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읽고 있는 <아버지의 편지>에서 재미난 구절이 있기에
옮겨 본다. 이 책은 유성룡, 박세당, 강세황, 박지원, 박제가, 김정희 등 조선의 학자이자 문인들이 자신의 아들들에게 쓴 편지를
우리말로 옮겨놓았다. 거의 모든 아버지들이 책 읽어라, 학문을 게을리하지 말라 품행을 어찌어찌하라 등 ‘선비’에 걸맞은 그야말로
‘유교 양반’스러운 편지를 아들들에게 보내고 있는데 그중 단연코 돋보이는 한 사람이 있으니, 바로 박지원. 박지원의 편지를
읽다가 여기저기서 빵빵 터졌다. 박지원의 편지만큼은 정말 ‘유교를 받드는 아버지’스럽지 않았다. 인간적 냄새가 물씬 나는,
그야말로 편지다운 편지였다. 그의 편지들을 보니 연암 박지원에게 호감이 매우 증폭.
재선(在先) 박제가의 집에 있는, 우리나라로 건너온
중국 사람의 시필(試筆) 몇 첩을 빌려 볼 수만 있다면 마땅히 요 며칠 사이의 답답증을 누그러뜨릴 수 있을 것 같구나. 하지만 그
인간이 꼴 같지 않고 무도하니, 어찌 지극한 보물을 잠시인들 손에서 내놓겠느냐? (197쪽)
ㅋㅋㅋ 박제가 디스 ㅋㅋㅋㅋ '꼴 같지 않고 무도하다' ㅋㅋㅋㅋ 심지어 안 빌려 줄 거라고 단정 ㅋㅋㅋ
《박씨가훈(朴氏家訓)》1권은 올라갔더냐? 선조의
휘자(諱字)는 푸른 종이로 가리면 어떻겠느냐? 이 책은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어서는 안 된다. 잃어버리기 쉽기 때문이다.
(중략) 고추장을 작은 단지로 하나 보낸다. 사랑에 놓아두고 밥 먹을 때마다 먹으면 좋겠다. 이것은 내가 손수 담근 것인데, 아직
잘 익지는 않았다.
말린 고기 세 접
곶감 두 접
볶은 고기 한 상자
고추장 한 단지. (200~201쪽)
아놔- 아끼는 책은 절대 다른 사람 빌려주지 말라는 소리에 완전 공감. 박제가가 시필 몇 첩 안 빌려 줄거라고 하더니
자기도 아끼는 책은 안 빌려 줌(하지만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 심정을 알리라). 더욱 놀라운 점은 고추장을 직접 담그는
박지원이라니. 상상이 가는가? 역시 실학자야! (응? ㅋㅋㅋㅋ) 요즘 며느리도 못 담근다는 고추장을 박지원은 담갔다! 게다가 그걸 또 시로 지었어요. ㅋㅋㅋ
초사흘에 관가의 하인이 돌아오면서 기쁜 소식을
가져왔더구나. 응애응애 하는 소리가 종이 위에 가득하다. 인간의 즐거운 일이 이것보다 더한 것은 없을 게다. 육순의 늙은이가
이제부터 엿을 물고 구슬을 희롱할 뿐 달리 무엇을 구하겠느냐? (중략) 오늘이 바로 내 손자의 삼칠일이로구나. 2백여 명의
관속들에게 아침에 국과 밥을 먹였더니 좋아하며 떠들썩하게 축하해주더구나. (203~204쪽)
이런 틈에도 돋보이는 박지원의 문장력과 표현력.
'응애응애 하는 소리가 종이 위에 가득하다' 캬! 손자 사랑 넘치는 다정다감한 할아버지 박지원.
네 첫 번째 편지에는 아이가 태어났는데 미목이 밝고
수려하다 하고, 두 번째 편지에서는 점점 충실해져서 사람 꼴을 제법 갖추었다고 했더구나. 종간(차남 종채)의 편지에서도 골상이
비범하다고 했다. 대저 이마는 넓고 솟았으며 정수리는 평평하고 둥근지. 어째서 하나하나 적어 보이지 않는 게냐? 답답하구나.
(중략) 전후해서 보낸 소고기볶음은 잘 받아서 아침저녁 찬거리로 했느냐? 어째서 한 번도 좋다는 뜻을 보여주지 않느냐? 답답하고
답답하구나. 나는 육포나 장조림 등의 반찬보다 나을 거라고 생각한다. 고추장도 내가 손수 만든 것이니, 맛이 어떤지 자세히
알려다오. (206~207쪽)
여기서도 엿보이는 손자 사랑. 대체 어떻게 생겼는지 왜 자세히 말 하지 않느냐고 투덜투덜 ㅋㅋㅋㅋ 거기다가 다시 또
고추장 맛이 어땠는지 궁금하다고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고 투덜투덜 ㅋㅋㅋ 고추장만 담그는 게 아니라, 소고기볶음도 손수 만드는
아버지 박지원, 연암 박셰프. ㅋㅋㅋㅋ
네 이름이 말 위에서 갑자기 생각났는데 궁상맞기 그지없더구나. 이는
박유선(朴諭善) 아들의 이름인데, 나와는 서로 잘 알고 지내는 사람이다. 다만 그 몰골이 아주 꾀죄죄하여 내가 그를 몹시
싫어하는데, 네가 어찌 이 이름을 같이 쓴단 말이냐? 이제부터는 종하(宗何)로 행세하는 것이 좋겠다. 그리고 자를 가인(可人)으로
하여라. (215쪽)
푸하하, 말 타고 가다가 아들 이름을 문득 생각해보니,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 이름과 똑같다고 기분 나쁘니까 언능 이름 바꾸라고 종용하는 아버지 박지원 ㅋㅋㅋㅋㅋ
귀봉이의 술주정은 요즘은 심하지 않느냐? 그 사람은 술만 취하면 망령된 사람이다. 절대로 아이를 안게 해서는 안 된다. 껄껄. (222쪽)
귀봉이는 하인 이름이다. 그런데 술만 취하면 망령된 사람이니 절대로 손주(효수)를 안게 하지 말라면서 껄껄 웃는 할아버지
박지원. 박지원은 손주 '효수'를 무척 사랑한 것 같은데 안타깝게도 어린 나이에 손주는 죽고 말았다고. 얼마나 슬펐을지...
하지만 이 책에 실린 연암의 편지 가운데 손주의 죽음을 언급한 편지는 없다.
암튼 <아버지의 편지>에서 연암 박지원의 소소한, 인간적인 편지는 단연 돋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