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도날


면도날이 팔랑거리면서 내려온다
축제에서 날리는 색종이들처럼

면도날 위의 삶
불운은 불공평하게 기울어져 있고
뒤뚱거리며 걷다가 결국 쏟아진다

색색의 조각난 면도날은
아스팔트 바닥에 짓이겨져
불그죽죽한 염료를 내뿜고
더러는 누군가의 머리에 내려앉아
휘파람을 불며 집으로 돌아간다

휘청거리면서 면도날 위를 걷는다
죽는 것은 그렇게 쉽지 않다
나는 면도날의 꿈이 죽을 꿈인가
며칠 동안 근심했다

오래도록 저린 왼쪽 손으로
면도날을 쥐었다
면도날이 조용히 웃었다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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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한 마리


농부는 사고로 다리 하나를 잃었다
그는 이제 자신에게 다리가 없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의 없어진
다리 하나는 밤이면 아프다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의 논은 얼마 지나지 않아 풀들로 넘실거렸다
이렇게 다리 병신으로 사느니 죽는 게 낫다
농부는 그렇게 생각하고서는 죽을 결심으로
마을 어귀의 저수지로 갔다 어찌어찌 물에
들어가기는 했으나 죽지 않았다 집의 대들보에
머리를 짓찧기도 하였다 하지만 작은 피딱지의
상처가 생겼을 뿐이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
그는 의사에게 가서 죽어버릴 약을 받아오기로 했다

나를 죽게 해주시오

의사는 농부의 잘린 다리를 보고는,

당신에게 소 한 마리를 처방하겠소

농부는 논을 팔아 소를 한 마리 샀다
이제 그는 아침에 소와 함께 집을 나선다
그리고 예전에 자신이 농사를 짓던
땅이 바라보이는 언덕배기로 간다
소가 풀을 뜯으면, 그는 그 소를 보면서
가만히 웃었다 다리 하나가 없는
방글라데시의 농부는 그렇게 살아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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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일(忌日)


새책을 읽는데 후두둑, 종이들이 떨어진다
읽지 않은 페이지, 나는 바닥의 종이들을
그러모으고는 스카치테이프와 가위를
들고서 가만히 생각을 해보았다 이걸 붙여서
읽을 것인지, 이 책은 어차피 버릴 책이다
그냥 한번 보고 버릴 책, 어차피 죽어버릴 인생,
그리고 잊힐, 하지만 잠시동안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늘어진 카세트테이프처럼 재생되는
새벽 3시 반쯤이었다 아버지는 잠이 들었다
밤은 고요하고 추웠으며 구불거리며 흘러갔다
나의 발은 언제나 시렸다 할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맨발로 자다가 양말을 신고 잠을 청해 본다
가을이다 그리고 오늘은 아버지의 기일(忌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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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이 아줌마


숙이 아줌마는 엄마의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아줌마는 교육자 집안에서 그리 어렵지 않게
자랐는데, 가난한 남자와 결혼하는 바람에
늘 쪼들리며 살았다 아줌마는 벌이가 시원찮은
남편을 돕기 위해 이런저런 부업을 하곤 했다
그래서 한때 문구점도 했었다 내가 어렸을 적에
엄마를 따라 아줌마의 문구점에 갔던 기억이 난다
나중에 아줌마는 돈을 좀 벌어보겠다고
명리학(命理學)을 배우러 다녔다 내가 재수생(再修生) 때의 일이다
아줌마는 이제 막 학력고사를 치룬 내 사주를 봐주었다
나는 아줌마의 실력을 별로 믿지 않았는데,
아무튼 그래도 무언가 좋은 말을 듣기를 희망했다
그리고 나의 기대에 걸맞게 아줌마는 이렇게 말했다

아, 너는 정말로 돈을 많이 벌 거야 엄청난 산처럼,
그렇게 넌 돈에 둘러 쌓여있을 거야

며칠 전, 나는 쇼핑몰 앱에서 선착순 천 명에게
주는 적립금 이천 원을 힘겹게 받아내었다
아, 정말이지 무척 기뻤다 그 이천 원을 뭘 사는데
보태어 쓸까, 고민하다가 문득 숙이 아줌마 생각이 났다
돈의 산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숙이 아줌마는 뇌출혈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아줌마는 고혈압이었는데도 혈압약을 먹지 않았다
사이비 도사가 그런 약을 먹으면
일찍 죽는다고 한 말을 믿었기 때문이다
내가 서른 살이 되던 해의 일이었다 

버터를 사야지,
내 인생에는 기름기가 부족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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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나무


새벽에 꿈을 꾸었다
죽을 사(死)자가 아주 커다랗게
허공에 쓰여있었다
정말로 죽을 꿈인가
마음이 서늘해진다

지난 1년은
몸이 너무도 아파서
죽어버리고 싶었다
어차피 버릴 시를 쓰느라
죽어버리고 싶었다

가끔은 그 모든 게
내 사주(四柱)에 단 하나뿐인
나무 목(木)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나무는 살아있는 기운인데
나무가 말라비틀어지고
나무가 바람을 가두지 못하고
나무가 고양이 울음에 놀라고
나무가 풀벌레와 함께 울고
나무가 사람을 진저리나게 싫어하고
나무가 나무가 나무가

죽어버린 나무에 물을 주면
백 년, 어쩌면 그 후에도
꽃을 피울 수 있다는
말도 안 되는 이상한 전설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러므로 오늘도
마침표 없는 글에다
물을 따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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