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리에르의 희곡을 읽다 보면, 한바탕 마당놀이를 감상한 기분이 든다. 웃음 속에 풍자와 조롱 해학이 넘친다. 몰리에르가 창조한 인물들은 우리나라 전통 마당놀이의 인물들을 꽤 닮았다. 신분이나 지위는 높지만 어떤 한 가지를 욕망하느라 주변은 돌볼 틈도 없이, 그 하나에만 몰두해서 어리석음의 늪에 빠지고 마는 인물들(「부르주아 귀족」의 ‘주르댕’, 「상상병 환자」의 ‘아르강’ 등)과 그런 인물을 통해 자기 잇속을 차리는 또 다른 인물들, 그리고 그 와중에도 그 어리석은 인물을 교화하고자 애쓰는 인물들이 나와 한바탕 난장을 이룬다. 그런데 조금만 더 읽다 보면, 그 어리석은 인물이 주된 풍자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인물을 이용해서 더 큰 이득을 챙기는 당대의 높으신 분들을 풍자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상상병 환자』에는「부르주아 귀족」, 「스까뺑의 간계」, 「상상병 환자」 세 작품이 실려 있다. 「부르주아 귀족」의 ‘주르댕’은 돈만 많은 부르주아로 진짜 귀족이 되기를 열망하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인물이다. 그는 넘치는 돈으로 ‘귀족’ 신분에 다가가고자 애쓴다. 귀족 같은 옷차림은 물론, 온갖 예술과 문화 수업을 받는다. 음악은 물론, 검술, 무용에 철학까지. 그의 하루는 귀족 따라잡기에 정신없이 바쁘다. 하다못해 하나뿐인 딸을 귀족과 결혼시키고자 안간힘을 쓴다. 일차적으로 이 작품은 뱁새가 황새를 따라가려다 가랑이가 찢어지는 형국인 ‘주르댕’이라는 인물을 풍자한다.
음악 선생: 주르댕 씨는 예술에 문외한이고 매사에 생각 없이 함부로 말하는데다가 아무 때나 박수 치지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지갑은 잘 열어요. 그분은 돈으로 칭찬합니다. 아시겠지만 우리를 소개한 그 알량한 귀족보다 무식한 부르주아가 우리에게는 백배 낫지요. (「부르주아 귀족」, 11쪽)
그런데 조금 더 들여다보면 어리석지만 결코 해롭지는 않은(주르댕은 그의 욕망에 충실할 뿐 주변에 해악을 끼치지는 않는다), 주인공에 비해 그 곁을 맴도는, 선함을 가장한 인물들은 오히려 해롭기 짝이 없다. 주르댕 곁에서 잇속을 챙기기 바쁜 철학 선생 및 음악, 무용, 검술 선생들을 보라. 그들은 겉으로는 예술과 철학에 밝은, 지식인과 교양을 갖춘 척하는 인물들이지만 사실 주르댕의 주머니만을 노릴 뿐이며, 그들끼리 있을 때는 서로의 직업이 우수하다고 언쟁을 벌이는 촌극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부르주아 귀족」에서 가장 사악한, 그리하여 가장 강도 높게 비판과 풍자의 대상이 되는 인물은 백작 ‘도랑뜨’이다. 그는 주르댕의 하나뿐인 귀족 친구라는 지위를 십분 활용하여, 주르댕으로부터 계속 돈을 빌려간다. 물론 그 돈을 갚을 리는 전무하다. 주르댕 부인의 말처럼 ‘친절을 베풀고 다정하게 대하고는 돈을 빌리’는 것이다. 이렇듯「부르주아 귀족」은 주르댕이라는 한 어리석은 인물을 풍자하는 듯 보이지만 그 속내에는 그를 이용해 자신의 이익을 꾀하는 비열한 귀족을 강도 높게 비판한다.
이 책에 실린 세 작품의 공통점은 등장하는 모든 아버지들이 신분이나, 돈, 종교, 의학에 사로잡혀 가족(특히 자식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전혀 개의치 않고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하고자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것은 보통 자식의 강제적인 결혼을 통해 이루고자 한다. 억압적인 가부장이 항상 등장하는 것이다. 그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난 작품이「스까뺑의 간계」이다. 이 작품에는 자식들이 이미 사랑하고 있는 상대가 있음에도 자신들의 욕심 때문에 일방적으로 다른 상대와 결혼을 시키려는 아버지들, ‘아르강뜨’와 ‘제롱뜨’가 등장한다. 그리고 이들과 얽힌 결혼소동이 한바탕 일어나는데, 이 소동을 주도적으로 이끄는 인물은 다름 아닌 ‘제롱뜨’ 아들의 하인인 ‘스까뺑’이다. 그리고 이 작품은 바로 그 스까뺑이라는 개성 넘치는 인물의 활약을 지켜보는 재미가 가장 크다. 스까뺑은 셰익스피어가 창조한 개성으로 똘똘 뭉친 인물 ‘폴스타프’에 견줄 만큼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그는 스스로 자신을 이렇게 말한다.
스까뺑: 사실 제가 손을 대면 뭐든지 됩니다. 제가 봐도 저는 천부적인 자질이 있는 것 같아요. 엉뚱하지만 어떨 때는 남이 상상도 못 하는 아이디어를 내서 다 해결하지요. 사람들은 제 재능을 보고 사기의 일종이라고 하지만, 사기가 아니라 기발한 지혜지요. 제 실력을 따라갈 만한 사람은 못 봤습니다. 이 바닥 최고의 권위자라고 남들도 그러네요. 그런데 무식한 놈들이 저를 잘 몰라요. 그래서 별 일거리는 없습니다. (「스까뺑의 간계」, 124쪽)
「부르주아 귀족」의 주르댕이 그렇듯이 자신들이 바라는 것을 이루기 위해 눈이 먼 두 아버지 ‘아르강뜨’와 ‘제롱뜨’처럼 뭔가 하나의 욕망에 집착하느라 주변은 모두 잊은 그들을 이용해 스까뺑은 자신의 잇속을 챙기기도 하는데, 그 꼴이 왠지 밉살스럽지는 않다. 오히려 그의 간계가 성공하기를 바라게 된다고나 할까. 자신의 잇속을 챙기는 데는 기막히게 머리가 잘 돌아가는 꾀돌이 하인 스까뺑의 입속에서 때로는 통찰력 빛나는 말이 쏟아지기도 한다.
스까뺑: 아가씨, 원, 그런 말씀을. 아무 문제없는 사랑은 지루한 고요함입니다. 남녀 간에 아무리 완벽하게 행복하다 해도 지겨울 거예요. 삶에는 기복이 있어야 해요. 원하는 대로 일이 잘 안 풀리면 더 열정이 생기고 즐거움이 배가되지요. (「스까뺑의 간계」, 169쪽)
스까뺑은 결국 자기 뜻을 이루지 못하고 머리가 깨져서 다 죽어가는(이마저도 연극인 것 같지만) 상황에서도 ‘저는요, 식탁 끄트머리에 데려다주세요. 거기서 제 인생의 최후를 맛보겠습니다.’라며 끝까지 웃음을 주는 강렬한 캐릭터이다. 한동안은 스까뺑의 이런 모습을 잊기 힘들 것 같다.
「상상병 환자」는 몰리에르의 마지막 작품이다. 그래서 그런지「부르주아 귀족」이나「스까뺑의 간계」에서 다룬 내용이 모두 집약되어 있다. 어딘가 자신이 항상 아프다고 여기는 ‘상상병 환자’ ‘아르강’은 귀족이 되고픈 주르댕처럼 ‘건강한 삶’을 늘 바라지만 그는 결국 언제나 아픈 존재이다(라고 생각한다). 때문에 그는 건강을 돌봐줄 의사를 항상 곁에 두기 위해 딸을 의사와 결혼시키려고 한다. 자신이 욕망을 자식을 통해 이루려고 하는 모습은「스까뺑의 간계」의 두 아버지들과 똑같다.
그런데 이런 아르강을 풍자하는 인물로는 하녀인 뚜아네뜨가 있다. 그녀는 하인 신분인 스까뺑 주인과 그 아들을 조롱했던 것과 마찬가지의 역할을 맡는다. 몰리에르의 희곡에서는 신분이 낮은 인물들이 오히려 더 약삭빠르게 자신들의 주인을 풍자하고 조롱하면서 비틀기를 시도하는 것이다.
뚜아네뜨: 혈색이 좋다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나리는 늘 혈색이 안 좋으세요. 그러니 나리 건강이 좋아졌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무례한 사람들이지요. 지금처럼 건강이 좋지 않았던 적은 없었어요.
아르강: 얘 말이 맞소.
뚜아네뜨: 나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걸으시고, 주무시고, 드시고 하시지만, 그래도 아주 위중한 상태이시지요. (「상상병 환자」, 255쪽)
이 작품 또한 상상병 환자인 아르강을 풍자하는 것 같지만 그런 어리석은 인물을 이용해 또다시 자기 잇속을 차리는 인물-이 작품에서는 ‘의사’-을 더욱 강하게 풍자하고 비판한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의사들은 하나 같이 똑같은 처방만을 반복할 뿐이다. 어떤 병에도 ‘관장-하제-사혈’만을 반복하는 것이다. 뚜아네뜨는 자기 주인인 아르강뿐만 아니라 의사들을 향해서도 날선 비판을 숨기지 않는다.
뚜아네뜨: 웃기지도 않네요. 당신들 의사들이 병을 치유해주길 바라다니. 참 엉뚱한 사람들이군요. 의사들이야 치료해주려고 그들 곁에 있는 게 아니지요. 단지 연금을 받고 약을 처방해주기 위해서 있는 거잖아요. 치료가 되고 안 되고는 자기들이 알아서 할 일이지.(「상상병 환자」, 264쪽)
사람들은 비극에서 진한 감동을 얻고는 한다. 셰익스피어 작품도 비극이 더 유명하다. 그런데 정말 비극이 주는 카타르시스가 희극보다 더한 것일까? 몰리에르 또한 처음에는 비극 배우로 출발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그의 재능은 비극보다는 희극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 무렵 라신의 비극이 귀족 문화의 표현이었다면 몰리에르의 희극은 부르주아 계급을 대표했다. 그는 그렇게 민중의 친구가 되면서 서서히 성공가도를 달리게 된다.
「상상병 환자」의 베랄드는 이렇게 말한다. “형님은 어떤 연극을 원하시는 거예요? 연극은 별의별 직업을 다 보여주고 있잖아요. 의사든 왕이든 왕자든, 어떤 명망가라도 늘 무대에 등장하지요” 이 말은 몰리에르 그 자신의 생각이 아닐까? 몰리에르는 이렇게 희극, 웃음이라는 장치를 통해 비극에서는 쉽사리 꿈꿀 수 없었던 것, 귀족이나 성직자처럼 신분 높은 이들을 통렬하게 비판한다. 거기에서 독자는 비극과는 또 다른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된다.
몰리에르는 1673년 자신의 마지막 작품인 「상상병 환자」에서 주인공 아르강 역할을 연기하다가 무대 위에서 쓰러졌고, 집으로 옮겨진 후 사망했다. 민중에게 웃음을 주고자 했던 그의 최후조차 뭔가 희극적이고 연극적이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