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길


다운 증후군을 앓는 늙은 아가씨가
뽀로로 음료수를 마시고는
커다란 콘칩 봉지를 웃으며 뜯는다
너무나 새까맣게 염색을 한 엄마는
딸이 건넨 음료수병을 버리러 일어선다

불행의 얼굴은 판박이처럼 비슷하다
아픈 왼쪽은 2년째 치료약을 찾지 못했다
나는 다음 진료를 예약하지 않는다

집으로 오는 늦은 엘리베이터에서
9층의 여자와 마주친다
여자에게는 자폐증을 앓는 아들이 있다
여자는 나즈막하게 노래를 부른다

오 솔레 미오(O Sole Mio)

나폴리의 태양은 눈물을 흘리는데
한쪽 눈으로만 눈물을 흘리므로
눈물길 검사를 받아야 하겠지만
막힌 눈물길을 우회하여
여자는 가끔 컹컹 짖는 강아지와
행복한 저녁 산책길에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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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유머


이상하게 목이 마른 날
물을 들이켜도 자꾸 물을 마시는
그런 날에 누군가 이런 말을,

소금을 조금, 아주 조금만 물에 넣어
밍밍한 맛이 나도록 해봐요

식어버린 다즐링 홍차에
굵은 소금 몇 알갱이를 넣는다

바다의 먼 비릿내가 나는
슴슴한 물을 들이키면서 오늘의 유머를 읽는다
70억 로또에 당첨된 사람의 이야기
집과 외제 차를 사고
스타벅스 매장이 있는 건물의 주인이 된 남자
그런데 그는 다니던 회사를 그만 두지 않았다

내가 로또에 당첨이 되면
시를 쓰지 않을 것인지 잠깐, 생각한다
시는 언제나 돈이 되지 않으며
그저 불면의 근원일 뿐이다

또 다른 오늘의 유머를 읽는다
나이 50이 넘어서 대운(大運)이 트이는 방법

돈 욕심을 버리시오
돈에 초연해져야 합니다

홍차의 소금이 새파란 입을 벌리며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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깁다


떠나야할 때가 되면 저절로 알게 된다
너는 아직 이별의 예감에 이르지 않았다
나와 나의 꿈은 이미 알고 있다
기다란 탁자의 끝에서 너는 지루한 표정으로
벽을 부수고 낯선 남자가 뛰쳐나오는데
천정의 석면 가루가 말문을 막는다

너는 무성의했고 무신경했으며 무지했다
너를 탓하지 않기로 한다
엉킨 시간을 무딘 가위로 힘겹게 자른다

어떻게든 다시 이어볼까 생각한다
시간의 틈에 댈 얇은 천을 고른다
해진 양말의 뒤꿈치를 기우듯
하지만 사람들은 새 양말을 산다

안녕, 깁지 못하는 말들
바삭거리는 과자가 되어 연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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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재활용품 수거장의 업라이트 피아노(upright piano)
어린 시절에 피아노 학원을 6년 동안 다녔지만
내 피아노가 없어서 매일 학원에 가서 연습했다
당시의 피아노 가격은 백만 원 정도였다
중국집 짜장면이 육백 원 하던 시절
용돈을 모으고 모으면 언젠가는 피아노를 살 줄 알았다

살림이 어려워지면 엄마는 내 통장의 돈을 빼갔다
살림은 늘 주글거렸고 결코 펴지지 않았다
피아노가 사라졌고 피아니스트도 떠났다

피아노가 누군가를 기다리며 서 있다
나는 뚜껑이 열린 피아노의 건반을 쳐본다
피아노는 멀쩡한데, 손가락이 늙었고
내 집에는 피아노의 자리가 없다
몇 대의 김치냉장고가 거쳐가면서 남긴
새 김치통들이 방 한구석을 차지했다

장마가 시작되었다
나무로 된 피아노와 강철의 줄과 그 안의 펠트를 생각한다
빗물에 버려진 것들과 잊혀진 시간에 대해서도
꿈은 연약하고 녹슬기 쉽다
또각또각 피아노가 걸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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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간짜리의 시


당신의 시를 삭제할게요
쓰는 데 한 시간이 걸렸으니까요
너무 성의가 없어요
머리에 피고름 나도록 언어를 연마해야죠
위대하신 시인의 발자취를 따라
시 창작 안내서를 펼쳐 기본기를 익혀요
비평가를 위한 시를 써요

고개를 빳빳하게 들면 안됩니다
스승님께 숙이고
독자들에게 숙이고
아, 그건 아닌가
독자들이 알아먹지 못할 시를 써요
그게 시에요
탁자, 위의 테이블(table), 을 걸어가요
문, 을 통과해서 도어(door), 를 열어요

진정성을 비웃어요
흉내내기의 달인이 되는 겁니다
레퍼런스(reference)를 기억하세요

책기둥을 부수고
정신머리를 챙겨요
한 시간 일 분이 지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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