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드라마를 보다보면 특정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세밀하고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경향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이 드라마 내에서 이야기를 끌어가는 주요한 흐름이 된다면 그 드라마는 직업 드라마가 된다. 최근에 내가 본 직업 드라마들 속에서 여러 흥미로운 점들이 보여서 이야기 해보려 한다.
무엇보다도 직업 드라마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춤추는 대수사선(1997, 이하 춤대)"이 아닐까 싶다. 춤대 매니아라는 말까지 생겼을만큼 이 드라마의 매력은 대단하다. 형사라는 특수한 직업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와 주연배우들의 호연이 탄탄한 각본과 조화를 이루면서 놀랄만한 흡인력을 갖게되었던 것이다. 전직이 영업사원인 주인공 아오시마 형사는 정의와 원칙이 통하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진 인물이다. 그런 그의 신념은 이상하게도 주변의 동료, 상관, 상부와 끊임없는 마찰을 일으킨다. 그는 누구보다도 자신의 직업적 윤리와 의무에 충실한 사람이지만 바로 그 점으로 인해 그가 속한 집단에서 "골칫거리"로 인식된다. 결국 TV판 춤추는 대수사선은 아오시마 형사가 자신의 상황에서 최선의 행동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부당한 대우와 처벌을 받아 동네 파출소로 좌천되는 것으로 끝이 난다. 왜 개인의 선한 지향과 가치가 그가 속한 집단의 가치와 일치하지 않는지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는데 그것은 아마도 "제도"라는 거대한 장벽에서 기인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런 이유로 아오시마의 선배로 퇴임을 앞둔 노련한 와쿠 형사는 "부당하다고 느낀다면 높은 자리에 올라서 제도를 바꾸라"는 신조를 강조하는 것이다. 지금 당장 바꿀 수 없다면 거기에 맞추어 사는 것이 현실의 방도인 셈인데 아오시마는 이것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이러한 갈등은 "블랙잭에게 안부를(2003)"의 신출내기 의사 에이지로도 겪는다. 고등학교 영어교사인 아버지에게 경제적인 부담을 지워가며 의대를 졸업한 에이지로는 대학병원의 인턴으로 의사로서의 첫발을 내딛지만, 비리와 편법이 판치는 의료 현실에 실망과 분노를 넘어 좌절감마저 느낀다. 그런 그를 그 누구도 내놓고 응원하지 않는다. 그와 뜻을 같이 한다는 것은 집단의 규범과 가치에 위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정의롭지만 환영받지 못하며 따돌림 당한다. 왜 모두들 무엇이 옳고, 어떻게 해야하는지 알고 있음에도 그렇게 하지 못할까? 시간이 지나도 왜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까? 에이지로는 끊임없이 고민하지만 해답은 없다. 많은 이들은 늘 그래왔던 규범과 전통이라는 이름아래 그냥 묻어져 가는 것이다.
"비기너(2003)"는 보다 직설적으로 법이라는 제도를 조명한다. 각자 다양한 출신 배경을 지닌 8명의 사법연수생들의 이야기와 매회 제시되는 사건들을 통해 법 제도의 의의와 가치에 물음을 던진다. 법에 대한 희망을 갖고서 첫시작을 하는 그들에게 법은 따뜻한 인간의 얼굴을 지닌 것이 아니라, 엄격하고 때론 냉혹한 것이며 그에 따라 내린 어떤 판결은 부조리하게 보이기까지 한다.
그렇다면 변화는 불가능한 것일까? 일본의 드라마는 결코 제도의 급진적인 변화와 개혁을 옹호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춤대의 두번째 극장판 영화라고 할 수 있는 "레인보우 브릿지를 봉쇄하라"에서 아오시마는 그런 말을 한다. 올바른 엘리트가 이끄는 집단에는 희망이 있다고. 수평하고 대등한 의사결정 방식 대신, 집단내 차별을 인정하고 엘리트 옹호론으로 가는 것인가 하는 아쉬움이 드는 대목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런치의 여왕(2002)"은 변화에 대한 소시민의 이상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아버지로부터 시작되어 30년 넘게 작은 경양식집을 이어온 나베시마 가문의 구성원들은 시대의 변화 속에서 가게를 어떻게 운영해나갈지 고민하고, 서로 다른 대안으로 인해 갈등하기도 하지만 그들이 결국 택하는 것은 전통이다. 아버지 나베시마가 "내일 일본이 가라앉더라도 난 오늘 데미그라 소스를 만들겠다"고 한 말은 의무와 전통에 충실한 일본인의 면모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오랜 경기침체와 불황을 겪고 있는 일본 사회는 지금의 어려움을 어떻게 헤쳐나갈까? 그들이 생각하는 사회 변화와 제도 개혁에 대한 기대와 열망은 어떤 것인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앞으로 만들어질 직업 드라마들 속에서 그러한 면면들을 살펴보는 것도 그 궁금증을 푸는 한 방법이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