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녘 그는 내게 다가와 작은 입술을 살포시 가까이 댄다. 그러고는 곧 내 눈썹과 코, 입술에 입맞춤을 한다. 그러다가는 급기야 그 작은 입술을 열어 조그만 혀를 내밀고 나의 뺨, 나의 입술, 나의 눈썹을 핥는다. 그러면서 자신도 모르게 기쁨의 소리를 내뱉는다. 그릉그릉, 나는 그의 까칠한 혀를 느끼며 기분 좋게 웃으며 슬며시 다시 잠속으로 빠져든다. 내 둘째 고양이와 나의 밤은 그렇게 깊어 간다.
그러던 어느 날, 일주일 전인가 녀석은 나에게 무언가 기분이 상했는지 내가 잠드는 방이 아닌 다른 방에서 잠을 자기 시작했다. 안타까이 불러도 오지 않는 그. 부르면 오히려 부르지 말라는 듯 차갑게 앵알거리는 그. 대체 무엇 때문일까 알 수 없지만 그날 이후로 나는 새벽녘 그의 입맞춤도 눈썹에 닿는 까칠한 혀의 기쁨도, 이윽고 이어지는 그릉그릉 자장가 같은 다정한 소리도 들을 수 없게 되었다. 그 밤들은 얼마나 허전했던가. 그러다가 문득 그는 혼자 마음이 풀렸는지, 며칠 전부터 다시 새벽이면 나를 찾아와 내 귓가에 그릉그릉 자장가를 불러주곤 한다.
올리브는 생이 그녀가 ‘큰 기쁨’과 ‘작은 기쁨’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다. 큰 기쁨은 결혼이나 아이처럼 인생이라는 바다에서 삶을 지탱하게 해주는 일이지만 여기에는 위험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해류가 있다. 바로 그 때문에 작은 기쁨도 필요한 것이다. 브래들리스의 친절한 점원이나, 내 커피 취향을 알고 있는 던킨 도너츠의 여종업원처럼. 정말 어려운 게 삶이다. (<올리브 키터리지>, 124쪽)
드디어 마침내, 요즘 <올리브 키터리지>를 읽고 있다. 노년의 삶을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는 이 작품은 ‘올리브 키터리지’라는 한 노년 여성과 그녀 주변 인물의 삶을 묘사한다. 많은 이들이 이런 점에서 이 작품을 좋아하는구나, 공감하면서 참 잘 쓴 작품이구나 감탄하면서 읽고 있는데, 때마침 위의 구절에서 눈길이 한참 머물렀다. 인생은 올리브 그녀가 생각하듯이 ‘큰 기쁨’과 ‘작은 기쁨’이라고 부를 만한 것들로 이루어진다. 나의 ‘작은 기쁨’이란 무엇일까 생각하다 보니,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내 둘째 고양이, 그의 새벽녘 뽀뽀와 핥아줌, 그리고 그릉그릉 자장가 3박자라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요 일주일 녀석이 그 행복을 앗아간 후에야 깨달은 일상의 소소한 기쁨들….
어쩌면 내게 이 ‘작은 기쁨’은 ‘큰 기쁨’의 하나일 수도 있다. ‘결혼이나 아이처럼 인생이라는 바다에서 삶을 지탱하게 해주는 일’이지만 ‘위험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해류’도 존재하는 ‘큰 기쁨’- 나는 비혼주의자이므로 올리브 키터리지가 말하는 종류의 큰 기쁨, 그러니까 ‘결혼’이나 ‘아이’같은 큰 기쁨은 내 삶에서 없고, 앞으로도 없을 예정이다. 사실 그것이 큰 기쁨인지는 여전히 내겐 의문이다.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분명 그럴 것이다. 그 대신 나의 고양이들은 어느 날 문득 내게 찾아와 인생이라는 험난한 바다에서 삶을 지탱하게 해주고 있으며, 그와 함께 ‘위험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해류’도 있음을 덩달아 깨닫게 해주고 있다. 녀석들이 아프거나 노화해 가는 것을 지켜보노라면 그 해류가 더 가까이 밀려오는 것 같아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짐은 어쩔 수가 없다.
다시 ‘작은 기쁨’을 생각해 본다. 올리브에게는 그녀의 커피 취향을 알고 있는 던킨 도너츠의 여종업이 있다. 나는 도시의 익명성을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이라 잘 가는 카페의 주인이 어느 날 알은체를 하면 그 카페에 더 이상 가지 않는 다소 괴팍한 성질의 소유자이다. 비슷한 이유로 식당에서도 알은체를 하면 그곳에 더는 발걸음을 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던킨 도너츠 같은, 익명성이 보장된 곳에서 점원이 내 커피 취향을 알아본다면 더더욱 기겁할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이들 중에는 기막히게 그런 취향을 잘 알아내는 이들이 있다. 나의 집 근처 편의점의 S 점원도 그런 이들 중의 하나가 아닐까. 어느 날 퇴근 후 늘 그렇듯이 나는 4캔 만 원인 맥주를 사서 계산대 위에 올려두었다. 그런데 점원 S는 아주 친절하게 계산을 해주면서 내게 물었다. “이 맥주 맛있어요?” “네, 저는 맛있더라고요.”하면서 주섬주섬 가방에 넣었다. 그 맥주는 국내 수제맥주인 ‘수퍼 스윙라거’였다. 사실 나는 언젠가 이곳에서 밝힌 적이 있지만 ‘서울숲’이라는 맥주를 더 좋아한다. 그런데 이 편의점에서 더는 그 맥주가 보이지 않아 대체용품으로 찾은 게 ‘수퍼 스윙라거’였다. ‘서울숲’이 아쉬웠던 터라 한마디 덧붙였다. “그런데 서울숲이라는 맥주가 더 맛있어요.” 점원은 눈을 반짝이며, “그래요? 한번 먹어봐야겠다. 그 맥주 냉장고 안에 있어요. 찾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진열 안했는데 꺼내놔야겠네요. 그걸로 드릴까요?”한다. 점원을 귀찮게 하기가 미안해서 괜찮다고 말하고는 가게를 나왔다.
그러고 나서 얼마나 지났을까 아마 그 다음 주였을 것이다. 나는 또 퇴근 후 4캔 만원을 주문처럼 떠올리며 그 편의점에 들러 또 다시 습관적으로 ‘수퍼 스윙라거’ 4개를 담았다. 냉장고에 서울숲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계산을 하려고 맥주 4개를 계산대에 올려놨는데, 바로 그 점원 S가 안타깝다는 듯이 말을 덧붙인다. “서울숲 냉장고에 있는데 드릴까요?” 나는 화들짝 놀랐다. 일주일 전에 서울숲이 맛있다고 지나치듯 말했는데 그 점원은 그 사실을 기억할 뿐만 아니라 서울숲을 나 때문에 냉장고에 넣어뒀다는 말을 덧붙이니까 뭐랄까 몸 둘 바를 모르겠는 거였다. “아, 괜찮아요. 귀찮으실 텐데 다음에는 서울숲 달라고 말씀드릴게요.”하고 가게를 나왔다. 집으로 걸어오는 내내 저 사람은 어떻게 그 많은 손님들 중에 내가 지나치듯 말한 ‘서울숲’을 기억하는 걸까. 손님들마다 어떤 담배를 좋아하는지, 어떤 맥주를 즐겨 사 가는지 다 아는 걸까? 문득 궁금했다. 그러다가 묘하게도, 점원 S의 관심과 배려가 그다지 불쾌하지는 않다는, 익명의 섬에서도 가장 미미한 익명으로 존재하기를 바라던 내가 내 취향을 누군가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더는 불쾌해 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올리브 키터리지의 ‘작은 기쁨’처럼 이 또한 나의 ‘작은 기쁨’이 된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