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노니는 집 - 제9회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대상 수상작 보름달문고 30
이영서 지음, 김동성 그림 / 문학동네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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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이는 아버지를 잃는다. 필사쟁이었던 아버지는 나라에서 금지하는 천주학 책을 필사하게 되었고, 그것이 발각되어 관아에 끌려가 곤장을 맞고 시름시름 앓다 죽는다. 아버지는 장이를 최 서쾌(책을 파는 사람)에게 맡긴다. 장이는 어릴 때부터 책과 함께 했다. 아버지는 필사쟁이었고, 나중에 책방을 내자고 했었다. 아버지를 잃은 장이는 자꾸 주눅이 들고, 조심스러워진다.

최 서쾌의 책방에서 책심부름을 하는 장이. 기생집에서 당돌한 어린 아이 낙심이를 만나게 된다. 똑 부러지게 말하는 어린 낙심이가 밉다가도 미쁘다. 기생 미적 아씨는 자애로운 마음을 가졌고, 언문 소설을 좋아했다. 남동생 백일값으로 팔려온 낙심이를 딸처럼 동생처럼 보살핀다.
홍 교리와의 만남도 장이에게는 새롭다. 양반이 자기처럼 하찮은 아이에게 말을 건네고 질문을 하는 게 새롭다. 그의 서재에 가득한 책도, 좋다. 떠돌이 허궁제비에게 홍 교리에게 전달할 상아찌를 빼앗기고, 바짝 얼어붙어 홍 교리를 만났지만, 홍 교리의 자상함에 아이는 포근함을 느낀다. 

상아찌를 되찾기 위해 돈을 버는 장이는 들킬까 혼날까 마음이 천근만근이다. 아버지도 없는데 최 서쾌에게 쫓겨나면 어쩌나 마음이 조마조마. 난이의 당돌한 고자질로 난감한 상황을 해결했을 때 아이가 터트린 울음은 가슴을 찡하게 한다. 최 서캐는 아비 잃은 아이가 비뚤어지지 않을까 엄하게 키운 것인데 어린 아이는 그 마음을 알 리가 없다. 아이는 사건이 해결되면서 한 뼘 더 자란다. 최 서캐의 마음을 읽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아이는 아비처럼 필사쟁이가 된다. 어려운 한자보다 언문의 필사가 더 쉽고, 편하다. 사람들이 언문 소설을 좋아하는 것처럼, 언문 시대가 오고 있음을 느낀다. 책심부름을 덜하게 되고, 필사에 매진하면서 아버지와 함께 열고 싶었던 책방을 꿈꾼다.
아이는 자신을 귀하게 봐주는 이들에게 마음을 연다. 외톨이라고 생각했지만, 장이의 곁에는 최 서쾌도 있었고, 낙심이, 홍 교리, 미적 아씨가 있다. 시대가 조금씩 변하고 있다. 신분의 구분이 철저하던 시대였다. 그럼에도 그들은 서로 어울릴 줄을 안다. 그 중심에는 천주학이 있다. 아이는, 천주학 때문에 아버지가 죽었던 것처럼 가까운 사람이 다치는 게 싫다. 자기가 전한 책이 천주학인 걸 알게 된 장이는 동란이 일어나자 홍 교리 집으로 뛰쳐들어가 책을 찾아 불태우게 한다. 아이는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을 지킬 줄 아는 마음도 생겼다.

<책과 노니는 집>은 시대적 배경보다, 아이의 심리와 행동 묘사가 와 닿는다. 아이의 천진한 마음과 질투, 걱정, 슬픔, 근심이 과하지 않게 담겨 있다. 역사적 배경을 자연스레 공부할 수 있고, 시대의 모습을 읽을 수 있다. '문학동네 어린이 문학상 대상'을 수상한 <책과 노니는 집>은 아이들이 이해하기 쉽고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정보를 습득해야 한다는 압박 없이 자연스럽게 장이의 감정에 동화된다. 관계와 감정의 이해라는 면에서도 쉽고 재밌게 이해할 수 있다. 초등학교 5, 6학년 이상을 대상으로 쓰여졌지만, 성인이 읽어도 충분한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아이가 겪어가는 일들을 따라가다 보면, 아이가 훌쩍 커버린 것을 알 수 있다. 아비를 잃어 두렵고 힘들었던 마음이 사람에게 향한다. 아이처럼 어른의 잔소리에 투정을 부리지만, 결국 자신을 향한 사랑임을 깨닫는다. 누군가를 동경하며, 무엇이든 잘하고 싶어 한다. 칭찬에 기뻐하고, 좋아하는 이에게 더 큰 행복을 주기 위해서 노력한다. 주변 사람들이 위험에 닥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자신도 힘이 되려 한다. 처음에는 자신의 처지에 서글픈 마음이었지만, 장이는 결국 자기가 가야 할 길을 깨닫게 된다.
아이의 이러한 변화는 책을 읽는 이에게도 기쁨이고, 즐거움이다. 

아이들에게 즐겁고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책을 건네줘야, 책을 읽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정보만 가득한 어린이 지식 정보책 보다, 이런 책 한 권이 아이들에게 흥미롭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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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을 길들인 풍차소년
윌리엄 캄쾀바, 브라이언 밀러 지음, 김흥숙 옮김 / 서해문집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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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말라위에 사는 '윌리엄 캄쾀바'. 어린 아이의 생각과 행동이 아프리카에 희망을 만들었다. 바람을 따라온 희망에서 아프리카의 빈곤과 고통을 씻어줄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MBC 시사 프로그램 <W>를  볼 때면, 내가 우리가 얼마나 많은 풍요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는지 느낀다. 하지만, 돌아서면 결국 내가 갖지 못한 것들 때문에 투덜댄다. 내가 배고픈 현실이 아닌 이상, 다른 사람의 가난과 고통은 가슴 아픈 이야기일 뿐이니.

캄쾀바는 어릴 때부터 가난과 배고픔을 경험한다. 그것은 상상을 초월한다. 단지 밥이 없어서 굶는 것 이상이다. 먹을거리가 풍요롭지 않은 나라에서 배고픔이란, 먹을 게 거의 없다는 뜻이다. 2주 동안 세끼 정도로 생활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은 나조차 상상이 되지 않는다. 먹을 수 없는 것을 먹게 되는 상황도 슬프지만, 먹을 것 때문에 죽고 죽이는 상황은 끔찍하다. 정부의 부패와 타락이 국민을 배고픔으로 내몰고, 무지가 환경을 척박하게 만든다. 벌목으로 나무가 사라지니 홍수와 가뭄은 반복된다. 농작물은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타거나 썩어버린다. 실낱같은 희망이란 것도 없다.

캄쾀바는 이런 상황 속에서도 학교만은 다니고 싶었다. 하지만, 먹을 것도 구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학교에 갈 수 있는 돈이란 없다. 배우고 싶지만, 배울 수 없는 이 현실에 캄쾀바는 절망한다. 하지만, 절망으로 끝나지 않는다. 도서관을 드나들며 책을 본다. 책 속에는 많은 세계가 있었고, 캄쾀바의 눈을 잡아끈 것은 과학이었다. 과학만 있다면, 반복되는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과학을 모르는 사람들은, 모르기 때문에 과학을 믿지 않는다. 모든 재앙은 마법사가 쫓아줄 것이라고 믿는다.

캄쾀바의 무모한 도전은 사람들의 비웃음을 산다. 비웃음보다 안타까운 것은 그가 배운 것들을 시도해 보려면 쓰레기장을 뒤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필요한 것들은 쓰레기장을 뒤져 쌓아야 했고, 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쓰레기장을 뒤지는 캄쾀바를 모두 비웃고 미친 사람 취급했다. 하지만, 캄쾀바는 전기 바람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못했고, 고철 덩어리를 모아 새로운 희망을 만들어냈다.
그는 풍차를 직접 본 적이 없었지만, 풍차를 만들었다. 말라위에 부는 바람을 풍차에 모아 전기로 만들 수 있었다. 직류와 교류에 대한 고민, 전력에 대한 고민, 사람들 모두 전기를 쓸 수 있다면 가난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소망. 풍차에는 그가 고민하는 모든 것이다. 

말라위 사람들은 상상하지 못했다. 바람을 모아 무언가를 해낼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이 바보여서가 아니다. 그들은 몰랐다. 알 수 있을만한 환경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생존과 싸운다. 빈곤은 대를 이어 그들을 괴롭히고, 어린 아이들의 노동으로도 가난은 해결되지 못한다. 태어나면서부터 입에 들어가야하는 걱정을 하는 아이들이 과학, 예술, 인문학을 접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자라기 때문이다.
그 속에서 캄쾀바는 자신의 힘으로 풍차를 만들어냈다. 이것은 사람들에게 큰 메시지를 주었다. 기자들이 찾아가고 세계에서 그를 주목할 때 그는 말했다. "난 해보고 만들었어요." 그 말은 많은 사람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그의 이야기가 알려지자 그는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원하던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지금도 계속 공부를 해나가며 아프리카 사람들의 현실을 개선해 나가기 위해 활동하고 있다.
아이의 작은 움직임은 감동 이상이다. 사람들은 아프리카의 현실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되었다. 관심은 도움으로 이어질 수 있다. 캄쾀바가 해 낸 일은 아프리카의 변화와도 연결되는 일이다.

캄쾀바의 처절한 고백들은 눈으로 읽고, 느낄 수 있을 뿐 내가 경험한 것은 아니다. 그가 얼마나 고통과 두려움 속에서 살았을지 희망을 느끼지 못한 채로 얼마나 방치되었을지 나는 알 수 없다. 그의 이야기로 나는 풍요로운 부끄러움을 느낀다. 아무것도 없이 풍차를 만들기 시작한 한 아이가, 많은 것을 만들어 냈다. 바람을 길들인 풍차 소년 캄쾀바는 우리에게 필요한 희망을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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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e - 시즌 5 가슴으로 읽는 우리 시대의 智識 지식e 5
EBS 지식채널ⓔ 지음 / 북하우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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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e는 줄곧 하나의 이야기를 해왔다. 여러 개처럼 보이는 이야기도, 사람이었고, 정의였고, 사회였고, 올바름이었다. 간결한 카피와 코끝이 시큰해지는 감동. 울대가 뜨거워지며 짜릿한 눈물이 치솟을 때도 있었다. 그것은 몇 줄 때문이었고, 짧은 이야기 때문이었다. 

<지식 e 5>에는 사람들을 모았다. 기존의 폼은 유지했지만, 사이사이 테마와 관련된 사람들을 인터뷰해 실었다. 그들의 생각과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난 인터뷰는 사회와 개인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인간'과 '인생'은 벗어날 수 없는 테마다. 그 안에는 '인권', '생활권', '생존권' 등 처절한 싸움이 담겨있다. 개인의 문제가 사회의 문제임에도 우리는 외면하고 사는 것들이 많다. 다른 방향에 서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나의 오늘을 묻게 했다. 

결국 '다양성'이다. '다양성'이 무시되는 사회는 성장할 수 없다. 획일화된 생각과 독단적인 결정에 순응해야 하는 사회라면 미래가 없는 것이다. 그저 로봇처럼 조종하는 대로 명령하는 대로 움직이면 되는 것이다. '다양한' 사람들의 몸부림이 사회가 앞으로 나아가는데 많은 기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 나의 오늘과 내일이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고산거별 등반 전문산악인 김세준, 축구저널리스트 서형욱, 팝아티스트 낸시랭, 판화가 이철수, '노리단' 퍼포머 강희수, 마임이스트 유진규, 공연연출가 탁현민, 진보네트워크 활동가 장여경, 인드라생명공동체 상임대표 도법 스님, 뮤지션 한대수, 친환경에너지 발명가 황성순, '미디어몽구' 운영자 김정환, 용산 철거민 참사 유족 김영덕, 성공회대 연구교수 보노짓 후세인, '슬로 라이프 운동' 지도자 쓰이 신이치.

모두 다른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다. 다른 목소리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목소리다. 그들의 생각과 삶을 모두 동의할 필요는 없지만, 이해 가능한 목소리다. 생각해봐야 할 목소리다.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는, 문제의 발생으로부터 시작된다. 문제가 제기되고 나면, 다른 목소리들은 멈출 수 없다.

그들의 목소리 중 가장 마음이 아팠던 목소리는, 용산 철거민 참사 유족 김영덕 씨의 목소리였다. 애원도 통하지 않고, 인권이 말살 당하고, 약자에게 불을 지르는 사회를 경험한 그녀의 처절한 목소리가 뼛속까지 사무쳤다. 그리고 오늘의 나에게 묻는다. 오늘의 나는 그들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노력했었나? 그들이 찢어질 듯 외치는 악다구니가 과연 그들만의 문제일까? 그녀는 몰랐다고 내가 이렇게 될지 누가 알았냐고 했다. 한 가정이 산산조각나며 뿌리까지 흔들렸다. 단 하나의 사건, 단 하나의 결정, 단 하나의 외면 때문이었는데도 내가 아니니까 고개 돌리지 않았던가. 나는 부끄러운 오늘의 나에게 묻는다. 그녀가 말한다. "지난 대통령 선거 때 누구를 찍었냐고요? 내 손가락을 잘라 버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녀의 뼈아픈 후회가 사무친다.

성공회대 연구교수 보노짓 후세인의 목소리는, 부끄럽게 했다. 우리와 피부색이 달랐을 뿐인데, 이유도 없이 욕을 먹고 동행한 여자까지도 치욕스러운 말을 들어야 했다. 공권력은 도와주려 하지 않았고, 그가 교수라는 말조차 믿지 않았다. 신분 위장일 거라며, 제대로 신원 조회도 해주지 않았다. 경찰도 시민도 한통속이 되어 그의 피부색만으로 그를 차별했다. 그는 모멸감을 느끼고, 고소했다. 힘겨운 싸움이다. 그는 피곤하다. 이런 한국 사회가, 피부색으로 우월한 인종과 무시해야 할 인종을 나누는 이 사회에서 살아갈 희망을 찾아야 할까? 하지만, 그의 목소리가 있기에 우리는 조금씩 변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건투를 빈다. 

진보네트워크 활동가 장여경, 그녀 같은 사람이 없다면 우리의 사생활은 무사할 수 있을까? 그녀의 투쟁은 우리 모두의 투쟁이 되어야 할 것인데 우리는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감청의 합법화라니 온 국민을 통째로 관리하겠다는 것인가. 목소리가 있지만, 목소리가 없는 시대가 될 것이다. 박원순 선생님은 자신은 도청당하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태연한 그의 말이 난 두려웠다. 그런데, 모든 사람의 목소리가 누군가와 떠드는 이야기를 누군가가 듣고 있을지도 모른다면. 우리가 막아야 하는 것이 무엇일지, 올바르게 생각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지. 이대로라면 무서운 일이 일어날 것만 같다. 

우리 시대의 다른 목소리가 널리 널리 퍼지길 바란다. 그리고, 오늘의 나도 다른 목소리에 귀기울이길 바란다. 공부만 해서 되는 시대가 아니다. 다른 눈으로 세상을 바라봐야 하는 시대임을 깨달아야 한다.
한 사람의 목소리에는 큰 울림이 있다. 상상의 세계란 없다. 현실이 될 수 있는 세계만 있을 뿐.
<지식 e 5>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세계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그것이 중요하다. 다른 목소리의 힘은 그곳에서 나온다. 노력, 행동. 절망을 말하기엔 때 이르지 않은가? <지식 e 5>는 희망을 말하기에 묻는다. 당신의 오늘은 어떠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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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야행 1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 태동출판사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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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당포 주인이 살해당했다. 하지만, 누가 죽였는지 알 수 없다. 미심쩍은 게 많지만, 살인자를 밝혀내기에는 역부족이다. 많은 심증, 하지만 관계된 이들마저 하나 둘 죽어 버리고 만다. 왜일까? 안갯속에 갇힌 살인은 개운치 않은 뒤끝을 남긴다. 도대체, 누가, 무슨 이유로 죽였단 말인가. 그리고, 그의 주머니 속에 있었던 백만엔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의문투성이인 사건은 흐지부지 안갯속으로 사라지고, 시간을 건넌다.
눈설(雪) 이삭수(穗) 유키호, 그녀는 가난 속에서 살다, 엄마를 가스 중독사로 잃고 친척집에 입양된다. 어둠이 가득할 것 같은 그녀는 눈부시게 아름답고 우아하다. 공부도 잘해 사람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는다. 그녀는 그것을 즐기며, 누구나 자신을 좋아하게 만든다.
아버지가 살해된 후 어둠에 휩싸인 료. 차갑고 냉정하며 잔인하고 섬뜩하다. 돈을 버는 수완이 좋지만, 정직하게 번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돈에 집착한다. 그가 돈을 어디에 쓰는지, 그의 사업 아이템들이 어디에서 시작된 것인지 알 수 없다.

이 둘은 이상한 끈으로 묶여 있다. 하지만,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며 알 수 없다. 그들의 뒤를 끈질기게 쫓는 것은 사사가키 형사뿐. 하지만, 형사도 수년간 그들의 수수께끼를 명쾌하게 알아내지 못했다. 19년이 지나서야 밝혀진 진실, 감당하기 힘든 진실이 곳곳에 숨어 있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독자에게 혼란을 주기 위해, 의문이 들고 오해를 살만한 사건들을 여기저기 흩뿌려  놓는다. 차례도 없고 뒤엉킨 것 같은 조각들이지만, 결국 하나의 진실에 맞물리게 된다. 퍼즐 같은 것이다. 결국, 하나의 그림이 완성되는 것. 

사건의 중심에 놓여 있는 것은 언제나 료와 유키호지만, 그들이 대화를 나누거나 마주치는 장면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료는 료대로 살아가고 유키호는 유키호대로 살아간다. 하지만, 유키호가 어려움에 처하거나 곤란한 상황이면 꼭 이상한 사건이 일어나고, 그 뒤에는 료가 있다는 것을 조금씩 알 수 있다.
그들이 세상 사람들을 속이는 방법은 기상천외하다. 하지만, 세상에 나서서 화려하게 사는 건 유키호, 그늘에 숨어 어둠을 짊어지는 것은 료다. 그 이유는 료의 아버지의 죽음에서 시작된다. 실마리를 찾기까지는 독자도 긴 시간의 터널을 건너야 한다. 그게 히가시노 게이고의 애타게 하기 작전이다. 금방이라도 살인자는 누구다라고 알려주면 좋으련만 사실, 그의 이야기에서 살인자는 중요하지 않다. 사건이 시작되면서 벌어지는 또 다른 그들의 삶이 초점이다.

모든 일은 철저한 계획이다. 빈틈없다. 유키호는 밝고 따뜻한 곳에서 계획을 따라 움직인다. 그녀는 갖고 싶은 것을 가질 수 있고, 필요 없어지면 버릴 수 있다. 자기편을 만드는 데 오랜 시간을 투자하지 않는다. 그녀의 방법은 하나다. 료. 바로 료가 방법이다.
그녀는 돈에 집착한다. 그녀의 불행은 돈에서 시작됐다고 생각하는 걸까? 결국, 그녀는 돈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위치에서도 돈에 대한 욕심을 거두지 않는다. 료도 돈에 집착한다. 하지만, 료의 집착은 유키호의 집착과는 다르다. 그의 행복이 아니라, 누군가의 행복을 위해 돈에 집착한다.

백야행에 등장하는 어떤 인물이 말한다. 유키호가 아는 사람들은 어딘지 모르게 조금씩 불행해지는 것 같다고. 유키호는 자신과 관계하는 사람들의 행복의 기운을 빨아먹고, 그들을 내팽개친다. 자신이 행복해지는 수단으로 삼는 것이다. 그녀는 이미 어릴 때부터 너무 많은 불행을 겪고 있었기에 더이상 불행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행복해질 수 있다면, 누가 다치든 죽든 사라지든 상관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는 언제나 웃는 낯이다. 섬뜩하게 잔인하다.
료의 인생은 언제나 어둠이다. 그가 웃는 모습을 찾을 수 없다. 그림자에 가린 잿빛 표정이 보이지 않아도 보인다. 누군가를 끊임없이 불행하게 하지만, 그건 자신의 행복을 바라서가 아니다. 단 한 사람을 위한 일일 뿐. 그는, 사람들을 불행하게 하면 할수록 자신이 불행해져 가는 것을 안다. 하지만 상관없다. 유키호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그녀에게 밝은 날들을 주어야 하기에 그는 언제나 어둠 속에 갇혀 있어야 한다. 그녀의 백야행이 계속될 때까지.
극단적인 그들의 방식은 사랑인지, 동정인지 알 수 없다. 항상 밝은 빛을 보고 사는 유키호, 한 번쯤 밝은 세상으로 나가고 싶은 료. 자기들만의 유리상자를 만든 채 섞이진 않으나, 함께한다. 이상한 일이다. 끝까지 말이다.

사사가키는 그들의 행적을 끝까지 추적한다. 사사가키의 추적은 독자의 추적이다. 사사가키의 추적이 끝나야 독자의 의문도 풀리는 것이다. 의문이 풀려도 그들을 이해하기란 힘들다.
추적의 마지막, 냉정한 유키호의 눈빛이 눈에 보인다. 잊혀지지 않는다. 그녀는 아직도 계속 선물을 받아야 한다는 것처럼 굴고 있다. 자신의 상처를 이용해 끝까지 이기적이다. 어쩌면, 상처 따위는 그녀에게 아무 상관이 없는지 모른다. 그녀가 상처받고 있을 때 아무도 자신 따위에게 관심이 없었고, 그랬기 때문에 자신은 타인을 이해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일까? 하지만 료에게까지라니. 게이노는 인간 본성의 어디쯤을 건드리려고 했던 것일까?

어둠과 밝음은 적절히 섞여야한다. 극단적일 때는 무엇이든 문제가 생긴다. 그들의 극단은 많은 사람의 인생을 뒤흔들만큼 강력했다. 많은 사람의 인생을 바꿨으니 말이다.

손예진과 고수가 출여한 백야행은 어떨까? 그들은 유키호와 료의 극단적인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잔인한 삶을 잘 표현해 냈을까? 책 속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던 그들의 만남은 이루어질까? 어쩐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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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여자
오정희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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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꿈>에서도 그랬든, 오정희는 <가을 여자>에서도 농익은 농담을 시작한다. 삶을 살아가며 갑자기 찾아오는 농담 같은 이야기, 환상적이지도 않고 화려하지도 않고 솔직 담백한 이야기다. 시간의 무늬를 더듬더듬 겪어온 이만이 쓸 수 있는 이야기 같은 것. 하지만, 누군가의 아니 우리의 삶이 여기 담겨 있다.

우리는 가끔 착각한다. 착각을 하며 즐거워하기도 하지만, 진실을 알아버리고 픽하고 헛웃음만 나올 때도 있다. 착각하고 살았던 순간이 행복했느니 하면서 말이다.
'첫눈 오던 날', '비 오는 날의 펜팔'은 누구나 한 번쯤 했던 착각과 이어지며 삶의 농담처럼 씁쓸함과 즐거움을 가져다준다. 진실을 알기 전까지 펼치는 상상의 나래는 그나마 귀엽기까지 하다.

'멋 또는 존재증명'에서 느껴지는 허영의 쓸쓸함, 자신의 아이들은 내팽개친 채 열심히 봉사 다니는 엄마가 나오는 '어떤 자원 봉사', 죽은 아버지를 다른 방식으로 그리워하는 어머니의 이야기 '방생', 프로정신이 가득한 어린 음악가의 위트를 느낄 수 있는 '어느 음악가의 어린 시절', 부모의 행동을 깨우치는 농담 '요즘 아이들'. 여자들의 오지랖 넓은 상상 '독립선언', 진실을 모를 때가 행복한 '골동품', 병아리 소동으로 아이들의 인생의 짐을 알게 된 '병아리' 등 일상의 농담들이 가득하다.

묵은 시간들을 걸어온 인생이라면, 어디서 보았을까? 어디에서 들었을까? 하는 이야기들이 그녀만의 문체로 담백하고 간결하게 풀어낸다. 삶의 우화에서 눈물과 웃음, 사랑과 이별을 보게 되며 삶 속의 소품 하나가 인생의 중요한 의미가 된다는 것도 알게 된다. 생각하지 못하고 지난 온 시간들에서 인생의 다른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면, 가끔은 거짓말도 하고 누군가를 험담하면서 새롭게 깨닫게 되는 것들이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삶의 즐거움 아니겠는가.

외부로 열린 눈이 닫히고 내면으로 향하는 문이 열리는 시기라는 '가을'. 어떤 이야기들로 내면의 문을 열게 한다. 내면이 뭐 그리 진중하고, 심각하며, 고귀한 것인가? 시시한 사건도 내면의 움직임을 일으키는데 말이다. 자식의 연애를 의심하며 소홀했던 부부가 연애할 때처럼 가까워진다면, 남의 불행을 자신의 행복의 부피와 가늠하다가 오해였다는 걸 알게 된다면, 눈치 없어 보이는 시어머니가 나의 미래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깨달음이 느껴진다면, 알게 되는 그때 우리의 내면의 움직임은 결국, 인생과 삶의 움직임이 될 것이 아니겠는가. 

삶 속의 농익은 농담. 돌아보면 그것이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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