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기의 말들 - 안 쓰는 사람이 쓰는 사람이 되는 기적을 위하여 문장 시리즈
은유 지음 / 유유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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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고 4개월 만에 글(창작)을 썼다. 비록 더 오랜 퇴고의 과정이 기다리고 있지만 그래도 행복하다. 한동안 멈췄던 글쓰기에 다시 불을 지펴준 고마운 책. “쓰는 고통이 크면 안 쓴다. 안 쓰는 고통이 더 큰 사람은 쓴다.”(75쪽). 글을 썼으므로 행복한 나를 깨닫게 해준 고마운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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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 : 피아노 협주곡 23번 & 라흐마니노프 : 피아노 협주곡 3번 (+한글자막 DVD)
모차르트 (Wolfgang Amadeus Mozart) 외 작곡, 피녹 (Trevor Pi / 유니버설(Universal)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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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는 여러 모습이 있다. 온유하고 따스한, 천천히 스미는 사랑이 있다면 한편으로는 격정적으로 휘몰아치는 뜨거운 사랑도 있다. 이제까지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 3번이 주로 전자의 사랑을 떠올리게 했다면, 소콜로프의 연주는 후자의 사랑을 떠올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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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병 환자 창비세계문학 59
몰리에르 지음, 정연복 옮김 / 창비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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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리에르의 희곡을 읽다 보면, 한바탕 마당놀이를 감상한 기분이 든다. 웃음 속에 풍자와 조롱 해학이 넘친다. 몰리에르가 창조한 인물들은 우리나라 전통 마당놀이의 인물들을 꽤 닮았다. 신분이나 지위는 높지만 어떤 한 가지를 욕망하느라 주변은 돌볼 틈도 없이, 그 하나에만 몰두해서 어리석음의 늪에 빠지고 마는 인물들(부르주아 귀족의 ‘주르댕’, 상상병 환자」의 ‘아르강’ 등)과 그런 인물을 통해 자기 잇속을 차리는 또 다른 인물들, 그리고 그 와중에도 그 어리석은 인물을 교화하고자 애쓰는 인물들이 나와 한바탕 난장을 이룬다. 그런데 조금만 더 읽다 보면, 그 어리석은 인물이 주된 풍자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인물을 이용해서 더 큰 이득을 챙기는 당대의 높으신 분들을 풍자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상상병 환자』에는부르주아 귀족」, 스까뺑의 간계」, 상상병 환자」 세 작품이 실려 있다. 부르주아 귀족」의 ‘주르댕’은 돈만 많은 부르주아로 진짜 귀족이 되기를 열망하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인물이다. 그는 넘치는 돈으로 ‘귀족’ 신분에 다가가고자 애쓴다. 귀족 같은 옷차림은 물론, 온갖 예술과 문화 수업을 받는다. 음악은 물론, 검술, 무용에 철학까지. 그의 하루는 귀족 따라잡기에 정신없이 바쁘다. 하다못해 하나뿐인 딸을 귀족과 결혼시키고자 안간힘을 쓴다. 일차적으로 이 작품은 뱁새가 황새를 따라가려다 가랑이가 찢어지는 형국인 ‘주르댕’이라는 인물을 풍자한다.



음악 선생: 주르댕 씨는 예술에 문외한이고 매사에 생각 없이 함부로 말하는데다가 아무 때나 박수 치지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지갑은 잘 열어요. 그분은 돈으로 칭찬합니다. 아시겠지만 우리를 소개한 그 알량한 귀족보다 무식한 부르주아가 우리에게는 백배 낫지요. (부르주아 귀족」, 11쪽)


그런데 조금 더 들여다보면 어리석지만 결코 해롭지는 않은(주르댕은 그의 욕망에 충실할 뿐 주변에 해악을 끼치지는 않는다), 주인공에 비해 그 곁을 맴도는, 선함을 가장한 인물들은 오히려 해롭기 짝이 없다. 주르댕 곁에서 잇속을 챙기기 바쁜 철학 선생 및 음악, 무용, 검술 선생들을 보라. 그들은 겉으로는 예술과 철학에 밝은, 지식인과 교양을 갖춘 척하는 인물들이지만 사실 주르댕의 주머니만을 노릴 뿐이며, 그들끼리 있을 때는 서로의 직업이 우수하다고 언쟁을 벌이는 촌극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부르주아 귀족」에서 가장 사악한, 그리하여 가장 강도 높게 비판과 풍자의 대상이 되는 인물은 백작 ‘도랑뜨’이다. 그는 주르댕의 하나뿐인 귀족 친구라는 지위를 십분 활용하여, 주르댕으로부터 계속 돈을 빌려간다. 물론 그 돈을 갚을 리는 전무하다. 주르댕 부인의 말처럼 ‘친절을 베풀고 다정하게 대하고는 돈을 빌리’는 것이다. 이렇듯부르주아 귀족」은 주르댕이라는 한 어리석은 인물을 풍자하는 듯 보이지만 그 속내에는 그를 이용해 자신의 이익을 꾀하는 비열한 귀족을 강도 높게 비판한다.

이 책에 실린 세 작품의 공통점은 등장하는 모든 아버지들이 신분이나, 돈, 종교, 의학에 사로잡혀 가족(특히 자식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전혀 개의치 않고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하고자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것은 보통 자식의 강제적인 결혼을 통해 이루고자 한다. 억압적인 가부장이 항상 등장하는 것이다. 그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난 작품이스까뺑의 간계」이다. 이 작품에는 자식들이 이미 사랑하고 있는 상대가 있음에도 자신들의 욕심 때문에 일방적으로 다른 상대와 결혼을 시키려는 아버지들, ‘아르강뜨’와 ‘제롱뜨’가 등장한다. 그리고 이들과 얽힌 결혼소동이 한바탕 일어나는데, 이 소동을 주도적으로 이끄는 인물은 다름 아닌 ‘제롱뜨’ 아들의 하인인 ‘스까뺑’이다. 그리고 이 작품은 바로 그 스까뺑이라는 개성 넘치는 인물의 활약을 지켜보는 재미가 가장 크다. 스까뺑은 셰익스피어가 창조한 개성으로 똘똘 뭉친 인물 ‘폴스타프’에 견줄 만큼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그는 스스로 자신을 이렇게 말한다.



스까뺑: 사실 제가 손을 대면 뭐든지 됩니다. 제가 봐도 저는 천부적인 자질이 있는 것 같아요. 엉뚱하지만 어떨 때는 남이 상상도 못 하는 아이디어를 내서 다 해결하지요. 사람들은 제 재능을 보고 사기의 일종이라고 하지만, 사기가 아니라 기발한 지혜지요. 제 실력을 따라갈 만한 사람은 못 봤습니다. 이 바닥 최고의 권위자라고 남들도 그러네요. 그런데 무식한 놈들이 저를 잘 몰라요. 그래서 별 일거리는 없습니다. (
스까뺑의 간계」, 124쪽)


부르주아 귀족」의 주르댕이 그렇듯이 자신들이 바라는 것을 이루기 위해 눈이 먼 두 아버지 ‘아르강뜨’와 ‘제롱뜨’처럼 뭔가 하나의 욕망에 집착하느라 주변은 모두 잊은 그들을 이용해 스까뺑은 자신의 잇속을 챙기기도 하는데, 그 꼴이 왠지 밉살스럽지는 않다. 오히려 그의 간계가 성공하기를 바라게 된다고나 할까. 자신의 잇속을 챙기는 데는 기막히게 머리가 잘 돌아가는 꾀돌이 하인 스까뺑의 입속에서 때로는 통찰력 빛나는 말이 쏟아지기도 한다.



스까뺑: 아가씨, 원, 그런 말씀을. 아무 문제없는 사랑은 지루한 고요함입니다. 남녀 간에 아무리 완벽하게 행복하다 해도 지겨울 거예요. 삶에는 기복이 있어야 해요. 원하는 대로 일이 잘 안 풀리면 더 열정이 생기고 즐거움이 배가되지요. (
스까뺑의 간계」, 169쪽)


스까뺑은 결국 자기 뜻을 이루지 못하고 머리가 깨져서 다 죽어가는(이마저도 연극인 것 같지만) 상황에서도 ‘저는요, 식탁 끄트머리에 데려다주세요. 거기서 제 인생의 최후를 맛보겠습니다.’라며 끝까지 웃음을 주는 강렬한 캐릭터이다. 한동안은 스까뺑의 이런 모습을 잊기 힘들 것 같다.

상상병 환자」는 몰리에르의 마지막 작품이다. 그래서 그런지부르주아 귀족」이나「스까뺑의 간계」에서 다룬 내용이 모두 집약되어 있다. 어딘가 자신이 항상 아프다고 여기는 ‘상상병 환자’ ‘아르강’은 귀족이 되고픈 주르댕처럼 ‘건강한 삶’을 늘 바라지만 그는 결국 언제나 아픈 존재이다(라고 생각한다). 때문에 그는 건강을 돌봐줄 의사를 항상 곁에 두기 위해 딸을 의사와 결혼시키려고 한다. 자신이 욕망을 자식을 통해 이루려고 하는 모습은스까뺑의 간계」의 두 아버지들과 똑같다.

그런데 이런 아르강을 풍자하는 인물로는 하녀인 뚜아네뜨가 있다. 그녀는 하인 신분인 스까뺑 주인과 그 아들을 조롱했던 것과 마찬가지의 역할을 맡는다. 몰리에르의 희곡에서는 신분이 낮은 인물들이 오히려 더 약삭빠르게 자신들의 주인을 풍자하고 조롱하면서 비틀기를 시도하는 것이다.



뚜아네뜨: 혈색이 좋다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나리는 늘 혈색이 안 좋으세요. 그러니 나리 건강이 좋아졌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무례한 사람들이지요. 지금처럼 건강이 좋지 않았던 적은 없었어요.
아르강: 얘 말이 맞소.
뚜아네뜨: 나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걸으시고, 주무시고, 드시고 하시지만, 그래도 아주 위중한 상태이시지요.  (상상병 환자」, 255쪽)


이 작품 또한 상상병 환자인 아르강을 풍자하는 것 같지만 그런 어리석은 인물을 이용해 또다시 자기 잇속을 차리는 인물-이 작품에서는 ‘의사’-을 더욱 강하게 풍자하고 비판한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의사들은 하나 같이 똑같은 처방만을 반복할 뿐이다. 어떤 병에도 ‘관장-하제-사혈’만을 반복하는 것이다. 뚜아네뜨는 자기 주인인 아르강뿐만 아니라 의사들을 향해서도 날선 비판을 숨기지 않는다.



뚜아네뜨: 웃기지도 않네요. 당신들 의사들이 병을 치유해주길 바라다니. 참 엉뚱한 사람들이군요. 의사들이야 치료해주려고 그들 곁에 있는 게 아니지요. 단지 연금을 받고 약을 처방해주기 위해서 있는 거잖아요. 치료가 되고 안 되고는 자기들이 알아서 할 일이지.(상상병 환자」, 264쪽)


사람들은 비극에서 진한 감동을 얻고는 한다. 셰익스피어 작품도 비극이 더 유명하다. 그런데 정말 비극이 주는 카타르시스가 희극보다 더한 것일까? 몰리에르 또한 처음에는 비극 배우로 출발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그의 재능은 비극보다는 희극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 무렵 라신의 비극이 귀족 문화의 표현이었다면 몰리에르의 희극은 부르주아 계급을 대표했다. 그는 그렇게 민중의 친구가 되면서 서서히 성공가도를 달리게 된다.

상상병 환자」의 베랄드는 이렇게 말한다. “형님은 어떤 연극을 원하시는 거예요? 연극은 별의별 직업을 다 보여주고 있잖아요. 의사든 왕이든 왕자든, 어떤 명망가라도 늘 무대에 등장하지요” 이 말은 몰리에르 그 자신의 생각이 아닐까? 몰리에르는 이렇게 희극, 웃음이라는 장치를 통해 비극에서는 쉽사리 꿈꿀 수 없었던 것, 귀족이나 성직자처럼 신분 높은 이들을 통렬하게 비판한다. 거기에서 독자는 비극과는 또 다른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된다.

몰리에르는 1673년 자신의 마지막 작품인 상상병 환자」에서 주인공 아르강 역할을 연기하다가 무대 위에서 쓰러졌고, 집으로 옮겨진 후 사망했다. 민중에게 웃음을 주고자 했던 그의 최후조차 뭔가 희극적이고 연극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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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병 환자 창비세계문학 59
몰리에르 지음, 정연복 옮김 / 창비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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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자와 해학 조롱이 넘치는 몰리에르의 희극. 신명나는 마당놀이 한 판을 보고 나온 듯한 느낌이다. <스까뺑의 간계>의 ‘스까뺑‘은 셰익스피어가 창조해낸 개성 넘치는 인물 ‘폴스타프‘에 견줄 만큼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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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뒤에서>를 읽고 난 뒤, 조르조 바사니의 작품을 모두 사둔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했다. 조르조 바사니 선집은 <성벽 안에서>, <핀치콘티니가의 정원>, <금테 안경> 세 작품이 함께 나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 나는 왠지 모르지만 그 세 권을 거의 동시에 구입했다.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시리즈를 믿는 까닭도 있었지만 그 깨끗한 책 표지와 ‘서정적 문체’라는 말에 이끌렸다. 어쩐지 첫인상이 무척 좋은, 선하고 단아한 사람을 보는 듯 했다고나 할까? 그 느낌은 어긋나지 않았다.

내가 처음 읽은 그의 작품은 <금테 안경>이다. 가장 분량이 짧았기 때문에 가벼운 마음으로 도전했던 것 같다. 책을 덮을 즈음에는 마음 한 구석이 아릿해져왔다. 그 쓸쓸하고 먹먹한 기분은 뜻밖이었다. 그럼에도, 첫인상 좋은 사람과 실제로 대화를 나눠보니 예상대로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걸 확인했던 작업, <금테 안경>을 읽은 느낌이 바로 그랬다. 무엇보다도 조르조 바사니의 서정적이면서도 아름다운 문체, 그렇지만 결코 화려하지는 않은, 담담하고도 고독한 문체에 흠뻑 빠졌다. 그러나 그가 다루는 세계는 결코 아름답지만은 않다.

<금테 안경>의 주인공은 페라라에 정착한 성공한 의사 ‘파디가티’다. 그는 직업에 어울리는 교양도 갖추었고 예술을 사랑한다. 페라라 시민들은 그런 그를 존경한다. 그 자신 또한 여유롭고 만족스러운 삶을 살아간다. 또 다른 주인공인 ‘나’는 파디가티의 삶을 관찰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 가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의 삶이, 그리고 ‘나’의 삶이 조금씩 어그러져 감을 느낀다. ‘그’는 알고 보니 동성애자였으며, ‘나’는 유대인이기 때문이다.

무솔리니가 이끄는 파시스트당이 득세하는 이탈리아에서, 그것도 히틀러와 손을 맞잡은 상황에서 한 사람은 동성애자로, 또 다른 한 사람은 유대인으로서 서로 마주하게 된다.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진 그들은 비슷한 처지에 연민을 느끼고 친구가 되는데, ‘다름’을 결코 인정하지 않는 그 사회에서 그 둘이 나누는 우정은 쓸쓸하고도 서글프기 짝이 없다. 특히 ‘나’의 시선으로 그려지는 파디가티의 삶은 애수 그 자체다. 물론 ‘나’ 또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정체성을 알게 된 처음에는 충격에 빠진다. 하지만 곧 그를 이해하게 된다.



안다는 것은 이해하는 것, 더는 궁금해 하지 않는 것. ‘내버려 두는 것’과 같았다. (<금테 안경>, 20쪽)


파디가티를 그 자체로 내버려 두는 것이다. 더는 그 무엇도 궁금해 하지 않은 채.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파디카티의 사생활을 궁금해 하며, 뒤에서 수군거리기 바쁘다. 그런 그들 모두가 파시스트와 무엇이 다르랴. 존경받던 의사에서 한 순간 가십 거리로 전락하고 마는 중년 남자, 이웃과 가족의 따스한 보살핌 아래 미래가 찬란했던 한 젊은이. 그런데 그 둘 모두는 이탈리아 사회에서 영원히 국외자가 되고 만다. 이 이방인들의 애잔하면서도 쓸쓸한 우정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아름다운 이탈리아 풍경과 대비되는, 한없이 고독하고 서글픈 분위기가 오래 기억에 남는다.

<문 뒤에서>를 읽은 사람이라면, 아마 대부분 자신의 10대 시절, 꼭 10대 시절이 아니더라도 치기어린 젊은 날의 한때를 떠올리게 되리라. 그리고 그 기억은 행복이기보다는 그 행복이 산산이 부서지거나 때문에 고통으로 점철된 어떤 순간일 것이다. 나 또한 그랬으며, <문 뒤에서>의 주인공이 이야기하는 사연도 그렇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첫 문장부터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나는 인생에서 여러 번 불행했다, 아이였을 때, 소년이었을 때, 젊은이였을 때, 어른이 되어서도. 돌아보면 여러 번 이른바 절망의 바닥에 다다랐다. 하지만 나에게 유독 암울하던 시기는 1929년 10월에서 1930년 6월 사이, 고등학교 일학년이던 몇 달로 기억한다. 그 후 흐른 세월은 결국 아무 소용이 없었다. 남몰래 피 흘리던, 온전히 비밀한 상처로 남은 그 아픔을 세월이 치유해줄 수는 없었던 것이다. (<문 뒤에서>, 7쪽)


그 영원히 치유되지 않는 상처란 무엇일까? 주인공의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가면서 그 비밀은 조금씩 드러난다. ‘나’와 ‘나’를 둘러싼 몇몇 친구들과의 관계. ‘풀가’와 ‘카톨리카’- 한 사람은 가난하고 약삭빠르며 모두가 기피하는 인물이고, 다른 한 사람은 언제나 1등에 모든 면에서 완벽한, 그래서 모든 아이들의 동경의 대상이다. ‘나’ 또한 그 선망의 대상인 ‘카톨리카’와 가까워지고 싶지만, 어쩐 일인지 ‘카톨리카’는 좀처럼 곁을 주지 않는다. 그에 비해 아이들이 기피하는 풀가는 ‘나’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우정을, 애정을 퍼부어주지만 어쩐지 풀가는 진실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그리고 나는 그 틈바구니를 위태롭게 오가다 결국 ‘문 뒤에서’ 어떤 가혹한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그 장면은 몹시 충격적이어서 주인공인 ‘나’가 느꼈을 아픔이 고스란히 전해져 오는 것만 같다.

그런데도 ‘나’는 그 모든 진실을 알게 된 뒤에도 그 가혹한 상처를 안겨준 대상에게 어떤 항변조차 하지 않는다. ‘문 뒤에서’ 나서지 못했던 것처럼 결국 영원히 ‘문 뒤에’ 숨어 있기를 선택하는 것이다. ‘나’에게 그 일은 오랜 세월이 흘러도 잊히지 않는, 씻을 수 없는 상처이지만, 그것을 통해 어떤 의미로든 성장한다. 삶이 언제나 찬란하게 빛나는 것만은 아님을 알게 되지 않는가. 그 일을 겪은 뒤 ‘나’는 어린 시절의 친구 오텔로에게서 그 진솔한 냄새의 밑바닥에서 언제나 다른 냄새, 역겹고 옥죄는 악취를 찾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듯이 삶의 이면에는 악취를 내뿜는 존재가, 그런 어두운 일은 꼭 있게 마련임을, 그 서글프고도 씁쓸한 진실을 깨닫게 된다.


오텔로는 수업이 많았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처럼 내가 다시 오텔로와 자주 만나려고 노력한다 해도, 그의 착하고 진솔한 냄새의 밑바닥에서, 나는 언제나 다른 냄새, 머릿기름의 역겹고 옥죄는 악취를 찾고 있게 될 것이다. (<문 뒤에서>, 144쪽)


10대 소년들의 우정 또는 뒤틀린 애정, 동경 또는 경쟁심, 혹은 열등감과 질투, 또는 그 모든 것이 어우러진 ‘그 사건’과 그것이 불러오는 파장을 지켜보노라면, 가족을 떠난 최초의  인간관계라고 할 수 있는 친구 사이에서 느꼈을, 그리고 그 안에서 때로는 고통 받고 상처 받았을, 자기의 지난 시절을 떠올리게 된다. 그 순간에는 그 상처로 인해 모든 관계가 부질없는 것처럼 느껴지고 인생 자체가 어긋난 듯이 절망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람은 또 살아간다. 상처가 아물기도 하고 희미해지기도 한다. 그러면서 사람은 어른이 되고, 늙어 간다.

조르조 바사니의 작품에는 그렇게 상처 받기 쉬운 예민하고 섬세한 성정을 지닌 인물들이, 하필이면 소외된 정체성(동성애자이거나 유대인이거나)을 지니고 살아가면서 더 가혹한 형벌 아닌 형벌을 받게 된다. 그럼에도 그들은 상처를 안고 묵묵히 살아간다. 아름다운 마을 ‘페라라’에서- 그 진실한, 그래서 눈부시도록 아픈 이야기가, 책을 덮을 즈음에는 언제나 마음을 울린다. 조르조 바사니 선집은 아껴서 여러 번 다시 읽어도 좋을 그런 작품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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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목련 2018-06-21 11: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조르조 바사니의 작품을 읽고 싶게 만드네요. <금테 안경>의 구절, ‘안다는 것은 이해하는 것, 더는 궁금해 하지 않는 것. ‘내버려 두는 것’과 같았다.‘ 란 말 너무 확 와닿아요. 좋은 작가를 소개해주셔서 감사해요. 늦더라도 꼭 만나보고 싶어요.

잠자냥 2018-06-21 11:28   좋아요 0 | URL
네, 그 구절에서 저도 참 많은 생각을 했더랍니다. 늦더라도 꼭 만나보세요. 아마 마음에 드실 거예요. ㅎㅎ

양철나무꾼 2018-06-21 16: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잠자냥 님,
님의 서재에만 들어오면 장바구니가 빵빵해져서 들어오기가 무섭습니다~--;
그렇지만, 님의 이런 페이퍼를 읽는 즐거움을 포기할 수는 없죠.
잘 봤습니다~^^

잠자냥 2018-06-21 17:19   좋아요 0 | URL
ㅎㅎㅎ 조금씩 사두고 천천히 읽으시면 되지 않을까요? ㅎㅎㅎㅎ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