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전에 읽었던 헤르만 헤세의 소설 <유리알 유희>에 나왔던 글이 기억난다. 주인공 요제프 크네히트에게 그를 가르치던 선생님이 하는 말이다.

 "자넨 인간이 인간을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병에 걸린 것 같네."

  그 소설을 읽을 당시에도 그랬지만, 십수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지금도 난 그것이 과연 병일까에 대해 생각해본다. 아마도 병이 아닌 진실이라고 믿고 싶은 마음이 더 강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의 주인공 밥과 샬롯은 각자의 삶에서 어느 누구와도 진정으로 소통할 수 없음에 괴로워한다. 밥은 이십년 가까이 이어온 결혼 생활에서 소외와 고독을 느낀다. 아내는 카펫을 어떤 것으로 살지, 아이들의 일상은 어떤지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정작 일본이라는 낯선 곳에 광고를 찍으러 온 남편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샬롯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사랑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결혼했던 사진작가 남편은 촬영 일정이 빡빡하다는 이유로 부인을 호텔에 혼자 남겨두고 시도 때도 없이 떠나고 또 무엇을 하는지에 대해서도 궁금해하지 않는다.

  그 두사람의 고민은 모두 진정으로 자신의 문제를 나눌 수 있는, 진정으로 소통할 수 있는 대상이 부재한다는 데에 있다. 둘은 우연히 호텔의 바에서 만나게 된 이후로 서로의 고민에 대해 알게 되고 이해하게 된다. 그러나 상대방의 괴로움과 고통에 대해 알게 되었다고 해서 그 둘의 관계는 로맨스로 재빠르게 직진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이 영화에서 가슴 두근거리는 연애 경험담을 기대하는 사람은 실망할 수도 있다. 어떤 면에서 그 두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감정을 사랑이라고 해야할지에 대해서도 망설여진다. 명확히 말하자면 그것은 공감에 바탕을 둔 연대감 내지는 지지감이라고 해야하지 않을까?

    샬롯은 자신이 글 쓰는 것을 좋아해서 글도 열심히 써보았으나 자신이 쓴 글이 마치 소녀들처럼 모두 다 비슷비슷하고 별로였다고 밥에게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밥은 그런 샬롯에게 실망하지 말고 계속 글을 쓰라고 이야기해준다. 자신의 정체성, 재능, 가능성에 대해 불안해하도 두려워하는 것은 사실 그녀의 문제만이 아니다. 배우생활을 오랫동안 해왔던 밥에게도 그것은 늘 의문이었다. 그 지점에서 바로 진정한 이해와 소통의 필요가 발생한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을 이해해줄 사람, 내면을 함께 들여다보고 지지해줄 사람을 꿈꾸고 또 있기를 바란다. 그것이 꼭 사랑이 아니어도 좋다. 다만 소통할 수 있다면... 그러나 살아가면서 그러한 필요를 채우며 사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밥은 일본에서의 광고촬영 일정이 끝나자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샬롯은 밥에게 같이 머무르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하지만 그 둘은 이미 각자가 살아가야할 삶의 영역이 다르다는 것을 안다. 그 두 사람의 키와 나이 차이만큼이나 다른 삶... 그렇지만 헤어짐에도 불구하고 만남 자체가 주는 감동은 놀라운 것이다. 공항으로 떠나는 차 안에서 길을 걷고 있는 샬롯을 발견한 밥은 갑자기 내려서 샬롯에게 달려가 꼭 끌어안고 무어라 귓속말로 속삭인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샬롯은 눈물을 그렁거리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 말이 무엇이었는지 영화를 보는 사람은 결코 알 수가 없다.  

  미국으로 다시 돌아간 밥, 그리고 일본에 남편과 함께 남은 샬롯은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 감독은 그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그대신, 어쩌면 삶에서 진정한 소통의 순간, 자신과 타인의 진실과 대면하는 순간은 너무나 짧은 것이라 지속될 수 없지만 그 기억만은 소중히 간직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영화를 보는 이에게 묻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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