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의 가을
"아이구, 이 선생 왔어? 여기 좀 앉지 그래."
"교수님, 찬 거 싫어하셔서 따뜻한 커피로 가져왔습니다. 여기."
규영은 박 교수의 책상에 학교 카페에서 사온 커피를 조심스럽게 놓았다.
"뭘 이런 걸 사 오고 그래. 하여간 이 선생은 구식이야. 옛날 사람이라구. 빈손으로 오는 걸 못 견디지."
"아닙니다. 그런데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규영은 박 교수의 호출 때문에 오늘 강의 내내 신경이 곤두섰다. 뭔가 안 좋은 소리를 들을 것 같았다. 아마도 그것은 다음 학기 강의와 관련된 문제일 터였다. 시간 강사로서 모교의 6 시수(時數)강의는 규영에게 생존의 동아줄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그 강의가 날아간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규영은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교수실에 오기 전에 구내 편의점에서 타이레놀을 샀다. 타이레놀을 2알이나 먹었지만 두통은 가시질 않았다.
"이 선생, 이런 이야기하는 거 나도 참 싫다."
결국, 그렇게 되는구나. 규영은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고 말았다. 박 교수는 그런 규영의 얼굴을 힐끔 보더니 말을 이어갔다.
"내가 요새 상황이 좀 안 좋아. 그 일이 그렇게 되어서..."
그 일이란 박 교수가 지인의 타 대학 전임 교원 채용을 위해 부당한 청탁을 한 일이었다. 형사 고발까지 가지는 않았지만, 그 일로 박 교수의 평판은 급전직하했다. 그리고 그것을 보고 삐딱하게 웃고 있는 사람은 박 교수와 사이가 좋지 않은 정 교수였다. 두 사람은 사학과의 앙숙이나 다름없었다. 둘은 어떤 일이든 발톱을 세우고 대립했다. 교수들의 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것은 대학원생들이었다. 논문 심사에서 두 교수는 서로 상대방 제자들의 논문에 트집을 잡는 일도 다반사였다. 규영은 은퇴한 은사님으로부터 학위를 받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고 늘 생각했다. 규영에게 중세사 강의를 맡긴 것도 은사님의 배려였다. 박 교수는 은사님이 데려온 외부 학교 출신으로 은사님에게는 일정 부분 마음의 빚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 빚은 갚지 않아도 되는 것이 되어가고 있었다.
"정 교수가 추천한 사람이 다음 학기부터 중세사를 할 것 같아."
"아, 네..."
무릎에 놓은 백팩을 꽉 붙잡고 있던 규영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이제 남은 강의는 시립대학의 중세사 강좌 3시수 짜리 뿐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쪼들리는 생활비에 아주 좋지 않은 신호였다. 다음 학기까지 어떻게든 돈을 벌 방도를 찾아야만 한다. 교수실의 문을 닫고 나오는 규영의 어깨가 앞쪽으로 구부러졌다.
집으로 오는 길은 너무나 길게 느껴졌다. 강의가 끝난 날의 저녁은 언제나 떡이었다. 동네 떡집에서는 목요일마다 특가 세일을 했다. 3 종류의 떡을 5천 원에 팔았다. 중세사 강의가 끝나면 규영은 그 무지개 떡집에 들려서 세일하는 떡을 샀다. 사는 떡의 종류도 거의 똑같았다. 쑥절편과 백설기, 가래떡이었다. 저녁에 그 가운데 하나를 먹고, 나머지 2개는 냉동실에 넣어두었다. 그렇게 해서 조금이라도 식비를 아낄 수 있었다. 오늘도 무지개 떡집에 들러서 떡을 살 생각이었다. 하지만 떡집의 문은 닫혀있었다. '금일휴업(今日休業)'이라는 검정색의 네 글자가 돌덩이처럼 규영의 발에 내려앉았다. 밥솥에 밥이 남았던가? 하지만 그보다 머리가 아파서 밥 먹을 생각도 나지 않았다.
백팩을 소파에 내려놓고, 규영은 찻물을 끓였다. 뜨거운 우롱차를 한 모금 마시자 조금은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 같았다. 오늘은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고 싶었지만, 내일 시립대학의 강의 준비를 해야 했다. 책장에서 중세사 책을 한 권 골라서 식탁에 놓았다.
'중세 농부의 생활'이라는 장을 펼치자, 커다란 삽화가 보였다. 얼기설기 이은 엉성한 지붕 아래에는 농부와 그의 아내, 두 아이가 있었다. 그 집에는 방과 거실, 부엌의 구분 따위는 없었다. 그리 크기 않은 공간에 요리를 할 수 있는 벽난로와 작은 나무 식탁, 그리고 짚더미처럼 보이는 침대 2개가 있었다. 집은 농부 가족만의 것은 아니었다. 구석에는 돼지와 닭이 있는 우리가 있었다. 그림 속 농부의 아내는 이제 막 저녁을 준비하던 참이었다.
규영은 커다란 무쇠솥에다 말린 콩과 밀가루, 시든 양배추 껍질을 넣었다. 고기를 먹은 것이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물을 많이 넣는 것이 중요했다. 어떻게든 국물로라도 배를 채워서 허기를 면해야 했다. 규영이 끓이는 스튜는 사실 음식이라기보다는 멀건 물처럼 보였다. 스튜가 끓으면서 나오는 김이 추운 집안의 기온을 조금은 올릴 수 있었다. 구석에서는 돼지가 꿀꿀거리는 소리가 계속 들렸고, 온기는 곧 가축의 배설물 냄새를 음식 냄새와 마구 섞이게 만들었다.
"얘들아, 그릇 가지고 어서 와라. 다 됬어."
이제 6살이 된 작은딸이 한쪽 귀퉁이가 떨어진 나무 그릇을 가지고 규영에게 내밀었다. 규영은 손잡이가 시커멓게 탄 국자에 뜨거운 국물을 떠서 그릇에 조심스럽게 담았다.
"국물은 많으니까, 천천히 먹어."
남편은 피곤한지 식탁 위에 엎드려서 코를 골기 시작했다. 규영은 그런 남편을 깨울 생각을 하지 못했다. 잠이 깨서 배고프면 알아서 먹겠지. 규영은 큰아들의 그릇에 스튜를 담아주고는, 자신의 그릇을 꺼내었다. 건더기는 이미 아이들에게 주어서, 규영의 그릇에는 말 그대로 국물뿐이었다. 아이들은 규영이 담아준 음식을 허겁지겁 먹느라 정신이 없었다. 딸이 어느새 비운 그릇을 규영에게 내밀었다.
"에휴, 천천히 먹으라니까. 그렇게 먹다가는 체한다."
그렇게 말하면서 규영은 일어나서 솥 앞으로 갔다. 딸에게 줄 건더기가 있는지, 규영은 국자로 솥의 밑바닥을 긁어보았다. 뭔가 걸리는 느낌이 있었다. 규영은 국자에 건더기를 모아서 국물과 함께 담았다. 그릇에 그걸 담는데, 뜨거운 음식에서 나는 김 때문에 작은 그릇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때였다. 국물이 규영의 발 위로 떨어졌다.
"앗, 뜨거워!"
규영의 눈이 번쩍 뜨였다. 우롱차를 담은 머그잔이 마룻바닥에 나뒹굴었다. 피곤이 몰려오자 책을 펴놓고 그대로 식탁에서 졸던 규영은 발등에 쏟아진 우롱차에 잠이 깼다. 얼른 양말을 벗고, 얼얼해진 발을 주무르며 규영은 이상하게 몰려오는 서글픔과 분노를 느꼈다. 대체 공부 따위가 뭔데,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인생을 잘못 살아온 것 같았다. 규영의 젖은 양말은 삽화 속 농부의 집을 물바다로 만들었다. 농부의 얼굴은 쭈글쭈글했고, 농부의 아내가 만든 스튜는 넘쳐서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그들의 아이들은 이미 물에 녹아서 보이지 않았다. 규영과 농부 가족의 밤은 앞으로도 그렇게 길게 이어질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