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압(水壓)


아파트의 수도관 공사가 끝나고
수압이 전보다 세졌다
부엌 수도꼭지는 콸콸
샤워기에서는 팡팡
세탁기는 쏴아쏴아
양변기는 쒸익쒸익
귀에서는 삐이삐이
머리는 지잉지잉 

족저근막염에 걸린 나의 오른발은
쓸데없이 칭얼거리는 못난 계집애
수도관에는 그 계집애가 살고 있어서
물을 틀 때마다 우는 소리를 낸다

시끄러워!
조용히 하란 말이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꿈에 보였다
아버지, 말 좀 하세요
화장실로 들어간 아버지는 나오지 않았다
하수구에서 차오르는 물과 함께 어디론가

미친 수압과 싸워야지
더러운 늙음을 견뎌야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세발자전거


날아가 버린 인생의 물기
말하자면 젊은 날, 자전거 타는 법을 배우는 일
난 자전거를 탈 줄 몰라
그러므로 달리는 자전거에서 바라보는
풍경 따위는 상상할 수가 없어

머리 허연 늙은 여자가
세발자전거를 타고 가더군
신나게 달릴 수는 없겠지
좀 느리게 가면 어때
무릎이 깨져서 흉터가 생기진 않을 거야
모험을 하기에는 좀 많이 늦었어
그래도 출발은 할 수 있어
지익직, 아스팔트를 긁으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한밤의 케이블 TV


새벽 2시 반, 잠이 오질 않아서 케이블 TV를 틀었다
내가 좋아하는 동물 다큐멘터리를 틀어주는 데가
있나 열심히 리모컨을 눌러본다 하지만 그런 채널은 없다
성우는 기깔나는 목소리로 열심히 싸구려 물건을 선전한다
저런 걸 사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은 모양이군
그 성우는 다음 채널에서 또 다른 물건을 팔고 있다
젊은 남자 가수는 쥐어짜내는 목소리로 트로트를 부른다
귀엽게 보이려는 손짓은 어색한 웃음을 터지게 만든다
자동차 고등학교에 다니는 학생이 나온다
열심히 배우고 졸업해서 빨리 돈을 벌고 싶다고 말한다
그래, 돈 벌어야지 쓸데없이 대학 가서 뭐하니

어떤 할머니는 엉덩이뼈가 부러져서 응급실에 누워있다
보기만 해도 심란해서 얼른 채널을 돌린다
요새 새로 방영되는 미니 시리즈가 나온다
젊은 배우들의 얼굴은 죄다 낯설다 내가 모르는 애들
오래전 구닥다리 사극도 나온다 구질구질한 화질 속
중견 배우들은 이제 은퇴해서 시골에 집을 짓고 산다
그러니까, 벌써 20년 전에 만들어진 사극이구먼
어떤 채널에서는 나를 가르쳤던 교수가 한국 영화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저 양반은 별로 늙질 않았구나
나는 미친듯이 흰머리가 나는데

그 많은 채널 가운데 어쩜 그리 볼 게 없을까
TV를 끄고 창문으로 건너편 아파트를 바라본다
불 꺼진 거실에 경광등처럼 번득이는 TV 화면
저 사람은 늘 새벽 4시까지 저렇게 시간을 보낸다
늙은 사람이겠지 내일 돈 벌러 나갈 젊은이는 자고 있다
정신 나간 매미가 짧게 우는 소리를 낸다
얘야, 지금은 잘 시간이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큰 개


큰 개가 짖고 작은 개가 짖는다
큰 개는 작은 개가 싫은 모양이다
작은 개는 큰 개가 우습다 앙칼지게 짖는다
네가 뭔데
큰 개는 작은 개가 무서워서 짖는다
저리 가 저리 가란 말이다

작은 개의 주인은 매일 오후 5시
큰 개가 사는 집 앞을 지나간다
그렇게 작은 개와 큰 개가 만난다
괴롭고도 짜증나는 개들의 인사
큰 개의 주인은 어디론가 늘 나가 있다
큰 개는 지나가는 사람만 보면 짖는다
놀라고 무섭고 외로워서

큰 개는 유리창에 얼굴을 대고
혓바닥을 길게 내밀고는
우는 표정으로 드러누워 있다
이 더운 여름, 길고 누런 털은
눅눅해진 나머지 푸르스름하게
곰팡이가 핀 것 같다
털갈이는 어찌 하는지

후두둑, 장맛비가 떨어지기 시작한다
빗소리에도 놀라 짖는 큰 개
나는 큰 개가 몹시도 가엽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장마(The rainy season)


튼살처럼 터져버린 물소 가죽 소파에
몸을 누이고 낮잠을 청한다
돌아가신 할머니와 아버지가
거실에 앉아계셨다
회색의 얼굴, 아무 말도 없이

죽은 조상이 꿈에 보이는 건
어쨌든 좋은 건 아니에요
젊은 아가씨 무당이 말했다
 
엄마는 혼자 집을 나갔다가 길을 잃었다
무너진 기억의 제방을 더듬으며
여기가 어딜까? 아무 생각이 나질 않아

나는 땀과 장맛비로 범벅이 된
엄마의 얼굴을 가만히 닦아 주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