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환장할 봄날에 창비시선 232
박규리 지음 / 창비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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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게는 잡지를 읽을 때 맨 뒷장에서부터 읽는 기이한 습벽이 있다. 예전에는 나만 이런가 싶은 생각도 해보았으나 알아보니 예상외로 그런 사람들이 꽤 있는 모양이다. 소설이나 다른 일반 서적 같은 것은 그렇게 할 수 없지만 첫장부터 꼼꼼히 읽는 것은 한편으로는 답답하고 괴로운 일이기도 하다. 시집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냥 손 가는대로 아무데나 펴서 읽는다. 그렇게 읽기를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한권을 짜깁기하듯 다 읽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박규리의 시집은 그렇게 되지 않았다. 중간에 한부분을 읽다가 마음이 바뀌어서 첫장부터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시집을 덮고나니 이 시들을 그렇게 읽은 것이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처음부터 읽게 된 이유가 있었다. 이 시의 소재 대부분은 절과 스님, 그곳을 지나치는 이, 머무르는 이, 그곳을 둘러싼 자연에 관한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처음엔 이것이 시인의 상상속의 산물인가 싶었는데 아무래도 생생하게 살아있는 묘사와 느낌들이 상상이 아닌 체험에서 나온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처음부터 찬찬히 읽어봐야할 것만 같았다. 상상에서 체험으로 나아간 시들이 쪽수를 넘겨갈 수록 이것은 시인의 삶 자체라는 결론에 이르게 만들었다. 그랬다. 시인은 적지않은 년수의 세월을 절의 공양주로 살았던 것이다.

  체험과 삶은 엄연히 다른 것이라고 누군가 내게 이야기해준 것이 기억났다. 체험은 단지 무언가를 해본다는 데에 그치는 것, 그래서 다시 돌아올 삶의 자리가 있는 한정적인 것이지만 산다는 것, 삶이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며 그곳이 그 사람이 서있는 전부라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내가 파출부의 하루를 체험해 보는 것이 파출부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의 하루와 동일시 될 수 없다는 이야기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박규리의 시들은 체험이 아닌 삶으로서의 기록들이다. 그것들은 때론 처연한 표정을 짓는가 하면 상처를 후벼파기도 하고 반성도 하고 눈물도 흘린다. 놀랍지 않은가? 시들에게 그러한 생명의 힘이 느껴진다는 사실이... 그러나 이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것들은 모두 일회성의 체험이 아닌 매일의 일상 속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도록 단련되었기 때문이다. 그 목소리들은 읽는이에게 스며들어서 깊은 울림을 만들어낸다

  나도/ 언제쯤이면/ 다 풀어져/ 흔적도 없이 흐르고 흐르다가/ 그대 상처 깊은 그곳까지/ 온몸으로 스밀/  죽, 한사발 되랴   "죽 한사발"

  이 시집은 그녀가 대접해주는 따끈한 죽 한사발 같은 느낌으로 오래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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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살인생
이희재 지음 / 청년사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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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 가을의 일이었다. 부모님을 뵈러 지방에 내려갔다가 M 서점이 문을 닫은 것을 알게 되었다. M 서점은 그 지역에서는 꽤 오래된 서점이었다. 정확히 서점이 언제 문을 열었는지는 모르지만 내가 초등학교 때 그 지방으로 온 이래에 작년까지 있었으니 이십년 가까운 세월을 한곳에서 지킨 셈이다. 그런데 그 서점이 무슨 연유에서인지 갑자기 문을 닫아버린 것이다.  문을 닫은 텅 빈 매장을 보고나니 참으로 마음이 씁쓸했다. 내게는 지나간 삶의 여러 기억이 남아있는 장소였던 그곳이 그렇게 한순간에 문을 닫게 될 줄은 몰랐다. 마치 다 맞추어놓은 퍼즐의 한조각을 잃어버린 느낌이었다.

  "아홉살 인생"은 성장소설의 틀 안에서 여민이라는 아홉살 소년의 이야기를 무리없이 담아낸다. 어찌보면 아주 평범하고 별 특색없는 이야기일 수도 있는 이 책이 흥미를 끌게 된 큰 이유는 아마도 여민이가 살았던 산동네에 관한 묘사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 공간은 "악동이"를 그린 만화가 이희재 씨의 그림체에 힘입어 생생하게 살아난다.

  산동네에서 살면서 만났던 이웃들, 친구들, 그리고 그곳에서 겪었던 여러사건들을 통해 여민이는 자신의 인생에서 잊지 못할 추억을 갖게 된다. 만약에 그 공간이 아닌 다른 곳이었다면 여민이가 갖게될 아홉살 인생의 이야기는 전혀 다른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이 책의 끝부분에는 자신의 아이들을 데리고 이제는 아파트 숲을 이룬 예전의 산동네가 있던 곳을 찾아가는 어른 여민이가 있다. 그곳에 자신의 아홉살 인생이 있었노라고 회상하는 대목은 인생에서 어떤 공간은 시간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고 그 사람의 일부가 되어버리기도 한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아직도 부모님의 집에는 용돈을 모아서 M 서점에서 샀던 내 많은 책들이 먼지를 뒤집어쓴채 있다. 그 서점 앞의 분수대에서 누군가를 만나서 했던 이야기들이며, 그곳의 공중전화에서 전화를 걸었던 일까지도 나의 기억에는 남아있다. 이제는 그 서점이 문을 닫았다는 사실이 그 기억의 끝부분을 이루게 되었다. 자신과 관련된 어떤 공간에 대한 특별한 기억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아홉살 인생에 담긴 여민이의 삶을 보다 더 가깝게 느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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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주 오래전에 읽었던 헤르만 헤세의 소설 <유리알 유희>에 나왔던 글이 기억난다. 주인공 요제프 크네히트에게 그를 가르치던 선생님이 하는 말이다.

 "자넨 인간이 인간을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병에 걸린 것 같네."

  그 소설을 읽을 당시에도 그랬지만, 십수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지금도 난 그것이 과연 병일까에 대해 생각해본다. 아마도 병이 아닌 진실이라고 믿고 싶은 마음이 더 강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의 주인공 밥과 샬롯은 각자의 삶에서 어느 누구와도 진정으로 소통할 수 없음에 괴로워한다. 밥은 이십년 가까이 이어온 결혼 생활에서 소외와 고독을 느낀다. 아내는 카펫을 어떤 것으로 살지, 아이들의 일상은 어떤지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정작 일본이라는 낯선 곳에 광고를 찍으러 온 남편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샬롯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사랑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결혼했던 사진작가 남편은 촬영 일정이 빡빡하다는 이유로 부인을 호텔에 혼자 남겨두고 시도 때도 없이 떠나고 또 무엇을 하는지에 대해서도 궁금해하지 않는다.

  그 두사람의 고민은 모두 진정으로 자신의 문제를 나눌 수 있는, 진정으로 소통할 수 있는 대상이 부재한다는 데에 있다. 둘은 우연히 호텔의 바에서 만나게 된 이후로 서로의 고민에 대해 알게 되고 이해하게 된다. 그러나 상대방의 괴로움과 고통에 대해 알게 되었다고 해서 그 둘의 관계는 로맨스로 재빠르게 직진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이 영화에서 가슴 두근거리는 연애 경험담을 기대하는 사람은 실망할 수도 있다. 어떤 면에서 그 두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감정을 사랑이라고 해야할지에 대해서도 망설여진다. 명확히 말하자면 그것은 공감에 바탕을 둔 연대감 내지는 지지감이라고 해야하지 않을까?

    샬롯은 자신이 글 쓰는 것을 좋아해서 글도 열심히 써보았으나 자신이 쓴 글이 마치 소녀들처럼 모두 다 비슷비슷하고 별로였다고 밥에게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밥은 그런 샬롯에게 실망하지 말고 계속 글을 쓰라고 이야기해준다. 자신의 정체성, 재능, 가능성에 대해 불안해하도 두려워하는 것은 사실 그녀의 문제만이 아니다. 배우생활을 오랫동안 해왔던 밥에게도 그것은 늘 의문이었다. 그 지점에서 바로 진정한 이해와 소통의 필요가 발생한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을 이해해줄 사람, 내면을 함께 들여다보고 지지해줄 사람을 꿈꾸고 또 있기를 바란다. 그것이 꼭 사랑이 아니어도 좋다. 다만 소통할 수 있다면... 그러나 살아가면서 그러한 필요를 채우며 사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밥은 일본에서의 광고촬영 일정이 끝나자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샬롯은 밥에게 같이 머무르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하지만 그 둘은 이미 각자가 살아가야할 삶의 영역이 다르다는 것을 안다. 그 두 사람의 키와 나이 차이만큼이나 다른 삶... 그렇지만 헤어짐에도 불구하고 만남 자체가 주는 감동은 놀라운 것이다. 공항으로 떠나는 차 안에서 길을 걷고 있는 샬롯을 발견한 밥은 갑자기 내려서 샬롯에게 달려가 꼭 끌어안고 무어라 귓속말로 속삭인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샬롯은 눈물을 그렁거리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 말이 무엇이었는지 영화를 보는 사람은 결코 알 수가 없다.  

  미국으로 다시 돌아간 밥, 그리고 일본에 남편과 함께 남은 샬롯은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 감독은 그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그대신, 어쩌면 삶에서 진정한 소통의 순간, 자신과 타인의 진실과 대면하는 순간은 너무나 짧은 것이라 지속될 수 없지만 그 기억만은 소중히 간직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영화를 보는 이에게 묻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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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구마을 아침편지
이진우 지음, 우승우 그림 / 열림원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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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다보면 가끔씩 목이 턱턱 막히는 듯한 순간이 있다. 아등바등 무언가를 얻기위해 온힘을 다하지만 아무리 채워도 성에 차지 않을 때가 그렇다. 그럴때에 가장 좋은 방법은 내 안에 든 것을 탈탈 털어버려서 새로운 것을 위해 비워두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비운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가? 이제까지 내가 모아두었던 것들을 버리고, 언제 채워질지 모르는 불확실한 것들을 바라보며 텅 비어있음을 응시하는 것은 고통에 가까운 일이기도 할 것이다.

  시인과 가족들은 서울에서의 모든 것을 버리고 거제도의 저구마을에 새로운 둥지를 틀었다. 이 산문집은 그 둥지에서 보낸 날들의 찬가이다. 비록 물질적인 여유나 편리함 같은 것들은 있지 않았지만 그곳에서의 삶은 시인과 아내, 두 아이들에게는 이전에는 체험할 수 없었던 휴식과 평화를 선물해주었다.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시인이 자신의 텃밭을 가꾸면서 친구가 한 말을 떠올릴 때이다. 산다는 것은 겨울 텃밭과도 같다는 말에서 아무것도 없는 겨울의 텃밭이 봄과 여름을 지나 결실을 맺을 수 있는 공간으로 변화함을 알게 되고, 마음의 텃밭 또한 비워두어야 새로운 씨앗이 날라와 싹을 틔울 수 있음을 긍정하게 되는 부분은 읽는 이로 하여금 깊은 울림을 준다.

  시인은 집에 머무르게 된 강아지 식구 이야기, 아이들의 학교 생활, 먹거리 장만, 마을 사람들 이야기와 같이 시골생활의 소소한 일상을 한폭의 그림처럼 그려낸다. 그 그림 안에서는 모두가 다 주인공이며 이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살고 있음을 강조한다. 그러한 자부심은 도시 사람들은 결코 느끼지 못할 삶의 충만함과 진정성을 자신이 직접 살아내고 있다는 사실에서 나온다. 그리고 이 책을 읽는 이들은 누구라도 시인의 견해에 동의하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 책이 더 살갑게 느껴지는 것은 시인의 가족사에 관한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신과 아내를 둘러싼 가족의 내력과, 문학에 대한 열망 때문에 젊은 시절 집을 떠나 겉돌았던 시인이 어떻게 다시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안정을 찾고 관계를 복원시켜갔는지를 읽다보면 진정한 삶의 복원은 관계의 복원과 다름 아님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시인이 저구마을에 와서 살기 시작하면서 일어난 변화이기 때문이다.

  비록 가진 것은 없지만 그 자체로 행복을 살고 있는 시인과 가족의 삶은 때론 비어있음이 더 큰 충만함을 가져온다는 것에 대해 말해주고 있는 듯하다. 어쩌면 그것은 반드시 시인처럼 시골 마을에서 살아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복잡하고 어지러운 도시의 한가운데에서도 마음만이라도 매순간 비우려 노력하는 이에게도 작게나마 맛볼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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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명한 산책 문학과지성 시인선 281
황인숙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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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시를 즐겨 읽는 사람은 아니다. 그건 시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뜻이라기 보다는 나의 기억과 정서와 체험의 영역에 받아들여질 수 있는, 소위 말해 나와 코드가 맞는 시를 찾지 못했다는 것이 맞을 것 같다. 그런면에서 본다면 우연히 보게된 황인숙의 시집 '자명한 산책'은 나의 가슴을 톡톡 두드리는 코드를 지녔다는 생각을 한다.

몸이 굉장히
굉장히, 굉장히
어려운 방정식을 푼다
풀어야 한다
혼자서
하염없이 외롭게
혼자서. - '병든 사람'

  아픈 사람의 고통은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 아무리 옆에서 챙겨주고 위로해주어도 결국 병의 고통을 감당해야하는 것은 병자 본인의 몫이다. 그것을 혼자 풀어야만 하는 수학의 방정식에 비유한 것은 참 신선하게 다가온다. 혼자서 풀어야할 방정식이 어디 아플 때의 몸 뿐이랴. 때론 삶 한가운데에서 철저히 혼자임을 자각할 때가 더 많이 있다. 시인에게 있어서 삶은 결코 쉽거나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그것은 괴롭고 지겨워도 견뎌야만 하는 것이다.

...
한 번이라도 감자를
삶아본 적이 있는가?
스무 번도 더 냄비 뚜껑을 열고
젓가락으로 찔렀다
...
쉭쉭거리며 가스불은 시퍼렇게 달려들고
냄비는 열과 김을 다해 내뿜고
감자는 버티고 있다
...
이렇게까지 해서 감자를 먹어야 하나?
한번 더 찔러보고 아직 아니라면
그냥 자야겠다
우, 삶은 감자! -'삶은 감자'

  삶을 바라보는 자신의 시각을 감자로 등가시키는 언어의 유희를 통해 생생하게 풀어내는 시인의 감각에는 절로 찬탄이 나온다. 몇번씩 익었는가를 찔러보고 확인하는 그 지겹고도 긴 과정에 지쳐서 아직 익지 않았다면 그냥 자야겠다고 말하지만, 결국 익혀서 먹게되는 감자처럼 삶이란 기다려서 그 결과물을 얻게되는 과정임을 느끼게 한다.

  인간이란 얼마나 외롭고 미소하고 모진 존재인지에 대해 그녀의 시는 때론 강하게 마음을 후벼파는듯한 언어로 노래한다. '강'이라는 시에는 스스로의 고통을 그 누구와도 소통할 수 없음과 받아들여지지 않음에 대한 절망과 괴로움을 핏발이 서린 언어로 쏟아낸다.

당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괴로운지,
미쳐버리고 싶은지 미쳐지지 않는지
나한테 토로하지 말라
...
인생의 어깃장에 대해 저미는 애간장에 대해
빠개질 것 같은 머리에 대해 치사함에 대해
웃겼고, 웃기고, 웃길 몰골에 대해
차라리 강에 가서 말하라
당신이 직접
강에 가서 말하란 말이다

강가에서는 우리
눈도 마주치지 말자. -'강'

  그럼에도 시인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어둡고 칙칙한 것만은 아니다. 그녀는 삶의 처연함과 외로움을 응시하지만 그것에 함몰되지 않는 유머감각을 갖고 있다.

귀뚜라미는 만물이 쓸쓸해하는 가을밤 속을
씩씩하고 우렁찬 노랫소리로 가득 채운다
뭐가 쓸쓸해? 뭐가 쓸쓸해? 뭐가?!뭐가?!뭐가?!
귀뚜라미 소리가
명랑한 소름처럼 돋는 밤. -'가을밤 2'

  그녀의 시들은 마치 독한 탄산수 같다. 목을 넘어갈 때는 미칠듯이 따갑게 하지만 가슴 속 깊은 갈증을 해소시켜주는 탄산수... 그녀의 시들은 그렇게 내 가슴을 톡톡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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