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를 돌아보다가 몰리 님의 글 중 ‘나중에 죽으면 물려줄 사람도 없는데 이것들은 다 무자비하게 헌책방으로 가겠지’라는 구절을 보고 몇 자(?) 끼적여본다. 나 또한 나날이 쌓여가는 책을 보면 문득 문득 그런 생각이 들곤 하기 때문이다. 어제 우연히 1년 전에 찍은 내 책상 사진하고 지금 책상 위를 비교해 보니 1년 전 책상 위에는 책이 별로 없는 게 아닌가! 지금은 책꽂이에 더는 꽂을 공간이 없어 바닥에 쌓아두더니 책상도 나날이 좁아지고 있다. 알라딘 플래티넘 회원을 벗어나자는 결심이 무색할 정도이다. 그나마 책상을 책으로 다 뒤덮는 만행은 저지르지 않을 것 같은데, 그것은 내 고양이 2번님께서 책상 위를 당신의 침대로 애용하시기 때문에 그분이 몸을 뉘일 공간은 마련해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현재 비혼이고 앞으로도 결혼하지 않을 것이고 자식은 더더군다나 이 세상에 남길 생각이 없지만, 그럼에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이따금 ‘물려줄 것’을 생각해보곤 한다. 엄마는 몇 년 전에 “그래도 이 세상에 왔으면 뭐라도 남기고 가야 하지 않겠느냐”며 내가 보통의 삶을, 아이를 낳는 인생을 살기를 바라시는 간절한 편지를(실제로 처음으로 이메일을 보내심;) 보내기도 하셨는데 이제는 포기하신 것 같다. 내가 세상에 남기고 갈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책이 가장 많을 것 같다. 책 쟁여두는 사람들 가운데는 다른 것들- 예컨대 음반이나 문구류에도 강한 집착을 보이는 이들이 많을 텐데, 나 또한 음반도 만만치 않게 많다. 그래도 분야를 한정해서 내가 모으는 장르는 주로 록과 클래식인데, 그나마 음반은 책보다 애정이 덜한지 다행스럽게도 몇 년 사이 CD는 구매량이 크게 줄기는 했다.
독립한 지 십 년이 훌쩍 넘었는데, 처음 집을 나올 때 책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커다란 책꽂이로 하나쯤? 원룸에서 시작했기에 책을 많이 갖고 나온다는 게 부담스러웠고, 내 집이 아닌 이상 몇 년에 한 번씩 이사 다닐 때마다 책을 옮길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십 년이 넘는 동안 책은 켜켜이 쌓여가서 지금은 책에 둘러싸여 사는 수준이 되었다. 이사 갈 때마다 짐꾼들의 볼멘소리를 들어야 했고, 선생님인가요? 박사님인가요? 직업에 대한 추측의 소리도 많이 들었다. 다 아닙니다. 저는 그저 알라딘 개미입니다. 그러다 보니 가만히 누워 있노라면 나의 이 책 탐욕에 고개를 절레절레 하면서 저 많은 책들은 내가 죽으면 어떻게 될까 싶어진다.
책을 나만큼 읽지는 않지만 책은 좋아하는 내 애인은 나보다 어린데, 그래서 나는 내가 먼저 죽으면 내 책 다 가져, 라고 유언(?) 아닌 유언을 남기기도 했다. 그랬더니 애인은 그럼 음반은? 묻기에 음반도 가지라고 했다. 죽고 나면 저세상에 싸갖고 갈 일도 없고 죽어서 책을 읽고 음반을 들을 일도 없을 터이니 갖고 싶다는 사람에게 남기고 가면 후련할 것 같기는 하다. 그런데 애인하고 가끔 심하게 말다툼하고 헤어져버릴까 보다 생각하게 되는 날은 머릿속으로 책이랑 음반은 내가 다 가져가야지, 선물로 준 책이랑 음반도 뭔가 탐나는데 그냥 가져갈까? 막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애인아, 미안하다........그런데 그런 생각 드는 건 어쩔 수 없;;;), 나의 이 책 집착은 참으로 심각한 것 같다.
아무튼 책과 음반은 애인에게 주기로 했는데, 애인은 그럼 장난감은? 하고 묻는다. 자못 심각한 표정이다. 책과 음반과 달리 경쟁자가 있기 때문이다. 나의 수집병은 책이나 음반에서만 그친 게 아니라 한때 미친 듯이 장난감, 그러니까 어른들의 장난감이라 할 수 있는 베어브릭, 큐브릭, 레고 미니 피규어 수집에 열을 올린 적이 있어서 그것들도 꽤 많다. 게다가 이런 상품은 한정품이 많아서 세월이 지나면 가격이 오르는데....... 아무튼 그렇다. 그런데 아주 오래 전, 우리집 조카 1호가 꼬꼬마 시절, “이모, 이모 죽으면 저 장난감 어떻게 할 거야?” 너무나 진지하게 물은 적이 있어서 빵 터진 적이 있다. 그때 조카 나이 다섯 살 즈음이라, 녀석이 뭔 가치도 모르고 그저 장난감이 좋아 보여서 저렇게 묻나 보다 하고 “너 줄까?” 물었더니 선뜻 “응!”한다. 그 후로 녀석은 잊을 만하면 “나중에 저 장난감은 내 거”라고 도장을 찍곤 했다. 그래도 커서는 그 약속을 잊을 줄 알았는데 고등학생이 된 어느 날에도 “장난감은 잘 있지?”하고 물어서 진심 놀란 적이 있다. 이 녀석 정말인가 봐? 어머나.....그래서 나는 어떤 분란도 일으키지 않고자 내가 할머니가 되면 장난감은 영화 <토이 스토리>의 한 장면처럼 야드 세일하기로 결심했는데, 그때 내 야드가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겠다. 죽기 전 야드 세일의 그날을 위해 야드를 마련해야 한다!
어느 수집광의 집요한 자기 관찰기인 <아무 것도 아닌 것들에 대하여>에서는 수집을 일컬어 “소유하는 능력을 끊임없이 재확인하는 행위”이고 “타자성을 통제하는 훈련”이자 “궁극적으로는 일종의 기념비적 건물로서 사후의 생존을 보장하는 일”이라고 했다. 또 “이런 이유로 우리는 흔히 한 컬렉션에서 그 컬렉션의 수집가를 읽어낼 수 있고, 그다음으로는, 비록 대상물 자체에서 읽어낼 수는 없더라도, 대상물을 획득하고 유지하고 전시하는 일련의 과정에서 그 수집가를 읽어낼 수 있다. 수집은 삶을 써나가는 행위”(90~91쪽)라고 했다. 그러고 보면 문학 책과 록과 클래식 음반으로 가득한, 거기에 온갖 피규어들이 들어선 내 방은 내 역사이자 나 자신인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이 많은 물건들을 지켜보노라면 가끔은 한숨이 나오면서 이제 그만 미니멀리스트로 거듭 태어나서 차라리 경험수집가로 살아가는 게 낫지 않을까 싶어지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