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명한 산책 문학과지성 시인선 281
황인숙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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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시를 즐겨 읽는 사람은 아니다. 그건 시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뜻이라기 보다는 나의 기억과 정서와 체험의 영역에 받아들여질 수 있는, 소위 말해 나와 코드가 맞는 시를 찾지 못했다는 것이 맞을 것 같다. 그런면에서 본다면 우연히 보게된 황인숙의 시집 '자명한 산책'은 나의 가슴을 톡톡 두드리는 코드를 지녔다는 생각을 한다.

몸이 굉장히
굉장히, 굉장히
어려운 방정식을 푼다
풀어야 한다
혼자서
하염없이 외롭게
혼자서. - '병든 사람'

  아픈 사람의 고통은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 아무리 옆에서 챙겨주고 위로해주어도 결국 병의 고통을 감당해야하는 것은 병자 본인의 몫이다. 그것을 혼자 풀어야만 하는 수학의 방정식에 비유한 것은 참 신선하게 다가온다. 혼자서 풀어야할 방정식이 어디 아플 때의 몸 뿐이랴. 때론 삶 한가운데에서 철저히 혼자임을 자각할 때가 더 많이 있다. 시인에게 있어서 삶은 결코 쉽거나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그것은 괴롭고 지겨워도 견뎌야만 하는 것이다.

...
한 번이라도 감자를
삶아본 적이 있는가?
스무 번도 더 냄비 뚜껑을 열고
젓가락으로 찔렀다
...
쉭쉭거리며 가스불은 시퍼렇게 달려들고
냄비는 열과 김을 다해 내뿜고
감자는 버티고 있다
...
이렇게까지 해서 감자를 먹어야 하나?
한번 더 찔러보고 아직 아니라면
그냥 자야겠다
우, 삶은 감자! -'삶은 감자'

  삶을 바라보는 자신의 시각을 감자로 등가시키는 언어의 유희를 통해 생생하게 풀어내는 시인의 감각에는 절로 찬탄이 나온다. 몇번씩 익었는가를 찔러보고 확인하는 그 지겹고도 긴 과정에 지쳐서 아직 익지 않았다면 그냥 자야겠다고 말하지만, 결국 익혀서 먹게되는 감자처럼 삶이란 기다려서 그 결과물을 얻게되는 과정임을 느끼게 한다.

  인간이란 얼마나 외롭고 미소하고 모진 존재인지에 대해 그녀의 시는 때론 강하게 마음을 후벼파는듯한 언어로 노래한다. '강'이라는 시에는 스스로의 고통을 그 누구와도 소통할 수 없음과 받아들여지지 않음에 대한 절망과 괴로움을 핏발이 서린 언어로 쏟아낸다.

당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괴로운지,
미쳐버리고 싶은지 미쳐지지 않는지
나한테 토로하지 말라
...
인생의 어깃장에 대해 저미는 애간장에 대해
빠개질 것 같은 머리에 대해 치사함에 대해
웃겼고, 웃기고, 웃길 몰골에 대해
차라리 강에 가서 말하라
당신이 직접
강에 가서 말하란 말이다

강가에서는 우리
눈도 마주치지 말자. -'강'

  그럼에도 시인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어둡고 칙칙한 것만은 아니다. 그녀는 삶의 처연함과 외로움을 응시하지만 그것에 함몰되지 않는 유머감각을 갖고 있다.

귀뚜라미는 만물이 쓸쓸해하는 가을밤 속을
씩씩하고 우렁찬 노랫소리로 가득 채운다
뭐가 쓸쓸해? 뭐가 쓸쓸해? 뭐가?!뭐가?!뭐가?!
귀뚜라미 소리가
명랑한 소름처럼 돋는 밤. -'가을밤 2'

  그녀의 시들은 마치 독한 탄산수 같다. 목을 넘어갈 때는 미칠듯이 따갑게 하지만 가슴 속 깊은 갈증을 해소시켜주는 탄산수... 그녀의 시들은 그렇게 내 가슴을 톡톡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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