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은 세상 - 우리 미래를 가치 있게 만드는 83가지 질문, 2018 세종도서 교양부문 선정 도서
피터 싱어 지음, 박세연 옮김 / 예문아카이브 / 2017년 11월
평점 :
절판


지난해 사두었던 피터 싱어의 <더 나은 세상>. 새해에 읽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제목부터가 왠지 그렇지 않은가? 1월 1일부터 시작하지는 못했지만 1월에 읽었다. 책을 덮을 때 즈음, 새해에 읽기 좋은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이 책의 77번째 이야기는 ‘새해 결심을 지키려면’이다. 슬며시 웃음이 난다. 피터 싱어는 사람들이 새해 결심을 잘 지키지 못하는 원인 중 하나로 ‘실천하기 힘든 것들만 목표로 삼기’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맞다. 나부터도 올해 크게(?) 마음먹은 것 중 하나가 알라딘 플래티넘 회원 벗어나기(산 책은 다 읽고 사자), 굿즈 때문에 책을 사지 말자였는데, 이건 정말 실천하기 어려운 목표였고 고작 2월인데도 이미 그 결심은 망했다. 그놈의 굿즈 때문에 사들인 책을 다 읽기도 전에 사고, 사고 또 사고 있지 않은가!

피터 싱어는 이렇게 새해 목표를 세우고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원래 인간은 그렇다고,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텔레스의 말까지 인용하면서 다독인다. 소크라테스는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을 선택하는 사람은 없다”고 말했단다. 사람들이 새해 계획을 잘 지키지 못하는 까닭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포기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들이 무엇이 좋은지 잘 알고 있지만 순간적으로 감정이나 욕망에 압도당하게 된다’고 했단다. 문제는 ‘지식의 결핍이 아니라 내면의 본능적인 측면이 우리의 이성적인 측면을 지배하는 데 있는 것’이라고(365쪽). 결국 새해 결심을 잘 지키지 못하는 까닭은 우리가 본능에 지배당하는 너무나도 인간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데, 지금 당신도 바로 할 수 있는 쉬운 방법 한 가지를 제안한다. 피터 싱어는 ‘실천’ 윤리학자로 유명하다. 단순한 ‘윤리’ 학자가 아니라 ‘실천’에 방점을 둔 사람이다. 그러니 인간의 윤리가 이렇다 저렇다 책상 위에 앉아서 그저 철학적 사색을 하는데 그치는 게 아니라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것들을 제안한다. <물에 빠진 아이 구하기>와 같은 책에서도 이미 사람들에게 기부를 실천으로 옮길 것을 제안했던 그는 이번에도 역시 행동에 나설 것을 촉구한다. 세계의 빈곤은 과연 누구의 몫인가 물으며 그는 이렇게 말한다.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이 소득의 1퍼센트를 기부한다면 우리 사회는 전 세계 빈곤층 인구를 절반으로 줄이는 것을 넘어서 완전히 없애버리는 단계에까지 도달할 수 있다. (중략) 사치를 누릴 여유가 있으면서도 소득의 작은 일부를 가난한 이들과 나누려 하지 않는 부자에게는 기부를 통해 막을 수 있는 죽음에 대한 책임이 있다. 이제 우리는 1퍼센트라는 최소한의 기준조차 지키지 않는 부유한 사람을 도덕적으로 잘못된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바라봐야 한다. (중략) 세계적인 빈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소득의 1퍼센트를 기부하는 노력이야말로 윤리적으로 올바른 삶을 살기 위한 최소한의 요건이라는 믿음을 사회 전반에 널리 확산해야 한다. 우리는 영웅이 아니어도 소득의 1퍼센트를 기부할 수 있다. 그 정도도 기부하지 않는다는 것은 절박한 빈곤 문제, 그리고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죽음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는 것을 말해준다. (195쪽)


자기 소득의 1퍼센트만 기부로, 행동으로 직접 옮겨도 이 세상에서 빈곤을 사라지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10퍼센트도 아니고 1퍼센트다. 10퍼센트라면 부담스럽다. 지키지 못할 새해 결심처럼 돼 버리기 쉽다. 하지만 1퍼센트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어쩐지 실천하기 쉬어 보이지 않는가?

피터 싱어는 기부하는 행위 또한 널리 알리라고 말한다. 그의 다른 저작에서도 꾸준히 접할 수 있던 주장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유명인을 비롯하여 사람들이 기부행위를 ‘밝히고서’ 하는 것을 좋지 않은 시선으로 보기도 한다. 숨기고 있던 기부행위가 우연히(!) 밝혀졌을 때 더 찬사가 따라붙는다. 누군가를 돕는 행위를 공공연하게 밝히는 행동에 그 동기의 순수성을 의심한다. 하지만 정말 동기가 그렇게 중요할까? 누군가를 돕고 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피터 싱어는 윤리적 관점에서 볼 때 기부 뒤에 숨겨진 동기의 순수성에 그렇게 많은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주장한다. ‘분명한 것은 선행을 실천하기 위해 기부한다는 사실 그 자체’라고 말한다. 게다가 이렇게 선행을 알리는 행위는 장점이 더 많다.


사람들이 자선활동을 결심하도록 만드는 중요한 요인 중 하나는 다른 사람도 똑같은 노력을 하고 있다는 믿음이다. 자선단체에 기부를 실천하고 있다는 사실을 널리 알리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똑같은 일을 하게 될 가능성을 높인다. (중략) 우리는 남몰래 선행을 베풀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침묵하는 기부는 장기적으로 더 높은 만족감을 줄 수 있지만, 사람들이 기부보다 자신과 가족을 위해서 돈을 쓰고자 하는 사회 전반의 분위기를 바꾸는 데는 도움을 주지 못한다. (203~205쪽)


자, 그러니 이 글을 읽는, 또는 이 책을 읽은 사람이라면 올해부터는 자신의 소득에서 1퍼센트라도, 아니 0.5퍼센트라도 누군가를 돕는 일에 써 보면 어떨까? ‘우리는 영웅이 아니어도 소득의 1퍼센트를 기부할 수 있다. 그 정도도 기부하지 않는다는 것은 절박한 빈곤 문제, 그리고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죽음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것을 말해준다’는 구절을 되새기면서 말이다.

2장 ‘동물과 윤리’도 흥미롭다. 부모님 집에서 개 한 마리를 가족 모두가 함께 돌보면서 키울 때는 그렇게까지 동물의 권리에 관심이 크지는 않았다. 그런데 독립해서 어쩌다 보니 길냥이들을 데려다가 키우기 시작하고 그럼으로써 단 한 번도 관심을 두지 않았던 존재, 길냥이들의 척박한 '묘생'이 눈에 들어오면서부터 동물권이나 인간에 의해 망가지는 그들의 삶에 눈길이 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렇게 동물을 보호하고 그들의 권리를 지켜주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그렇지 않은 대다수 사람들은 이렇게 묻는다. ‘인권보다 동물권이 먼저’냐고. 마치 저 먼 나라에 있는 아이에게 기부를 하면 한국의 결식아동부터 도우라고 비아냥대는 논리와 비슷하다. 피터 싱어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 외에 수많은 종이 고통을 느낄 수 있다면, 다시 말해서 삶의 행복을 영위할 수 있다면 우리는 어떤 근거로 인간의 이익이 동물의 이익보다 앞선다고 말할 수 있을까? (74쪽)


동물도 고통을 느낀다. 심지어 사람들이 고통 없는 존재로 인식하기 쉬운 물고기조차도 고통을 느낄 줄 안다. 그런데도 인간은 자신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마치 이 지구의 주인이라도 되는 듯이 동물들의 종을 나누고는 그들 가운데 어떤 존재는 고통을 느끼고, 또 어떤 존재는 느끼지 못할 것이라 섣불리 판단한다. 그러고는 인간의 필요에 따라 멋대로 죽이고 때로는 학대한다. 피터 싱어는 이런 논리로 일본의 고래잡이도 비판하다.


고래를 잡아야 할 절박한 필요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고래로부터 얻는 모든 것은 잔인한 살육 없이도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 절박한 필요성 없이 무고한 생명에게 엄청난 고통을 가하는 일은 분명 잘못된 행동이며, 고래잡이는 비윤리적인 산업이다. (중략) 고통을 느끼는 동물에게 불필요한 고통을 가하는 행동을 특정 문화의 가치로 정당화 할 수 없다. (71~73쪽)


비단 일본만의 문제일까? 위 구절에 ‘고래’라는 단어 대신 ‘개’를 집어넣어보라. 보신탕 먹는 행위, 보신탕을 먹기 위해 ‘개’를 고통스럽게 죽이는 행위를 언제까지 ‘우리의 전통 문화’라는 가치로 정당화 할 수 있을까? 개뿐만이 아니라, 돼지, 소, 닭 등등 다른 동물을 집어넣어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인간을 위해서 고통 속에 죽어가야 할 까닭은 없다. 이런 책을 읽으면 채식을 마음먹다가도 결국 얼마 가지 못하고 이런저런 이유로 무너지고 마는데(아직은 지키기 어려운 결심;_;) 언젠가는 꼭 채식하는 사람이, 철저하게 하지는 못하더라도 동물의 고통을 줄이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채식주의자나 비건으로 살아가는 것은 그 자체로 목표가 아니라 인간과 동물의 고통을 줄이고 좋은 자연 환경을 미래 세대에 물려주기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한다. (87쪽)


5장 ‘섹스와 젠더’에서도 흥미로운 이야기는 계속 펼쳐진다. 일일이 옮겨 적을 수는 없지만 현재 우리 사회에서 첨예하게 갈등을 겪고 있는 문제에 대해서 피터 싱어가 주장한 내용만을 조금 옮겨 본다.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는다면 그 행위와 관련하여 어떤 측면이 비도덕적이라는 말인가? 동성애 금지와 관련된 사안의 핵심은 국가가 법률로 개인에게 도덕성을 강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법률은 동성애가 비도덕적이라는 선입견에 기반을 두고 있다. (‘동성애는 비도덕적인가’, 174쪽)

우리는 일상적으로 사람들에게 성별을 묻는다. 그런데 이러한 물음이 정말로 필요한 것일까? 인터넷 세상에서는 상대의 성별을 모른 채 메시지를 주고받기도 한다. (중략) 성별을 요구하는 관습은 다양한 역할과 지위에서 여성을 배제하고, 그들에게 특권을 주지 않으려 했던 시대의 유산인가? 특별한 이유 없이 성별을 묻는 관습을 없애면 여성 불평등 문제를 완화할 수 있다. 또한 육아휴직과 관련해서 남성들이 겪게 되는 부당한 차별도 막을 수 있다.  (‘생물학적 성별이 그렇게 중요한가’)


이런 책을 읽거나, 피터 싱어와 같은 이들의 주장을 듣다보면 때로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이게 정말 가능할까? 이런 주장은 지나치게 희망적이지 않은가? 하지만 세상을 돌아보면 결국 조금씩은 변화해왔다. 동물해방 운동이 처음 태동하기 시작했던 ‘1970년대 초에는 어떤 대형 동물보호 단체도 닭장 사육에 반대하는 운동을 벌이지 않았다’(63쪽). 하지만 이제는 이 땅에서조차 닭장 사육 환경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소비자는 자연에서 풀어놓고 키운 닭이 낳은 달걀을 선택할 수도 있다. 이런 것들이 바로 변화이고 진보가 아닐까? 지난해는 페미니즘 관련 서적이 불티나게 팔렸고, 요즘은 미투 운동이 세계적으로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이 또한 진보를 향해, 더 나은 세상을 향해 가고 있는 과정일 것이다.


인류학자 마거릿 미드는 말했다.

“신중하고 열정적인 시민들로 이뤄진 작은 모임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주장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실제로 세상은 지금까지 그렇게 변해왔다.” (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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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칸 급행열차
제임스 설터 지음, 서창렬 옮김 / 마음산책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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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칸 급행열차>는 제임스 설터의 첫 번째 단편집이다. 우리나라에는 그의 두 번째 단편집인 <어젯밤>부터 소개되었다. 애초에 첫 단편집인 <아메리칸 급행열차>로 독자를 만나는 게 순서가 아니었을까? 고개를 갸우뚱했는데, 이 책을 읽고 나니 왜 <어젯밤>으로 먼저 이 땅을 찾아왔는지 알 것 같았다. <아메리칸 급행열차>는 <어젯밤>만큼 강렬한 인상을 주지는 않는다. <어젯밤>에 비해 읽기도 수월하지 않다. <어젯밤>이 명료하고 간결하면서도 매우 강렬했다면, <아메리칸 급행열차>는 모호하고 흐릿하다. 문장과 문장 사이의 공백, 그 빈틈에 뭔가가 있는 것만 같아서 읽다가 자꾸 멈추게 된다, 문장 앞으로 돌아가는 일이 잦다. 내가 놓친 게 많은가? 내가 잘못 읽고 있나? 자기를 탓하게 된다. 그럼에도 아, 역시 설터구나 하는 순간들이 분명 존재한다.



새 차나 다름없는 자신의 스웨덴 차 옆구리에 생긴 움푹 팬 자국 같은 인생 (44쪽, ‘인생’)


이 책을 다 읽고 나서도 한동안은 머릿속에 드리워진 얇은 막 같은 것이 걷히지 않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여전히 안개 속을 거닐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다시 한 번 책을 넘기다가 저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새 차나 다름없는 스웨덴 차 옆구리에 생긴 움푹 팬 자국 같은 인생’이라는 표현. 아, 맞아, 그래. 그 순간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아메리칸 급행열차>에 실린 열 한 개의 단편은 거의 모두가 그런 움푹 팬 자국 같은 인생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새 차나 마찬가지인 자동차에 움푹 팬 자국이 생기면 처음에는 몹시 신경이 쓰인다. 몇날 며칠은 마음이 쓰릴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곧 그 자국을 잊는다. 그런 자국이 하나씩 늘어갈수록 더욱더 그 자국에 둔감해진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아무렇지 않게 그 자동차를 언제 새 차였냐는 듯이 굴리다가는, 다른 새로운 자동차에 눈독을 들이고, 마침내 그 차에게 이별을 고한다. 그와 함께 그런 모든 자국들도 잊힌다. 한때 몇날 며칠 마음을 쓰리게 했던 자국이, 언제 있었냐는 듯이 잊는다. 그러나 기억에서 희미해진다고 해서 그 자국들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일까?

바로 그런 움푹 팬 자국, 그러나 곧 잊힐 그 미묘한 순간을 설터는 눈 여겨 본다. 거기에 주목하고, 그 미세한 균열의 순간을 포착했기에, 11개 단편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거의 대부분은 자신의 인생에서 지금 어떤 중요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지 못하고, 혹 알더라도 그저 속수무책으로 흘려버리거나 때로는 알면서도 모르는 척 덮고 간다. 그 자국, 그 균열은 곧 잊히거나 기억 속에서 지워버릴 것을 알기 때문이다. 작품 속 등장인물들이 이러할 진데 그들의 삶을 엿보는 독자는 더더욱 그 움푹 팬 자국과 균열, 삶에 미세한 틈이 생기는 순간을 알아차리기 쉽지 않다. 때문에 <아메리칸 급행열차>는 마치 ‘급행열차’를 탄 듯이 빠른 속도로 읽을 수도 있지만 그러고 나면 주위 풍경을 하나도 보지 못한 채 목적지에 다다른, 조금은 허망한 여행이 될 수도 있다. 느리게 가더라도 미처 보지 못했던 온갖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완행열차를 탄 것처럼 천천히 읽다보면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는 작품들이랄까.

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아마도 가장 좋아하는, 또는 가장 인상 깊은 작품을 골라보라고 한다면 ‘20분’을 고르는 사람이 많을 것 같다. 나 또한 처음에는 그랬다. 이 책의 서문을 쓴 ‘필립 구레비치’도 ‘20분’을 가장 좋아하는 작품으로 꼽았다. 그는 이 작품을 ‘매우 냉혹하고 날렵함, 매 순간 육체적인 문제에 직면하고 또한 긴박감 넘치는 동시에 고통스럽고, 안쓰러운’ 작품이라고 말했다. ‘게다가 마치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닌 딱 20분의 이야기를 실시간으로 써서 들려주는 것 같고, 그 20분 안에 전 인생을 드러’ 냈으며 ‘동시에 압축과 팽창은 흥분과 전율을 불러일으키는데, 이는 설터의 지혜와 예술을 반영한다(12쪽, 서문)’고 말한다. 맞다. 전적으로 공감한다. 무엇보다도 이 책에 실린 단편 가운데 이 작품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지 가장 선명하게 독자에게 가닿기 때문에 많은 이들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그런데 나는 ‘20분’보다도 ‘탕헤르 해변에서’나 ‘아메리칸 급행열차’, ‘황혼’, ‘괴테아눔의 파괴’와 같은 작품들이 <아메리칸 급행열차>의 전체 분위기를 만드는 데 크게 일조한 작품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탕헤르 해변에서’는 니코와 맬컴 두 연인 사이에 니코의 친구인 ‘잉게’가 불쑥 끼어든다. 잉게 그 자체가 삶의 미세한 균열이자, 움푹 팬 자국이다. 그런데 니코도 맬컴도 그 사실을 잘 알지 못하는 듯하다. 아니 균열이 일어나고 있음을, 뭔가가 일어나고 있음을 감지하면서도 애써 외면한다. 그들 삶에 이렇다 할, 큰 사건은 일어나지 않지만 균열은 생긴 것이다. 그리고 그 균열은 어느 순간 아마도 잊히리라. ‘아메리칸 급행열차’의 성공한 두 변호사들의 인생 또한 마찬가지다. 성공만큼 타락도 빨리 찾아온 그들의 삶. 둘은 급기야 여행지에서 한 여자를 공유하는 지경까지 이른다. 그들의 삶은 정말 성공뿐일까? 그 두 남자의 어쩐지 공허한 몸짓들이 삶에 움푹 팬 자국을 떠올리게 한다. 고급 스포츠카 어딘가에 남은,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지만 틀림없이 지울 수 없는 흔적으로 남은 자국을 연상케 한다.

‘황혼’의 중년 여성 ‘챈들러’ 부인은 남편에게도 버림 받은 채 혼자 살아가고 있다. 그녀는 집을 수리하러 오는 ‘빌’과 한때 은밀한 사이였던 것 같다. 어느 날 빌은 아내와 재결합하기로 했다고 통보한다. 조금 아쉬운 마음을 드러내는 그녀에게 빌은 화를 낸다. ‘마흔 여섯. 그 세월이 목과 눈 밑에 스며있었다. 그녀의 젊음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자신은 애원해야 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희망을 품었던 길었던 여름은 가버렸다.’ (189쪽, ‘황혼’) 아무도 원하지 않게 된 그녀를, 잠시나마 원했던 빌조차 이제는 가버린 것이다. 작가 나딘은 언젠가 ‘괴테아눔 The Goetheanum’이라는 제목의 작품을 발표했다. 그 의미는 그의 ‘인생에서 하나의 위대한 행위를 뜻하는 것’(212쪽, ‘괴테아눔의 파괴’)이다. 그런데 괴테아눔은 덧없이 잿더미 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마치 나딘이 결코 위대한 작가가 되지 못하듯이 말이다.



어떤 사람은 실패하고 어떤 사람은 이혼했으며, 땅을 파는 일을 하는 더그 포티스 같은 사람은 경찰관의 아내와 정을 통하다가 트레일러 안에서 총을 맞았다. 그녀의 남편 같은 사람은 산터바버라로 가서 디너파티의 여분의 남자가 되었다. (50쪽, ‘20분’)


인생의 위대함을 뜻하는 것은 덧없이 사라지고, 어떤 사람은 실패하고 어떤 사람은 이혼하고, 누군가 다른 사람의 아내와 정을 통하다가도 총에 맞아 죽는다. 그런 극적인 사건이 일어나지 않더라도 결국에는 디너파티의 ‘여분의 남자’가 되고 마는 삶. 한때는, 젊었을 때는 재능 있어 보이고, 삶에서 어떤 위대함을 이룩할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을 품기도 했지만 그것들은 그저 산산이 부서지고 마는 삶. 그리하여 ‘인생의 항해를 시작해본 적이 없’이 그저 ‘해안 근처에만 머물’(168쪽, ‘애크닐로’)고 마는 삶. 그런 삶들이 <아메리칸 급행열차>에는 쓸쓸하게 그려진다. 그리하여 ‘삶은 우릴 때려눕히고 우린 다시 일어나는 거야. 그게 전부야.’(50쪽, ‘20분’)라는 통렬한 깨달음을 절감하게 해준다. 삶은 움푹 팬 자국들의 연속, 하지만 그 자국은 잊히고 우린 다시 살아간다고. 설터는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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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는 남자 - 2017 제11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
황정은 외 지음 / 은행나무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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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을 보는 일은 사람이 자기를 들여다보는 가장 쉬운 방법 중 하나이다. 단편 소설을 읽는 일은 때때로 거울을 보는 것과 같다. 물론 여기서 거울에 비치는 모습은 사람이 아닌, 한 사회이리라. 어떤 사회의 단면을 보기 위해 신문이나 텔레비전 등 미디어를 참고하는 일은 가장 손쉬운 방법일 수 있다. 하지만 문학이라는 필터를 통해 바라본 한 사회의 모습은 직접적이지는 않더라도 때로 더욱 많은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제11회 김유정문학상 수상 작품집인 <웃는 남자>, 그 안에 실린 단편 하나하나를 읽노라니, 거울을 마주하는 기분이 들었다. 2000년대의 한국 그 어느 곳에서 일어나고 있을, 또는 이미 일어난 일들을 지켜보는 심정. 지금의 한국을 살아가고 있는, 살아낸, 살아나가야만 하는 사람들의 쉽지 않은 인생을 엿본다. 그런데 그 풍경은 하나같이 행복과는 조금 거리가 멀어 보인다. 평화롭지도 편안하지도 않다. 그들은 모두 무언가 하나씩은 잃어버렸고(‘웃는 남자’, ‘존엄의 탄생’, ‘최미진은 어디로’, ‘여름방학’, ‘개의 밤’ 등) 잃어버릴 위험에 처했거나(‘웃는 남자’, ‘이혼’), 간직했었다고 느꼈던 것이 실은 순전히 자신만의 착각이었음을(‘평범해진 처제’) 깨닫기도 한다. 그래서 모두 한없이 쓸쓸하고 초라하다.

<웃는 남자>에 실린 일곱 작품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행복해 보이는 이들이 있는가? 그래서 어쩌면 ‘웃는 남자’라는 이 단편 모음집의 제목은 매우 역설적이다. 어쩌면 <웃는 남자>는 이토록 힘든 오늘날의 한국에서 인간으로서 살아남으려면 고통 속에서도 웃는 법을 스스로 깨우쳐야 한다고 다그치는 것인지도 모른다. 첫 번째로 읽은 김숨의 ‘이혼’부터 무척이나 고통스럽다. 이혼을 앞둔 ‘민정’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읽어갈수록 답답하다. 가부장의 폭력으로 삶이 망가질 대로 망가진 엄마와 그런 엄마를 대신해 이혼 서류까지 만들어왔던 민정은 이제 자신의 이혼을 앞두고 있다. 대물림 되는 ‘이혼’의 풍경 속에서 지금 이 땅의 수많은 가정에서 일어나고 있을 가정폭력과 해체의 문제를 세밀하게 다룬다. 민정은 아버지의 폭력 때문에 이미 한 번 가정이 망가진 경험을 했다. 그런데 또 다시 가정을 잃어버릴 위험에 처한 것이다. 그런데 그런 그녀의 삶의 풍경은 어쩐지 낯설지 않다. 지금 이 순간에도 불 켜진 어느 한 집안에서는 일어나고 있을 법한 이야기이다.

조금 유쾌한 작품인가 싶은 기대로 읽어나간 김언수의 ‘존엄의 탄생’에서는 매우 익숙한 망원동 골목 풍경이 펼쳐진다. 길고양이들에게 밥을 챙겨주는 캣맘, 영화감독을 꿈꾸지만 백수나 마찬가지인 박진수, 그리고 그들 주변을 어슬렁대면서 진수의 신경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떠돌이 개. 진수는 어쩌면 이 사회에서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고 있는 쓸모없는 잉여인간이며, 그 잉여는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왠지 떠돌이 개보다 못한 존재가 아닌가 싶어 슬그머니 개에게 발길질을 한다. 어떤 장면 장면에서는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이 나기도 하지만 그 뒷맛은 역시 쓰다.

이기호의 ‘최미진은 어디로’도 이와 비슷하다. 블랙유머가 곳곳에 숨어 있어 키득키득 웃음이 나기도 하고, 중고 책을 팔러 나온 사람과 자기 책을 형편없는 가격에 판매하는 사람에 대한 분노와 일종의 호기심 때문에 직접 거래에 나선 작가와의 만남이라는 설정도 흥미롭다. 과연 어떤 사연이 펼쳐질까, 싶었는데 그 끝은 조금 허무하고 마찬가지로 씁쓸하다. ‘존엄의 탄생’의 ‘진수’나 ‘최미진은 어디로’의 작가 ‘나’ 모두 어찌 보면 이 사회에서는 돈벌이가 되지 않는 일에 몸담고 있는 이들이다. 경제적 가치로만 따진다면 그들의 인간으로서의 가치는 아마 가장 밑바닥이 되지 않을까? 그런 이들이기에 이 사회에서 얼마나 한 인간으로서 ‘존엄’을 지키며 살기 힘들었을지 이 짧은 단편을 보면서도 고스란히 그 괴로움이 전해온다. 그렇기에 ‘최미진은 어디로’의 ‘나’는 ‘모욕을 당할까 봐 모욕을 먼저 느끼며 모욕을 되돌려주려고’(245쪽) 하다가 그런 자기 자신을 깨닫고는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런데 그건 ‘나’가 작가라는 신분이기에 최소한의 부끄러움이라도 느끼며 자신을 성찰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여느 평범한 사람들은 자신이 모욕 당할까봐 상대에게 먼저 모욕을 주는 행위를 오늘도 곳곳에서 서슴지 않고 행하고 있지 않을까? 이렇듯, 이 두 작품에서는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잃어버린, 그 존엄을 잊어야만 적응하며 살아갈 수 있는, 오히려 쉽사리 누군가에게 ‘모욕감’을 주는 이 사회의 풍경이 ‘웃프게’ 그려진다.

윤고은의 ‘평범해진 처제’에서는 젊은 세대의 사랑, 또는 사랑이라고 착각하기 쉬운 ‘그 어떤 애매한 관계’가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페이스북, SNS, 자전거, 종주 기념 도장 등 오늘날 이 사회의 익숙한 풍경 속에 정기적으로 야동을 보고 리뷰를 쓰는 작가라는 조금은 재미난 설정이 등장한다. 가볍고도 능청스러운 이야기를 읽어나가다 보면, 그 결말 또한 어쩐지 쓸쓸하다. 한때는, 연인 사이라고 부르기엔 조금 어색했어도, 그럼에도 자신을 좋아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대상의 진실이 실은 그게 아니었음을 뒤늦게 깨달은 이의 씁쓸하고도 비루한 사랑 이야기-라고 말하기도 머쓱한, 오해와 오독이 빚어낸 관계의 풍경이 펼쳐진다.

황정은의 ‘웃는 남자’는 나머지 작품들이 가진 개인적인 서사 안에서 조금 더 진폭을 넓혀서 한국 현대 사회가 겪어왔던 굵직한 사건들을 과하지 않게 담아냈다. 연인을 잃어버린 d의 일상을 통해 서울 주변부 반지하방, 음악조차 마음대로 들을 수 없는 고시원,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가는 세운상가 풍경이 펼쳐진다. d와 그가 만나는, 그를 스치고 지나가는 인물들 사연으로 한국전쟁, 산업화, 독재와 민주화 운동, 세월호 사건을 지나 이른바 ‘헬조선’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d는 세운상가의 ‘여소녀’로부터 우연히 구입한 오디오로 음악을 들으며 잃어버렸던 생(生)의 의지를 조금씩 되찾는다. 소리가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을 처음으로 느낀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환멸로부터 탈출하여 향해 갈 곳도 없’(81쪽)는 신세이기는 마찬가지다. 그런 d가 언젠가는 ‘웃을’ 수 있을까? 소음이 아닌 소리의 세상으로 계속 나아갈 수 있을까? 그다지 희망적으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건 사실, 명예퇴직 이후 새로운 노년의 삶을 모색하는 ‘이병자’의 이야기를 그린 ‘여름방학’이나, 비정한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더욱 ‘속물적 인간’이 되어가고 있는 ‘김’의 이야기를 담은 ‘개의 밤’도 마찬가지이다. 이 세계의 환멸로부터 탈출하여 향해 갈 곳이 도통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그것이 지금 한국 사회의 풍경은 아닐까.

고백하건데 문학을 좋아하면서도 나는 언제부터인가 한국 현대 문학을 잘 읽지 않았다. 대학 때까지는 한국 문학을 꽤 많이 읽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더는 읽지 않게 되었다. 거울에 비친 너무나도 생생한 그 풍경들이, 익히 봐온 고통스러운 삶의 현장들을 마주한다는 게 때로는 신물이 났던 것 같다. 좀 더 넓은 세상, 내가 잘 모르는 세상이 펼쳐지는 낯선 나라의 문학이 더 좋았다. 그래도 가끔은 이렇게 ‘나’의 모습은 요즘 어떤지 거울 앞에 서게 될 수밖에 없다. 그럴 때 이런 ‘단편 모음집’은 꽤 유용하다. <웃는 남자>는 오늘날 한국 현실을 생생하게 거울에 비춰준다. 그것이 비록 ‘헬조선’- 환멸로부터 탈출 할 곳 없는 지옥도 같은 풍경일지라도 그것을 직시해야만 한다고, 그래야 어쩌면 소음이 아닌 소리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다고, 그런 가능성이라도 찾을 수 있다고 일곱 개의 단편은 저마다 아우성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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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
제임스 설터 지음, 박상미 옮김 / 마음산책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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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산책에서 출간되는 시리즈 가운데 가장 아끼는 것을 고르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 없이 ‘제임스 설터(James Salter)’를 꼽을 것 같다. 최근 그의 단편 모음집 <아메리칸 급행열차 Dusk and Other Stories>가 출간되었다. 2010년 <어젯밤>을 시작으로 짧게는 1년, 길게는 2~3년 텀을 두고 꾸준히 나오고 있다. 작년과 재작년에 나온 <그때 그곳에서>, <사냥꾼들>은 사두기만 하고 아직 읽지 못하고 있지만 그것들을 제외한 다른 작품들 <어젯밤>, <가벼운 나날>, <스포츠와 여가>, <올 댓 이즈> 는 모두 읽어봤다.


며칠 전 <아메리칸 급행열차> 출간 소식을 듣고는 탄식했다. 아니, 왜 하필이면 내가 1월 할당량 책을 모두 주문한 다음에 나왔는가! 일단 장바구니에 담아두고는 2월에 사자, 마음을 다잡았다. 하지만 결국 설터의 손짓에 굴복하고 말았다. 알라딘 굿즈고 뭐고 이것저것 따질 틈 없이 이 책을 주문해서 받자마자 읽기 시작했다. 그의 작품을 몇 권 읽어 본 결과 설터는, ‘장편’보다는 ‘단편’에 탁월하다. <아메리칸 급행열차>에 실린 첫 번째 작품 ‘탕헤르 해변에서’를 읽노라니, 그래, 역시 설터는 단편이야! 만족감이 차올랐다. 그를 처음 알게 된 <어젯밤 Last Night>을 읽었을 때의 흥분이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책꽂이에서 <어젯밤>을 오랜만에 꺼내서 뒤적이기 시작했다.

<어젯밤>의 뒤표지에는 수잔 손택의 평이 실려 있다. ‘제임스 설터는 독서의 강렬한 즐거움을 아는 독자들에게 특히 어울리는 작가다.’- 소설가 하성란은 ‘제임스 설터는 너무 늦게 우리 독자에게 왔다. 왜 존 치버나 레이먼드 카버에 가려져 있었는지! 하지만 지금이라도 그의 소설을 읽게 되어 다행이다. 참 다행이다.’ 말한다. 정말 그렇다. 나는 이토록 강렬하면서도 완벽한 소설은 정말 오랜만에 읽었다. 애초에 알라딘에서 소개 글을 읽다가 이 문장 하나에 그냥 꽂혔다. 이 문장을 읽는 순간, <어젯밤>을 사지 않으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았다. ‘그녀는 열다섯이었고 그는 매일 아침 그녀의 몸을 안았다. 그때는 그게 삶의 시작이었는지, 아니면 삶을 망치고 있는 건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를 사랑했고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스타의 눈’, 42쪽)

<어젯밤>에는 제임스 설터가 그 스스로 자신의 작품 중에서도 최고작에 속한다고 생각하는 단편 10개가 실려 있다. 그가 자신하듯 한 작품 한 작품 모두 대단하다. 나는 어떤 작품을 읽자마자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읽는 일은 거의 없는데 설터의 작품은 자연스레 그렇게 된다. 그래서 놀랍다. 하나의 단편이 끝나자마자 다시 앞으로 돌아가게 된다. 또 읽고 싶어진다. 혹시 내가 놓친 부분, 또는 내가 잘못 생각한 부분은 없는지 다시 읽는다. 아니, 이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그 여운이 몹시도 강렬하기에 나도 모르게 읽고 또 읽는다.

한편의 긴 시를 읽는 느낌이다. 화려한 문장을 자랑하나?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는 않다. 레이먼드 카버처럼 단문 위주다. 별다른 꾸밈도 수식도 없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다. 그런데도 강렬하게 아름답다. 이 책의 옮긴이는 설터의 작품을 읽자마자 자신도 모르게 번역을 하고 있었노라고 고백을 했다. 옮긴이의 이 고백에 진심으로 공감이 갔다. 번역본을 읽으며 나도 모르게 설터가 쓴 원문 그대로 책을 읽어보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혔다. 원래 문장은 어떨까 무척 궁금해진다.

10개의 단편 속 인물들은 모두 겉보기에는 무척이나 평온한 삶을 살아간다. 그런데 그 삶이 어느 순간 비틀어진다. 인생이 어긋나기 시작한 순간, 어쩔 수 없이 예전의 삶과는 갑자기 달라지는 삶. 언제 그렇게 되었을까? 설터는 그 순간을 놀랍도록 포착한다. 설터의 작품 속 인물들은 욕망하고, 사랑하고, 배신하고, 유혹한다. 어그러진 인간관계의 파편들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온다. 그래서 읽고 있노라면 쓰다. 상실감, 공허함, 슬픔의 감정이 한꺼번에 밀려온다. 그런데 매우 아름답고 강렬하다. 삶과 인간에 대한 놀라운 통찰이 돋보인다.

그 시절, <어젯밤>을 읽고 이런 작품을, 이런 작가를 지금에야 만나다니! 안타까운 심정이 들기도 했는데 곰곰 생각해 보니 그 때 만난 게 차라리 다행스럽다. 설터의 작품은 어느 정도 인생을 살아본 후에 읽었을 때 더 다가오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10대에 만나고 20대에 그의 작품을 만났다면 이토록 강렬하게 다가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행복은 다른 걸 갖는 게 아니라 언제나 똑같은 걸 갖는 데 있다는 걸 난 그때 몰랐어’(‘방콕’, 163쪽) 이런 문장을 내가 10대, 20대에 봤어도 절절하게 공감했을까? 그렇지는 않았으리라. 때문에 좀 더 나이 들어서 설터의 작품을 다시 읽는다면 그때는 또 어떨까 기대 되기도 한다.

어느덧 그때로부터 8년이 흘러 <아메리칸 급행열차>가 다시 내 머리맡에 놓여졌다. 이제 겨우 한 작품 읽었을 뿐이지만, 8년 전 제임스 설터를 처음 만났을 때의 그 흥분이 고스란히 되살아난다. 강렬하고 아름다우면서도 쓰디 쓴 이야기들……. 평소 소설 읽기를 무척 좋아하고, 글을 쓰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면, 어떤 식으로든 글을 쓰고 있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제임스 설터 의 작품에서 한동안 빠져나오기는 힘들 것이다. <어젯밤>도 <아메리칸 급행열차>도 쓰고 싶은 욕망을 활활 불러일으킬 것이다.


아내가 좋아할 물건을 찾아내기는 쉬웠다. 우린 취향이 같았다. 처음부터 그랬다. 취향이 다른 사람과 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난 항상 취향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그건 아마도 옷을 입는 방식이나 또는, 같은 이유로, 벗는 방식으로 전해지는데, 취향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다. 그건 학습되고 어느 순간에 도달하면 바뀌지 않는다. 우리는 그런 얘기를 가끔 했다. 무엇을 바꿀 수 있고 또 바꿀 수 없는가에 대해서. 사람들은 언제나 뭔가, 말하자면 어떤 경험이나 책이나 어떤 인물이 그들을 완전히 바꾸어놓았다고들 하지만, 그들이 그전에 어땠는지 알고 있다면 사실 별로 바뀐 게 없다는 걸 알 수 있다. 상대방이 매력적이긴 해도 완벽하지는 않을 때, 사람들은 결혼한 다음에 전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론 잘해야 한 가지 정도를 바꿀 수 있을 뿐이고, 그것마저도 결국은 예전처럼 돌아갈 가능성이 높다. (‘포기’, 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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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목련 2018-01-19 1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임스 설터, 완전 좋아요!! 잠자냥 님의 이렇게 황홀한 리뷰를 읽었으니 <아멘리칸 급행열차>를 빨리 만나야겠네요^^

잠자냥 2018-01-19 11:57   좋아요 0 | URL
네, 정말 좋죠!! 저도 <어젯밤> 리뷰 다른 분들이 쓰신 것 읽어보다가 가장 첫 페이지에 있는 자목련 님의 리뷰를 좀 전에 읽고 그래, 그래, 맞아, 맞아.... ㅎㅎ 하고 왔답니다. ㅎㅎ <아메리카 급행열차> 급행으로 주문하셔서, 천천히~음미하며 읽으세요. ㅎㅎㅎ

레삭매냐 2018-01-19 15: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가 중의 작가란 표현이 명불허전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읽기 시작했습니다.

다만 표지는 정말 뚝심있네요.

잠자냥 2018-01-19 17:18   좋아요 0 | URL
표지는 모아놓고 보니 또 그럭저럭 통일감은 있네요. 하하하하. -_-;;; 즐겁게 읽으시길!
 
여자들
찰스 부코스키 지음, 박현주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2월
평점 :
절판


이 작품은 <우체국>처럼 ‘헨리 치나스키’가 주인공이고 <여자들>에서 그는 ‘우체국’을 때려치우고 전업 작가의 길을 걷고 있다. <우체국>의 치나스키가 30대라면 <여자들>의 치나스키는 50을 훌쩍 넘었고, 작가로서 어느 정도 밥벌이를 하고 살 정도가 되었다. 아주 유명한 작가는 아니지만 그의 작품을 좋아하는 팬도 상당하고 시를 쓰는 치나스키가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낭독회를 하면 사람들이 줄을 서서 입장하고 그렇게 받은 돈으로 치나스키는 집세도 내고 좋아하는 술도 마음껏 사마시면서 살 수 있을 정도다.


이 책은 정말 야하다. 400페이지 정도의 분량인데 매 페이지마다 ‘섹스’라는 단어가 튀어나온다. 이쯤 되니 ‘섹스’라는 단어나 여자 및 남자 성기를 일컫는 그 단어가 ‘안녕’이라는 단어보다 더 친숙하게 느껴질 정도다. 그런데 부코스키의 <여자들>을 읽노라니 이런 의문이 끊임없이 든다. 어떤 여자들은 정말 ‘작가’라면 환장을 못하는 것인가? <여자들>의 서문에 부코스키는 이 작품은 허구이며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그 어떤 사람을 모델로 하지 않았다고 밝히고 있지만, 글쎄 이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 작품은 그냥 부코스키의 분신인 치나스키가 여자들을 만나고 그녀들과 끊임없이 사랑(???이라고 말하기 보다는 섹스)하고 헤어지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이름도 헷갈릴 정도로 수많은 여자가 등장한다. 그녀들은 모두 치나스키를 짧게는 하룻밤 길게는 몇 년 이상씩 거쳐 간다. 치나스키가 묘사하는 여자들은 조금씩 달라 보이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똑같다. 바로 그녀들이 치나스키에게 다가오는 방식이다. 여자들은 모두 치나스키 작품을 좋아하고, 치나스키 글에 반했고, 그래서 치나스키에게 편지를 쓰거나 집으로 찾아오거나 낭독회에 왔다가 치나스키에게 번호를 주고 자기 집을 알려준다.

대부분 치나스키가 ‘작가’라는 사실에 별다른 저항 없이 자기를(정확히는 ‘몸을) 던진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당신의 글을 좋아한다.’ ‘당신 작품이 마음에 든다.’라더니 악수를 하듯 키스를 하고 포옹을 하듯 섹스를 하고 치나스키 곁에 머물다 떠나간다. 치나스키는 부코스키와 동일 인물로 봐도 무방하다. 그리고 이렇게 치나스키(부코스키)를 거쳐 간 여자들 중에는 그와의 관계를 이용해 경제적 이득을 얻는 여자들도 있다.

어떤 여자들은 부코스키 책을 훔쳐가 경매에 올려놓기도 하고, 어떤 여자들은 부코스키와 주고받은 연애편지를 경매에 내놔 돈을 벌기도 했고, 어떤 여자는 부코스키 두상을 본떠서 여기저기 경매에 올려놔 돈을 벌기도 했고, 또 어떤 여자는 부코스키와의 관계를 글로 써 돈을 벌기도 했단다. 이런 걸 노리고(?) 접근한 여자들도 있을 테지만...

이 작품을 읽는 내내 궁금증이 사라지지 않는다. 정말 여자들은 그렇게 ‘작가’라는 직업에 약한 것일까? 부코스키 뿐만이 아니라 조르주 심농을 보라. 그는 뭐 만 명 이상의 여자와 잠을 잤다지 않나? 심농이 만약 작가가 아니었다고 하면 그렇게까지 많은 여자를 이른바 ‘낚을’ 수 있었을까? 굳이 ‘작가’가 아니더라도 여자들은 예술가에게 약한 것 같다. 록 스타에겐 여자들이 줄줄 따르지, 피카소 같은 화가에게도 여자가 많았지, 아! 홍상수 영화만 보더라도 ‘영화감독’이라니까 불나방처럼 몸을 던지는 여자들이 숱하게 나온다.

모든 여자가 그러하지는 않겠지만, 어떤 여자들은 ‘예술가’가 좋은 걸까? 아니면 그 예술가가 만들어내는 작품의 한 부분이 되고 싶나?(실제로 부코스키 작품에 보면 몇몇 여자들은 ‘나중에 나와의 이런 이야기를 쓸 것이냐?’라거나 ‘써 달라’고 부탁을 하기도 한다. 뭐 물론 쓰지 말라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아니면 그냥 ‘유명인’이 좋은 걸까? 명품을 좋아하는 심리처럼 사람도 일단 유명해야하고, 유명한 사람을 만나야 자기도 그런 사람이 된다고 느끼는 것일까?

진심으로 치나스키(부코스키)를 좋아한 여자들도 많았겠지만 처음에는 그의 글 때문에 치나스키(부코스키)에게 반한다는 점은 크게 다르지 않다. 글이 꼭 그 사람일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진실할 수도 있지만 그만큼 거짓말로 꾸며댈 수 있는 것도 글이다(물론 부코스키의 글은 너무할 정도로 솔직하다). 글을 좋아할 수는 있지만 ‘글이 곧 사람’이 되고마는 그 사고의 과정이 여전히 궁금하다. 만일 부코스키가 계속 우체국에서 우편배달부'로만' 일했다면 이렇게까지 여자를 쉽게 얻을 수 있지는 않았을 텐데(물론 이 또한 나의 편견일 수 있다)…. 난 아무리 어떤 작가의 글을 좋아해도 그 글이 좋을 뿐이지, 글쓴 사람 자체를 좋아하게 되는 일은 드물던데.... 부코스키의 '여자들'은 정말 신기하다.




언제나 이렇게 술을 마시면서 낭독회를 했다고...ㅋㅋㅋㅋ Henry Charles Bukows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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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01-17 1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슈퍼돌아이 작가 찰스 부카우스키,
정말 못 말리는 작가였네요.

열책에서는 어케 표지를 색깔만 바꾸어서리
세 권을 날로 잡숫는지 대단한 신공이었습니다.

호밀빵도 사두기만 하고 못 읽고 있네요.
빨랑 읽어야겠습니다.

잠자냥 2018-01-17 17:27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 ‘슈퍼돌아이‘에 웃었습니다. ㅋㅋㅋㅋㅋ 적절한 비유입니다. 호밀빵 재밌어요! ㅋㅋ 요즘 이책저책 읽느라 정신 없으신 것 같던데 ㅎㅎ 조만간 호밀빵도 추가요!!

Falstaff 2018-01-18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코스키, 구라일 확률 90%에 만원 겁니다.
ㅋㅋㅋㅋ 저렇게 술 마시고 그리 많은 여자와 밤을 지냈지요. 그냥 잠만 잔 거예요!!!
그리고 심농의 최하 만 명의 여자와? 흐흐흐... 1/10 정도도 믿지 않습니다. 남자새끼들 그런 방면에 구라 때리는 거, 못말려요. ㅎㅎㅎ 만 명의 여자들과 단 하루 씩 자더라도 하루도 쉬지 않고, 부모님 제사도 안 모시고 꼬박 27년이 넘게 걸리는데요, 그렇게 해대다가는 제 명에 못 죽습니다. ㅋㅋㅋ
˝작가˝라는 타이틀에 매혹을 느끼고 그게 사랑인줄 오해하는 거 아닐까 합니다.
잘 생긴 남자에 홀랑 넘어가는 거나, 돈 많은 놈한테 넘어가는 거나 뭐 비스무리...

잠자냥 2018-01-18 18:00   좋아요 0 | URL
아니 진짜 같은데 .... 그럼 역시 대단한 작가들이네요 ㅋㅋㅋㅋ 왕구라쟁이들 ㅋ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