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저드 베이커리 - 제2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구병모 지음 / 창비 / 2009년 3월
평점 :
절판


관념론적인 소설이 싫어졌다. 필요없는 묘사와 쓸데없는 수식으로 지면을 채우는 이야기는 이제 지루하다. 그게 작가만의 의미를 담고 있을지라도 입 속에서 맴돌뿐 몸 속으로 체화되지는 않는다. 찌꺼기 같고 글자 속에서만 뱅뱅 맴돈다. 남들이 하는 똑같은 이야기가 아니라 신선한 이야기를 원한다. 문학도 흘러야 하지 않을까? 주제 넘는 생각이라고 해도, 주제 넘게 읽고 있다고 해도 요즘 내 생각은 그렇다는 이야기다.

어쨌든, 그런 소설들에 지쳐 소설에 흥미를 잃고 있었을 때쯤 광고를 빠방하게 때리는 '위저드 베이커리'를 만났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이 없는 게 다반사이지만 그래도 소문난 잔치를 구경하고 싶은 게 사람 심리라고 쪽수도 별로 안 되고 양장본에 '창비'라는 거대 출판사에 게다가 청소년 문학상까지 너무 화려하다 싶은 게 구미가 끌려서 읽게 되었다.

달콤한 케익에 끌려 결국 한 판을 다 먹고 어리둥절해져 버리는 것처럼, 정신없이 읽다보니 뭔가 다른 맛이 있었다. 고통 받는 아이 앞에 나타난 빵집. 그 빵집의 주방장. 오전에는 빵집 아가씨로 밤에는 파랑새로 바뀌는 마음 착한 빵집 누나. 빵집에 숨겨진 비밀의 방. 비밀스러운 빵들.

고통받지 않는 사람들은 없겠지. 상처받는 사람도 없을 거야. 다 크고 작은 고난과 역경쯤은 이겨내고 사니까. 하지만, 인간이란 존재라는 것이 이겨내고자 하는 마음보다 유혹에 약한지라, 좀 더 쉽게 가는 방법을 찾다보니 위저드 베이커리에서 만드는 비밀스러운 빵과 과자들은 인간들이 애용하는 마법의 주술이 되어 버렸다. 분명, 빵을 파는 사람은 경고한다. 이 빵을 사용할 시에 일어날 수 있는 부작용을. 인간은 얼마나 단순하고도 멍청한지 눈 앞의 달콤함에 미쳐 뒤에 남을 강력한 쓴맛을 생각지 못한다. 닥쳤을 때 다시 원망의 대상이 필요하고, 그 원망이 빵을 만든 사람에게 미친다. 역시나 이기적. 이기적인 생각 앞에는 아무것도 들이댈 수 없다. 고집불통, 안하무인, 인면수심까지.

선택은 개인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선택에 따른 고통과 불행은 외면하려 하는 우리의 모습. <위저드 베이커리>에서도 여실하게 들어나고 있다. 새엄마와의 관계, 오해, 아빠의 치졸한 행동까지 감당해야 했던 소년. 결국 위저드 베이커리가 궁지에 몰리고 억울한 누명 때문에 뛰쳐나온 집으로 다시 들어가는 날 소년은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손에 쥐게 된다. 새엄마가 주문한 자신의 부두인형과 선물로 받은 타인 리와인더를 든채 지옥같고 무서웠던 집으로 돌아간 그가 본 아빠의 만행. 그리고, 새엄마의 절규. 그 속에서 선택을 해야하는 시간이 왔을 때 그의 선택.

Y, N.

시간을 돌리느냐, 그 시간을 감내하고 이겨내느냐.
그것은 너의 선택이다. 


개인적으로 N의 경우가 좋았다. 자신의 의지였던 아니였던 결국, 그는 평화를 찾을 수 있었고 고통을 이겨내는 방법을 얻을 수 있었고, 중요한 기억을 잃어버리고 살지 않아도 되었으니 말이다.

신데렐라처럼 구박받고 살았지만, 백마탄 왕자님이 짠하고 나타난 것은 아니다. 사실 현실 속의 백마탄 왕자님이 있기나 한 것일까? 그렇게 믿고 싶을 뿐이겠지. 위저드 베이커리에서 만났던 사람들. 마법의 빵과 쿠키를 주문했던 사람들. 주방장의 삶과 이야기에서 그가 배운 것들. 그가 느낀 것들. 소년은 용기를 얻었겠지?

마법처럼 무슨 일이 일어날 듯 했지만, 결국 현실이었다. 현실 속에서는 마법이 통할리 없다. 노력이 통할 뿐. 그것을 깨닫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만. 책 속의 상징들이 마음에 들었다. 결국 희망을 말했지만, 식상한 희망은 아니었다는 게 좋다. 소년의 존재를 찾게 된 것도, 지긋지긋한 빵을 이해하게 된 것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문명의 관객 - 미디어 속의 기술문명과 우리의 시선
이충웅 지음 / 바다출판사 / 2009년 1월
평점 :
품절


과학은 진정 이성적인 것일까? 과학에 맹신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 우리를 돌아보게 된다. 뜨겁게 끓어오르다가, 쉽게 식어버리고, 과학을 이벤트성으로 생각하는 우리의 태도. 어떤 사건에 대해서 성찰하거나, 통찰력있게 들여다보지 못하고 언론에 이끌려, 하나의 문제로, 단면적이고 단편적인 시선으로 보는 우리의 모습. '과학적'이라는 말에 홀려 '이성적'이 되지 못한 문명의 관객들은 바로 우리가 아니었을까?

수많은 다이어트 방식이 '과학적'으로 증명되었다는 광고에 열광하며, 값비싼 다이어트 프로그램에 덜컥 홀려버리고도 그 문제를 느끼지 못한다. '정상적'인 체중을 가진 이도, '비만'을 만들어버리는 모호한 그 '과학적 기준'이 진짜인 것처럼 비판적 사고 전에 '주관적이고 감성적인 사고'가 먼저 튀어나간다.

'성형'으로 이루어지는 정형화된 美에만 관심이 있을 뿐,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의학적 사고와 불합리한 시스템은 애써 외면한다. 나를 '성형'해주는 이는 '의사'라는 것에만 초점을 맞춘다. '의사'는 신이 아닐 것인데, 그 '의사'가 행하는 의료행위는 모든 것이 완벽할 것이라는 믿음이 앞서나가는 것이다. 정형화된 아름다움이 일반화 되어가고, 그 아름다움을 얻기 위해 큰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듯 '과학'이라고 믿는 것에 목숨을 거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아무런 비판의식도, 아무런 성찰도 없이 말이다.

황우석의 줄기세포, 한국 최초의 우주인, 태안 기름 유출 사고 모두 이벤트였다. 물론, 조류독감과 광우병 공포까지도 말이다.줄기세포에 감춰진 이면, 우주인 이벤트에 숨겨진 정치적 효과, 봉사와 감동으로 본질이 흐려진 태안 기름 유출 사고는 결국 과학이라는 '단어'로 포장된 철저한 정치적 이벤트였다. 우리가 진정 원한 '과학'은 무엇일까? 되묻게 된다.

'과학적 열광'은 도대체 어디에서 시작되는 것일까? 집단적인 열광은 위험할 정도로 극에 달한다. 조류 독감으로 죽는 사람보다 독감으로 죽는 사람이 더 많음에도 불구하고, 본질은 외면한채 다른 확률에 집중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그 불안과 공포를 이용해 이익을 창출하는 이들의 배를 불려주는 게 옳은 일일까? '과학'이라는 명목하에 '인체의 신비전'에 아이들의 손을 잡아 끄는 것이 옳은 일일까? 남들이 하기에, 남들이 열광하기에, 남들이 좋다기에. '과학'이라는 단어가 포장될라치면, 다른 것보다 100배 1000배쯤 더 열광한다.

비단, 과학뿐만이 아닐 것이다. 정치, 예술, 문학. 어떠한 사건. 그 이면에 감추려하는, 감추어진 것들을 억지로라도 끌어내 다른 시선으로 봐야하는 노력은 필요할 것이다. 반성과 성찰없이 발전할 수 있는 것이 있던가? <문명의 관객>은 믿지 말라고 말하지 않는다. 믿어도 제대로 믿으라 이야기하는 것이다. '과학'이 '이성'으로 포장되어, 본질을 흐릴 수 있으니, 똑바로 바라보라고 말한다. 그 본질을 찾아내고 반성하고 성찰해야 더 넓은 곳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인터넷 시대'에 사는 우리들은 많은 정보를 가감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 서로의 정보를 공유하며,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 판단하기도 전에 흡수되고 만다. 그 '흡수'의 방식이 바뀔 수 있길 바란다. 이 책을 읽으며 말이다. 멈추어버린 뇌는 슬프다. 작동하는 뇌에서 우리는, 진정한 정보와 올바른 과학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
잉게숄 지음, 이재경 옮김 / 시간과공간사 / 2004년 5월
평점 :
절판


히틀러가 집권한 나치 시절, 한스 숄, 조피 숄, 잉겔 숄은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 어떻게 이러한 정부가 우리나라에 등장할 수 있었을까요?"
"우리는 가난에 시달렸기 때문이지."

아버지는 이어서 설명해 주셨다.
"그러면서 우리가 어떤 시대를 겪어왔는지 한번  살펴보자. 처음엔 전쟁, 그리고 곧 전후의 인플레와 극심한 빈곤으로 많은 실직자들이 거리를 메우게 됐단다. 그리고 원래 사람이란, 아무런 희망도 바랄 수 없는 벽에 부딪히면 나약해지기 마련인데, 누군가 감언이설로 장래를 약속한다면 속아넘어가고 마는 것이다. 그 약속을 하는 자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지도 않고 말이다."

"하지만 히틀러는 실업자를 구제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어요?"

"그 문제에 관해서는 아무도 핵심을 따져보려 하지 않았단다. 히틀러가 실업을 어떻게 몰아냈는가를 말이다. 그가 일으킨 것은 바로 전쟁 산업이었다. 곳곳에 병영을 만들고...... 너희들 이런 종류의 산업이 어떻게 끝나는지 아니? 그는 전쟁 산업이 아닌 평화 산업을 지향하는 노선을 취했허야만 했어. 실업자를 없앤다는 것은 독재국가에서는 매우 쉬운 일이야. 하지만 우리는 결코 먹이만 던져 주면 좋아서 만족하는 짐승이 아니지 않니? 물질적인 보장만으로는 결코 행복할 수가 없단다. 우리는 최소한 개개인의 자유로운 견해와 신념을 가질 수 있는 인간이 아니냐? 그런데 여기에 문제점을 갖고 있는 정부가 국민으로부터 어떻게 존경을 받을 수가 있겠니.... 우리가 정부에게 요구해야 할 중요한 사항은 바로 개개인의 자유로운 견해와 신념의 보장이란다."


나치와 히틀러에 강력하게 저항한 한스 숄, 조피 숄 그리고 그들과 같은 활동을 했던 '백장미단'은 결국 죽음을 맞이했다. 수세적 저항으로만 일관했을 뿐인데 '저항' 자체가 금기되었던 시절에는 '저항' 자체만으로도 사형이 될 수 있었다. 갓 스물을 넘긴 그들이 고민하고 행동했던 모든 것은 국가와 자유와 민족을 위한 명분이 있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국가와 독재자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단지, 국민을 존중하라. 국민을 속이지 말고, 진실되게 행동하라고 했을 뿐인데 말이다. 결국, 국가는 그들이 두려웠던 것이고, 그들의 행보가 속고 있는 국민들에게 영향을 미칠까 두려웠던 것이다.

아, 역시 우민한 독재자는 시대를 넘나들어 비슷한 양상을 보이는 것인가. 이명박 정부 또한 비슷한 행동으로 국민의 자유를 억압하고, 폭력을 휘두르고 제멋대로인데. 백장미단의 활동과 정부가 대처하는 것은 지금의 우리나라와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았음을, 그들의 희생이 히틀러가 무너지게 된 것에 작은 불씨가 되었음은 명백하다. 어떠한 저항도 헛된 것은 없다.

우리는 침묵을 거부한다.
우리는 바로 당신들의 양심이다.
백장미를 따라 분연히 떨쳐 일어나자!


독일 국민에게 독재 정권을 자각하고,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며 체제를 부정하자고 했던 백장미단. 촛불을 들었던 우리 모두가 백장미단이었다고 말하면 과장된 것일까? 국가의 간섭이 심해지고, 부당함이 심해지면서 피부로 느끼는 모든 것들이 나치 시대와 별반 다를 게 없다고 생각되는 것은 무엇때문일까?

 
백장미단의 편지에 노자(老子)의 말이 인용되어 있었다.

국가의 통치작용이 드러나지 않을 때에만 국민은 행복한 것이다. 그러나 국가의 통치작용이 뚜렷하게 부각될 때에는 국민은 파멸의 길을 걷는다. 아! 진실로 행복은 연민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연민은 어디서부터 나오는 것일까? 그 끝은 보이지 않는다. 질서는 무질서에 의해 유린되었고, 선은 악에 의해서 유린되었다. 그로 인해 국민은 혼돈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런 현상은 사실 오래 전부터 일상적으로 되어버린 것이 아닐까? 그리해 성인(聖人)이란 모가 났지만 남을 찌르지는 않는다. 그는 똑바로 서 있지만 결코 가파르지 않다. 그는 밝지만 결코 빛을 발하지 않는다.
국가를 지배해 자신의 의지대로 자기 세계의 국가를 건설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다. 나는 그런 자들이 자기 목표를 한번도 달성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것 자체가 그들의 전부인 것이다.
국가는 살아 있는 유기체(有機體)와도 같다. 진실로 국가는 창조되어 지는 것이 아니다. 국가를 창조하고자 하는 자와 국가를 자신의 소유로 하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그 국가를 잃어버린다.
그러므로, 어떤 자들은 앞으로 전진한다. 또 다른 자는 그들을 뒤쫓아간다. 어떤 자는 따뜻함을 느끼고 어떤 자는 차가움을 느낀다. 어떤 자는 강하고 또 어떤 자는 약하다. 어떤 자는 만족을 얻고 또 다른 자들은 실망한다.
그리하여 성인들은 과도하게 추구하지 않으며 불손하지 않고, 그리고 간섭을 하지 않는다.


아! 우리 시대에 어떤 성인이 나타나 국가의 작용이 제대로 되게 할 것인가. 나는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을 읽으며, 자꾸 우리나라가 처한 시점과 국가의 대표로 서 있을 뿐인 그를 생각하고 생각해 보았다. 이 시대에도 벌써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들이 너무 많이 죽었고, 너무 많이 희생되었다. 그 끝을 한스 숄과, 조피 숄은 알 수 있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토리얼리스트
스콧 슈만 지음, 박상미 옮김 / 윌북 / 2010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자, 패션에 관심은 있으나 우리가 보는 잡지의 패션들은 부담스럽기만 하다. 명품으로 치장한 늘씬한 모델들이 잘 계획된 세트장 안에서 영화처럼 움직인다. 예쁘다라는 탄성이 나오긴 하지만, 생활 속에서 과연 저렇게 입을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들곤 한다. 보기에 좋은 스타일이지만, 입기엔 어려운 스타일이라는 말이다. 그런 목마름을 스콧 슈만은 알았던 것일까? 하루를 살아도 스타일있게 사는 사람들을 모아 모아 책을 만들었다.

 http://www.thesartorialist.blogspot.com/  이곳, 그의 블로그를 방문한다면, 책 속에서 본 사토리얼리스들과 책에서 볼 수 없었던 사토리얼리스트를 만날 수 있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그곳에 있는 인물들이고 자기만의 스타일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간혹, 패션 관계자나 모델들도 등장하지만, 사실 일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인물들이 더 많다. 단지, 자기 스타일을 멋스럽게 표현할 뿐. 나만의 스타일을 갖고 싶은가? 그럼, 이 멋스러운 사람들을 구경한 후, 고민해 보자.


 

 

난 나이가 들었어도 멋스러운 사람이 좋다. 과하지 않지만, 자기만의 향기를 뿜어내는 사람. 아~~ 정녕 이들은 사토리얼리스트였다. 백발이 창창해도, 얼굴에 주름이 가득해도 흐트러지지 않고, 자기만의 스타일을 창조하는. 이 외에도 444p에 멋스러운 할머니를 올리고 싶었으나, 찾을 수 없었다~ 흑. 밀라노에서 만난 우아한 여성. 그녀의 매혹적인 눈빛과 은빛 머리는 정말 닮고 싶은 세월이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스타일. 가끔은 남성적인 느낌을 한껏 뿜으며, 감히 나를 건들이려거든 한 대 맞을 줄 아시오. 라고 협박할 수 있는 스타일을 좋아한다. 그리고, 정말 사내 아이처럼, 개구쟁이처럼 한껏 매니쉬한 스타일을 뽐내고도 싶다. 아 그녀들의 길쭉한 다리와 가는 허리란. 역시 키는 그렇다치고 살이라도 열심히 빼야, 내가 갈망하는 스타일을 입어볼 수 있지 않을까? 올 블랙으로 치장해도, 남자양복을 입은 듯 나서도 조금 더 세련되어 보일 수 있도록. 검은색 킬 힐이나, 운동화, 워커를 신고 거리를 활보하는 멋진 여자가 되고 싶다. 으흑. 
   

 

 

가끔은 이렇게 사랑스러운 스타일도 좋다. 한껏 여성스럽게 치장을 하고, 기분 좋은 금요일을 맞이한 것처럼. 혹은 사랑하는 남자를 향해 달려가는 것처럼. 섹시하고, 귀엽게, 우아하고, 청순하게. 아~ 한가지 키워드를 가진, 그리고 그 키워드를 품고 자신을 스타일링한 이 여인들에겐 어떤 사연이 숨어 있을까? 파리에서, 뉴욕에서, 밀라노에서 그들을 포착하고 멋지게 잡아낸 스콧 슈만! 그는 어떤 눈을 가진 것일까? 잡지 속에서보다, 일상에서, 트렌디한 거리에서 익숙한 그녀들의 독특함. 와우~ 빛나는 사토 리얼리스트!


 

슈트를 잘 차려입은 남자는, 섹시하기 그지없다. 남편이 슈트에 대한 열정이 있어서인지는 몰라도, 슈트는 남자의 자존심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나이듦이나 젊음에 상관없이 잘 차려입은 슈트를 입은 남자는 섹시하고 사랑스럽다. 이들은 풍겨나오는 분위기도 독특하다. 이들은 단지 책 속에서 발견하는 단편일 뿐. 이들 말고도 섹시함을 뿜는 남자들이 가득하다. 
 






난 이들의 자유분방함이 좋다. 누더기 바지를 걸치고 모자를 눌러쓰고 담배를 피우는 노인의 정체는 거지가 아니라 랄프로렌 통합서비스 부서에 근무하는 멋진 남자라는 사실. 치마를 입는 남자, 의사 가운을 자기식대로 입은 남자, 자기만의 스타일을 가진 13살 짜리 꼬마. 꽃을 든 남자, 색을 자유자재로 소화한 남자. 아 이들은 멋지지 않은가? 담배 한 개피를 물어도, 뭔가 팍팍 느껴지는 이들. 거리에서 만나면 한 번쯤 다시 쳐다볼 이들. 그들의 일상은 얼마나 멋진가?
 



아! 마지막으로 이 책의 저자 스콧 슈만의 딸! 그녀 또한 스타일리쉬하다. 꼭 찍은 저 발을 보라. 가디건, 빨강 치마, 금빛 머리~ 으흑. 그녀는 아빠의 유전자를 타고난 것일까? 어쩜 이래.

유쾌하게 볼 수 있는 책. 한 장 한 장 넘어갈 때마다, 아 이런 스타일도 있군. 이렇게도 매치가 가능하군. 이런 분위기를 낼 수 있군. 유행을 잠시 머리 속에서 지우고, 그녀, 그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사토리얼리스트가 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으리란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을 엿보는 것만으로도 유쾌해질지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추장, 책으로 세상을 말하다
고병권 지음 / 그린비 / 2007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연구공간 수유 + 너머> 추장 고병권 씨. 고추장께서 여기저기 기고한 글이 모여 책이된 <고추장, 책으로 세상을 말하다>. 읽어봐야지 읽어봐야지 벼르고 있다가 이제야 읽게 된 이 책. 고추장님의 생각과 생활이, 공부와 사유가 고스란히 담겨있는 책이다. 책을 읽는 동안에는 내 생각까지 좌지우지 하셨던 이 분. 쉽고, 즐겁지만 전혀 가볍지 않은 이 책은 많은 생각을 던져주는 책이다.
냇물에 돌을 던지면, 멀리 멀리 물이 퍼지듯 누군가의 말과 이야기와 생각이, 읽는 이에게 파장을 준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닐까? 고추장님은 그런 일에 너무도 능숙한 분이 아닐까 생각한다. 억지스럽지 않게 그리고 자신이 먼저 행동하면서. 행동하는 지식인, 공동체를 생각하는 지식인, 고추장님은 그런 분이다.

이 책의 1부는 우리가 논의해야 할 쟁점 키워드가 펼쳐진다. 철학자의 말을 빌어, 어떤 책의 말을 인용해 넌지시 자신의 생각을 전한다.  자유, 행복, 도덕, 기억, 역사, 사실, 여성, 기술, 화폐, 선물, 사회, 인권, 국가, 혁명. 짧은 글 안에서 느껴지는 방대한 독서량. 공부와 시간이 결합되어 만들어 놓은 산물. 그리고 2부가 펼쳐진다. 기본에 대해 이야기가 끝나자, 사회 현상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된다. 소수자의 이야기들. 장애인, 비정규직, 농민, 학벌, 교육, 지식인, 전쟁 등 그는 아픈 곳을 마구 마구 찌른다. 우리가 외면하고 사는 이야기들을 적나라하게 펼쳐 놓는다. 그 속에서 아프지 않은 자 없고, 그 안에서 반성하지 않는 자 없을 것이다. 그가 던지는 화두는 우리 모두의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인식과 사유를 하지 않은 채 힘을 가진 소수자들 뜻대로 하는 사회에 다시 한번 분노케 한다.

   
 

 진정한 자유를 위해서는 굳지 말고 깨어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할 잠재력을 가져야 한다. 자유란 선택이기보다는 능력이다. 알코올 중독자는 술을 자신의 기호라고 주장할 수 있겠지만 우리는 그의 자유가 술에 대한 예속가 무능력에서 벗어나는 데 있음을알고 있다. 코뮨이란 그래서 필요한 것이다. 그것은 나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나를 극복하도록 만든다. - 21p <자유>

 
   

베르그손이 말하는 자유는 행위 이전이나 이후가 아닌, 행위 자체의 독특한 색깔이다. 하지만, 우리는 자유라는 말, 그 행위 자체를 깨닫지 못할 때가 있다. 그게 올바른 자유인지 아닌지도 모른 채 '자유'라고 말한다. '자유'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면서, 기형적인 많은 현상이 일어난 것은 아닐까? 공기처럼 소중하지만, 소중하다고 인식하지 못하는 자유라는 기본을 논의하며 하나 하나 우리의 모습을 파헤쳐 간다. 이후 전개되는 1부의 주제들은 2부를 밀도 있게 이해하기 위해서 필요하다. 2부의 이야기들은 모두 1부의 주제들 안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들이고, 1부에서 말했던 고추장님의 생각들은 2부의 사회적 현상, 사건들을 바라보는 시각과 사유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한다.

   
  결국 공동체 바깥에 존재하는 적나라한 인간은 현실적으로 인권을 갖고 있지 않다. 그래서 아렌트는 인권이야말로 인간이 자기 행위를 의미 있게 발휘할 수 있는 공동체를 필요로 한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인권이란 그런 공동체에 살아갈 권리, 그래서 공동체가 부여하는 권리를 가질 수 있는 권리라고 할 수 있다. 노예제가 반인권적인 것도 자유의 권리를 부인당해서라기 보다는(전시[戰時]에는 시민들도 자유를 일정하게 박탈당한다) 자유의 '권리를 가질 수 있는 권리'(right to have right), '자유를 위해 싸울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했다는 데 있다(<전체주의의 기원>). 그렇게 보면 인권이란 동어반복이거나('권리를 가진 자들의 권리'로서 말할 때) 무의미한 것('권리 없는 자들의 권리'로 말할 때)이다.    - 92p <인권>에 대한 고추장의 독서 메모  
   

 모든 사회적 현상들은 본질적으로 인권이랑 얽혀 있다. 인권을 생각할 때 벌어지는 싸움. 국가라는 거대한 권력 조직은 권력 세력과 국민들을 사이에 두고 인권 싸움을 벌인다. 겉으로는 인권을 잘 지켜주고 있는 듯 탈을 쓰고 있지만, 결국엔 힘없는 소수의 인권을 박탈하고, 소수의 힘있는 인권(?)을 탐욕스러운 방법으로 지켜준다. 그것은 국가라는 상부조직에서 권력을 가진 자들이 힘있는 소수이기 때문이 아닐까?

2부를 열자마자 시작되었던 최옥란 씨의 이야기. 마음이 아팠다. 단지 사람답게 살고 싶어 투쟁했지만, 아무도 그녀의 말에 귀기울지 않았고 아무도 알려 하지 않았다. 그녀는 결국, 우리의 무관심 속에 사그라들었다. 그녀가 요구한 것은 '최저생계비를 현실화하라'였다. 28만 원으로 한달을 살 수 있다는 국가의 단정 속에. 그녀는 28만 원으로 한달을 살아내야 했다. 그녀는 힘없는 소수자들을 대표한다는 말이 과장이 아닐 정도로 불우한 가정에서 자랐으며, 교육받지 못했으며, 신체장애를 가졌으며, 아이의 양육권을 빼앗겼으며, 이혼한 사람이며, 여성이었고, 가난한 사람이었다. 단지 사람답게 살고 싶어서 인권을 위해서 '싸우는 사람'이었다. 국가의 존재 목적이 무엇인지, 사회가 약자들을 보호하고 있는지 존재의 역할을 잘 하고 있는지 온몸으로 묻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의 이름과 요구 속에서 여러 '가난한 자들'의 이름과 요구들을 봅니다. 그리고 맑스가 '전부를 가진 자'들에 맞선 '아무것도 갖지 못한 자들'에서 미래를 찾았던 이유를 생각해봅니다. 그는 왜 미래를 그들의 것이라고 생각했을까요. 가난한 자들은 빈곤하고,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자체로 사회가 바뀌어야 할 이유이자 요구이고 투쟁인 것입니다. 나는 네그리와 하트가 '가난한 자'라는 모든 시대 '공통의 이름' 속에서 인간이 지닌 모든 가능성의 토대를 발견했다고 말한 것을 기억합니다. 
- 115p <최옥란을 기억하며>

 
   

농민이 외면 당하는 세상, 농민을 외면하는 국가, 더 큰 이익을 위해서라고 그게 합리적이라고 말하는 권력을 가진 사람들, 학벌이 최고인 사회, 학연과 지연으로 굴러가는 사회, 박탈감을 느끼게 하는 순간들. 과연 우리는 이곳에서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가 하는 공부는 무엇일까? 이 권력 안에 속하기 위해서 발버둥 치는 공부라면 그게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남을 무시하기 위해서, 자신이 우월감을 느끼기 위해서 하는 공부라면 그것이 과연 가치가 있는 것일까? 공부를 하면서 성장한다는 것은 사유를 하고 인식을 한다는 것인데, 신성한 대학에서조차 사유와 인식과 반성과 성찰보다는 탐욕과 권력을 잡으려는 발버둥이 만연한다. 과연 이들을 지식인이라고 부르는 것이 합당한 것인가.
미네르바가 백수에 전문대를 나온 이었다고 밝혀졌을 때, 우리가 그려놓은 환상에서 동떨어진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믿음이 불신으로 바뀌는 그 이상한 순간. 우리는 모두 마음속에 괴물 한 두마리쯤은 키우고 있는 것 같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 이 책을 읽으며, 부끄러워지는 순간. 마음이 아파오는 순간. 바로 내 안의 괴물이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삶으로부터 분리된 지식인, 현장에서 떨어져 나온 지식인. 오랫동안 우리는 이것을 지식인의 존재조건인 양 말해왔다. 플라톤은 "평화롭고 한가하게 담론을 생산하는 자들"과 "물시계의 흐르는 물에 쫓기면서 언제나 긴급하게 이야기하는 자들"을 대비시켰는데, 전자만이 철학하는 자로서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삶에 쫓기는 자들은 차분히 숙고할 여유를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스쿨'(school)dml djdnjsdls '스콜레'(schole)가 '여가'라는 뜻을 가진 것은 이와 무관치 않다. 물질적 이해로부터 떨어져 나올 수 있는 여유. 그것이 학문의 전제인 것이다.
그러나 삶에 쫓기지 않을 여유, 물질적 이해관계와 거리를 둘 수 있는 여유란 아무에게나 가능한 게 아니다. 지식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갖추어야 할 '거리두기'는 사실상 특정 계층, 특정 계급 이상에게만 가능하다. 먹고사는 것이 다급한 빈곤층에서 지식인이 배출되기는 어렵다. 우리는 지식인이 물질적 이해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계급이나 계층을 넘어 보편적 진리를 말할 수 잇다고 말하지만, 그런 지식인이 특정 계급이나 계층으로부터만 충원된다면, 그렇게 그 지식의 보편성을 믿을 수 있을까. - 155p <지식인, 그 이미지와 현실 사이에서>
 
   

지식인은 비대해졌고, 기형적으로 탄생되기 시작했다. 고소득층 자녀들이, 강남 자녀들이 명문대에 가는 비율이 비이상적으로 높아졌고, 그 명문대는 미국 대학의 학부가 되어가고 있다. 미국의 대학에서 박사가 되어 돌아온 소위 지식인들은 미국식으로 아이들을 가르친다. 사유하지 않고, 흡수하기만 하고 돌아오지 않은 것이다. 성찰하지 않고, 입력된 대로 내뱉는 이들 속에서 복제되어 가는 지식인들을 과연 우리가 생각하는 지식인의 개념과 의미로 보듬어줄 수 있을까? 많이 배웠다고 지식인일까? 교육과 지식이라고 포장된 욕심과 탐욕이 '지식인'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수치스러움만 쌓아가고 있다. 그 반성, 분명 필요한 것이다.

그가 속한 <연구공간 수유+너머>는 공부를 하는 연구원들이 만들어가는 꼬뮌이다. 그는 그곳에서 추장으로, 공부하며 공동체의 도움을 받으며 생각하고 말하는 대로 살고 있다. 용기, 그의 삶은 용기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 없이 살 궁리'를 하고, '공부다운 공부'를 하며 함께 살아가는 연구공간. 그들의 그런 노력이 있기에 안 될 것처럼 보이는 일도 되어 가는 거겠지. 고추장! 그가 바라보는 시선으로 세상을 보는 것은 불편하다. 하지만, 끊임없이 논의되고 개선되어야 하는, 그래서 이 국가에 살고 있는 모두가 '인권'을 보장받고 '자유와 행복'을 보장받으며, 올바른 '역사'를 쌓아가는데 꼭 필요한 시선이다. 신속히 사라지는 기억의 끈을 꽉 붙잡고, 이 책 안의 의미들을 외면하지 않고 똑바로 보고, 경계하며 살아가고 싶다.




댓글(0) 먼댓글(1)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 고병권이 쓴 '민주주의'
    from 그린비출판사 2011-05-25 14:55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무엇인가’를 묻는 책들이 태풍처럼 출판계를 흔들어놓고 있다.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 바람이 채 가라앉기 전에, 뒤를 이어 유시민의 『국가란 무엇인가』 바람이 불고 있다. 이제 여기에 다시 고병권의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바람을 추가해야 한다. 그러나 고병권이 몰고 올 바람은 일시적으로 불고 지나갈 바람이 아니라, 끊임없이 반복해서 되돌아올 바람이다. 그것은 한국의 정치·사상 지형에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파열을 내는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