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벨의 개
캐롤린 파크허스트 지음, 공경희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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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그녀는 죽었다.

그녀의 죽음을 보았던 증인은 개 로렐라이 뿐이다.

말이 안된다는 건 알지만 로렐라이에게 말을 가르쳐 보기로 한다.

그녀의 죽음이 석연치 않다. 분명.

로렐라이는 그녀의 죽음에 대해서 말해줄 수 있을까?

지금은 로렐라이에게 말이라도 시키지 않으면 그녀를 잃어버린 슬픔을 가눌 수 없을 것 같다. 그녀와의 추억이 사라져 버릴 것 같다.

그렇게 그녀 렉시와의 시간 속으로, 로렐라이에게 말을 가르쳐 보려는 노력 속으로 들어 가려는 한 남자 폴이 있다.

 

그가 느끼는 렉시의 죽음에 관한 의문, 그리고 그를 견딜 수 없게 만드는 그녀의 빈자리를 이해한다 치더라도 개에게 말을 가르친다?

공상 소설이 아니고는 현실을 비추는 모습에서 그건 솔직히 허무맹랑했다. 그리움의 흔적을 잔뜩 머금고 있어 서정적인 소설이라 생각했는데 그녀와의 추억이 짙어 갈수록 로렐라이에게 말을 시키기 위한 과정이 현실화 되어 갈수록 '이건 아니다'라는 느낌이 들었다. 처음 갖었던 그 분위기는 서서히 변화하고 있었다.

폴의 이야기 같지만 결국은 우리 앞에 한번도 드러난 적이 없는 렉시, 그녀의 이야기였다. 로렐라이도 렉시가 먼저 키우고 있던 개였고 폴이 살고 있는 집은 렉시의 집이였다. 이야기는 흘러 갈수록 렉시와 폴이 함께가 아닌 렉시, 폴 각각의 형상으로 그리고 렉시가 더 짙게 그려지고 있었다.

 

그녀의 일, 우울증, 그리고 죽음의 의문까지 폴이 아는 한 전부를 털어 놓는다. 물론 그 안에는 폴과 렉시가 함께였던 그들의 소중한 추억이 포함되어 있다. 그 추억을 알아가면 갈수록 렉시를 느껴가고 렉시의 죽음에 관한 의문을 조금씩 풀어나간다.

그녀가 죽던 날 왜 서재 정리를 한 것인지, 스테이크는 구워졌지만 접시와 포크, 나이프는 왜 없는지, 그녀가 왜 사과나무에 올라갔는지 말이다.

다른 사람들은 폴이 찾아낸 것들을 가지고 자살로 단정 지을 수 없겠지만 렉시는 폴에게 메세지를 남겼다. 폴은 그것을 알아 차린 것이다.

 

폴의 이야기가 중점이 아니고 더군다나 로렐라이에게 말을 시킨다는 사실이 중점도 아닌, 폴은 렉시와의 짧지만 행복한 순간을 정리해 놓은 것이다.

그녀는 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일까.

처음부터 그녀의 죽음이 나왔지만 만약 폴이 '그녀는 자살했다'라고 말했다면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폴이 그런 결론에 다다르기까지 그녀의 자살가능성의 복선으로 두가지를 말하고 싶다.

우울증, 그리고 가면을 만드는 그녀의 일.

내 나름대로의 생각이지만 이것들을 뚫고 나오지 못한 렉시는 결국 자살을 택하지 않았을까 하는 결론에 이른다.

가면을 만드는 그녀의 일은 처음에는 단순히 독특해 보였다.

예술성을 지니고 있는 그녀는 충분히 고독할 수 있다고 외로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가면이라는 그 자체만으로 그녀는 자신으로부터 많은 것을 숨기고 있었다. 오히려 그 숨김을 가면 제작으로 표출하는게 아닌가 생각했지만 그녀는 갇혀 있었다.

자신 속에 그리고 그녀가 만드는 가면 속에 동봉한채 그렇게 자꾸 오그라 들어 갓다.

그런 슬픔,분노,우울은 가끔 표출하기도 했다. 폴은 그럭 저럭 받아줬다고 생각하는데 폴 자신이 더 잘 알고 있다. 그녀의 밑바닥의 고통까지 감싸주지 못했다는 것을.

그건 곁에서 위로는 해줄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이 뿌리 뽑아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걸 안다. 나도 그걸 겪어 봤기 때문에 온전히는 아니더라도 어느정도는 이해한다.

그러나 렉시의 선택은 폴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주었다. 더군다나 그 사실을 폴이 찾아 나서야 했을땐 어땠을까.

분명 고통스러운 시간이였지만 그 시간 속에서 폴이 꼭 잃는 것만 있는 건 아니였다. 그녀의 메세지를 찾아가는 과정 동안 폴은 그녀를 온전히 다시 볼 수 있었다. 기억속이 아닌 가슴 속에 있다는 것을.

그녀와 오랫동안 함께 할 순 없었지만 그녀와 함께한 시간은 정말 행복하고 소중했다는 것을.

그녀에게 향하던 분노가 서서히 용서와 사랑이 되어 간다는 것을 깨달아가고 있었다.

켤코 쉽지 않은 과정이였다.

 

그런 생각을 해본다.

사랑하는 사람을 남겨두는 것과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가는 것.

어떤게 과연 더 힘들까 하는 생각.

머리가 아파온다.

가능하면 함께 하는 것이 제일 좋은게 아닐까 생각된다.

그 사람에게 말을 걸 수 없을때 후회하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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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빈슨 크루소의 사치 - 소비사회를 사는 현대인의 정경
박정자 지음 / 기파랑(기파랑에크리)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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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무엇인가를 사가지고 올때 그 기쁨은 오래 가지 않는다.

용돈이 부족한 10대 때는 정말 갖고 싶은 것을 목표를 세운 다음 몇달이고 돈을 모은다. 그리고 그것을 손에 쥐었을때는 정말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였다. 그 기분이 평생갈 것 같아도 시간이 지나면 시들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렇게 힘들게 노력한 결과가 있었기에 뿌듯함은 지금보다 오래갔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만족감이 오래 가지 않는다.

오랜 계획을 세워 무언가를 사본게 언제적인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현재 나의 소비는 쉽게 끓어 올랐다가 쉽게 사그라드는 번복이 대부분이다.

'다른 걸 안사면 되지','이건 필요한 거니까' 라는 위로를 던져 보아도 기쁨 보다는 우울함이 금방 파고든다. 무리를 했다는 생각에 그리고 내게 꼭 필요한 것이였던가에 대한 질문에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작년부터 책에 빠져 들면서 모든걸 제쳐두고 읽고 싶은 책을 몽땅 샀다. 할인하면 사고 쿠폰이 있음 사고 적립금이 많으면 사고 '책은 많이 사도 괜찮아'란 위로를 던지며 산 책이 엄청 쌓여 버렸다. 언젠가는 읽겠지만 김영하님의 말대로 책을 읽을 시간까지 지불했다는 느낌이 지울 수 없어 나의 미래의 시간들을 너무 맣이 저당 잡힌 것 같아 조금은 불안해 지기도 한다.

'요즘은 시간을 산다'는 본문의 내용과 다르게 나는 반대로 가는 듯한 느낌이 드는건 왜일까?

 

로빈슨 크루소의 사치?'

로빈슨 크루소가 사치를 했던가?

자세히 일어본 기억은 없지만 홀로 섬에 갇혀 사치했다라기 보단 오히려 소비의 고립을 만났을 것 같은데.. 사치라... 제목부터 흥미로웠다.

소비의 사회, 현대 사회와 팝아트, 현대성의 풍경 총 세 단락으로 나뉘어진 소비의 행태 속에서 첫 단락 '소비의 사회'를 읽고 새로운 세계를 경험한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내가 쇼핑을 하면서도 우울한 느낌이 드는 것, 그리고 나의 소비 안에 감추어진 많은 비밀들, 소비에서 읽을 수 있는 현대상등등 내가 전혀 생각지 못했던 것들이 속속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내 나름대로 나의 수준에 맞추어서 소비를 한다는 어느 정도의 가치 척도를 알고 있다고 생각 했었다.

그러나 나는 정해진 상업적 틀 속에서 움직였던 것이였다.

그런 것들을 교묘히 움직이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우리 인간들이 만든 사회였고 그 안에 필요한 구조였던 것이다. 소비라는 단순한 행위가 이렇게 큰 세계를 구축하는지 그리고 각각의 효용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정말 알지 못했다.

문학을 가장 좋아한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나이니 이런류의 책과의 교류도 부족하고 읽어도 100% 이해는 못하지만 어느 정도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부분을 받아들이니 커다란 부담은 없었다.

 

'현대 사회와 팝아트' , '현대성의 풍경'을 통해 '소비의 사회'와 조금은 동떨어진 느낌을 받았지만 오히려 우리가 늘상 생각하는 범위를 벗어나 또다른 소비의 모습을 보여주어서 다양함과 광범위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단락이 구분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비의 사회'와 동떨어진 느낌에 이것이 소비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란 제목에만 매여있는 나를 보면서 아직 내가 만들어 놓은 생각의 틀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아 한편으로는 씁쓸함도 들었다.

좀 더 넓고 틔인 식견을 가지지 못한 내가 2.3단락의 글들을 쉬이 받아들이지 못함은 나의 내부의 문제라는 생각이 든 연유이기도 했다.

 

그러나 아쉬움이 남는 부분도 있었다. 언어의 다양함과 자극성이었다.

내가 문외한이라는 걸 감안하더라도 끝까지 편하게 읽히기에는 내가 모르는 언어의 유희는 넘쳤다.

단 한문장도 이해할 수 없는 책을 만나 보았지만 처음의 매끄러움과 편안함을 유지하지 못해 그 부분이 아쉬웠다.

이쪽 분야의 문외한인 내가 이 정도 읽은 것도 다행이지만 좀 더 욕심을 내고 싶어 드는 생각이였는지도 모르겠다.

또한 소비 속에는 즐거움이 깃들어 있기에 우리를 자극할 만한 예시들이 많았다. 최신의 정보와 통계가 읽는 즐거움을 한층 더해준 것은 사실이나 시시각각 변하는 유행을 좇는다는 느낌과 수시로 업데이트가 필요 하다는 걱정도 들었지만 소비라는 다양함의 세계를 맛본 것도 사실이였다.

 

내가 직접 경험한 것들도 많았지만 역시 책을 통한 간접경험과 지식의 전달이 시간을 저당잡혔다고 우울해 할 일은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나는 늘 즐거움을 갖고 책을 읽었는데 책의 양에 기가 눌려 있었던 것이다. 그 눌림을 줄이기 위해 쌓여 있는 책의 양을 줄여야 겠다라는 생각을 하면서 로빈슨 크루소가 누렸던 사치와 책에 대한 나의 사치가 실은 별반 다를게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 사치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 아닌, 나 혼자만의 독식이 아닌 즐거움과 나눔의 전환은 개개인의 숙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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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통의 원리를 상속하라
강준민 지음 / 두란노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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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언제인지 모르지만 내 책 꽃이에 꽂혀 1년이 넘도록 있었던 책일 것이다.

한달에 한권 정도 읽자고 다짐해도 쉽게 손이 가지 않는게 종교 서적인 것 같다.

그런 책을 보다 못해 꺼내들었지만 생각보다 쉽게 그리고 편하게 읽어서 어리둥절 할 정도다.

 

성경구절이 많아서인지 매주 목사님께서 설교하시는 말씀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형통이 무엇인가..

그 형통을 어떻게 보존하고 퍼트릴 것인가...

성경속의 인물들의 예시를 통해 현실에서 어떻게 쓰임 받을 것인가를 말해주고 있었다.

형통! 형통! 그들은 오로지 하나님만 믿고 따랐기에 그 믿음에 의심을 갖지 않고 기만하지 않았기에 하나님께서 주신 형통을 완성할 수 있었다.

그런 예시들만을 늘어 놓았다면 자칫 흘려들어 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였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했듯이 우리가 현실에서 어떻게 대입할 것인지를 예견해 주기에 한번쯤은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었다.

 

내가 원하던 형통은 과연 무엇이였을까.

세상적인 것과 종교적인 것을 따로 따로 나누어서 생각하지 않았는가 라는 생각을 해본다.

세상에서의 형통 교회 안에서의 형통을 나는 따로 따로 보고 있었다.

그래서 늘 일치되지 못한 나를 발견하고 변화하려 하지만 그게 쉽지가 않았다.

교회 밖과 안에서의 불일치를 어쩔 수 없다고 판단하며 내 스스로에게 너무나 관대했던게 사실이였다. 그런 불일치가 만들어 지기에 일관성 없는 믿음때문에 핍박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어느새 그런 일관성 없는 믿음의 주역에 내가 있음을 발견하고 말았다.

 

주님의 향기가 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그건 나와는 너무나 거리가 멀었다.

언제나 충만한 나의 모습 긍정적이고 환하고 밝은 모습을 갖고 싶었지만 언제부터인가 나는 그 일치를 분리해 가고 있었다.

형통을 이루었다고 할 수 없다.

아니 형통이 무엇인지 인식조차 못하고 있었다.

형통을 이루었던 성경속 인물들도 나와 같은 평범한 사람이지만 나와 가장 큰 차이를 가지고 있던 사람이였다.

오로지 주님을 믿고 따르는 것.

그것 밖에는 없었다.

과연 나는 그들의 믿음을 본받고 예수님을 닮아가고 있는가.

한없이 부끄러워 진다.

형통을 말하기 전에 나의 믿음부터 점검해 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신앙을 점검해 보고 어떤 믿음을 가지고 살 것인가를 실행하는 믿음...

그게 가장 이상적인 믿음일테다.

성경에 대한 지식을 잘 모르더라도 내가 알아가는 것들을 실천하는 믿음.

그럴때에 자연스레 성경에 대한 애정과 애착이 생길걸로 믿고 지금껏 방심해 왔지만 이젠 진정으로 내 마음을 다잡아야 할 때인 것 같다.

그런 방향으로 나아갈때 내가 형통을 만들어 가고 있을것이고 나에게도 내가 느낄 수 있는 형통이 내려올 거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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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제국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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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꽃' 을 읽고 단박에 김영하님의 팬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김영하님의 작품이 나올때마다 관심을 갖고 있었지만 '검은꽃' 이후로 장편이 나오지 않아 내심 기다리고 있던 차에 '빛의 제국'이 나와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그래서 바로 구입하고 읽었는데 나는 잠시 멈칫 해진다.

책을 읽은 느낌을 쓴다는게 애매해지고 난해해지는 느낌이다.

민감한 남북관계의 묵직함 때문일까?

아니면 '검은 꽃'의 여운을 떨쳐버리지 못함이였을까?

그 어떤것도 이 느낌의 잔상이 아니라는걸 인정하지 못한채 나는 그렇게 빛의 제국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한남자가 있다.

남파간첩으로 내려왔지만 활동이 없었던 10년만의 메세지가 귀환이라니...

이미 자신에게 연결된 선도 끊어졌고 자신이 간첩이라는 사실을 망각했다 해도 과언이 아닐 평범한 삶을 살고 있는 그였다.

그는 어떠한 결정을 해야 할지를 모른다.

북으로 돌아가야 하는지,이대로 남아야 하는지,아니면 제 3국으로 도망을 칠것인지, 혹시 숙청 되는 건 아닌지 수많은 고민과 걱정속에 아무런 결정을 못하는 가운데 그려진 하룻동안의 이야기다.

책이 두꺼운 반면 쉽게 읽혀질 것 같은 분위기였는데 책장을 넘기는 손길에 자꾸 미련이 남았다.

책장을 넘기면서도 생각하게 되고 서서히 다가가는 결론에 조바심이 날법도 한데 오히려 결론을 만나고 싶지 않은채 이대로 머무르고 싶은 느낌들이 밀려왔다.

기영이 선택한 결론의 너머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을지 난 두려웠다.

그래서 자꾸 기영의 주변을 멤돌았는지도 모르겠다.

 

한 아이의 아빠, 자기만의 일을 가지고 있고 애정이 깊진 않지만 아내도 있는 평범한 생활의 연속이였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이 간첩이고 이젠 북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가족에게 말했을땐 과연 어떤 반응이 나올까.

결국 딸에겐 말하지 못했지만 부득이 하게 말하지 않을 수 없었던 아내 마리는 냉담하다. 과연 15년동안 살을 섞고 살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현실을 직시하며 젊은 애인과의 정사를 드러내고 난 이런 여자라고 말하는 아내.

그는 배신감 보다 혼란스럽다.

그런 아내를 보아도 도무지 어떠한 결정을 해야할지 알 수가 없다.

하룻동안의 시간속에 오로지 자신의 결정만이 모든걸 뒤집을 수 있었을 상황임에도 기영은 결국 좁은 선택의 폭 속에서 갇히고 만다.

책의 끝을 맞이해야 하기에 어쩔 수 없이 만나고 마는 결론은 조금은 허무했다.

그가 하루종일 용을 쓰고,머리를 굴리고,정보를 모으고 고민하던 과정을 봐왔기에 기영이 당면하게 되는 위기와 결론은 팽팽한 풍선이 바람이 빠지는 듯한 허무였다.

기영은 또 다른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마리도 알아버렸고 이제 자신의 존재를 알아버린 정보기관이 있는한 그 전의 평범은(간첩이라는 사실을 덮어두더라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이젠 평범을 가장한 평범을 연출해야 할지도 모르겠기에 그는 제 3의 국면을 맞이한 것이다.

 

단 하룻동안의 이야기라고 하기에 속도감을 기대했던것도 사실이였다.

하루라는 시간속에 느낄 수 있는 많은 것들을 만나리라 기대하며 펼친 빛의 제국은 하루라는 시간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긴박함 속에 수많은 것을 펼쳐놓은 하루가 아닌, 하루이면서 10년 20년의 세월을 담고 있는 듯한 느낌이였다. 이런 느낌의 가운데에는 결코 쉽게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분단의 역사가 있었다.

서로 다른 길을 가고 있는 민족의 비애가 현실속에 때로는 무덤덤하게 때로는 실감나게 다가와서 넘어가면서도 찜찜한 느낌들이 담겨 있었다.

기영이 남파하던 80년대와 2000년대는 분명 차이가 나지만 분단의 사실은 변함이 없다.

그에 대응하는 방법이 달라졌을뿐 그 사실은 변함이 없기에 그런 무게감이 짓눌렀는지도 모르겠다.

 

저자 또한 긴박하게 흘러감이 아닌, 절제가 보였기에 충분히 감지할 수 있는 무게감이였다.

한층 더 묵직하고 신중하게 다가온 빛의 제국은 저자의 다음 작품에서의 노련함을 기대하고 기다리게 되는 아쉬움을 담고 있었지만 진보의 과정이라 생각한다.

한 작가의 그런 과정을 만끽하고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알기에 기꺼이 동참하려고 한다.

저자가 바라보고 향하는 방향으로의 동행이 그래서 즐거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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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깊은 나무 1
이정명 지음 / 밀리언하우스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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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면서 '단테의 모자이크 살인'이 생각났다.

비슷한 양상이면서도 다른 느낌을 자아냈기에 떠올랐는지도 모르겠으나 그 책을 읽을때는 내가 모르는 것 투성이라 무척 지루한 기억이 난다.

뿌리 깊은 나무에서도 방대한 분야의 함축된 지식들이 넘쳐나 시원스레 이해하지 못해 답답하고 어려운 부분도 있었지만 낯선 국외의 역사가 아닌 우리의 역사라서 그런지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팩션이라는 장르는 국내 작품보다 국외 작품을 더 많이 접했고 흐름이 무척 빨라 이 책도 쉽게 읽힐거라 생각하고 조금은 가볍게 봤던게 사실이였다.

그러나 쉽게 쉽게 읽을 수가 없었다. 저자의 노력과 노고가 구석 구석 배어 있어 자연스레 책을 자세히 읽으려고 했고 내게 어려운 내용이더라도 저자가 이걸 쓰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는지 말하지 않아도 느껴졌었다.

저자는 오랜시간 준비하고 많은 수정을 걸쳤다고 했다.

글이란게 참 신기해서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느낌으로도 스르르 묻어 나고 있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결과가 아닌 과정의 책이라고.

그리고 국외 작품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작품이라고.

사건을 해결해 가고 비밀을 풀어가는 가운데 거대한 결과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이미 모든것은 드러났고 모든것은 예견되어 있어 결과는 차분했다.

집현전 학자의 계획적이고 비밀이 담겨있는 살인에서 발견되는 지식은 거대했다.

단순히 속국으로서의 자체적인 글자, 훈민정음을 만드는 과정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 안에 내포되어 있는 숨은 뜻은 무궁 무진했다.

비밀을 풀어가는 겸사복 강채윤이 지식을 흡수하는 능력, 비상함, 끈질기면서도 탐구적인 그의 태도를 따라가지 못해 어질할 정도였지만 독자에 가까운 강채윤이란 인물은 사건을 해결하기에는전형적인 인물이였다.

강채윤을 따라가지 못하면서 최고의 지식의 샘터 집현전 학자들의 학문을 어찌 따라갈 것인가.

따라오라는 이끔이 아닌 설명하고 전파하는 지식이였지만 어려웠다.

그런 지식을 사대부들만 습득하고 있으니 그 고립은 어떠할 것인가.

세종은 그런 편견과 권위주의를 타파해서 다양한 인재등용을 하고 백성들의 설움과 비애를 없애고자 한글을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그러한 과정은 비밀스러워야 했고 수없는 시간을 투자하고 인내를 겪어야 했고 엄청난 인재손실까지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그 일을 추진해 간다.

진정 백성을 생각하고 미래를 꾸릴 줄 아는 인에서 나온 처사이리라.

그래서 그렇게 힘겹게 한글을 만든 것이다.

그 비밀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받친 사람들은 얼마나 많으며 그러한 프로젝트를 막으려 명나라까지 끌어들이며 막으려는 이들 또한 얼마나 많았던가.

부와 명성, 권력을 쥐고 안주하기 위해 왕의 목숨까지 노리는 이들은 어떠한 이들이였을까? 어느 세대나 그런 인물들이 있기 마련이지만 그들 또한 훈민정음을 만드려는 세종대왕과 학자들 만큼이나 끈질기고 집요했다.

훈민정음이 반포되면 그 파장이 엄청날 것을 알기에 그들의 음모 또한 처절하다.

속국으로써의 자체적인 글자 반포만큼 위험한 일이 또 있을까마는 가장 강력한 적은 늘 가까이 있는 법이다. 그 모든 것을 감수하면서 우리의 글자, 그리고 모두가 읽고 쓸 수 있는 글자를 만들었기에 그 과정과 마음은 감동을 자아내지 않을 수 없다.

많은 부분에 소설적인 요소를 가미했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글자를 만드려는 의의와 노력은 인공적으로 만들 수 없었을 것이다.

완성도 높은 이 작품에서 그것 하나만 깊이 느끼더라도 내가 느끼었던 난해함은 큰 문제가 되지 않을것이라 사려된다.

 

누구나 글을 읽고 지식을 습득할 수 있도록 세종대왕과 수 많은 학자들은 노력하고 이루고자 했다. 그러했기에 수 많은 역경을 거치며 지금까지 한글은 우뚝 솟았다.

그러나 한글을 쓰고 있음에도 여전히 한자,영어,식민지시절의 일본어까지 수많은 언어가 통용되고 있는게 사실이다. 그 언어들이 사라질 순 없을 것이다.

우리의 언어속에 너무 뿌리 깊이 박혀 있는 한자나 당연시 되는 영어나 세계화 시대를 맞이 한 우리들은 그 언어의 습득이 지식의 한 단계 상승한듯한 이미지 속에, 또한 사회에서 그렇게 요구하기에 익히지 않을 수가 없다.

한글날과 그러한 역사는 형식적으로 기억할 뿐 아끼고 사랑하며 소중히 하지 못한게 현 실정이다.

새로운 구성과 시대적 배경이 짙게 우러나오는 탁월한 언어로 씌어지고 수많은 지식속을 헤엄치게 만드는 치밀함까지 두루 갖추고 있는 이 책은 단순한 우리의 글자 훈민정음 창제가 아닌 깊은 뜻을 담고 있는 것이다.

천천히 음미하면 할수록 짙게 배어나는 여운과 의의는 현재의 나를 잊을 정도였다.

또한 짧은 어휘력과 감성이나마 이렇게 느낌을 남길 수 있게, 글로 남길 수 있게 우리만의 글자를 남겨주신 선조들의 노고와 뜻이 이렇듯 뿌듯할 수가 없다.

이러한 한글을 지켜가고 가꾸어 가고 아름답게 쓰며 다음 세대에 남겨주는 일은 지금껏 해왔듯 이젠 우리의 몫이다.

이러한 글자와 언어를 흐리게 해서는 안될 것이다.

좋은 말, 예쁜 말, 깨끗한 글자를 쓰는 것이 어찌 그 지킴의 일부가 아니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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