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곱고 아름다운 영상과 잔잔한 바람 소리 같이 들리는 음악이 깔리는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불안과 두려움의 징후를 읽어내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마리 이야기>를 보면서 나에게 중첩되었던 이미지는 브라이언 드 팔마의 <캐리>였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 두 영화가 기이하게도 나의 마음 안에서 공명을 일으킨 것이다.

  이 영화는 외견상 사춘기 소년의 잊을 수 없는 추억에 관한 이야기라는 인상을 주지만 그 추억은 마냥 기쁘고 행복한 것은 아니다. 그 이면에는 상실과 이별에 대한 두려움, 성장에 대한 당혹스러움과 떨림의 느낌이 자리하고 있다. 열두살 소년 남우에게 이별은 익숙한 옷처럼 보인다. 아버지의 부재, 새로운 사람과의 만남을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는 어머니, 심장병으로 인해 얼마남지 않은 여생을 보내는 할머니, 서울로 떠나는 친구 준호, 철거를 앞두고 있는 마을의 등대... 이것이 남우를 둘러싼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남우가 찾고 싶어하는 위로와 평화는 결코 사람으로부터 주어지지 않는다. 기껏해야 떠돌이 고양이 요와 천사가 들어있는 것처럼 보이는 구슬이 전부인 것이다.

   그런 남우가 마리를 만나게 된다. 마리를 과연 누구로 보아야할 것이냐에 따라 이 작품을 보는 시각도 달라질 수 밖에 없다. 제작의 시놉에 나온 원래의 의도는 "마리"란 한 마리, 두 마리와 같이 살아있는 것을 지칭하는 것에서 따온 것으로 생명에 대한 포괄적인 개념이다. 그러므로 마리의 사랑은 모든 살아있는 것에 대한 보편적인 사랑인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 마리는 주인공 남우의 무의식의 현현(顯現)이다.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자신을 분리시키고 배제하는 주위 환경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도피하려는 남우의 무의식이 만들어낸 완충적 복제물로 보인다.  

  성장이란 깨어짐의 아픔없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알 속의 새는 자신의 부리로 단단한 알껍질을 깨부수고 나와야지만 세상의 빛을 만날 수 있다. 소년을 둘러싼 환경은 언제부터인가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했고 새로운 탄생을 위한 마지막 부서짐의 몫은 온전히 소년의 것이다. 그 순간에 어떻게 두려움과 떨림을 느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소년은 잠시 멈추어서 알 속의 세계를 눈에 담고 마지막으로 작별을 고한다.

  <캐리>가 사춘기 소녀의 성장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이 가져오는 극단적이고 파괴적인 양상에 대해 보여주었다면- 캐리는 자신은 물론 학교 친구들, 어머니까지 죽음으로 몰고 간다 -<마리 이야기는> 매우 정제된 결말을 보여준다. 친구 준호의 아버지를 태운 배는 세찬 밤바다의 폭풍우를 이겨내고 마침내 잔잔한 아침 바다를 만난다. 그 장면은 마치 소년 남우의 내적 여정을 그대로 재현해낸 듯한 착각마저 불러일으킨다.

  어른이 된 남우는 마침내 고백하게 된다. 어린 시절의 그 추억을 잊지 않겠다고 누군가에게 약속한 것 같은데 그것이 누군지 모르겠다고, 어쩌면 자기 자신이 아니었을까 하고. 깨어짐의 아픔을 전제로 한 성장의 첫 관문에서 가장 큰 두려움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름 아닌 그 자신이다.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스스로 파괴해야한다는 두려움과 공포, 불안과 당혹스러움을 직면하는 사람만이 껍질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소년 남우가 만난 마리는 바로 그 자신이었다. 소년의 이야기는 우리의 내면에 자리한 성장을 향한 끊임없는 갈망을 보여준다. 진정한 성장이란 바로 자신을 바라보는 데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그리고 때론 그것이 두렵고 고통스러운 일일지라도 지나간 곳으로 되돌아가는 것에 있지 않다는 사실에 대해 <마리 이야기>는 넌즈시 일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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