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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시창 - 대한민국은 청춘을 위로할 자격이 없다
임지선 지음, 이부록 그림 / 알마 / 2012년 10월
평점 :
희망? 말로는 참 쉽지
희망을 꿈꾸다 급기야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평범'하게 산다는 것은 남의 일 같다. '평범'의 기준은 어디에 있을까? 어느샌가 '일반', '보통', '보편', '평범'이라는 단어들이 멀게 느껴진다. 세상은 자꾸 나를 밀어내기만 하고, 사람들 사이에 끼어들 틈조차 주지 않는다. 희망을 꿈꾸었지만, 절망의 밧줄이 온몸을 옥죄어 오고 벗어날 수 없는 늪에 빠진 듯 허우적거리기만 한다. 이러다 세상이 끝날 듯, 암흑은 끝도 없이 길게 이어져있다. 언제쯤 이 절망의 터널을 끝낼 수 있을지. 과연, 그런 날이 오기나 할런지. 막막한 삶 앞에서, 주먹을 쥐어본다. 언제나 현실은 시궁창.
내가 이책 한 곳에 쓰여진 삶을 사는 사람이었다면, 어떤 날 이런 일기를 썼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 책을 읽었을 뿐인데도 이런 글을 쓴다. 그들이 겪어내는 고통과 절망, 쓰디쓴 현실을 온몸으로 받아낸 듯, <현시창>을 덮으며 기진맥진하고 말았다. 마음이 너덜너덜해지는 글들을 읽어내면서도 멈출 수 없었던 것은, 이 나쁜 현실을 어떻게든 바꿔야 한다는 '작은 의지'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현실이 계속 되어서는 안 된다는 '분노'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복잡한 감정 속에서 온몸을 밀어내며 그 시간을 견뎠을 사람들의 슬픔이 속까지 깊게 전해져 안절부절 못하는 상태까지 이르렀다. 이쪽 아니면 저쪽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것이다. 이쪽도 안 되고, 저쪽도 안 된다고 말하는 세상에서 왜 안 되냐고 악다구니를 써도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현실. 그것을 살아내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는 비슷하다 못해 지루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가슴을 치게 만들 그런 이야기다.
나는 이들 그 누구도 위로할 자격이 없다
학자금 대출을 갚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다 이마트 지하에서 죽어간 장남,
밤늦은 새벽 전기로 청소를 하다 쇳물에 녹아내린 청춘,
온갖 부당함을 다 견뎌내고 성실하게 일해도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언제든 버리는 기업과 사회,
희망을 품고 삼성에 입사해 백혈병으로 죽어간 소녀,
위험한 질주를 부추기는 기업과 사회에 죽음으로 내몰린 피자배달원,
진실을 규명하지 못해 20년 동안 묻히지 못한 한 청년,
살인적인 경쟁을 괴로워하며 죽어간 카이스트 학생들,
경쟁과 학벌 사회에 갇혀 살인자가 된 강남키드,
아빠가 휘두르는 폭력과 공부감옥에 갇혀 두려움 속에 살았던 세자매,
매일 열심히 일해도 불투명한 미래에 마음이 답답해지는 어느 영업맨,
꿈도 희망도 없이 살아가는 영구임대아파트의 청소년들
아무리 희망을 품어도 밀어내는 사회 앞에서 절망에 빠져든 가난한 명문대생,
대출 사기단에 걸려 가짜 결혼을 한 젊은 청춘,
회사의 성희롱과 지난한 싸움을 벌였던 용감한 여자,
끝도 없는 감정노동에 자신마저 잃고 있는 항공사 콜센터 직원,
아무도 관심갖지 않아 더욱 외로운 성매매 여성들,
돈으로 팔려와 폭력과 무시를 견뎌야했던 캄보디아 신부,
탈북 소녀의 결혼 이야기,
도움받지 못하고, 손가락질을 견뎌야하는 미혼모,
만삭의 의사부인 사망사건 뒤 감춰진 이야기,
온라인에서 하고 싶은 말을 했다는 이유로 고소당하고 죽음에 이른 공익근무요원,
양심적 병역 거부를 하며 사회의 편견과 싸우는 예비 법조인,
쥐식빵 사건, 그 안의 진실,
부모에게 살해당하고도 가는 길마저 외로웠던 세 살배기 아이까지.
한 줄 설명만으로도 투명하게 들여다 보이는 이야기. 그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나는 그들에게 어떤 위로도 전할 수 없었다. 어떤 문제든, 우리가 만들어낸 결과였다. 철저한 신자유주의, 그로 인해 빈부의 격차는 더욱 심해지고, 인간이라는 존재보다 돈이 우위를 차지했다. 모든 이야기는 '돈'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돈'만 있으면 다 되는 사회에 살고 있기에, '돈'보다 중요한 가치는 없다. 기업은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인간을 돈을 버는 수단으로 생각하고, 과거에는 신성시했던 결혼도 돈만 있으면 사람을 사서 할 수 있다. 대학은 학생들의 학문 쌓기를 독려하고, 학생들의 꿈을 독려하기 보다 취업률에 열을 올리고, 제 몸집을 불려나가기 바쁘다.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명문대에 들어가야 돈을 잘 벌 수 있다고 주입당하기에, 과도한 경쟁은 아주 자연스럽다. 잘 사는 사람들은 잘 사는 사람들끼리 어울리며, 낮은 곳을 거들떠보지 않고, 가난한 이들은 서로를 위로할 힘도 없이 사그라든다. '돈'이라는 주도권을 잡는 건 남자의 비율이 높아, 여자들의 목소리가 커졌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약자일 수밖에 없다. 돈 때문에 개인정보를 팔아 넘기기도 하고, 신념을 내세워 큰 목소리를 내면 돈을 가진 권력자들이 찍어내린다. 편견은 뿌리박혀 있어, 평범함에서 조금만 밀려나도 색안경을 쓰고 보기 일쑤다. 이런 모든 상황들이 매일, 매번 가슴 아프고 쓸쓸하고, 분통터지는 일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것은 너무도 극단적이기에 싸움마저도 힘겹고, 외롭다. 그래서, 나는 이 모든 이들을 위로하지 못한다. 위로하기 버겹다. 위로해도 위로받을 수 없을 것이기에, 위로하지 못하고 생각만 많다.
하소연해도 듣지 않는 사회
한 사람 한 사람 쏟아낸 말들이 가슴을 찌른다. 삼성이라는 거대한 기업과의 싸움을 마친 딸의 아비가 딸의 무덤 앞에서 "아비가 약속을 지켰다. 유미야."라고 했단다. 글자가 들린다. 산재 증거를 유족이 대라는 나라에서 그 말도 안 되는 싸움을 했을 황유미 씨의 아버지의 속은 얼마나 까맣게 탔을까?
"지금도 막막한데 앞으로가 더 막막해요."라고 말하는 가난한 명문대생은 한 달을 살기도 벅차다. 어려운 학생들을 돕는다고 만든 제도가 가난한 학생을 불안하게 떨게 했으니, 그 결론 앞에서도 뾰족한 해결점도 없었으니 얼마나 막막했을까?
"나도 평범하게 살고 싶었다."라고 말하는 성매매 여성. 많이 배우지도 못했고, 어려운 가정 형편에 병에 걸린 부모, 남동생 학비를 짊어져야 한 한여자가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은 많지 않았다. 몸 하나로 가족을 지키고 있지만, 사회는 등을 돌리기만 한다.
"1년에... 두 번쯤은 있었던 것 같아요." 학교를 그만두고 집에서 아빠의 공부 압박과 폭력까지 견뎌야 했던 세 자매 중 큰 딸은 아빠와 사는 동안 1년에 두 번쯤 외출했다고 한다. 매일 문제집을 풀고, 폭언을 들으며 살아야 했던 삶. 부모도, 사회도 그녀에게 따뜻한 울타리가 되어주지 못했다.
현실은, 시대는, 진창이다. 어쩜 이리도 사회는, 잘 사는 사람들을 위해 최적화되어 가는지 모르겠다. 아니, 나약하고 힘든 사람들에게 최악이 되어가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게 안 된다면, 그냥 하지 말아."라고 말한다. "그럼 할 수 없는 거지. 어쩌겠어?"라고 말한다. 온 세상은 희망이 있다고 떠들고, 온 기업은 사회에 힘이 되겠다고 떠드는데 도대체 현실은 그런 것들이 어디 있는지 찾을 수 없다. 이 아픈 사람들에게 하나 도움이 되지 못할 사회라면, 그 나쁜 사회를 방관하고 만들어낸 게 우리라면 이제 죄책감을 갖고 바꾸려는 시도라도 해봐야하지 않을까? 매번, 외로운 누군가가 혼자 앞에 나서고, 혀를 차며 안타까워하지만 그 뿌리 깊은 편견과 이기심은 버리지 못한다. 이 모든 사람들은 계속 하소연하고 있었다. 좀 도와달라고, 우리를 돌아봐달라고 조금만 힘을 보태주면 안 되겠냐고. 온몸으로 하소연하고 있지만, 누구도 대답하는 이 없다.
정말, 계속 이렇게 살아갈 건가요?
우리는 스스로, 기어이 경쟁 속으로 걸어들어간다. 남들이 모두 그렇게 하는데 나만 하지 않으면, 뒤쳐질까봐 그 무리에 끼어들지 못하고 내침당할까 무서워 기어이 들어간다. 그게 불구덩이 속인지 모르고. 괜찮다고 하면서, 이미 마음 이곳저곳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다치고, 깨지고, 찢어지고. 그래도 아무 말 못하고, 꾸역꾸역 버틴다. 그렇게 하다보면, 괜찮은 삶을 살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그 믿음이 너무도 굳건하여, 옆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만 간다. 그렇게 앞만 보고 살다가, 앞만 보고 사는 삶을 누군가에게 강요한다. 누군가를 짓밟고, 못살게 굴고, 싸우는 삶을 주입하고 지속되게 만든다. 이렇게 현실이 시궁창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현실이, 시대가, 진창이 되고 말았다. 정말, 계속 이렇게 사는 게 옳은 걸까? 언젠가 청춘을 맞이할 아이들을 이렇게 살게 내버려둘 건가? 과연 그래도 좋은가?
나쁜 사회가 만들어놓은 틀 안에서 청춘들이 품었던 희망은 조각나 가루가 되고, 탈출구를 찾기도 전에 사회에서 밀려나 버린다. 그래놓고 우리는 뻔뻔하게 위로란 걸 하고 있다. 위로만 하면 다일까? 위로 받는 다고 모든 상처가, 고통이, 쓰라림이 다 사라질까?
'희망'이 부끄럽지 않게
세상의 구석구석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우리에게 자꾸 어떤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방관하는 시간들이 더 큰 고통을 만들 거라고, 결국 누군가의 고통이 내 고통이 될 수 있다고 자꾸 경고한다. 내 아이가 경쟁에 밀린 게 고통스러워 어느 날 죽음을 선택할지 모르고, 내 삶이 어느날 한꺼번에 무너져 빈곤이라는 늪에 빠질지도 모른다. 어떤 일도 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나는 어디선가 비정규직으로 일하게 될지 모르고, 부당한 대우를 받으며 아르바이트를 할지도 모른다. 세상의 모든 불행한 일들은 내가 맞닥뜨릴지도 모르는 그런 일이라는 걸, 우린 너무 간과하며 살아가고 있다. 나는 아닐 거라는, 나는 아니어야 한다는 생각이, 우릴 절망으로 더 가까이 끌어당기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나는 희망이 대안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그래도, 그래도'라고 중얼거려본다. '그래도, 언젠가는, 시간이 좀 지나면'이라는 헛될지도 모르는 중얼거림. 그래도 그들에게 꿈꾸던 어떤 날이 찾아올 거라는 기대. 어떤 날 누군가를 만나 손을 맞잡고 "희망을 가져요."라고 말해도 부끄럽지 않은 그런 시간이 찾아올까? 그렇게 바꿔나가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만들어 나가야 하지 않을까? 매번 속으면서도, 헛된 희망. 그 안에서 힘을 얻을 수 있을까? 자꾸 자신없는 생각들을 해본다. '희망'이라는 말이 부끄럽지 않은 세상을 만들고 싶다. 만들어 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