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국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1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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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펑펑 쏟아지는 겨울. 고느적한 분위기에서 현장독서를 하며 설국을 읽고 싶다는 생각을 하였다. 제목만 보고 생각해낸 무턱댄 바람이였는데 막상 책을 읽어 보니 첫 장면의 모습 이후 설국에 맞는 이미지는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단순하게 온통 눈으로 뒤덮인 배경이 펼쳐질거라 생각했는데 쌓인 눈을 보면 떠오르는 추억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그렇기에 눈을 떠올리면 꼬리에 꼬리를 물듯 자연스레 기차를 타고 가던 것, 온청장의 게이샤 고마코, 또 다른 매력을 뿜어내는 요코가 차례대로 그려지며 주인공 시마무라에게 생생하게 떠오르는 것이다. 그래서 눈은 설국 속의 매개체가 되어 자연스레 자연과 인간, 그리고 추억을 연결시켜 주고 있었다.
 
그러나 무척 서정적으로 보이는 분위기임에도 그들의 내면 가운대로 빠져드는 건 쉽지 않다.
<한 나라의 고유한 문화와 정서가 짙게 배어 있는 훌륭한 작품일수록 번역도 힘들다.> 라며 번역자도 말했듯이 읽어 내는 독자도 그 공백을 메우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특히 고마코의 변덕과 행동들이 그랬다.
시마무라를 좋아하면서도 행동과 말에서는 그녀의 진심을 찾기가 힘들었다.
고마코의 마음을 아는 시마무라의 행동도 어정쩡하고 요코에게 더 매력을 느끼며 자신이 머무르고 있는 마을에서 고마코와 요코의 관계를 알고 나서는 더 우유부단해 진다.
고마코의 한결 같을 수 없음이 자신을 향한 애정에서 비롯된 것이고 그런 고마코에게 어떠한 입장도 취할 순 없다. 그는 그냥 지켜보며 관찰 할 뿐이다. 고마코도 요코도 그들의 관계도.
 
그랬기에 그가 떠나는 날 마을에서 난 불로 인해 고마코와 요코의 또 다른 모습을 보며 끝나버리는 결말 앞에서 나는 멍할 수 밖에 없었다. 책 속으로 완전한 흡수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들의 마음을 이해해보려 해도 '우리와 많은 것이 다르니까'로 밖에 결론이 안나는 모습이 아쉬웠다.
한때 들리는 소문에 조정래님의 작품들이 노벨상을 받지 못하는 것은 번역의 문제이고 도저히 그 공감대를 형성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말이 들렸다.
내가 읽어 보아도 토속적인 우리의 문화와 진한 역사가 배어 있어서 수긍이 가면서도 어쩜 이 작품도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그런 의식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은 마음이 편했지만 한 나라의 고유성을 하나하나 느끼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책을 덮어야 했다.
현재의 일본의 정서를 잘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더 거슬러 올라가는 과거의 일본인들의 모습은 100% 공감하기 힘든 것이다. 한정된 공간 속에서 그다지 특별하다고 볼 수 없는 스토리를 보며 이런 거창함을 운운하는 것은 우리와 너무나 다른 고유의 문화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였다.
그러면서도 수박 겉핥기 밖에 할 수 없는 주석들을 보며 우리와 너무 다르다고 답답해 하거나 짜증을 낼 수 없었던 것은 그 모든 것을 문학으로 이끌어 내는 저자의 역략에 순종할 수 밖에 없어서리라. 쉽게 무시할 수도 지나칠 수도 없는 멈춤이 다행으로 여겨지는 것은 문학이라는 연결 고리의 이어짐이 계속 되었기 때문이리라.
 
시마무라의 시각이 때로는 지나치게 냉담하고 이기적이다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지만 지켜본다는 것이 더 힘들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아 간다. 그래서 단순한 에피소드로 보기 보다는 처음에 밝혔듯이 기억의 회귀라는 말이 더 맞는지도 모르겠다. 어떠한 메세지를 담고 있어 그것을 떠올리는 순간 퍼뜩 생각이 나는 필연적인 연상이 아닌 자연스레 몸과 마음이 따라가는 기억의 흡수라고 말하고 싶다.
시마무라가 다시 자기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라든가 고마코의 앞으로의 행보, 요코의 내면을 속속들이 알 수는 없지만 자연스레 그들의 흐름을 보아 주는 것도 어쩜 순리가 아닐까.
나의 틀에 모든 것을 맞추기 보다는 때로는 흘러가는 대로 나를 맡겨 보는 것도 좋을 듯 하다.
모든 것이 낯설다 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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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예감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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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에 씌여진 소설을 손질해서 다시 내 놓았다는 후기를 보니 내가 읽었던 책 속의 주인공들이 과거의 인물처럼 느껴진다.
그러면서 나의 상상의 나래는 펼쳐진다. 야요이와 데츠오는 지금쯤 어떤 모습을 하며 살아가고 있을까. 야오이와 유키노는 어떠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고 있을까란 생각을 해보지만 금방까지 내 곁에 머물렀던 그들의 미래를 꺼내보려니(그들에겐 현재가 되겠지만)조금은 낯설다.
그래도 뿌듯함이 남도록 그들을 기억하고 싶다. 결국 자신들에게 솔직해 졌으니 하나하나 헤치고 나와 당당하게 맞서서 추구하고자 했던 것들을 누렸을 거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가족의 관계, 사랑에 추구라는 용어를 써서 딱딱해 보이긴 하지만 야요이와 유키노, 데츠오에겐 헤쳐나가야 할 난관이다. 그래서 절망을 싣기 보다는 추구를 통해 희망을 안겨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지끔껏 잊어 버리고 억눌렸던 것들이 많았기에, 그런 세월의 흐름 앞에 그들은 방황하고 안절부절 못했기에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싶다. 그들은 분명 힘들어 하고 있었지만 격하거나 극단적일지라도 차분함 속에서 생생히 살아 숨쉬며 온전이 그 모든 것들을 전해 주었다고.
 
깊은 밤 그들의 이야기를 읽고 있어서인지 그들의 감성과 언어는 느끼는 그대로 나의 몸과 뇌리에 박히고 있었다. 유난히 묘사가 많은 밤 하늘과 자연은 답답할 수도 있는 상황임에도 숨통을 틔워주고 있었고 그들이 찾아야 할 것들은 도심의 복잡함 같을 지라도 여유로움과 단아함으로 묘사되며 다가왔다.
양녀라는 사실보다 이모로 알고 있었던 유키노가 언니라는 것, 남동생 데츠오가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변하는 것. 무언의 감정 속에서도 그들은 그 모든 것을 담담하게 받아들였거나 받아들인 채 현실에 충실하고 있기에 내가 느낄 우울함도 없었다.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어 버린 유키노와 야요이의 방황은 내면을 조금씩 갉아먹어 주체할 수 없을 때 집을 나가는 행동을 보이며 안정감을 찾으려 하지만 소원해져 버린 그녀들의 관계가 결국은 돌아가야 할 종점이며 그 사실을 인정해 갈때 조금씩 제자리를 찾는다는 것을 깨닫는다.야요이에게 데츠오가 그러하듯 이모와 동생을 잃은 것이 아닌 언니와 애인을 스스로 발굴했다고 결론짓 듯 복잡미묘한 상황을 서정적으로 이끌어 간다.
 
그들 앞의 현실은 수 많은 난관부터 떠오르지만 야요이의 결정에서 나는 긍정적인 희망을 보았다.
더이상 집을 나서서 이모집으로(이제는 언니지만) 도피하거나 이모를 찾아 과거의 행적을 뒤질 필요도 없을 것이고 집을 나올지언정 지금 속해 있는 집에서 정체성 혼란도 자주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을 어렴풋이 상상하며 책을 덮으려는 찰나 이미 나온 작품을 수정했다는 후기를 보았으니 어느새 그들은 과거의 인물이 되어 있었고 그들의 현실을 추측할 수 밖에 없는 내가 되어 버렸지만 저자도 수정과 책을 다시 내는 과정에서 그들의 미래와 과거를 그려봤을 것이다.
그러한 변화의 시도를 독자들에게 미안해 하고 있었지만 수정 이전의 이야기를 알 수 없기에 그들의 이야기를 현재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래서 그들의 현재가 내게는 미래일 뿐이라며 긍정적인 추측만 어렴풋이 할 뿐, 그들에게 무엇을 바라거나 이러이러 했으면 좋겠다라는 소망은 드러내지 않는다.
결말은 오픈되어 있지만 충분히 희망적이기 때문이다.
 
야요이가 천천히 더듬어 가던 자신의 기억과 자아처럼 새롭게 펼쳐질 진정한 야요이의 미래에 긍정적인 삶을 살 의지를 보이고 있고 그것 하나만으로도 그들의 현재건 미래건 내게 중요하지 않다. 싱그러운 자연 속에서 서서히 내 딛는 야요이의 발걸음처럼 조금함도 답답함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치하지만 슬픈 예감이 지금껏 야요이를 지배했다면 이제는 기쁜 예감만이 존재해 햇살 가득한 베란다의 따뜻함처럼 혹은 밤의 맑은 공기처럼 상쾌하기를 바랄 뿐이다.
달이 차오르듯 바람이 흘러가듯 야요이가 느꼈던 공허를 안정됨으로 채우고 더이상 잃어 버리지 않기를....... 그 곁에는 데츠오와 유키오가 늘 힘이 되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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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 세미콜론 그래픽노블
프랭크 밀러 글.그림, 린 발리 채색, 김지선 옮김 / 세미콜론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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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300이라는 숫자와 전쟁을 인식하는 순간 성경에 나오는 기드온의 300 용사가 생각났다.

하나님의 이끔에 따라 300이라는 숫자로 엄청난 수의 적을 물리치고 승리를 거둔 사건.

300을 보는 순간 그 사건이 생각나 호기심을 가지고 읽었지만 기드온의 300용사와는 성격이 다르다는 것을 알았고 그것 보다는 책을 읽고 그림을 보고 있음에도 도통 흐름을 잡을 수가 없었다.

늘 글씨만 빽빽히 들어찬 책들을 읽고 상세한 설명과 묘사를 접하다 보니 배경 그림 가운데 띄엄 띄엄 들어찬 말풍선의 대화와 설명을 이해하기엔 역부족이였다.

 

책을 덮고도 멍했고 무언가 휩쓸고 지나 갔는데 도통 그 느낌을 적을 수가 없었다. 거대한 바다에 빙하가 둥둥 떠다니는 느낌,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래서 다시 읽기 시작했다.

날림으로 읽었던 첫 번째 읽기와는 다르게 공백의 비워짐속에 상상력을 집어 넣고 천천히 보았다.

마치 말풍선들 사이에 다른 이야기가 존재 하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어떻게 보면 글씨로 채워진 책들 속에서의 상상력 부족이라고 할 수도 있으나 첫 번째 읽기의 헛점을 인식하고 읽었더니 조금씩 책 속으로 빠질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애니메이션으로 채워졌지만 보통 그림책보다 길고 빽빽한 배경속의 여백이 처음엔 낭비라고 생각되던 것이 두 번째 읽을 때는 무한한 상상속의 실제 공간이 되어 주고 있었다.

그리고 레오니다스 왕과 그들의 군대는 전설이 되었다.

 

불가능한 상황과 맞닥뜨렸을 때 우리는 포기하고 싶어진다.

그게 더 쉽고 불가능을 뛰어 넘기엔 몇 안되는 가능성을 끌어 모아야 하고 그건 피로한 일이다.

그러나 불가능을 뛰어 넘을 때의 그 만족감 또한 쉽게 지나칠 수가 없다. 그 불가능을 뛰어 넘고자 할 때 정의감이 살아 있다면 이들처럼 죽음이 두렵지 않을 것이다.

죽음을 알면서도 맞서는 이들, 맞수가 안되는 상황에서도 불복하지 않고 당당한 그들 그들을 그렇게 불타게 만들었던 건 무엇이였을까.

옳지 않는 것에 복종할 수 없는 스파르타인의 기질이였을까?

무엇이라 뚜렷이 말할 순 없지만 가족을 버리고 지위도 버리고 명예도 버리고 전쟁을 강행했던 그들이 어리석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평생 굴욕적인 삶을 선택 하느니 정의로운 죽음을 선택한 그들의 되려 경이로울 뿐이다.

 

도망치지 않는 왕, 그런 왕을 따라 끝까지 싸우는 군사들을 보고 있노라면 내가 살고 있는 세계가 지저분하게 느껴진다. 멀리 내가 사는 세계까지 올 필요도 없이 레오니다스에게 복종을 권유했던 오만한 크세르크세스와 탐욕만 일삼는 사제들만 보더라도 절대 그들 앞에 무릎 꿇으며 모욕을 받기는 싫을 것 같다.

다른 방법이 있었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들이 전면전을 선택한 것은 어리석다고 얕보고 깔보는 그들에게 우리의 신념은 불타고 있으며 의지는 하늘을 향하고 손에 쥐어진 창은 너희들 가슴을 찌를 것이라는 걸 보여주려 함이 아니였을까.

 

레오니다스가 출전하기 전 딜리오스에게 마지막 명령을 내린다.

승리의 소식을 전하라고. 우리는 스파르타 법에 따라 싸우다 죽을터이나 새로운 시대가 열릴 거라고. 그것은 위대한 행동의 시대, 이성의 시대, 정의의 시대, 법의 시대이고 그것을 지키고자 삼백 명의 스파르타인이 마지막 숨결을 바치게 될 것을 누구나 알 것이라고 레오니다스는 말한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싸우며 의로운 죽음을 향해 갈 뿐이였다.

레오니다스의 말대로 그들의 싸움은 전설이 되고 역사가 되어 그리스인들 사이에 퍼졌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딜리오스는 전쟁을 준비한다. 수수께끼 같던 왕의 승리를 그제서야 인정한 채 레오니다스의 뒤를 이어 정의로운 죽음, 승리의 전쟁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그렇게 그들은 모두 죽었지만 많은 이들의 마음 속에서는 늘 살아 있는 것 같다.

이름 모를 용사들이라 할지라도 300이라는 숫자에 감추어진 개인들일지라도 그들에겐 의로움이 남았다. 진정 죽음을 선택하고 상상할 때 이러한 죽음을 떠올려 본 적이 있는가.

정의의 총대를 메고 전진하는 사람의 뒤를 따른 적이라도 있는가.

그들 앞에 나의 생명은 한 없이 차갑게 느껴진다. 그러나 뜨거웠던 그들의 열기는 나의 생명을 비웃지 않는다. 단지 우리는 싸웠을 뿐이라고 말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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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속의 서울 - 한국문학이 스케치한 서울로의 산책 서울문화예술총서 2
김재관.장두식 지음 / 생각의나무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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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이 조금 다르긴 하지만 열린책들에서 잠깐 나왔던 도시가 만든 작가 시리즈가 생각이 났다.

프란츠 카프카와 카사노바에 대한 책이였는데 도시 속에서 문학을 만들어 가는 그들이 인상 깊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살았던 도시는 아름다웠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문학은 아름답고 살기 좋은 곳에서만 나온다는 어처구니 없는 생각은 깨지고 있었다.

카프카의 문학이 그러하듯이 문학 속의 서울을 보며 문학은 다양함을 지니고 있지만 그 시대를 반영하고 있다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내가 알아가고자 했던 문학은 국내 문학이 아니였다.

국내 문학의 분위기를 어느 정도 알기에 시선을 돌려야 한다는 오산으로 인해 세계문학을 접하다보니 국내문학이 되려 찬밥이 되고 말았다. 국내 문학으로 시선을 돌려야 한다는 사실은 알면서도 현대 문학의 우울함 때문에 고전만 탐하고 있던 내게 문학 속의 서울은 내가 느끼고자 했던 다양성을 국내로 돌리게 되는 계기를 마련해 주고 있었다.

196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의 문학 속에서 우리나라의 수도 서울을 만난다는 것이 책을 읽기 전까지 같이 잡히지 않았다. 유명한 소설들을 추렴해 그 안에서 서울의 모습을 짜맞출 거라는 상상을 하고 있었던 것인데 우선 우리 문학의 방대함과 꾸준함, 시대의 모습을 잘 반영하고 있는 작품을 만날 때 마다 나의 허성이 드러나는 것 같아 부끄러웠다.

 

국내의 것은 열등하다는 생각이 문학속에도 내재되어 있어 그 동안 등한시 해왔던 것이다.

고전에 관심이 가면서 우리의 고전의 위대함을 느끼면서도 내가 살아가는 시대의 자화상을 그린 현대소설들은 식상하기만 했다. 이 시대를 즐기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는 아둔함일 수도 있으나 문학 속의 서울에서 정리해 본 현대 문학은 나의 아둔함을 질책하고 있어다.

단지 내가 우울하다는 이유 만으로 현대 문학을 피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었다.

 

서울이 우리나라의 수도이긴 하지만 문학 속에서 서울의 모습이 이렇게 많이 드러나 있는 줄 또한 서울을 중심으로 그려진 다양함이 수 많은 문학적 텍스트가 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문학을 통해 간접경험과 그 시대에 내가 들어가 있다라는 착각이 드는 사례도 많았지만 약 40여년의 서울의 모습을 훑어볼 수 있다는 것은 많은 감흥을 주었다.

서울의 변화된 모습은 기본이고 역사, 시민의식, 경제 등 수 많은 인간군상을 통해 서울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었다. 워낙 문학의 홍수 속에 살고 있어 읽었다 할지라도 그냥 지나쳐을 것들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다른 시각으로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에 서울을 통한 혹은 문학을 통한 그 시절의 모습은 내 가까이에 와 있는 듯 했다.

빈빈촌에도 들어 갔다가 거품 경제 속도 맛보았고 인권의 몰락과 지배 속에서는 울분을 토하기도 했다. 그 모든 것들을 문학을 빌어 말하고 있었다.

그 드러남으로 위험해 지더라도 나의 생각을 말하는 것은 그 시대를 살아보지 못한 나에게 진실을 알려주고 있기도 했다. 허구가 뒤섞인 소설이라 할지라도 어느 정도의 현실은 존재하기에 씁쓸함이 묻어나기도 했지만 책을 읽으면서 삶의 현장을, 우리네 모습을 피하지 말아야 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학에서 보는 것은 단순한 겉모습의 서울이 아닌 서울의 뒷골목, 서울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적나라함은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아닌 문학의 힘을 빌었기에 조금은 은유적인 느낌도 있었지만 그 여운은 오래 남았다.

 

2000년대의 문학이 별로 실려 있지 않아 그나마 내가 공감할 수 있는 시간이 부족해 아쉬웠지만 문학을 통한 도시의 내부는 실로 방대했다. 나 또한 그 방대한 도시에 잠깐 머물면서 도시의 유인원이 아닌 곁도는 존재의 경험을 해봤지만 그 안으로의 흡수를 바라지는 않았다.

모두들 흡수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공간을 이용하는 허상이 존재하더라도 그들의 존재만으로 도시는 형성이 되는 것이다.

그 인간군상 속에서 비단 문학만이 서울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리라.

개인 하나하나가 도시의 필요한 요인이 되는 것은 인간미가 떨어지는 바램일까.

그들에게 부속품도 되지 못하는 상실감이 존재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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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 문라이트
이재익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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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잘 알고 있다. 연애 소설을 대하는 당신의 냉소적인 태도를.>

프롤로그에서 이 소설에 대한 독자의 반응을 기다렸다는 듯이 과감히 드러내는 문장을 보며 나 또한 그러한 태도를 보일 것이라는 것을 예감하면서도 앞으로 펼쳐질 사랑이 궁금한 것도 사실이였다.

그런 나의 마음을 간파하기라도 한 듯 책장은 질주하듯 넘어갔고 그 자리에서 책을 다 읽어 버린 후 나는 멍하게 앉아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사랑이란 도대체 무엇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읽어내려간 이들의 사랑은 내 마음의 무미건조함을 나타내는 것 밖에 더 이상의 감정이입은 없었다.

사랑에 내 모든 것을 던져본 적이 있느냐는 질문은 제쳐두고라도 왜 이 사랑은 내게 낯설게 다가왔을까.

 

루너틱하게 변해버린 준혁 때문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 분명 강한 자극에도 끄떡도 하지 않는 나의 감정때문이리라.

내가 겪어 보지 않았다는 사실에 핑계를 대는 것보다 이젠 그러한 감정을 잊어 버렸는지도 모를 내가 두려웠다. 결국, 내가 하는 사랑은 쉽게 질려 버릴 꺼라고 포기가 빠르지 않겠냐고 인정하는 꼴이 되어 버렸지만 준혁,진영,소원,관의 사랑 앞에 내 자신이 작아지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다. 그들이 사랑을 위해 처음부터 존재하려 한 건 아니지만 관의 말처럼 바라보는 방향이 다르더라도 사랑에는 이유가 없다. 그랬기에 아프다고 포기해 버리는 절망의 드러남이 적었다.

분명 오랜 세월동안 고통의 시간을 지내왔을 터이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는 듯이 그들은 사랑만을 갈망한다.

 

엇갈려 버리고 방향이 다른 사랑 때문에 운명의 장난처럼 마음은 분산되어 가지만 그들이 사랑을 하는 이유는 찾을 수 없었다. 우리가 자주 언급하는 그냥 너이기에 좋다는 말을 넘어 '너 아니면 안되겠어'가 되어 버려 오랜 세월 고통 받지만 준혁에겐 그 고통의 시간보다 진영이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이 더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진영이 그토록 좋아하던 달을 보며 매일 밤 기도한다.

자신을 진영이 곁으로 데려가 달라고. 그리고 달이 진영이인냥 바라보며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다.  오랜 시간 소원이 자신을 그런 식으로 좋아했다는 것을 모른채. 그러한 준혁의 마음을 알아 준 것일까. 진영을 처음 본 자신의 옥탑방 옆집 옥상에서 진영과 분위기가 비슷한 민희를 만난다.

그리곤 준혁의 눈이 아닌 다른 이의 눈으로 바라 본 민희의 존재여부는 밝히지 못하고 준혁은 사라져 버리고 만다. 자신은 진영이를 보았다고 생각하지만 그녀의 흔적이 없다. 달에게 매일 밤 빌었던 소원이 이루어졌다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듯이. 그 뒤에 남겨진 소원은 준혁의 흔적을 찾지만 아무 것도 좇을 수 없었다. 달이 준혁을 데려 간 것일까. 아니면 정말 진영이 다시 나타난 것일까.

 

그들의 사랑을 순식간에 읽어 버렸지만 책을 읽으면서 그들과 동화될 수 없음에 몸둘 바를 몰랐다. '어디서 많이 들은 것 같아, 익숙한 복선이야' 를 되뇌이며 간접경험을 뽐내고 있었지만 전혀 자랑스럽지 않았다. 더 강렬한 비극을 원한 것인지 행복한 결말을 원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고 엇갈리는 사랑,죽음,변하지 않는 마음등을 지켜 보며 익숙한 스토리라는 이유만으로 관심을 두고 있지 않은 것이었다. 책을 읽고 난 후 멍하니 그들의 사랑을 생각해 봤지만 더 이상의 진척은 없었다. 그들의 사랑을 이해하기엔 내가 가진 세상에 대한 열정이 떨어졌고 그들의 사랑을 느끼기엔 나는 현재 사랑을 하지 않는다는 바보 같은 변명을 늘어뜨릴 수 밖에 없다. 이젠 사랑의 감정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까.

기억의 순환이 아닌 잊혀짐만이 늘 일상화가 되어버린 것일까.

그들의 사랑을 두고 누구는 불행하고 누구는 행복하다 논할 수 없는 것이 그들의 마음 속에는 한 사람이 잠재해 있지만 그 한사람과 오래 오래 마주보며 살아갈 수 없으니 그게 안타까울 뿐이였다. 내 곁에 둘 수 없는 사람, 그 사람 때문에 준혁은 매일 밤 달을 보았으리라.

그리고 그 환영을 좇아 자신의 사랑을 찾아갔으리라. 자신의 모든 걸 던진 준혁의 뒷모습이 더 이상 쓸쓸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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