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통당한 몸들을 껴안는 피의 글쓰기
- 이브 엔슬러, <그들의 슬픔을 껴안을 수밖에>
저기 몸들이 있다
여기 몸이 있고 그 몸 위에는 붉은 점들이 점점이 찍혀있다. 이 몸은 어떤 몸인가, 이 붉은 반점들은 또 무엇인가. <그들의 슬픔을 껴안을 수밖에> 책 표지를 보는 순간 이런 질문이 떠오른다. 이윽고 책장을 넘길수록 그 몸은 나의 몸이자 당신의 몸이기도 하고, 이 책에 실린 글들을 쓴 이브 엔슬러 그녀 자신의 몸이기도 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저 붉은 점들은 피, 그러니까 그 몸들이 흘린 핏방울이다. 저 몸은 어쩌면 지도일지도 모른다. 이 지구 곳곳에 흩어진 여성들의 몸의 지도, 그리고 붉은 점들은 그들이, 그녀들이 지금 어디선가 흘리고 있는 슬픔의 눈물이거나 고통의 핏방울이거나 침묵하는 외침일지도 모른다.
볕 좋은 가을, <그들의 슬픔을 껴안을 수밖에>를 읽다 형언할 수 없는 아픔과 고통에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린다. 그러나 이 눈물은 내가 저 세계에 속하지 않았다는, 안도의 눈물일지도 모른다. 만일 내가 이브가 찾아 나선 세계 곳곳의 유린당한 여자들의 몸들이 존재하는 그 도시, 그 나라에서 살아가는 여자였다면 이렇게 한가롭게 그들의 슬픔을 책장 너머로 응시하면서 눈물 몇 방울을 흘리는 데에서 나도 공감과 연민을 지닌 존재라고 안도하며 책장을 덮을 수 있을까. 그럴 수는 없으리라. 그러나 이브는 그들의 슬픔을 가서 껴안는다. 방글라데시, 스리랑카, 아이티, 과테말라, 필리핀, 수단, 체첸공화국, 나이지리아, 콜롬비아, 네팔, 끝도 없이 이어지는 목록의 장소들을 찾아가 심신이 찢겨나가고 죽어서도 영원히 평안을 구하지 못하는 여성과 소녀들의 흐느낌을, 그 유령들이 흐느끼는 소리를 듣고 기록한다. 그 참혹한 기록을 마주하노라니 종이 위로도 피가 스며 나오는 듯하다.
한편으로는 이브 엔슬러는 어떤 힘을 지닌 여성이기에 이런 글을 멀찍이 떨어져 쓰는 것으로도 모자라 직접 그 현장에서 듣고 기록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을까? 그이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다가 나는 또 한 번의 충격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이브 그녀 자신이, 그녀의 몸이 일찍이 폐허처럼 산산이 조각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만난 세계 곳곳의 성폭력 피해자들이 그러했듯이 이브 엔슬러 또한 어린 시절부터 성폭력으로 인해 심신이 찢겨나가고 영혼이 망가진 경험이 있는 피해자이자 생존자였기 때문이다. 그것도 가장 안전해야 할 장소-집이라는, 가정이라는 공간에서 누구보다도 그녀를 보호해줘야 할 임무를 지난 사람들-아버지로부터는 강간을, 어머니로부터는 방임과 구타를 지속적으로 당한 성폭력 피해자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런 자신을 이렇게 말한다. “출생과 동시에 실종”되었노라고, “무수히 많은 사라진 자들 중 하나”였노라고, 그런 그녀가 어떻게 이런 힘을 낼 수 있었을까, 이런 어마어마한 용기를 낼 수 있었을까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아니 감탄이라는 말은 적절하지 못하다.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이 먼 나라에서, 이토록 안전한 장소에서 잘 벼려진 책장을 통해 그들을 슬픔을 그저 느끼기만 할 뿐인데, 그녀는 어떻게 그토록 참혹한 환경에서 살아남아, 그녀와 닮은꼴이거나 또는 더 참혹한 총이 아닌 총보다 더한 또 다른 타인의 몸으로, 성기로 관통당한 여성들의 삶을 껴안고 슬픔을 함께 나누고 그것을 글로 알리는 일에 수십 년 가까이 지기의 한 몸을 던질 수 있는가, <그들의 슬픔을 껴안을 수밖에>를 읽는 일은 인간의 잔인함을 목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또 다른 인간의 위대함을 경험하는 이중의 시간이자 모순의 시간이기도 하다.
글쓰기가 그들을 구원하노니
이브 엔슬러- 이브라는 이름의, 태어날 때부터 인간의 원죄를, 타락을, 추락을 떠올리게 하는 이름을 지녔던 그녀. 다섯 살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지속적인 성폭력과 구타를 당하고 죽지도 못해 자라나야만 했던 그녀. 그녀는 자신이 추락하지 않고 있던 때가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브는 서는 법을 배우기도 전에 추락했으며, 아버지의 애정을 한 몸에 받았으므로 가정이라는 울타리에서 기댈 수 있는 평화와 안정을 구하기는커녕 폭력의 세계로 추락한다. 그런 그녀가 나락으로 떨어지면서도 산산이 부서지지 않는 연습을 하려면, 무언가 꼭 그녀 자신을 붙잡아줄 그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것이 바로 글쓰기였다.
태초부터 추락하는 여자 이브에게 글쓰기는 구원이었다. 그녀는 글 쓰는 행위에서 자신을 발견한다. 그토록 위압적이고 폭력적인 장소와 사람들 속에서 글을 쓰는 행위를 통해 그것들 밖에서 존재할 수 있음을, 벗어날 수 있음을 깨닫는다. 또 여러 다른 얼굴들- 또 다른 페르소나를 통해 글을 쓰고 그러면서 자기 자신의 내면의 자아와 마주하면서 대화를 나눈다. 글쓰기는 이브 그녀를 자살과 광기로부터 구원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 광기로 무언가를 빚어낼 수 있게 해준다. 글쓰기는 그녀에게 고백이자 발굴이며 구원이었고, 고발이기도 하다. 여기 생존자가 다른 생존자들을 글을 통하여 지켜내고 있다는 발굴이자 고발이다. 그녀가 말하듯이 글쓰기는 “혼돈과 폭력 속에서 의미”를 건져내는 행위이며 “글 속에서 아름다움을 만들어 낼 수”(p.22)도 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고닉이 말한 “단지 고백하는 목소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말하는 페르소나”(비비언 고닉, <상황과 이야기>, p.31)에 가까우리라.
이처럼 진실을 말하는 이브의 페르소나는 그녀 인생 대부분의, 그러니까 45년에 이르는 긴 시간 동안 수많은 글과 일기, 모놀로그, 연극, 기사, 에세이, 우화, 연설문, 시, 때로는 불평들처럼 일생의 천착과 호기심들이 결정을 이루어 이 책, 그러니까 그녀의 생애를 회고한 기록인 <그들의 슬픔을 껴안을 수밖에> 한 권을 낳았다. 이브는 자신의 추락을 추락할 자유라 명명한다. 거기서 미친 생동감과 찬란한 위험을 감지하기도 하지만 자신의 이 기록들이 그저 추락에 대한 기록일지도 모른다고 자조하기도 한다. 그렇다. 어쩌면 이 글들은 그녀가 말하듯이 “추락하는 장소들과 사람과 벽들, 전쟁과 펜데믹의 낙진, 사랑에 빠지고 또 헤어 나오던 일, 추락하는 제국, 갈라진 틈 사이로 추락하는 노숙자와 수감자와 성범죄피해자, 추방자들, 산산이 부서졌던 일, 누구 하나 내 말을 들어주지 않을 것 같은 막연한 두려움”에 관한 기록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추락에 관한 글들은 나를 기어이 울린다. 단지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 머나먼 땅에 있는 나 같은 사람조차도 마음 저 깊숙한 곳에서 무언가를 끓어오르게 하여 이렇게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다는, 그들을 위해서 무언가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게 한다. 이렇게 볕 좋은 날 슬픔의 눈물을 흘리면서 그녀들을 잊지 않겠노라 다짐하는 아주 미미한 움직임조차 빚어 낼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이브의 이 파편 같은 글들은 단지 그녀의 인생을, 이야기를 기록한 일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문학적으로 아름다운 회고록으로서의 가치도 보여준다. “회고록은 증언도 우화도 분석적 기록도 아니다. 회고록이란 삶이라는 원료로부터 이야기를 끌어내 경험을 구체화하고 사건을 변형하고 지혜를 전달하는 자아라는 개념에 의해 통제되는 일관된 서사적 산문이다. 회고록 속의 진실은 실제 사건의 나열로 얻어지지 않는다. 작가가 당면한 경험을 열심히 노력하고 있음을 독자가 믿게 될 때 진실이 얻어진다. 작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는 중요치 않다. 중요한 것은 작가가 그 일을 큰 틀에서 이해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비비언 고닉, <상황과 이야기>, p.107)에 가장 가까운, 나의 이야기만이 아닌, 그녀의 이야기를 통해 이 세계의 진실에 가닿을 수 있는 가치를 지닌 책이 바로 이브 엔슬러의 <그들의 슬픔을 껴안을 수밖에>가 아닐까. 그리하여 이 책은 글을 쓰며 살고자 하는 나에게 글 쓰는 자의 자아와 태도, 관점까지 생각해 보는 계기를 마련해 주기도 한다. 누군가에게 글쓰기는 하나의 생존방식으로 혼란을 염려하고, 타인의 횡포에 휩쓸리기를 거부하고, 어둠 속에서 조용히 눈물 흘리는 방식일 수도 있음을 일깨워준다.
인식하고 기억하라, 거기서 사유가 시작되니
이브는 이 같은 글을 20년째 쓰고 있다. 자료를 통하거나 거리두기, 열정, 호소, 절망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해 이 같은 절절한 글을 쓴다. 그럼에도 고통에 찬 이들의 울부짖음은 셰계 안에 파묻히고 만다. 그녀는 콩고로 떠나기 전 10년 동안은 브이데이v-day라는 여성(시스젠더, 트랜스젠더, 젠더에서 기인한 폭력에 취약한 유동정 정체성을 지닌 모든 이들) 폭력 근절을 위한 글로벌 운동에 투신해왔다. 그런 그녀의 발걸음이 보스니아, 아프가니스탄, 아이티 등 세계의 강간 광산, 즉 강간이 전쟁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는 곳들을 향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으리라. 그러나 성고문과 여성을 파괴하려는 시도가 콩고만큼 끔찍하고 체계적으로 일어나는 곳을 본 적이 없노라고 그녀는 증언한다. 나 또한 콩고 내전 중 벌어지는 여성을 향한 잔혹한 페미사이드를 보며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브는 또 말한다. 이런 상황을 그저 페미사이드로만 칭하고 그들, 콩고 여성들의 미래가 심각한 위험에 처했다고 그저 말하는 것으로는 무언가 턱없이 부족하다고.
이럴 때 세계의 대다수는 고개를 돌린다. 아니 그들을 돕는 척 흉내만 낸다. 세계 온갖 단체들이 콩고를 찾아가 성폭력 피해 여성들이 사는 곳을 방문한다.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눈물을 흘리지만 도와주겠다고 다시 찾아오는 사람은 없다. 콩고의 대통령도, 영부인도 그곳을 찾아 눈물은 흘리지만 딱히 무엇을 하지는 않는다. 상황이 이럴진대 콩고에서 멀리 떨어져, 자신이 사는 곳에서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으리라 순진하게 믿고 살아가는 대다수 사람들에게 이 성폭럭 피해자들의 현실은 단지 먼 나라의 이야기일 뿐일 것이다. 같은 여성이더라도 그들의 슬픔에 공감하기란, 그 슬픔을 마치 내 것처럼 껴안기란 그리 쉽지 않다. “다른 여자를 믿는 일은 당신이 겪었던 고통과 두려움과 슬픔과 분노에도 손을 내미는 것”(p.122)을 뜻하므로 그렇게 하기란 견딜 수 없을 만큼 괴로운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브가 말하듯이 “거짓 속에 사는 것은 삶을 반만 사는 것과 같”(p.122)지 않을까. 진짜 이야기를 시작하고 그 진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행동부터가 어쩌면 고통스럽더라도 참 행복에 가까워지는 일이며 자유가 무엇인지 진실로 알게 되는 길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이브 엔슬러의 글들은 생각지도 못했던 이들의 슬픔과 고통을 내 앞으로 끌어와 그들의 삶을 통해 나의 삶을 반추하고 세계의 슬픔과 고통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작동하는지 돌아보게 한다. 이브가 말하는 사유의 과정은 기억하기, 인식하기, 책임지기 행위를 수반한다. 사유는 “눈앞에 있으나 우리가 바라보기를 거부하는 바로 그것에서 눈을 돌리지 않고 들여다보고 살펴보고 수치심을 기꺼이 끌어안으라고 요구한다. 사유는 개인과 집단의 책임과 그 둘이 언제, 어떻게 교차하는지를 결정한다. 진정한 사유에는 실수와 잘못, 악행을 인정하고 사과하며 필요하다면 생각이나 행동을 바꾸는 일까지도 뒤따른다.”(p,20) 인식하고, 기억하고, 책임지기-
나는 이 안온한 장소에서, 콩고에서 벌어지고 있는 경제 전쟁, 그리고 그로 말미암은 페미사이드에 나조차도 공범이라는 생각을 인식하게 된다. 구리, 주석, 금, 아이폰과 컴퓨터에 들어가는 콜탄 같은 광물과 자원을 약탈하기 위해 벌어지는 그 경제 전쟁이 콩고 여성들의 몸을 유린하는 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내가 아이폰과 컴퓨터를 자주 교체할수록 콩고의 광물 수탈은 더욱 가속화된다. 여자들은 유린당하고 그곳의 가족과 공동체는 무너진다. 그곳 사람들은 다국적 기업의 대리인이자 광산 관리자인 민병대를 피해 달아난다. 민병대만이 두려운 존재인가? 여자의 몸을 관통하는 그들의 총은 아군과 적군이 따로 없다. 그들 모두가 여자들을 강간한다. 그곳에서 여자들에게는 제복을 입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적이다. 지도를 펼쳐놓고 보면 대량 강간이 일어나는 모든 곳에는 콜탄이 묻혀 있다. 콜탄은 컴퓨터와 플레이스테이션, 휴대전화에 들어가는 광물이다. 세계 곳곳의 사람들이 단지 휴대폰을 편하게 쓸 수 있게 하려고 여자들의 몸이 유린당하는 것이다. “식민주의와 자본주의, 인종차별주의가 얽혀 만든 죽음의 교차로가 여성의 몸을 관통”(p.141)하는 것이며, 이 자본주의의 최첨단을 걷는 나라에서 최신 IT 장비를 갖추고 있는 사람들 누구 하나 그 굴레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렇게 인식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앎에서 그치고 마는 것이 진정한 사유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이제 기억과 책임이 따라야 한다.
참혹한 상황에서 살아남은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 그것을 기록하는 것만으로, 고발하는 것만으로 그들 생존자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일까 회의가 들기도 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렇다.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만으로도 이 지구를 같이 살아가는 존재로서 하나의 책임을 지는 행위가 될 수도 있다. 이브는 이런 여성들을 만나면서 그들의 가장 깊은 상처를 알아본다. 그들은 잊히는 것이 가장 두렵다.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 존재, 그저 한때 살았던 생명이었으나 아무렇지 않게 강간당하고 살해당해도 누구 하나 기억하지 않는, 기억할 필요도 없는 존재로 잊히는 것이 두렵다. 그들이 겪은 그 고통이 아무런 의미 없이 잊히고 마는 것이 무엇보다 두렵다. 그것이 가장 큰 상처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렇게 이브가 했듯이 누군가가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만으로도 커다란 위로를, 구원을 받는다. 인식하고, 기억하기- 그리고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작은 책임 이것만으로도 사유의 길이 조금은 열릴 수 있다.
그럼에도 사랑이 있으니
세계는 극단적으로 나 아닌 다른 존재에 대한 무관심으로 이어지고 있다. 끝없이 잔인하고 고통스러운 일들이 이어지고 있으면서도 나 아닌 존재에 대해서는 병적일 정도로 몰인정하다. 그리고 서로를 돌보기보다는 법으로 차별하고 금지하는 쪽으로 흐르면서 담장을 쌓아 내 울타리만 지키기 바쁘다. 이 울타리 너머 일어나는 일에는 무관심하기 짝이 없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이브 엔슬러의 기록을 읽노라면 인류는 실패한 것이 아닐까 절망에 빠지게 된다. 특히 이브 그녀가 그랬듯이 ISIS 성노예 시장에서 유출된, 소와 함께 이름이 오른 성인 여성과 여자아이의 가격 리스트를 보고 난 뒤에는 그 생각을 더욱 떨칠 수가 없다. 그 목록에 따르면 마흔 살에서 쉰 살 사이 여성들은 40달러, 서른 살에서 마흔 살 사이는 69달러, 스무 살에서 서른 살 사이는 86달러다.
여기까지는 인간이 인간에게 이렇게 가격을 매길 수 있을까 절망스럽고 비참하면서도 세계 곳곳에서 여성들이 어떻게 소비되는지 익히 알고 있는 부분이라 씁쓸하면서도 그다지 충격적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이후에 이어지는 가격 리스트를 보고는 인간이란 대체 어떤 존재인가 싶어져서 충격과 절망에 빠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 살에서 아홉 살까지는 172달러”(p.167)라는 문장을 눈으로 읽을 때였다. 한 살에서 아홉 살까지! 이 어린아이들을 아니, 갓 태어난 생명을 성노예 목적으로 172달러라는 리스트에서는 가장 값비싼 가격을 치르고 사 가는 남자들이 이 지구에 존재하는 것이다. 인간은 과연 어떤 존재인가. 이토록 괴물 같은 존재이구나 한탄하게 된다.
그러나 그렇게 인간은 괴물 같은 존재라고, 그런 인간들이 대다수인 이 인류는 실패했다고, 그러므로 이 지구는 멸망해 마땅하다고, 어차피 멸망으로 가는 길에 들어섰다고 절망과 한숨에 싸여 방관만 하기에는 또 다른 종류의 인간들도 엄연히 존재한다. 성학대로 목숨을 잃을 위기에 놓였던 여성들을 치료하는 콩고의 판지 병원에는 매일 같이 살해 위협에 시달리면서도 하루 14시간 이상의 중노동을 하고 있는 무퀘게 같은 의사도 있다. 그리고 그런 현장을 찾아가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이렇게 글로 온 세상에 알리고 있는 이브 엔슬러 같은 작가도 있다. 무엇이 그들을 이렇게 나와 멀리 떨어진 존재들을 위해 한없이 희생하게 만드는 것일까? 아마도 결국 인간에 대한 사랑일 것이다. 사랑이라고 말하니 순진하다고 코웃음 치는 이들도 있으리라. 일반적인 사랑은 이브가 말했듯이 “불가능할 만큼 더 많은 구멍만을 만들 뿐인 너무 커다란 구멍들”(p.203)만을 잉태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사랑만으로 이루어진 세계라면 분명 금세기의 실패는 사랑의 실패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그러나 인간은 왜 이 땅에 태어났을까. 고통뿐이고 절망뿐이라면 인간은 대체 왜 이 땅에 태어나, 태어난 순간부터 썩어가기 시작하는 것일까? 그 존재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이처럼 허무하고 고통스러운 세계에서 어떤 사랑이, 얼마나 깊은 사랑이, 얼마나 사납고, 맹렬한 사랑이 과연 우리에게 필요할까?
“순진하고 감상적이고 신자유주의적인 사랑은 아닐 것이다. 지칠 줄 모르는 이타적인 사랑, 바로 그런 사랑”이 필요할 것이다. ‘소수의 배를 불리기 위해 다수를 착취하는 시스템을 무너뜨리는 사랑, 여성과 인류를 향한 온갖 혐오스러운 범죄에 무감각해진 우리를 일깨워 결코 멈추지 않는 공동의 저항으로 나아가게 하는 사랑, 신비를 추앙하고 위계질서를 해체하는 사랑, 경쟁보다 연대를 더 소중히 여기는 사랑, 난민들을 향해 벽을 쌓고 최루 가스를 던지고 우리 해변에 떠다니는 그들의 시체를 치우는 대신 그들에게 두 팔을 활짝 벌리는 사랑, 너무도 강렬히 타올라 우리의 죽은 내면에까지 스미는, 우리의 담을 허물고, 우리 상상력에 불을 지피고, 그리하여 마침내 이 죽음의 이야기에서 우리를 구해내는 사랑”(pp.174~175)이 필요할 것이다. 이 사랑의 마음을 열지 않는다면, 끝내 열지 못한다면, 그리하여 지금처럼 고통에 찬 이들의 울부짖음을 가볍게 무시해 버린다면 이 인류에게 영원히 구원을 없을지도 모른다. 내가 아닌 타자의 슬픔마저 껴안을 수 있는 사랑, 이 사랑이 어쩌면 이 시대에 바로 필요한 언어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