르고 재미나게 하는 센스를 갖추고 있는 사람이 바로 에프라임 키숀이였다.

그래서 그가 이야기하면 평범한 얘기도 재미 있고 매력적이 되어서 독자들에게 더 큰 여운을 주는 것이다. 이국적인 면들이 흘러 넘침에도 이렇게 내가 공감하고 같이 웃는 이유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솔직함이다.

우리가 생활하면서 일상에서 일어나는 심경들을 너무나 드러내놓고 이야기를 하고 있기에 못말린다고 하면서도 어느새 동조하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풍자적인 요소를 갖고 있음에도 솔직함을 맛보았다는게 왠지 역설적으로 들릴테지만 솔직함은 풍자와 묘하게 어울린다.

 

때론 그러한 가족의 일상이 처절해 보일때도 있었기에 독특한 사고를 가졌다며 치부해 버리기도 했지만 반면 즐거워 보이기도 해 책을 읽고 난 후의 느낌은 여러가지였다.

그래서 막상 책을 읽고난 후의 잔상을 남기려고 해도 남길 것이 별로 없고 무어라 한마디로 일축하며 말하려 해도 나의 생각은 산산히 흩어지고 만다.

그랬기에 이 가족의 독특함, 유쾌함을 온전히 전달할 수가 없다.

나와 같은 시간을 갖고 느끼는 수 밖에 없다. 그러면 나의 이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분명 많은 요소를 담고 있지만 저자가 가장 추구하는 것은 유머이기 때문이다.

공감하며 즐거워하기를 바라지 우스운 얘기 가운데에서 풍자의 의의를 찾느라 헤메는 것을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조금은 유쾌하고 싶을때 혹은 현실을 비판하며 불평을 터트리고 싶을때 곁에 두고 읽으면 즐거워 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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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시스 무어 5 - 영원한 젊음 율리시스 무어 5
율리시스 무어.피에르도메니코 바칼라리오 지음, 이현경 옮김 / 웅진주니어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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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제 서서히 완결을 눈 앞에 두고 있는 가운데 읽게 된 5권 '영원한 젊음'은 4권에서와 마찬가지로 미로 속을 헤메이는 느낌이다.

3권까지 스피드하게 나아갔던 전개는 4권에서부터 주춤 하더니 5권에서도 경험 보다는 추리와 추측으로써 비밀을 풀어가는 분위기였다.

3권까지 여행을 통해 스케일의 거대함과 재미를 느꼈는데 4,5권을 읽고 보니 여전히 결말을 알 수 없지만 왠지 커다란 비밀 보다는 늘 곁에 있어 왔던 이야기가 결말이 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책은 여전히 흡인력 강하게 읽혔지만 무언가 흥미를 잃어버린 느낌. 그 점이 조금 아쉬웠다.

 

킬모어 코브의 규정을 함께 만들었떤 마지막 인물 블랙 볼케이노를 찾아가는 길이 첫번째 열쇠를 비롯해 나머지 네 개의 문과 가장 중요한 율리스시 무어를 찾을 수 있는 단서 제공을 하기 때문이다. 오블리비아 뉴턴은 블랙 볼케이노의 정체를 찾기 위해 만프레드와 함께 빌라 아르고에 잠입하고 아이들은 그가 마지막까지 일했던 기차역을 찾는다.

아이들은 끊어진 기찻길에서 율리시스 무어 가문의 묘지를 발견하게 되고 다시 돌아온 집에서 오블리비아 뉴턴을 따돌리기 위해 릭은 줄리아와 제이슨을 메티스호에 타게 하고 그는 길을 잃고 헤메다 다시 율리시스 무어의 지하 묘지로 내려간다.

따돌리려 했던 오블리비아 뉴턴과 만프레드는 메티스에 같이 타버리고 릭은 비어있는 율리시스 무어의 무덤과 그의 아내 무덤 앞에 놓인 꽃다발을 보게 된다.

릭은 이제 더이상 추측의 여지가 없다. 분명 율리시스 무어는 살아있고 그것도 가까이 있다고 예감한다. 등대지기 미나소와 정원사 네스터에게 누가 율리시스 무어냐고 묻는다.

 

6권에서 밝혀지겠지만 이 것만 보더라도 분명 율리스시 무어는 어디서 튀어 나오는 새로운 인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아직 정리되지 않은 의문들이 많기에 섣불리 결정 지을 수 없는 것은 미나소의 행동 때문이였다.

그는 왜 바다속으로 내려가 침몰된 배를 레이먼드 무어가 타고온 배라고 말하고 힘겹게 시계를 가지고 올라 왔을까. 그리고 왜 릭의 아버지는 그 배안에 갇혀 있는 것일까.

무엇을 얻으려고. 무엇을 밝히기 위해서?

그게 분명 율리시스 무어와 빌라 아르고의 비밀을 풀어주는 단서가 되겠지만 흥분 되기 보다는 차분해진다. 약간의 설레임을 간직하고 있기는 하지만 결말을 주시할 수 없는 이유는 지금까지의 과정을 한번에 무너뜨려 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지금껏 비밀을 풀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모험을 한 보람까지는 아니더라도 허무는 찾아 오지 말아야 하는데 지금까지의 고생이 헛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된다.

그 동안 아이들의 모험을 지켜 보면서 그들과 함께 마음 졸이고 흥분해가며 마치 내 일처럼 여겼던 것들이 끝나가고 헤어져야 한다는 서운함이 교차하면서 그 동안의 모험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는 법이지만 아이들이 모험을 잘 마치는 바람과 함께 킬모어 코브에서 평화롭게 그 나이의 천진함을 지켜 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지금까지 책을 읽어 오면서 다음권을 기다리는 재미와 전 권의 줄거리를 떠올려 가며 단숨에 읽었던 기억들이 새삼 새롭게 다가오지만 이제 마지막 한 권만이 이런 기다림의 종점에 서있다.

여전히 결말은 궁금하고 책의 발간을 기다리는 마음이 그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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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에게 시대를 묻다 - 민현식의 한국 현대건축 읽기
민현식 지음 / 돌베개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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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호기심을 감당할 수 없을 때가 있다. 주체할 수 없는 궁금증이 아닌 막상 호기심을 일으키고 보니 그 결과에 동화되지 못함을 말하는 것이다.
이 책을 고를때 나의 호기심을 충분히 검토해 보지 않았음이 바로 드러났다.
'건축에게' 여기까지는 좋았다. 건축에 관해 워낙 문외한인지라 호기심에 읽어보고 싶었을 뿐이였는데 미쳐 '시대를 묻다'라는 것에 큰 비중을 두지 않은 것이 표면적으로 떠오르고 말았다.
시대를 묻는다는 것에 대한 의구심을 일으켰어야 했는데 '건축'이라는 화두에 쏠려 시대를 묻는다는 것은 건축을 뒷받침해 주는 적절한 배경으로 생각했다.
 
분명 이 책에서 건축 혹은 건물이 주축이기는 하지만 시대의 말함은 건축과 떼어놓을 수 없는 무게감으로 다가왔다. 그 무게감의 낯섬은 건축가를 인식하고 있는 나의 의식을 것이다.
분명 건축을 한다는 것은 미적 감각을 떠나 창의력과 독창성이 부여 되는 예술의 혼이 담겨 있는 작업임에도 단순히 건물을 짓는 사람으로만 생각했다. 어느 순간 건축가라는 존재를 깨닫고 있는게 아닌 우후죽순처럼 솟아나는 똑같은 건물들에 질려 건축만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변의 경관과 독특함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 같은 것들만 지어내는 주변의 건축물들을 보면 사람이 지었다라기 보다는 기계로 찍어낸 듯한 인간미가 사라진 삭막한 세계일 뿐이였다.
그랬기에 내가 인식하고 있는 건축가는 노동의 한 복판에 서 있는 요소일 뿐이였다.
 
그러나 저자는 말한다. 지적이면서도 감수성을 가진다는 것은 모순처럼 보이지만 건축가는 지적 감수성을 가지고 세상을 보는 이들이라고.
이 말을 무심코 지나치지 않았지만 이 말을 능가하는 철학적 사고와 아름다움을 건축가들이 지니고 있다는 것에 놀라고 말았다. 분명 이들은 건축가들이지만 그들이 말하는 언어는 노동의 거침도 아니였고 자의식의 젠체도 아니며 자기들만의 세계에 빠져 허우적대는 좁은 식견을 가진 것도 아니였다. 건축을 통한 시대를 말한다는 것은 단순히 건축물을 놓고 요즘의 세태나 유행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건축물 안에 들어 있는 그들의 혼을 말하고 있었다.
건축을 통해 철학을 하고 있다는 말을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예술의 미는 제쳐두고 그들의 언어는 날카롭고 깊었다.
때론 우뚝 솟은 건물 안에서 때론 야트막하고 자연에 순응하듯 도심의 한가운데 떠 있는 포근함 속에서 그들은 모든걸 토해내고 있었따. 그 토함은 너무 깊은 곳에서 올라 왔기에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어 혼돈의 늪 속에 빠져 버렸지만 허우적 거림이 나쁘지 않았다.
 
너무나 유명한 건축을 또는 건축도시의 거대함, 위대함 앞에 주늑들지 않고 허우적 거림을 만끽할 수 있었던 것은 밖에서 건물을 쳐다보는 능동적인 시각을 버리고 건물 안에서 바깥 세상을 바라보게 만들어 준 그들의 배려 덕분이였다.
실로 밖에서만 찍어대는 건물의 모습에 익숙한 우리는 이방인에 불구했다.
그러나 건물 안에서 밖을 바라봤을 때의 시각의 충족은 내가 생각한 것 이상이였다.
그래서 지적 감수성을 가지고 세상을 보는 이들이라는 말을 실감하게 된 것이 바로 안에서 바라본 바깥 풍경이였다. 밖에서 바라볼때의 낯섬은 존재하지 않은 채 공간속의 포근함은 안으로 들어다 보기 전에는 알 수가 없다.
 
또한 이 책을 통해 구체적으로 알게된 환경결정론의 의도는 늘 나의 갈망이였지만 이 책 속의 건축물들을 보고 나니 그 의도에 순응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리적 환경을 개선하면 거주하는 사람들의 정신적,신체적 복지가 향상된다는 환경 결정론은 비단 특별한 사람들만이 아닌 우리들에게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 모습을 보며 투기로써 집을 마련하고 다른 사람의 시선을 위해 집을 꾸미는 것이 참으로 어리석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랬기에 도연명의 귀거래사에 나오는 말은 세속을 잊고 욕심을 버리고 내 삶의 향상을 돕고 있었다.
 
남창에 기대어 마음을 다잡아 보니
무릎 하나 들일 만한 작은 방이지만 편안함을 알았노라
 
어쩜 단아하면서 햇살이 그득한 집을 바라는 것도 욕심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그동안 창을 통한 바깥 세상을 보지 못하는 어두움을 안고 사는 시각을 지녀 왔는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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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답게 산다는 것
안대회 지음 / 푸른역사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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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도 언급 되지만 다치바나 다카시의 <나는 이런 책을 읽어 왔다.>에서 '실전에 필요한 14가지 독서법' 중에서 요즘 내가 즐겨서 하는 독서는 '같은 테마의 책을 여러 권 찾아서 읽어라' 이다. 특히나 이런 독서를 할 수 있음은 내게 낯설었던 테마에 흥미를 갖게 되면서 행하게 되는 독서법일 것이다.
나 같은 경우는 책 읽는 소리, 오주석의 한국의 미 특강, 책만 보는 바보를 읽고 이 책을 마주하게 되었다. 옛 공부의 즐거움, 스승의 옥편이라는 비슷한 책이 대기 중이지만 위의 책들을 읽으면서 조선 중기의 학자들을 많이 만났고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이 흥미로워 졌다.
특히나 책만 보는 바보를 통해 만난 이덕무에 관심이 많이 쏟아졌는데 이 책에서도 이덕무 뿐만이 아닌 정조때의 선비들에 대해 많이 나온다.
'책 읽는 소리'라는 책을 읽고 비슷한 책들을 찾아 보지 않았다면 잊혀졌을 선인들이였고 벗처럼 스승처럼 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나니 더 친근해진 느낌이고 낯설게만 느껴졌던 선비들의 모습이 조금씩 확신을 더해가는 느낌이다.
 
내가 읽었던 책들 속에서 선비들의 모습은 학문에 대한 열정, 책을 사랑하는 마음, 벗과의 우정이 주류였다면 '선비답게 산다는 것'은 좀 더 포괄적인 선비들의 활동영역과 다양함을 추구하고 있다. 저자의 개인적인 의견 피력이 곳곳에 드러나 있어 온전히 시대에 흡수 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많은 것을 추측해야 하는 어려움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또한 다양함을 추구하다 보니 좁고 깊게 파고느는 것이 아니라 넓고 얇게 파고 들어서 진득한 깊이를 느끼려 하면 어느새 테마가 바뀌어버려 아쉬웠다.
몇몇 선인들의 특징을 알고 있어 읽는 재미도 더하였지만 중복되는 느낌도 있어 때론 너무 광범위해 선비답게 산다는 것보단 선비들의 모습이라고 치부해 버릴 뻔 했다.
그러나 시대를 뛰어 넘어 그들을 존경의 눈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는 곧음, 열정, 순수함은 한껏 지겨움이 난무한 세상에 신선함으로 다가왔다. 대부분 학문이 주류가 되는 그들의 세계에서 어려움 보다는 즐거움으로 대하고 양심에 거리낌 없이 행동하는 모습을 보면 괜히 내가 반듯해지는 느낌이다.
 
같은 시대를 살지 않더라도 느껴지는 정갈함이 이러할진대 연암 박지원이 말하는 벗의 의미는 현 시대에 머무르고 있는 내게 생경하게 다가온다.
한 세상을 살게 된 것 부터 같은 장소, 같은 나라. 같은 지역, 같은 직업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를 대며 인연의 오묘함을 말하고 있는데 나는 그러한 오묘한 인연이 몇이나 되는지 잠시 생각해 보게 된다. 그랬기에 그들의 소박한 편지와 글, 공부와 취미, 독서와 선비로써의 삶은 범접할 수 없으면서도 '이것이 바로 조선의 선비구나'라는 감탄사를 터트리지 않을 수 없었다. 특정 계층으로써의 시대적 배경을 떠나서 선비다움을 지키지 않을 수 없음은 잠시 제쳐 두고 각 분야에서 다양한 열의를 보인 그들의 모습에 잔잔한 감동이 일어난다.
시대 격차의 공백을 비웃듯이 뛰어 넘는 선인들의 성찰은 복잡하고 첨단화된 21세기를 살고 있는 내게 잠시 현실을 잊고 많은 과욕을 버리게 해주었다. 18세기 후반 백두산에 올라 내려다본 풍경은 천하만사를 모두 잊어 버리게 했다던 신광하의 충격 보다 못할지라도 잔잔한 깨달음은 나의 조재감에 감사함을 더해 주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다방면의 선비들의 모습을 보여 주어 흥미롭게 읽어서 자칫 선비들을 통한 깨달음을 방치할 수도 있지만 자신에게 깊게 다가오는 성찰이 있을 것이다.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벗과의 우정, 독서, 공부였는데 요즘의 우리처럼 단기간에 무엇인가 해보려는 것이 아니라 평생을 두고 지켜가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나의 취미든 일이든 인생이든 벗이든 평생지기를 할 만한 것이 무엇일까.
마음을 다듬어 보며 생각에 잠기는 이 밤이 무척이나 고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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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노아르 서문당 컬러백과 서양의 미술 4
전규태 해설 / 서문당 / 198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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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파 화가들의 그림 중에서도 자연 풍광에만 마음을 뺐기다 보니 르노와르의 그림들은 눈에 쉽게 들어오지 않았다. 특히나 누드화가 많은 르노와르의 그림은 나의 관심 밖이였다.

고흐나 코로 등 자연의 모습이 더 많은 화가들만 보다보니 어쩜 당연한 모습일 수도 있으나 그림에 워낙 문외한이다 보니 우선 시선이 자연스러움으로 간다.

그렇게 그림만 보다 보니 조금씩 시선이 틔이는 느낌이고 어느새 르노와르의 그림도 나의 시선 안으로 들어왔다. '테라스에서'라는 그림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겨 작은 도록까지 사게 되었는데 정작 이 책에는 그 그림이 없어서 아쉬움이 컸으나 오히려 '테라스에서'라는 그림에 쏠리지 않고 객관적으로 보게 된 것 같다.

 

누드화만 그리는 화가로만 인식되어 있었는데 르노와르가 그린 풍경화를 보면 그 동안 내가 보아왔던 풍경들보다 더 자연스러움이 묻어난다.

얼핏 보면 특징이 없어 보이는 자연의 모습들은 르노와르가 절제를 했기에 그렇게 보이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특히나 르노와르의 섬세함에는 감탄을 자아낼 수 밖에 없다.

여인의 머리카락이라 든지 화려한 원피스를 얼마나 정성 들여 그렸는지 그림속에 여인이 들어 있는 모습으로 착각하기 쉽다.

 

분명 문외한인 나의 시선으로 봤다면 이것들을 느끼지도 못하고 스쳐 버렸을 수도 있다. 그림과 함께 짧막한 설명은 깊으면서도 명료하다.

때론 내가 이 그림을 보고 있다는 것이 자랑스러워 질 정도다.

판본이 오래 되어서 괜히 모든 것이 낡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림은 변하지 않고 언제 어디서 보느냐에 따라서 느낌이 다르기 때문에 평론에 구애를 받을 필요도 없고 마음을 연 상태에서 그림을 보면 될 것 같다.

게을러서 그림을 보는 것만 좋아해 봐도 봐도 보는 시각이 느는 건 느껴지지 않지만 그냥 볼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행복하다.

그림은 내게 그런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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