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 - 삶의 여백에 담은 깊은 지혜의 울림
박완서.이해인.이인호.방혜자 지음 / 샘터사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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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박완서님과 이해인 수녀님은 익히 알고 있지만 방혜자님, 이인호님은 낯설었다.

그래서 박완서, 이해인 이 두분을 믿고(?) 책을 읽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박완서 이해인의 대화 방혜자 이인호님이 대화는 내가 그분들을 안다고 해서 더 와 닿거나 모른다고 해서 덜 와 닿는 그런 차원을 떠나는 진솔한 대화였다.

물론 박완서님의 몇몇 작품을 읽고 그 분의 개인적인 모습들을 많이 접해 대화 속에서 더 많은 밑 배경을 알고 있어 마치 내가 아는 사람의 일 인냥 읽어 나갔지만 이러한 소소함 보다는 대화의 폭이 넓고 쉽게 공감할 수 있는 것들이여서 크게 좌지우지 되었던 것은 아니였다.

그러나 이 분들의 배경과 일은 대화의 중심에서 부터 다른 주제로 뻗어나가는 원동력이 되고 있었다.

 

박완서 이해인 님이 대화는 삶 속에 녹아 들어 인내와 고통 사랑을 얘기 하는 부분이 많은 반면 방혜자 이인호님의 대화는 유학파 답게 여성의 역활, 세계속의 나 등을 말하는 시각이 좀 더 틔인 주제가 많았다. 너무나 유명한 박완서 이해인 님이기에 무슨 대화를 할까 하는 궁긍증이 일었는데 그 두 분의 친분과 명성이 어느 정도 있기에 개인적인 얘기들도 많았다.

방혜자 이인호님도 그러했지만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박완서 이해인 수녀님의 배경에 반해 전혀 아는게 없어 방혜자 이인호님의 대화를 더 재미나게 읽었는지도 모른다.

 

사회적으로 한 인생을 놓고 볼때 세상을 내려다 보는 위치의 분들의 대화지만 쉽게 수긍할 수 있고 공감 가는 내용들과 그들의 지혜를 빌 수 있는 내용들로 채워져서 어려움 없이 읽은 기억이 난다. 조금은 어렵지 않을까 하는 염려 속에서 박완서님의 말처럼 쉽게 읽힌 다고 쉽게 씌여진 것도 아닌 독자들을 위해 아니면 삶의 연륜으로 그렇게 대화를 이끌어 갔는지도 모르겠다.

그 안에서 얻은 것을 품는 것은 각자의 몫이지만 그 분들의 대화에 몰입할 수 있었던 것은 각자의 처소에서 능력을 발휘하고 늘 자신을 가꾸어 나갔던 역량이라고 생각한다.

1945년 생인 이해인 수녀님만 빼고 세 분은 1930년대 생이시다.

60~70년의 인생을 살아오는 동안 격동의 세월을 보낸 분들이라 단순한 나의 삶과는 비교할 수 없는 삶의 맛을 느낄 수 있었다.

박완서님도 말씀하셨듯이 70년의 인생을 살면서 몇 백년의 삶을 산 것처럼 개인적으로나 사회 정치적으로 수 많은 변화와 아픔과 기쁨을 맛 보았기에 인간으로 다시 태어날 이유를 못 찾을 정도로 그들의 연륜은 깊었다.

이 분들의 대화가 우리들에게 미치는 영향, 사고를 틔워주는 인식을 떠나 인생의 까마득한 선배로써 보여주고 나누어 주는 것들은 많았다.

우선은 자기네들의 경험을 유감없이 뱉어냄으로써 선택의 기로를 매일 걷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좀 더 넓은 시각을 틔워주었던 것 같다. 즉흥적인 것이 아니라 인생의 기회라고 말할 수 있고 선택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진짜 나의 삶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소설가,수녀,화가,역사학자라는 범상치 않은 그녀들의 일은 열정적인 인생을 살아가는데 많은 독려가 되었다. 여성이기 이전에 의지를 가진 한 사람으로써의 그녀들의 모습은 시대를 뛰어 넘어 도전을 가늠해보는 열정이 묻어났다.

더욱이 요즘같이 해외유학이 흔해진 세대의 젊은이도 아닌 50~60년대의 젊은이였던 방혜자,이인호님의 유학은 의미가 남달랐다. 자기 분야에서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고 더 큰 세계에서 나를 가꾸기 위해 떠난 유학과 시대가 요구해서 호기심으로 도피하듯 떠나는 유학은 차원이 다른 것이 인상 깊었다.

나이로 보자면 할머니의 대열에 올라선지 오래인 그녀들의(그녀라고 말하기에 송구하지만) 모습에는 세대차이의 고리타분함이 아닌 삶이 지혜와 열정이 숨어 있어 그것을 엿보는 시간은 참으로 진귀했다. 그 분들의 대화에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멀뚱하게 앉아 있는 것이 아닌 그 대화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는 사실이 신기하고 좋았다.

 

자신과의 대화가 없다면 상대방과의 대화는 흐름을 타지 못할 것이다.

그랬기에 이 책을 읽는 내내 내 자신과의 대화를 많이 한 셈이라 상대방과의 대화를 해야 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만에 아주 진솔하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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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셋 - 시간을 초월해 나를 만나다
기타무라 가오루 지음, 고주영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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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시간이 흐를수록 운명이라는 말을 믿지 않게 된 것 같다.

운명이라고 여겼던 만남과 일들이 틀을 벗어나면서부터 불거져 나온 불신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없이 펼쳐진 초원, 푸른하늘, 나를 감싸는 바람의 한가운데 서 있을때면 운명을 꿈꾸어 본다. 이 평안함을 전해줄 사람이 있다면, 어딘가에서 나처럼 똑같이 이 모든 것을 느끼고 있겠지 라고.

그러곤 한 동안 잊고 있었던 이러한 생각들을 꺼내보며 잠시 멍해진다.

지금 내 손에는 리셋이 쥐어져 있다. 신기하게도 이 책이 추억 속으로 나를 이끌어 준 느낌이다. 그것도 아주 또렷하게.

 

2005년 봄. 화창한 일요일 오후 심부름을 가기 위해 교회 아이 자전거를 빌려 타고 시골길을 달리고 있었다. 자전거를 타고부터 지나가는 바람이 시원하다는 걸 알았으니 시골길의 달림은 상쾌하기 그지 없었다. 그래서 상쾌한 바람을 쐬며 달리다보니 내 눈앞에 보리밭이 나타났다.

바람이 보리밭을 일렁이게 만드는 광경을 보며 와~ 하고 탄성을 내지를 수 밖에 없었다. 수확하기 전의 노란 보리였으니 바람이 스칠때마다 사삭거리는 소리는 아직도 귓전에 울리는 듯 하다.

그 보리밭의 느낌이 너무 강렬해 매년 그곳을 다시 찾았지만 그 감동은 되살아나지 않았다.

그러나 무라카미에게는 나보다 더한 감동이 보리밭에서 일어난다.

바로 마짱을 만난 것이다.

 

무라카미에게 나타나는 슈이치와 마치코에게 나타난 마스미를 무어라 말할 수 있을까.

환생이라고 단정지어 말할 수 없는 것은 그들에게 슈이치와 마스미가 들어 있지만 무라키미와 마치코의 모습도 존재하기에 그들을 무어라 쉽게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슈이치와 마스미의 결합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다행인 것은 영화 '번지 점프를 하다'처럼 동성으로 태어났거나 결혼 상태가 아니라는 점에서 그 마음은 더 애틋하다. 시간의 흐름의 차이가 나서 각자 한 삶을 마치고 비로소 만날 수 있었지만.

어떻게 보면 어긋나 버린 인연이고 쉽게 지나칠 수 있었을 만남이였지만 마즈미 마음속에 깊이 각인된 슈이치와의 몇 안되는 추억과 죽음은 슈이치를 마음속으로 기다리며 살아가게 한 힘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얼마 안되는 추억이기에 그와 함께 사랑을 한 것도 아니고 서로의 마음만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상태에서 전쟁은 모든 것을 앗아갔다.

그리고 마즈미는 슈치이를 만난 것이다. 슈이치가 목숨을 잃었을 즘의 중학생인 무라카미를.

서른이 넘어버린 미즈미 앞에 나타난 중학생의 슈이치를 마즈미가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또한 그 사실을 어떻게 받아 들일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마즈미의 보습을 담고 있는 마치코의 등장도 슈치이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중학생의 모습에 세일러복 차림이였다.

서로의 마지막 모습으로 만남을 시작하며 동시에 이별하게 되는 사실은 운명의 장난 같았지만 몇십년도 기다렸다는 마치코의 말처럼 그들의 재회가 중요한 것이다.

같은 하늘 아래서 사자자리 유성군을 보며 33년 더 살아서 또 보자는 마지막 그들의 대화는 그래서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고 삶까지 뛰어 넘는 거스를 수 없는 아름다운 사랑이였다.

 

이 사랑의 모습을 흩뿌리듯 조급하게 이야기를 끌어 갔더라면 분명 식상했을 것이다. 얼핏보면 간단할 수도 있는 줄거리를 저자의 문체와 구성이 차분해서 그 운명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도록 만들어 나갔다. 1부에서 슈이치와 마즈미가 함께 존재했던 혼란스러운 전쟁시기에 하루 하루의 모습은 평범한 것 같으면서도 비범했고 성장과 동시에 내면의 모습을 잘 드러내고 있어 문학적인 면모까지 엿볼 수 있었다.

무라카미와 마즈미의 만남이 슈이치와 마즈미의 만남이라는 것을 이해시키기 위해 1부와는 완전히 다른 2부의 내용은 다른 이야기인가 하는 혼란스러움이 있었지만 그들이 누구인지에 대한 궁금증으로 1부에 대한 조급함을 눌러 주어 책을 덮고 난 후에는 작가의 구성에 다시 한번 감탄하게 된다. 먼 길을 돌아온 듯한 느낌이지만 슈이치와 마즈미의 재회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비교적 일관된 분위기를 이끌어 낸 책의 분위기는 충동적인 사색을 만들어 내는 것도 아니였고 무한한 환상을 자아내는 것도 아닌 여운을 깊게 주어 인상 깊었다.

가볍고 자극적인 일본 소설을 주로 읽다 보니 일본 소설에 대한 식상함이 밀려와 별 기대없이 읽은 리셋은 일본소설에 대한 편견을 깨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렇기에 이러한 작품의 만남이 자주 이루어 지기를 갈망한다.

한 생을 뛰어 넘은 슈이치와 마즈미의 재회처럼 기다림이 길다해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분명 책을 읽는 즐거움도 삶을 살아가는 기쁨도 흔치않는 만남을 기다리며 설레임으로 마주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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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말로 좋은 날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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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나에게 오는 우연의 만남은 어떠한 결과를 낳든 숙명적일 수 밖에 없다고. 그런 생각을 하게 된 매개물은 사람이 아니라 음악과 책이 더 자주였다. 한 음악가나 한 작가의 작품 속에서 혹평 되거나 난해하거나 지금껏 발표된 분위기와 다른 것을 첫 만남으로 대했을 때 나는 그 음악가와 작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별 느낌없이 지나치는 작품들도 많지만 명성에 비해 나의 만족감을 채우지 못할때는 이런 아쉬움이 든다. 다른 작품을 먼저 만났더라면, 그랬다면 좀 더 포괄적으로 생각할 수 있었을 텐데 하며 그들의 작품을 많이 듣고 읽는 건 깊은 인연이라 생각한다.

 

거창하게 이런 궤변을 늘어놓는 것은 이 책이 성석제님의 작품 중에서 첫 만남이였기 때문이다. 책을 읽기 전 성석제님의 문체, 이야기에 대해 신선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던 터라 설레임으로 책장을 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러한 신선함을 만나기도 전에 이 책은 분위기가 다르다는 것을 예감했다. 무언가가 내 마음 속에서 꿈틀대는 감정이 솟구치는 것을 거부하고 있었다. 그것은 인간의 극과 잔인한 우울함이 깃든 현실의 부분을 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실의 모습을 그린 작품을 피하는 나의 편독에는 이러한 요소들을 만나기 싫어서였다. 현실을 살고 있으면서 현실을 피한다는 나의 편독이 이해가 가지 않을 때가 많지만 음지의 한가운데를 살아가기에 양지만을 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책을 읽다가 많이 덮어버렸다.

책 속의 감정들이 책 밖으로 비져나올라 치면 나는 황급히 도망쳐 버린 것이다. 그 우울의 짙음은 책을 읽어나가는 페이지 수 만큼 두꺼워지고 농도도 짙어가고 있었기에 나의 도망은 자주일 수 밖에 없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길 곁의 잔상을 그려내고 있다는 관심의 유도 속에서 허우적 댈 수 밖에 없었다.

 

책을 읽으면서 책 속의 분위기에 동화되어 가는 것을 책 읽기의 즐거움으로 꼽기도 하지만 인간의 어두운 감정을 계속 드러나게 하는 참말로 좋은 날은 제목과는 상반된 분위기 속에서 극을 달리고 있었다.

7편의 단편이 다 그러한 분위기를 나타내는 것은 아니였지만 툭툭 불거지던 꽃이 한꺼번에 와르르 피어나듯 우울함은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특히 마지막 작품 '저만치 떨어져 피어 있네'는 희망이라곤 눈꼽만큼도 들지 않는 어둠을 그려낸 작품에다 살아 있어야 겠다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잔인한 몰락을 그리고 있있다. 지나가는 말로 들어도 안타까움에 마음이 무거웠을텐데 그 세세함을 만나야 하는 나는 깊은 어둠을 맛 보고 있었다. 삶이 이래야만 하는 걸까 과연 나는 이들보다 낫다고 말할 수 있을까란 질문을 던져보지만 그들이 그려내는 좌절과 현실의 팍팍함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없음일터다.

결말을 바꿀 힘도 처음부터 곁길만 존재했던 그들 앞에 그 곁길을 벗어나라고 용기를 북돋워 줄 수 없었다.

행복은 이렇게 먼 것일까, 과연 행복은 큰 것 에서 나오는 것인가 수없이 질문을 던져 보아도 답이 나오지 않는다. 귀가 멀어져 가는 아내, 부모와 자식간의 끈이 끊어져 버릴 듯 변해가는 딸, 집을 잃고 갈 곳이 없는 가족, 점점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이 작품 뿐만이 아닌 다른 작품 속에서도 나의 우울을 끌어내었던 것은 가족의 불화였고 가정의 파괴였다. 존재감 상실로 이어지는 혈연관게는 예의를 차리지 않은지 오래였고 같은 공간에서 겨우 겨우 형식의 틀을 이어갈 뿐 가족이라는 허울만 겨우 뒤집어 쓰고 있었다.

거기다 저자의 언어는 태연히 그 모든 것을 그려내고 있었기에 잔인한 우울의 탓을 누구에게 돌려야 할지 헷갈릴 정도였다.

저자가 만들어낸 세계의 사람들, 실재로 존재하고 있는 어둠의 실체, 자꾸 엇나가 버리는 그들을 보면서 이것은 나와 상관없다, 난 현실이 싫어 라고 언제까지 외칠 수 있을까. 그 또한 내가 버릴 수 없는 잔인함이로다.

 

이러한 내용이였기에 성석제님에 대한 인상은 이 책으로 관철될 것이다.

다른 책을 읽어 봐야겠다라는 생각은 들지만 이미 맛 본 쓴맛을 단맛으로 잠재울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하기에 이 또한 성석제님과 나와의 숙명이고 나는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언젠가는 만나게 될 좋을 날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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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의 당신에게 - 흔들리는 청춘에게 보내는 강금실의 인생성찰
강금실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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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유명인사들의 책을 만날때마다 읽기도 전에 드는 편견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그 인물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책이 나왔다고 하면 알기 위해 읽어 보려는 것이 아닌 내 안의 편견 속에 더욱 더 가둬 버린다.

이 책도 그랬었다. 법무부 장관을 지내면서 획기적인 일들을 단행했기에 강금실 변호사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너무나 유명하기에 그리고 그런 똑부러짐에 기가 죽었기에 멋지다는 인상을 받으면서도 그녀의 책을 손에 쥐는 건 쉽지 않았다. 그녀에 대한 나의 생각이 어떻게 바뀌게 될지 두렵기도 하였다.

그녀는 자기의 일을 말하고 있음에도 나는 젠체한다고 느낄 수도 있는 것이 그녀가 특별하다는 걸 인정할 수 밖에 없음이다.

분명 그녀는 대단한 사람이다. 법조인으로써가 아니라 여성으로써가 아니라 사람 강금실은 멋있는 사람이다.

 

거기다 그녀는 글을 통한 또 하나의 통찰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강금실과 깊은 친분을 맺고 있으면서 그녀의 책 머릿말을 쓴 분도 질투가 날 정도였다고 하니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솔직히 유명인사의 책들은 자기의 인생을 되짚으며 독자들에게 보여줌에 힘썼다라고 생각하고 대충 훑어본 그녀의 사진들을 보며 이 책도 그렇겠구나 생각하였다. 처음 책을 읽으면서 그녀의 일, 결혼 얘기가 나올때 '그럼 그렇지'라며 내 멋대로 생각해 버리고 있었다. 그러나 책을 읽어 나가면 나갈 수록 나의 생각이 부끄러워지고 있었다. 그녀의 글은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았지만 쉽게 지나칠 수 없는, 한번에 주르륵 읽고 나아가기엔 무언가가 걸리는 글이였다.

그녀의 글을 깊이 공감할 수 없어 겉도는 나를 발견하면서도 그녀의 글을 외면할 수 없었다. 책을 대하면서도 법조인 강금실을 마주하고 있었지만 어느새 강금실이라는 소소한 사람의 일상속으로 빠져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이야기이고 자신 내면의 드러남이였지만 우리가 알아갈거라 추측한 그녀의 시시콜콜한 것들이 아닌 그녀의 생각, 그녀의 삶의 자세를 읽는 듯한 기분이였다.

 

책의 구성이 조금은 어수선 하다라는 느낌과 곳곳에 그녀야 예전에 기고했던 글들이 실려있고 또한 그녀의 사진들이 글의 성격과 맞지 않고 생뚱맞다라는 느낌이 들어 일관성이 없어 들쑥날쑥 하다는 기분이 들기도 하였지만 그녀의 글에 대한 편견과 유명인사의 책이라는 무조건적인 불신은 사라지고 있었다.

내가 한권의 책으로 그녀를 판단하고 논한는 것은 가당치도 않지만 그녀의 다른면을 만난 것은 분명하다. 어쩌면 그녀의 일, 경력이 주류가 된 것이 아닌 그녀의 사고의 드러남이 짙어 조금은 가까이 다가간 기분이다.

무언의 장벽이 거느리고 있었던 수직구조의 딱딱함, 긴장감을 그녀가 법무부장관시절 조금씩 무너뜨렸던 것처럼 독자와의 장벽도 무너진 느낌이다.

순전히 내가 그녀에게 가지고 있던 편견의 무너짐이였지만 글을 통한 소통으로 인해 그녀에 대한 생각이 조금은 소원해졌다.

얼마나 많은 몰이해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지 그녀의 소소함에서 칼끝 같은 날카로움을 보며 무언가를 깨트려가고 있었다. 그 무언가는 개개인의 몫이겠지만.

 

내가 느꼈던 것들이 이러했기에 그녀의 책 '서른의 당신에게'는 제목이 폭이 좁거나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른 즈음에 그녀가 느꼈던 것이 특별하다고는 하나 제목에 편중되어 꼭 서른즈음의 독자들에게만 뿌려지는 내용이라 생각했다.

이 책의 완성이 서른즈음의 고독과 환희로부터 시작되었을 수도 있으나 인생의 성찰, 삶의 고뇌라는 거창한 발언보다는 그녀의 삶의 소소함이라는 모습으로 좀 더 가깝게 다가갈 수도 있지 않았을까하는 아쉬움이 든다.

소소함이든 성찰이든 그녀의 드러남을 부인할 수 없지만 조금은 그녀에게 가깝게 다다가길 원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염려로 보아준다면 고맙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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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똥별 머신
하시모토 쓰무구 지음, 박승애 옮김 / 노블마인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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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적 부모님이 모두 잠든 깊은 밤, 마당을 서성이며 별자리를 보던 기억이 난다. 우연히 별자리 공을 하나 얻은 후 그 공과 하늘을 비교하고 신기해하며 한껏 고개를 젖힌 후 보던 밤하늘을 잊을 수 없다.

별똥별을 본 후 혼자 흥분해 날뛰던 밤이며 수 많은 추억이 깃든 시골집 마당의 밤하늘은 이제 추억이 되었지만 이젠 밤하늘을 보고 있으면 가지가 생각날 것 같다.

 

별똥별 머신으로 나오코에게 사랑을 고백했던 가지.

6년의 짝사랑의 고백을 멋지게 한 후 가지와 나오코는 하나가 되었다.

설레임과 깊은 융화감이 기든 연인이라고나 할까. 그러한 사랑을 해본적이 언제이던가 감상에 빠지기도 전에 그들의 미래는 내 밤하늘의 추억처럼 흔적 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오로지 추억만이 존재한채.

외국의 섬에서 낯선 여자와 버스 추락 사고로 죽은 가지.

나오코에겐 그의 죽음도 받아들이기 힘든데 죽어버린 낯선 여자에 대한 질투심으로 혼란스럽고 괴롭기만 하다. 늘 가지는 나오코 안에 잠재되어서 절대 빠져나올 수 없지만 나오코는 가지의 친구였던 다쿠미와 새로운 사랑을 만들어 가고 있다. 가지와는 완전히 다른 다쿠미지만 언제든 보고 있으면 힘이 나기에 나오코는 그에게 점점 의지해간다.

그러나 가지를 잊을 순 없다. 가지는 그녀 곁에 없으니 그와의 추억은 더욱 더 미화되어서 그녀를 짓누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건 다쿠미도 마찬가지다. 가지의 연인을 자기 연인으로 만들었지만 가지를 잊지 못하는 나오코를 알고 자신 또한 가지를 진정 좋아했기에 가지라는 울타리 안에서 태연히 가지를 의식하지 않은 척 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 가지는 소중한 사랑이자 친구였기에 그리고 가지와의 추억도 남달랐기에. 가지는 멋진 녀석이였기에.

 

그러나 언제까지 그들은 가지 주위를 멤돌며 그렇게 힘든 사랑을 꾸려갈 것인가. 서로 잘 알고 있지만 모른척 하면서 도대체 언제까지.

나오코는 우연히 동창회에 갔다가 가지에 대한 친구들의 제 멋대로의 말을 듣고 다쿠미는 그 소식을 전해 듣고 둘은 각자 무너져 버린다. 가지가 살아있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채 가지를 그리워하며.

그러나 그들은 서서히 깨어나고 있었다. 가지라는 울타리 안에서 서로의 위치와 연결고리의 존재를 인정한 채 말이다. 그러곤 말한다.

우린 가지를 잊을 수 없을 거라고. 어떻게 잊을 수 있겠냐고. 그들은 비로소 마음 속에 품었던 가지를 공유함으로써 가지와의 이별을 극복해 나가기로 한 것이다.

 

처음엔 가지와 서로 연결이 되어 있는 사람들끼리의 만남이 더 고통스럽지 않을까. 가지를 배신하는 경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분명 그들은 힘든 상황에서 힘든 사랑을 하고 있었지만 가지가 서로에게 특별하기에 가지를 잊을 수 없기에 차라리 가지를 서로 공유한 채 살아가기로 한 것이다. 그러한 상황이 처음엔 힘이 들겠지만 그게 오히려 가지 안에 갇혀 사는 것보단 낫다고 생각한다. 가지와의 추억을 되새기며 그리움이 짙어 지더라도 그 아픈 마음을 채워줄 수 있는건 가지를 잘 아는 둘이기에 상처회복이 더 빠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속도는 느리지만 그들의 출발은 힘차 보인다. 가지와 나오코와 다쿠미는 그렇게 그들의 추억을 새롭게 만들어 갈 것이다. 사랑하는 가족들과의 소소한 일상 가운데에서 평화롭게. 그들의 마음속엔 가지와 새로운 연인과 같이 살아가는 힘겨움과 즐거움이 함께 존재하더라도 말이다.

 

이별 후의 그들의 모습은 그랬기에 조금씩 아름다워 보이기 시작했다.

무조건 가지와의 추억을 미화시키는 것 보다 그 추억을 통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삶의 희망을 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가지가 죽어서만이 아닌 우리는 이별에 익숙해져야 하고 익숙해 지더라도 이별엔 늘 서투르기에 이별 후의 희망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아무리 연습해도 이별과 절대 친해질 수 없다는 걸 알지만 나오코와 다쿠미를 통해 이별 후의 상실감만이 아닌 살아가는 힘을 품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늘 가지가 따라다니더라도.

 

 

오타발견 : p.195 근본족인 -> 근본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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