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영화 1001 죽기 전에 꼭 1001가지 시리즈
스티븐 제이 슈나이더.이언 헤이든 스미스 책임편집, 정지인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14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읽을 만한 책이 뭐 없나 책장을 살펴보다가, 이 책을 발견했다. 동생이 사서 보내준 책인데, 비닐 포장도 안뜯고 6년째 책장 안쪽에 처박혀 있었다. 왜 안보고 그렇게 놔두었을까? 거의 10년 가까이 영화를 안봤다. 영화라면 지겹고 신물이 났던 것도 같다.


  포장을 뜯고서 안쪽에 발행 년도를 보니 2014년. 책이 나오고 4판까지 찍어냈으니, 이 책은 꽤나 잘 팔린 책 같다. 이 판본 이후로도 2번이나 증보판이 나온 것을 봐도 그렇다. 영화를 좋아하는 이들이 이렇게나 많은가... 아무튼 책을 읽기 시작했다. 영화 제목만 보는 데에 2시간이 좀 넘게 걸린 것 같다. 내가 보았던 그 많은 영화들에 대한 추억과 이런 저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이 책은 어쩌면 내 젊은 날을 삼켰던 무수한 영화들의 목록인지도 모르겠다.


  D.W.그리피스의 '국가의 탄생(1915)', '인톨러런스(1916)'를 지금의 나에게 다시 보라고 하면 못볼 것 같다. 전공이었고, 내가 정말로 영화를 좋아하기도 했으니까 열정을 가지고 보았었다. 책에 나온 그 많은 영화들을 지금 생각해 보면 어떻게 봤을까 싶기도 하다. 시간과 노력과 청춘의 시간들이 그 영화들과 함께 흘러갔다. 말하자면 나는 영화를 제대로 보기 위한 훈련을 받은 셈이었다. 굳이 '1만 시간의 법칙' 같은 것을 말하고 싶지는 않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영화를 보아야 영화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될까... 어쨌든 이 책에 나온 영화들은 꽤 괜찮은 길잡이처럼 보이기도 한다. 물론 절대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 책에 언급된 영화들은 대부분 미국 영화들이다. 세계 영화사는 어떤 면에서는 미국 영화사이기도 하다. 그걸 부인할 수는 없다. 이 책의 편집자들도 대부분 미국의 학자들이므로 그런 시각에서 자유롭지도 않다. 유럽 영화사는 좀 쳐주기는 했다. 일본과 대만 영화들도 부록처럼 들어가 있다. 한국 영화는 단 두 편이다. '하녀(1960)'와 '올드보이(2003)'. 새롭게 증보판을 낸다면 '기생충(2019)'이 들어가겠지. 이 책이 미국과 유럽 위주의 시각에서 만들어진 책이라는 사실을 명백하게 드러낸다.


  책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내 영화 공부의 많은 부분을 EBS에 빚졌다는 사실이다. 초창기 헐리우드 흑백 영화들, 다양한 유럽 예술 영화들을 EBS에서 만났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이 책에 나온 켄 러셀의 '악령들(The Devils, 1971)'을 EBS '세계의 명화'에서 봤다. 물론 지금의 EBS의 영화 선정 안목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어쩌다가 '세계의 명화'가 망해가는 동네 비디오 가게처럼 되었는지 안타까울 따름이다.


  앉아서 2시간 넘게 영화 제목을 들여다 보고 마침내 마지막 장을 덮고 일어났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비로소, 오래전에 본 영화들과 함께 젊은 날의 시간들은 온데간데없고 나이든 영화광이 서있음을 깨닫는다. 영화는 나에게 대체 뭐였을까? 그 해답을 아직도 찾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책에 잘못된 부분이 있다. '올드 보이'가 나온 페이지는 900인데 뒷편의 색인에는 898쪽으로 나와있다. 단 2편의 한국 영화를 올리면서 쪽수까지 틀렸다. 단순한 실수일 수도 있겠지. 한국 영화가 아무리 성장했다 하더라도, 미국과 서구 유럽의 영화 학자들 시각에서는 아직도 비주류일 수 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좀 컸네, 그래 끼워주지, 하는 느낌이랄까. 이제 영화는 산업의 영역에 종속되었고, 그걸 예술로 보기는 어렵지 않나 싶다. 자본주의 시대에 돈이 되는 영화를 찍는 것이 영화인들에게 지상 최대의 과제가 된 것도 사실이다. 그래도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들고, 매혹시키고, 많은 이들로 하여금 젊은 날을 앞다투어 내던지게 만드는 이 요망한 영화의 알 수 없는 마력을 뿌리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은 누군가에게는 영화와 함께 그렇게 지나간 시간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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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가들은 당신처럼 다 미쳤소?"

  "나도 잘 모릅니다. 아마 뛰어난 화가들은 그럴지도."


  요양원에서 만난 전직 군인과 고흐는 그런 대화를 나눈다. 줄리언 슈나벨의 2018년 영화 '고흐, 영원의 문에서(At Eternity's Gate)'는 고흐가 죽기 전에 체류했던 아를과 오베르에서의 행적을 그린다. 고흐 역으로는 배우 윌럼 더포가 열연했는데, 이 연기로 베니스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정말로 상 받을만한 연기였다.


  일반적으로 대중에게 알려진 고흐의 모습은 광기에 사로잡힌 천재 화가이다. 스스로 자신의 귀를 자르고, 정신 병원에 갇히기도 하고, 결국은 권총 자살로 삶을 마감한 온갖 불행의 총합 같은 인생. 그러나 그의 신화는 죽음 이후부터 시작되었다. 생전에 인정받지 못했던 그의 그림은 시간이 지날수록 진가를 알아보는 이들이 늘어났고, 그는 현대 미술에서 상업적으로 가장 성공한 피카소를 넘어서는 불멸의 화가로 남았다. 빈센트 미넬리 감독의 '열정의 랩소디(Lust for Life, 1956)'에서는 커크 더글러스가 고흐 역, 앤소니 퀸이 고갱으로 나온다. 그 영화는 어쩌면 고흐에 대한 가장 평이하고도 무난한 초상을 그려낸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고흐, 영원의 문에서'는 고흐의 잘 알려진 인생 여정을 따라가는 데에는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 감독 줄리언 슈나벨은 관객들에게 고흐라는 화가의 내면을 보여주는 것에 촛점을 둔다. 우울과 광기, 그림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한 고흐의 혼돈스러운 마음의 풍경은 끊임없이 흔들리는 카메라를 따라간다. 그러한 실험 영화적 시도는 시각적 피로를 가중시킨다. 정지된 쇼트들이 거의 없으며, 한마디로 미친 듯이 춤추는 쇼트들이 이어진다. 마치 '광기 어린 화가의 내면이란 이런 것이다'라고 내내 외치는 느낌을 준다. 그게 효과적이었냐고 묻는다면 나는 '별로'라고 말하겠다. 슈나벨의 욕심이 좀 과했다. 


  촬영의 난삽함을 메꾸는 것은 윌럼 더포의 뛰어난 연기다. 이 영화를 찍을 당시에 63세였을 윌럼 더포가 37살의 고흐를 그토록 생동감 있게 재현해낸 것은 정말로 놀랍다. 그는 고흐가 죽기 직전에 정말 저렇게 느끼고 말하고 그림을 그렸겠구나, 라고 관객이 받아들이게 만든다. 솔직히 윌럼 더포의 연기 경력 후반부에 이런 눈부신 재능을 보여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세속의 평범함과 타인과의 교류를 소망하기도 하지만 스스로의 열정과 광기에 사로잡힌 예술가의 내면 풍경을 아주 잘 보여준다.


  이 영화의 음악도 나름의 흡인력을 가지고 있다. 미친 듯이 흔들리는 카메라를 따라가는 피로를 상당히 누그러뜨리고 영화에 몰두하게 만든다. 영화 자체의 완성도는 그다지 뛰어나다고 말할 수 없다. 나름대로 고흐의 그림과 죽음과 관련된 흥미로운 가설(자살이 아닌 타살의 가능성, 새롭게 발견된 유작 스케치의 진품 주장)을 제기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고흐의 삶에 대한 새로운 성찰의 기회를 주지는 못한다. 감독이 스스로 말했듯 이 영화는 슈나벨 자신이 느끼는 고흐의 삶에 대한 느낌이며 그것으로 관객이 인간 고흐에 더 가까이 가길 바라는 소망이 반영되어 있다. 슈나벨 표 고흐 영화는 마치 고흐의 어지러운 내면처럼 혼돈, 무질서, 자유로움으로 채워져 있다. 성공적인 시도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화가가 생의 마지막 날들에 마주친 사람들의 냉담함, 무관심, 조롱과 멸시를 영화적으로 재현한 것은 의미가 있다.


  '고흐, 영원의 문'을 보다가 문득 2018년에 aljazeera 방송국에서 만든 다큐 'Dreaming of Vincent: China's Copy Artist'가 떠올랐다. 중국 선전에서 오랫동안 고흐 그림의 모사 화가로 살던 남자는 진짜 고흐 작품을 만나러 유럽 여행길에 오른다. 1시간이 채 안되는 그리 길지 않은 이 다큐는 짝퉁 고흐 그림을 그려서 팔던 이가 고흐의 진짜 그림을 만나면서 일어나는 삶의 변화를 담아냈다. 그가 고흐 묘소를 찾아가 불을 붙인 담배를 올려두고 묵념하던 장면이 기억난다. 일개 모사 화가에게 고흐의 삶과 그림은 그 자신의 삶 전체를 뒤흔들 정도의 울림과 감동을 주었다. 비록 비극적인 죽음으로 삶을 마쳤지만, 고흐는 불멸의 생명력을 얻은 것처럼 보인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영화 '고흐, 영원의 문'은 그렇게 중단되지 않고 이어지는 고흐 이야기의 작은 쉼표일지도 모르겠다. 앞으로도 관객들은 그의 이야기를 흥미로운 다른 영화의 모습으로 만나게 될 것이 분명하다. 



*사진 출처: facebook.com/AtEternitysGate

 

Dreaming of Vincent: China's Copy Artists

출처: https://emptydream.tistory.com/4544 [빈꿈 EMPTYDREAM]

Dreaming of Vincent: China's Copy Artists

출처: https://emptydream.tistory.com/4544 [빈꿈 EMPTYDRE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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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아닌 것들에 대하여 - 어느 수집광의 집요한 자기 관찰기
윌리엄 데이비스 킹 지음, 김갑연 옮김 / 책세상 / 2017년 5월
평점 :
절판


 

  상품 라벨 1만 8천개, 시리얼 상자 1579개, 우편봉투 속지 패턴 800개, 신용 사기 편지 141통... 이런 걸 모으는 사람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이 책의 저자 윌리엄 데이비스 킹은 그런 걸 모아온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을 부르는 명칭이 있다. '수집광'. 이 양반은 번듯한 직업도 갖고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교 UC 연극 무용과 교수. 연극 전공 교수가 어쩌다가 그런 쓰잘데기 없는 것들을 어린 시절부터 모아온 것일까...


  저자는 자신의 수집 역사를 회고하며 책으로 펴냈다. 진짜 오만 자질구레한 것들에 집착하며 아주 어린 시절부터 모아온 그의 수집의 역사는 대단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대체 왜 그렇게 모은 거야?'라는 독자의 질문에 저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결국 자신의 인생이다. 자신이 모은 물건들과 긴밀하게 결부된 인생 이야기가 생각보다 꽤 재미있다. 단지 물건들에 미쳐서 그런 게 아니었다. 인생의 각 시기마다 얽힌 사연들이 있고, 물건들은 그가 겪은 마음의 흔들림과 파고(高)에 함께 따라왔다. 중간 중간 읽다 보면 웃음이 터질 때도 많다. 나름 두께가 있는 책인데도 술술 읽힌다.


  이렇게 글재주가 있는 사람은 물건 모아놓은 기록에서 삶의 다양한 모습을 헤아려 보게 만든다. 그의 수집의 역사에서 이혼과 재혼, 수집광인 그를 이해해주는 가족의 모습도 솔직하게 풀어내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누군가에게는 시시하고 한심해 보이는 취미인지 몰라도, 그에게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 결코 아닌' 물건들의 역사는 꽤나 진지하다. 저자의 수집품들을 보다 보면 독자들은 그 자신들의 수집의 역사도 생각해 보게 될 것이다. 나도 그랬다.


  이 책을 읽고나서 든 생각은 이랬다. 내가 아끼고 사랑했던 물건들이 있는 곳에 내 마음이, 그리고 이야기가 있었다는... 인생의 굽이치는 길목마다 어떤 물건들은 그 시기를 견딜 위안이 되어주기도 했다. 무언가에 아주 열심히 빠져서 모으고 애착을 가졌을 때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다 있었다. 그리고 그 시기가 지나면 시들해지고, 새로운 물건들을 발견하고 좋아하게 되고 그랬었다.


  이 책의 부제는 '어느 수집광의 집요한 자기 관찰기'이다. 자신이 모아온 오만 잡동사니들에서 그 물건들에 얽힌 마음의 허기와 불안을 읽어내며, 힘들었던 시절을 견뎌온 저자에게 물건들은 나름의 '심리 치료사' 역할을 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꼭 물건이 아니더라도, 사람들에게는 힘들고 지친 시기를 견디는 '무언가'가 다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소설이, 드라마가, 그리고 음악과 영화 같은 것들이 그러할 것이다. 나에게는 영화가 그러했다. 어쩌면 그런 것들과 함께 사람들은 부유하는 인생의 허무함과 괴로움을 견디며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괴짜 수집광 교수의 인생 이야기를 읽고 나서 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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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 그랍스키의 2009년작 다큐 '베토벤을 찾아서(In Search of Beethoven)'는 베토벤의 생애와 음악을 담아낸 작품이다. 러닝 타임이 2시간 20분에 이르는데, 생각보다 꽤 길게 느껴진다. 베토벤의 음악 세계를 충실하게 조망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기는 하다. 문제는 지루하다는 것이다. 솔직히 이 다큐는 클래식 음악 팬이나 서양 음악 전공자들에게만 나름의 매력이 있을지 모른다. 나처럼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도 이 다큐의 길고 지리한 여정을 따라가기가 쉽지는 않았다. 2시간 20분이 마치 네다섯 시간은 걸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다큐는 베토벤의 생애를 탄생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시간 순서대로 풀어낸다. 발음 좋은 여성 해설자가 생애와 작품에 대한 소개를 하고, 중간 중간에 세계적인 지휘자와 연주자들의 견해, 음악 평론가들의 부가 설명도 더해진다. 음반으로만 듣던 유명 음악인들의 실제 연주 모습과 그들이 생각하는 베토벤에 대한 개인적 감상을 듣는 기회가 흔치는 않을 것이다. 뭐랄까, 그런 면에서 본다면 귀 호강, 눈 호강하는 다큐일 수도 있겠다.


  지휘자로서는 로저 노링턴의 설명이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그는 베토벤의 음악을 베토벤의 성격과 결부해서 해석한다. '폭풍같다'라는 노링턴의 설명대로 젊은 시절 베토벤의 성격은 불같이 급하고 참을성이 없었다. 그 시기에 만들어진 현악 4중주 '라주모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과 2번이 그러한 면을 보여준다. 특히 피아니스트들이 보는 베토벤의 내면에 대한 해석들도 신선하다. 감상자로서 만나는 베토벤의 음악과 그것을 직접 연주하는 이들이 들려주는 느낌과 생각들이 어떻게 다른지도 알 수 있게 된다.


  다큐는 베토벤의 생애에 등장하는 여성들에 대한 설명도 놓치지 않는다. 특히 '불멸의 연인'에 대한 여러 이야기들도 들려주는데, 어디까지나 음악과 관련해서 짧게 언급할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게리 올드만이 베토벤으로 나온 '불멸의 연인(1994)'을 보는 것을 추천할 수는 없다. 영화의 작품성이 상당히 떨어진다. 거기에 게리 올드만이 연기하는 베토벤은 견디기 힘들다. 그가 영화 속의 누군가를 연기하면 영화의 인물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게리 올드만 그 자체가 되어버린다. 롤랑 조페 감독의 '주홍글씨(1995)'에서 그가 연기한 딤즈데일도 그랬다. 그의 영화 보는 안목이 문제인 것인지 연기력이 문제인 것인지 늘 답답하게 느껴지는 연기자이다.


  '베토벤을 찾아서'는 베토벤의 생애와 음악을 조화롭고 균형있게 살펴볼 수 있는 다큐이기는 하다. 문제는 그 여정이 지루하고 맥아리가 없게 느껴진다는 데에 있다. 감독 필 그랍스키는 2006년에 '모짜르트를 찾아서(In Search of Mozart)'를 만들어서 괜찮은 평가를 받았다. 그래서 회심작으로 '베토벤을 찾아서'를 뒤이어 만들었다. 음악가 전기 다큐로서 사실에 충실하고, 여러 세계적인 음악가들을 담아낸 것은 좋다. 그런데 이 다큐에는 '상상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베토벤의 생애에 대한 무슨 새로운 사실을 발굴하라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관객의 흥미를 끌 수 있는 영화적 장치에 대한 고민이 없다. 하다못해 재연 배우라도 좀 써서 볼거리를 만들던가. 이런 고지식하고 지루하기 짝이 없는 다큐는 일반 관객들까지 아우르는 확장성을 갖기 어렵다.


  그런 미진한 부분이 있기는 해도 클래식 음악 팬들에게는 볼만한 다큐이기는 하다. 로날드 브라우티검이 포르테 피아노로 연주하며 설명해주는 베토벤 음악의 세계, 아름다운 외모와 재능이 함께 빛나는 피아니스트 엘렌 그뤼모, 이안 보스트리지가 부르는 아델라이데, 그리고 마지막을 장식하는 교향곡 9번 '합창'까지 놓칠 수 없는 장면들이 이어진다. 일반적으로 피아니스트들이 실황 연주에서 악보없이 암보로 연주하는데, 브라우티검은 악보를 놓고 연주하는 것이 내 눈길을 끌었다. 잘 정돈된 실황 연주와 함께 리허설 장면들을 비중있게 넣은 것도 생동감을 부여한다.


  이 다큐는 인터넷에서 무료로 볼 수 있는데, 영어 자막이 없다. 그런 약간의 불편함을 감수하고서라도 베토벤을 좀 더 깊이있게 알고 싶은 이들이라면 충분히 볼만한 가치가 있다. 재미가 없다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 물 없이 고구마를 먹으려면 천천히 먹어야 하는 것처럼, 이 다큐도 참을성있게 보고 나면 나름의 성취감을 느낄 수 있다. 감독 필 그랍스키는 이 다큐에 이어 '하이든을 찾아서(In Search of Haydn. 2012)'도 만들었는데, 그다지 볼 마음이 들지는 않는다.




*사진 출처: laemml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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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영화사 수업을 담당한 선생은 일본에서 일본 영화로 박사 학위를 받은 이였다. 그 선생이 일본에서 공부하는 동안 학과 동기들에게 자주 받는 질문들 가운데에는 그런 것이 있었다고 했다.


  "왜 영화를 항상 그런 식으로 봐요?"


  선생은 일본 영화 속에 내재된 전체주의적 사고 방식, 집단주의와 가족주의, 식민주의에 대한 향수와 같은 맥락을 늘 놓치지 않고 보았다고 했다. 그건 식민 지배의 역사가 있는 한국인으로서 어쩔 수 없이 보게 되는 부분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부분을 영화 속에서 읽어내는 것이 일본인들의 눈에는 다소 낯설고 불편하며, 잘 이해가 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함께 같은 영화를 보면서도 하나의 텍스트를 해석하는 방법은 각 사람이 가진 문화적 배경, 그리고 경험의 층위에 따라 달라진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내가 한국인으로서 일본 영화, 특히 전후의 일본 영화를 보는 것도 서구인들이나 일본인들과 다를 수 밖에 없다.


  오늘, 시미즈 히로시 감독의 1937년작 '바람 속의 아이들(風の中の子供, Children in the Wind)를 보았다. 그 한 편으로 리뷰를 쓰기에는 뭔가 좀 심심하고 모자른 느낌이 있었다. 그래서 아이들이 나오는 비슷한 영화를 하나 더 보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보게 된 영화는 이나가키 히로시의 1948년작 '손을 잡은 아이들(手をつなぐ子等, Children Hand in Hand)이었다. 이 영화는 도저히 자막을 구할 수가 없어서 자막 없이 보았다. 둘 다 흑백 영화이고, 아이들이 주인공으로 나온다. 화질과 음질의 상태도 그리 좋지 못하다. 별 다른 재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일본 영화에 대단한 관심을 갖고 있거나 연구자들이나 볼 법한 영화들을 그렇게 두 편 보았다.


  '바람 속의 아이들'에는 예기치 못한 송사에 휘말린 아버지의 부재를 겪는 어린 두 형제가 나온다. 아이들의 연기는 그렇게 세련되지도 못하지만, 뭔가 날것 그대로의 생생함과 활기가 있다. 주인공 형제들과 동네 아이들은 영화 내내 뛰어다니면서 역동적인 에너지를 보여 준다. 그런데 그걸 보는 것이 그렇게 마음이 편하지가 않다. 1937년이면 조선은 식민지 수탈이 본격화되면서 아주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때인데, 일본 본토의 애들 얼굴 속에는 그 어떤 고통과 괴로움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는다. 주인공 젠타와 삼페이 형제의 집 앞의 큰 나무 맨 꼭대기에는 일장기가 늘 펄럭이는데, 두 형제는 그 나무에 자주 올라서 동네를 바라본다. 나는 '바람'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제목도 영 마뜩잖다. 물론 이 영화는 일본의 아동 문학가 츠보타 죠지의 소설을 영화한 것으로 '가미카제'의 '바람'과는 아무 상관이 없을 것이다. 


  '손을 잡은 아이들'도 역시 원작이 있다. 원작 소설은 1944년에 발간되었는데, 이 작품은 특이하게 발달 장애를 가진 아동이 주인공이다. 소설을 쓴 이가 특수 교육에 종사한 교육자였다. 지적 능력이 떨어지는 '나카무라'는 선생의 무관심과 또래의 이지메로 학교에 적응하지 못한다. 재봉일을 하는 부모는 고민 끝에 아들을 받아주는 다른 학교로 전학시킨다. 나카무라를 맡게된 담임 선생(류 치수 분)은 학급 아이들을 다독여가며 나카무라가 잘 지내도록 만든다. 그런데 '야마다'라는 못된 아이('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엄석대를 생각하면 된다)가 전학오면서 나카무라의 신세는 동네북으로 전락한다. 온갖 괴롭힘을 당하는 와중에, 착한 아이들이 힘을 합쳐 나카무라를 보호하고 야마다를 응징한다. 그 과정에서 담임 선생은 약간 방관자적인 위치에 서있다. 결국 영화의 결말은 아이들이 서로 우정을 회복하고, 나카무라는 무사히 중학교를 졸업하게 된다.


  1948년에 만들어진 이 영화에서 패전의 굴욕과 고통의 그림자는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나카무라의 아버지는 군인으로 참전하게 되는데, 그가 자신의 아들을 생각하며 선생에게 보내는 편지는 학교의 벽에 붙여져서 아이들이 모두 읽어야 하는 감동적인 편지로 나온다. 영화는 장애를 가진 아이조차도 사랑과 관용으로 대한다는 그 당시 일본의 교육 제도와 교육자에 대한 약간의 자화자찬 같은 느낌도 준다. 그러나 그런 은혜를 베푸는 국가와 학교, 선생에 대한 보은을 잊지 말라는 훈계의 뜻이 담겨 있다. 나카무라의 어머니는 아들을 재우기 전에 나카무라에게 아버지와 선생님을 생각하며 두 번 인사하게 한다. 마침내 아들의 졸업식 날, 학교를 나오는 길에 나카무라의 어머니는 아들과 함께 학교를 향해 공손하게 인사한다. 그 장면은 전쟁을 치루는 당시의 일본 사회와 구성원들이 어떻게 기능하고 작동하는지를 보여주는 결정적인 모습 같다.


  시미즈 히로시는 아이들을 주인공으로 한 일련의 영화들로 유명한 감독이다. 그의 영화들에 나오는 아이들의 모습을 누군가는 그 어떤 역사적인 배경을 생략하고 그냥 맘편히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나에게는 그것이 어려웠다. '반딧불이의 묘(1988)'가 보여주는 전쟁 피해자로서의 일본 국민들, 그 이기적인 감상주의가 우리 나라의 관객들에게 비판받는 것도 그와 비슷한 맥락에서이다. 어떤 텍스트들은 그것을 둘러싼 시대적, 사회적 맥락을 지운 채로, 마치 온전한 진공 상태로 보는 것이 결코 가능하지 않다.


  이나가키 히로시는 미후네 도시로 주연의 '미야모토 무사시(1954)'로 유명한 감독이다. 이 작품으로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전후의 유명한 일본 영화 감독들은 1930년대와 40년대에 일본 정부의 검열 하에서 작품 활동을 할 수 밖에 없었고, 선전 영화들도 많이 찍었다. 물론 그런 작품들 속에서도 특유의 예술성과 반전 메시지가 보여는 영화들이 있기도 하다. 그러한 배경을 충분히 감안하더라도, 한국인으로 그 시절의 일본 영화들을 그냥 맘 편히 보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오늘 본 두 편의 영화들도 그랬다. 분명히 아이들이 주인공으로 나오고, 아이들의 세계를 그린 영화들임에도 거기에는 그 당시의 일본 사회와 국가의 모습이 명백하게 투영되어 있다. 그런 맥락을 제거하고 순전하게 영화 그 자체만으로 보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건 피식민지 경험이 없는 서구인들이나 다른 제 3세계의 관객들일지도 모른다.


  아이들이 나오는 대부분의 영화들은 사실 그렇게 순수하고 아름다운 세계를 그려내고 있지는 않다. 어른들과 세상에 상처받거나, 바깥 세상의 권력 관계를 답습하고 어쩌면 더 잔혹해질 수 있는 그들만의 세계가 펼쳐지기도 한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아이들이 보고 배우는 어른들과 세상은 거울과도 같아서 그대로 따라갈 수 밖에 없다. 일제 시대의 일본 영화들 속의 아이들 또한 별 다를 게 없다. '바람 속의 아이들'과 '손을 잡은 아이들'에 나오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그 시대를 읽어내는 일은 비평을 하는 이들의 몫으로만 남아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보는 모든 영화들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다층적 의미와 역사와 이야기가 있으며, 그것을 놓치지 않은 것이 좋은 관객으로 영화와 만나는 길이기도 하다.



*사진 출처: commons.wikimedia.org 영화 '손을 잡은 아이들'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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