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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 콘서트
데이비드 나이븐 지음, 임성묵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6년 12월
평점 :
품절


건강은 오직 계획하고 준비하고 노력하는 사람이 누릴 수 있다고 한다. 나는 계획도 준비도 노력도 하지 않는데 그럼 건강하지 않는 것일까?

건강에 관해서 나는 늘 자신이 없기에 순간 마음이 약해진다.

몸이 먼저 날씨를 알아차리고 나쁜 시력에 무릎 관절이 자주 시려 건강에 관해서라면 늘 이렇듯 자신이 없다.

특별히 아픈 곳 없고 밥도 잘 먹는데 나는 왜 이럴까 노력을 안해서인가 라며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그러나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본다면 일상에서 얼마나 많은 습관적인 노력을 하는지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단지 내가 건강에 대한 노력이라고 인식하지 못할뿐 본능도 곧 노력인 것이다.

이러한 본능이든 아니면 자꾸 인식하려는 관심이든 이 책에서는 스스로의 습관과 태도를 점검해 건강한 삶을 누리라고 말한다.

무려 100가지의 소제목 속에 수 많은 건강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 100가지의 이야기를 비밀이라고 말하고 있어 당장 건강해 질수 있다는 요량으로 눈을 번뜩이며 살펴 보지만 읽으면서 그러한 느낌을 받았다.

경험하기 전에 예방할 것. 그리고 조금만 신경쓰면 건강해질 수 있다는 것.

 

각 제목마다 비교적 짧막한 글과 다시 한번 인식시키도록 만들어 주는 요약 정리와 통계는 강한 메세지로 전달된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100개나 되는 이야기들은 우리가 전혀 모르고 인지하지 못한것들도 있지만 충동적인 긴박감을 주진 않는다.

책을 읽으면서 당장 시작하지 않으면 큰일날 것 같은 긴박감은 건강에 대한 관심을 높여 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충동적인 감정은 빨리 잊고 식어버리기 일쑤다.

그런 약점을 파고들 듯 100가지나 되는 엄청난 양임에도 간단하고 강하되 자극성은 주는 것이 아니라 차분한 가운데 생각하게 만든다. 그래서 스스로 판단하고 점검해 보라는 저자의 의도는 어느 정도 따라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의문이 들 것이다.

무엇이 그리 많길래 100여가지나 될까.

얼핏 생각해 보아도 100여가지는 도저히 나올 수 없을 것 같은데 막상 접해 보니 가능하다며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건강이라는 단어 속에 내포되어 있는 요소는 무한하기 때문이다.

단순히 나의 '몸'만이 주체가 아니라 몸에 연결되어 있는 내면 즉 정신과 하루 하루 꾸려 나가는 삶까지도 포함되는 것이다.

너무나 광범위하게 나아가고 이런 것도 포함이 될까 라는 의구심이 드는 것도 있었다.

예를 들자면 포옹을 하라든가, 명절 잘 보내기, 애완 동물이 미치는 영향, 잔디깎는 기계의 위험성까지 총집합하는 모습 때문이였다. 건강과 관련되어 있다기 보다는 우리 몸을 보호하고 정신적인 건강을 추구하는 것 같이 보였다.

 

우리가 인지하고 있는 건강의 폭은 그만큼 좁았고 전문가들의 말하는 건강의 폭은 넓었다.

그랬기에 100가지의 주의와 경고가 나올 수 있었고 그 가운데에서 우리는 헤멜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건강을 잃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라는 말을 포용하고 있는게 이 책이 아닌가 싶다. 건강했을때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기쁨과 삶에 대한 충만감까지 건강에서 비롯되는 것은 수백 수만가지도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단순한 신체의 건강이 아닌 그 많은 것들을 만족시키고 건사하려면 얼마나 관심을 기울여야 하고 소중히 생각해야 하는지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려워 보여도 그렇게 힘든 것이 아니라는 것 또한 알 수 있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우리 외부와 내부에 깔려 있는 틀은 그렇게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그것을 깨닫고 보호하는 것이 아닌 흥청 망청 낭비해 버린다면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하고 많은 것을 잃어 버릴 수 있지만 그것을 자각했다면 지금부터 하면 되기 때문이다.

 

신체, 정신 삶의 영위까지 폭 넓게 생각하고 크게 한번 숨 쉬어 보라. 상쾌함이 흐를 것이고 미래의 밝은 모습이 상상이 될 것이다. 그러나 언제든지 위험에 노출되어 있고 때론 의도하지 않는 일들로 나의 건강이 위협 당하고 망가질 수 있다.

최악의 경우를 상상하지 않더라도 그 전에 우리가 자신을 어떻게 가꾸냐에 따라 닥치지 않을 일도 어느 정도는 헤쳐나갈 정신력과 가능성의 기질을 만들 수 있냐 없냐는 건강도 큰 영향을 미친다.

그렇기에 건강은 쉽게 지나칠 수 없는 것이다.

건강을 잃고 뒤늦은 후회를 하는 사람들을 남일 보듯이 하는 것이 아닌 그것은 언제든 나의 모습이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늘 깨어 있어야 한다. 그것은 절대 멀리 있거나 어려운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활 속에 늘 잠재되어 있다.

다시 한번 나의 건강을 돌아 보고 사색하며 앞으로 살아갈 삶은 건강하게 꾸려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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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동화 - 삶의 지혜가 담긴 아름답고 신비한 허브 이야기
폴케 테게토프 지음, 장혜경 옮김 / 예담 / 2006년 11월
평점 :
절판


책을 읽기 전까지 그 책에 대해 무어라 말할 수 없다는 걸 이번에 또 깨달았다.

호기심, 추측, 혹평까지 읽기 전에 느끼는 감정이 어느 정도 반영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건 책을 읽고 난 후다. 이 책을 읽기 전 나의 느낌은 겉표지도 어둡고 동화라고 하지만 식물?이라는 의문으로 별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그래서 전혀 기대 없이 읽은 책인데 의외로 괜찮은 책이여서 서론이 길었던 것 같다.

 

우연찮게도 이 책을 읽기 전 다른 책을 읽는 중이였고 허브차를 우려내서 마시고 있던 중이였다. 이 책을 읽을 거라는 계획이 없었기에 마셨던 차였고 다른 책을 읽었던 것인데 책 속의 허브들이 내가 마시던 차의 향으로 유혹을 한 탓인지 자연스레 식물동화에 손이 갔다. 결국 마시려던 차는 다 식어버렸지만 식물동화는 내게 정복(?)이 되어 있었다.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상상력의 독특함이였다.

영어명이 아니더라도 우리에게 낯선 이름들의 대부분이라 향을 기억하기도 힘들고 효능을 알고 있기란 더더욱 기대하기 힘든게 사실이다. 그런데 저자는 17가지의 허브에 효능과 향의 특징을 살려 동화를 엮어갔다.

그 상상력만으로도 놀라운데 이야기는 재미있기까지 하다.

이야기에 빠져 어떤 식물을 이야기 하는지 기억조차 못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는 것에는 자칫 억지스러운 면이 들어가지 않을 수 없어 우려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 부분이 이 책이라고 왜 없겠냐만은(더욱이 동화니까) 작가는 살짝 귀엽게 솔직함을 밀고 나간다. 괄호를 이용해 독자의 시작되는 의문을 지긋이 눌러주는 그런 방법으로 말이다.

알면서도 눈감아주게 되는 귀여움이 배어난 식물 동화는 그렇게 순식간에 읽혔다.

 

식물의 효능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것이 많아 비슷한 내용도 있었고 비슷해 보이는 식물들도 있었다. 식물 설명을 따로 해주는 부분에서 따로 체크해 두었지만 두번 세번 읽는다면 조카나 아이들에게 자연스레 이야기해 줄수도 있을 것 같았다.

또한 허브의 특징은 우리의 생활에서 얼마든지 이용할 수 있기 때문에 생활의 지혜까지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되니 다독했을 경우 이점이 많아질 것 같았다.

무슨 책이든 두번 세번 읽었얼때 얻는 것도 많고 더 많은 이해를 할 수 있겠지만 더 즐거워 질수 있는 다독은 이 책이 아닌가 싶다.

앞에서 말한 비슷함 덕분에 헷갈려 버릴 수도 있겠으나 우선은 책을 통한 즐거움 만끽이 우선이니 그 점은 우려하지 않아도 될듯하다.

 

책을 읽는 내내 내가 저 식물을 본적이 있을까 저 향을 맡아본적이 있을까 끊임없이 생각하게 되고 음미하게 되니 책을 통한 재미와 저자의 상상력에 제대로 걸려든 셈이다.

꼭 밤하늘의 별자리를 볼때처럼 사색에 잠기기도 했었다.

어린시절 우연히 획득한 별자리 공을 보며 밤마다 마당을 서성이며 별자리를 찾으며 그 별자리에 얽힌 전설을 떠올렸던 기억이 스르르 떠올랐던건 왜였을까.

저자가 만들어 내는 각각 허브에 얽힌 사연은 별자리를 볼때마다 전설이 떠오르는 것처럼 허브에 대한 저자의 상상력은 이제 전설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였을 것이다.

소소하지만 허브처럼 그 향만은 오래도록 남아 각각의 식물들에 얽힌 이야기는 스르르 퍼져나갈 것이다.

그럴때에 하찮은 식물이 아닌 생활에 큰 도움을 줄 수도 있다는 인식으로 자리잡을 수 있을 것이고 유치하다 생각하더라도 동심으로 돌아가 잠시 즐거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젠 허브차를 마실때 괜히 이 책을 들춰보며 차 한모금 이야기 한모금을 마시겨 향긋하고 배부른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 같다.

즐겨갖는 티타임이 더욱 더 즐거워 질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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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송어낚시
리차드 브라우티건 지음, 김성곤 옮김 / 비채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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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후반부를 향해 갈수록 엉덩이는 들썩 거렸고 속은 부글 부글 끓어 올랐다. 끝까지 읽어 버리고 싶은 마음에 아무리 참으려고 해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책을 덮어 버렸다.

철저한 분리.

그렇게 책과 나는 하나가 될 수가 없었고 폭발의 위험성까지 안고 있었다. 도저히 다가갈 수 없는 사람과 마주 보고 앉았을때처럼 느껴지는 당황스러움, 불편함 그리고 결국에는 불쾌함이 되어 버리는 이유는 무엇이였을까.

꾸역 꾸역 화를 눌러가며 겨우 끝까지 읽고 도저히 저저와의 인터뷰 내용은 읽지 못하겠기에 덮어 뒀다가 내 할일을 한 후 그제서야 읽고 나니 조금은 위로가 된다. 아니 이런 내 심정을 저자가 구구절절 설명해 주어서 오히려 감사하고 싶을 정도다.

 

특히 자신의 문장을 읽은 다음 즉시 던져 버리고 잊어버릴 수 있는 문장, 즉 자체취소(self-cancelling)적으로 씌여진 책이라고 생각되어 진다는 부분에서는 후반부를 읽었을때의 답답함이 뻥 뚫린 기분이였다.

그의 말처럼 나는 그의 문장이 아닌 이 책을 던져 버리고 싶었다.

책을 읽으면서 망각은 시작되었으니 던지기만 하면 이 책을 통한 울화는 해결할 수 있을 터였다.

이런 과격한 표현을 일삼을 수 있는 원인의 주역은 여려가지 였다.

책을 끝까지 읽었음에도 송어낚시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고 분명 책은 소설이라고 하지만 소설이라고 느낄 수 있는 요소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또한 문체에 대한 찬사도 결코 납득할 수 없는 가운데 나는 철저히 이 책에서 외면 당하고 있었다.

그런데 저자는 이 모든 것을 의도했다고 하니 기가 막힐 노릇 아닌가. 시원함과 고마움 뒤에는 왠지 모를 배신감에 으스스해 지는 기분이 들었다.(저자와 나는 의를 맺은 적이 없으니 배신이라는 표현이 독단적이긴 해도 저자와 독자의 배신이라 생각하면 되겠다.)

 

송어낚시의 의미는 저자로써도 의문이라고 하니 그건 제쳐두더라도 소설이라는 요소를 찾을 수 없었다는 나의 발언은 조금씩 모순이 되어 간다는 걸 알수 있을 것이다. 역설적이긴 해도 송어낚시의 무의미는 저자의 상상력으로 보아도 될터이고 저자가 의도하고 있는 풍자,유머,죽음,폐허는 현실에서 뿐만이 아닌 허구 속에서도 충분히 누릴 수 있는 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그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했고 그 장단에 맞장구를 쳐줄수 없었기에 나의 힐난은 당연했을지도 모른다.

 

그 이유를 곰곰히 생각해 보면 이 책은 1960년대에 씌여진 책이다. 시대를 뛰어넘는 고전은 많지만 브라우티건의 글을 만끽하려면 그 시절의 배경을 어느 정도는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인 시절은 내 피부에 와닿기엔 무리였고 시대적 배경을 모르더라도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기엔 현 시대의 나의 괴뇌는 부족했다.

책을 통한 가장 큰 교류가 처음부터 어긋났으니 책을 읽는게 고역일 수 밖에 없었다.

 

저자와의 인터뷰를 보고서 어느 정도 나의 감정을 누그러트릴 수 있었고 시대적 혼란과 고뇌가 어느 정도 내게 차 있었다면 스펀지가 물을 빨아 당기듯 나도 흠뻑 빠져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의 발전에 까지 미쳤다. 내겐 해설과 설명이 필요한 책이였다.

어느 정도의 브리핑 후에 읽었어야 했고 준비해야 했는데 무작정 내게 흡수되길 바랬다.

저자가 그토록 비난하는 목가적인 꿈, 아메리카 드림을 이해하지 못했을 뿐더러 무엇이 비난이고 무엇이 허구인지 분간도 못했으니 나의 무모함은 미국의 송어 낚시로 인해 크게 당한 것이다.

그 비난의 대상이 나 같은 무지일 수도 있다는 것이 스르르 등골을 타고 오싹하게 전해진다.

 

현대에서 누려야 할 것을 누리지 못하고 요구해야 할 것을 요구하지 못하는 무던하고 오버하는 삶 속에서 살아가는 내게 뒷통수를 치는 것이였으리라.

절판되었다가 다시 재발행 되었다는 소리에 혹해 달려들었다 독을 마시고 스러지는 오염된 강의 송어처럼, 내 몸속의 독을 해독하지 못하고 이상을 잃어버리는 한심한 모습의 송어가 바로 나였다는 걸 이제야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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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이브 스토리 1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해용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6년 12월
평점 :
품절


판타지 소설의 매력은 현실을 잊게 해주는 모험과 정의가 아니겠냐며 얕은 지식을 드러내며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브레이브 스토리는 이러한 나의 예상을 깨며 평범한 초등학생 와타루를 등장시키면서 오히려 현실감을 부각시켜 새로운 세계로 이끌고 있었다.

그래서 와타루가 겪는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의 출연이 꿈인지 생신지 내가 분간을 못할 정도였다. 브레이브 스토리를 읽다가 잠들면 꿈 속에서 나는 와타루가 되었고 깨어 났을땐 책과 꿈속을 헤메는 나를 발견하고 있었다.

 

환상의 세계 비전의 등장은 말 그대로 환상임에도 이렇듯 초입부터 혼란을 겪고 있었다. 그러나 운명을 바꾸기 위해 들어가야만 하는 비전을 평범한 와타루가 왜 들어가야만 할까?

본격적인 비전의 모험기를 2권에서 시작됨을 알리며 끝나지만 와타루가 비전으로 가야하는 이유를 1권에서 처연할 정도로 세세히 보여준다.

그랬기에 현실감을 느끼면서도 환상적인 느낌을 지울 수 없었던 와타루의 현재는 '남쪽으로 튀어'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성장의 진통과 그로 인한 모험이 시작되었기에 양쪽의 세계를 허우적 거리면서도 와타루가 비전으로 가는 목적이 분명한 것처럼 나 또한 읽는 이유가 분명해져 가는 느낌이였다.

 

와타루 부모님의 이혼에 어떠한 결론을 부여할 수 있을 것이며 또한 와타루는 자신에게 닥친 운명을 어떻게 헤치며 뒤집을 수 있을 것인가. 과연 그것들을 바로잡는 다고 해서 와타루와 와타루의 부모님은 모두 행복할 수 있을 것인가.

단순한 운명의 바뀜이 아닌 목숨을 걸고 잃었던 것을 다시 되돌려 놓고 싶다라고 강하게 염원하는 사람이 없으면 열리지 않는 요어문. 그 문은 10년에 한번 열린다.

와타루가 부모님의 이혼으로 힘들어 하고 엄마 또한 서서히 망가져 가고 있으니 그 문이 나타났겠지만 어린 와타루에게 그것은 자기 인생을 송두리째 붓는 모험인 것이다.

자기보다 더한 상처를 안고 잃어버린 것을 찾기 위해 이미 비전을 여행하는 미쓰루를 통해 모험이 펼쳐질 테지만 분명 쉬운 길은 아닐 것이다.

 

우연히 들어간 비전의 세계는 만만치 않았고 희망의 근처에는 가보지도 못하고 쫓겨났기 때문이다.

운명의 탑에서 와타루는 운명을 바꿀 수 있을 것인가.

운명을 바꾼다고 한다면 그것은 와타루 혼자만 생각하는 잃어버린 무엇일 것인가 아님 와타루 가족 모두가 바라던 것일까.

그 점이 궁금하다.

와타루의 길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정도 나만의 판단이 생길 것이고 또한 와타루가 처한 상황에서 또 다른 이면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운명을 다 던졌다고 하지만 가족의 해체야말로 12살 와타루에게는 가장 큰 고난인 것이다.

부모님이 자신을 엄하게 다루는 것, 사고 싶은 게임 cd를 살수 없다는 것 보다 훨씬 심각한 문제다.

너무나 평범한 아이 와타루.

그러나 한순간에 운명의 고난에 허덕이며 환상같은 현실을 마주하고 있다.

 

공사가 중단된 학교 근처의 가건물에서 유령을 보았다는 수근거림은 와타루에게 닥쳐올 고난의 복선이였고 요어문을 볼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던 것이다.

자신에게 들려오는 알 수 없는 목소리, 정체불명의 노인, 그리고 비전을 여행한 미쓰루는 우연이 아니였다.

자신은 열심히 나름대로 삶을 꾸려가며 살아가고 있는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운명은 교묘한 준비를 하고 있었고 자신의 상상과 바램이 보태져 나타난 요어문이 있다면 얼마나 많은 생각과 망설임이 교차할까.

와타루도 그러한 운명을 탓하며 망설임을 느꼈지만 과감히 나아간다. 궁지에 몰렸다기 보다 자신에게 처해진 상황에 맞대응한다라고 말하고 싶다. 그랬기에 다음권에서 펼쳐질 와타루의 모험이 궁금하면서도 망설여지는건 이러한 이유일테다.

맞대응에서 오는 처연함, 나빠질 수 없는 상황속에서의 와타루의 용기가 나 또한 피할 수 없는 순리처럼 다가오는 가운데 와타루의 지지자를 자처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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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선인
이토야마 아키코 지음, 김경인 옮김 / 도서출판두드림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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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쩌면 나는 바다의 선인 카츠오를 선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름다운 바닷가에 아늑한 집에서 하루 하루 자기 나름대로의 삶을 꾸려가며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것.

그것보다 아름답고 평안한게 어디 있을까.

나는 하루 종일 집과 바닷가를 뒹구며 책을 보고 음악을 듣고 차를 마시며 수영을 하고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을 사랑해주는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것. 상상만해도 기분이 좋아지고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다. 그러나 그건 나와는 거리가 멀기에 상상만으로도 행복해지는 건지도 모르겠다.

 

세상을 피해 사는 사람 같다는 선인. 카츠오도 복권이 당첨되기 전에는 상상하기 힘든 상황이였을 것이다. 복권으로 인해 당분간 먹고 사는데는 문제가 없었기에 회사를 그만두고 조용한 바닷가에서 살아가고 있었지만 도시 사람들에겐 그가 무료해 보일지 몰라도 카츠오도 나도 만족할만한 상황이였다.

거기다가 사랑하는 사람까지 만났으니. 덤으로 별 도움 안되는 신神 판타지까지.

 

옮긴이는 판타지의 존재를 정확히 알 수 없다고 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 판타지의 등장은 생뚱맞고 어색했다. 신이라는 생각은 전혀들지 않고 카츠오의 집에서처럼 식객이 더 어울리는 역할이였다. 대부분 어디선가 본 것 같아서 알고 있기도 하지만 카타리기처럼 판타지를 모르는 사람도 있다.

그 부분에 큰 의미부여를 둔 것은 아니지만 판타지는 지나가는 바람 같았다. 무얼 해줄 수 없기에 신이 존재한다며 엉뚱한 말과 행동을 서슴치 않고 전혀 신 같아 보이지 않는 존재다.

그러한 판타지는 카츠오, 카타리기, 카렌에게 자연스레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지만 카츠오가 가지고 있는 의문처럼 모두는 판타지를 자연스레 잊기도 하고 자연스레 받아 들이기도 한다.

카츠오가 시력을 잃은 후 바닷가에서 첼로를 켜고 있을때도 말이다. 카츠오에겐 판타지의 출현이 카린처럼 자연스럽다.

그녀가 떠나고, 그녀와 오랜시간 같이 하지 못했지만 그녀가 다른 세상으로 가버린 후에도 늘 기억 저편에 살아 있어 자연스레 꺼낼 수 있는 것처럼 판타지는 더 쉽다.

대화하기도. 그리고 기억하기도.

 

카츠오는 카린의 죽음 앞에서도 슬픔의 티를 별로 내지 않았지만 그는 마음속에 그녀, 그리고 그녀와의 추억을 깊이 담은 것 같다.

그 추억이 그의 전부가 되어 버린 첼로 속에 봉인 되어 있듯이 말이다. 그러나 카타리기는 카츠오에게 다가오고 있다.

오래전부터 카츠오를 좋아하고 있지만 그 사실을 카츠오도 알기에 그녀에게 좋은 답을 말해줄 수 없지만 그녀는 오랜시간 마음의 방황뒤 카츠오를 보러 온다. 아마 그가 눈이 멀었다는 사실에도 개의치 않고 그를 여전히 사랑할 것이다. 그들의 이야기는 어떻게 될지 모르나 시간이 흐른 후 좋은 모습을 기대해도 좋을 듯 하다.

단지 시간이 흘렀다는게 변화했을 뿐 새로운 그들의 변화는 충동적이지 않을 것이다.

 

판타지의 등장, 카츠오의 삶이 독특하게 다가왔지만 카린의 죽음 카타리기의 마음에 있는 카츠오를 향한 변치 않는 모습 등은 충분히 식상한 내용이였다.

여기 저기에서 접붙인 듯한 느낌이 든 것도 사실이였다. 너무 뻔한 내용들에 익숙해져 있고 왠만한 자극에도 흔들리지 않는 약아버린 나일지 모르지만 식상함뒤에 오는 무의 감정은 뜨뜻미지근 했다.

그러나 카츠오의 생활은 부러웠다.

통장의 잔고가 아닌,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삶이 아닌 복잡한 세상을 벗어나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가고 사랑하고 자신을 새로 발견해가는 모습이 부러웠다.

나는 그럴만한 용기가 없다.

그렇기에 그의 용기를 부러워할뿐 '당신은 참 식상해'라고 말할 수 있는건 용기가 아닐 것이다.

나를 향한 자책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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