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피의 법칙(Murphy's law)이란 것이 있다. 어떤 일이 자꾸 안좋게만 풀려나가는 상황에 처했을 때 서양 문화권에서 사용하는 말이다. 그것과 같은 뜻의 우리말 속담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가 있다. 올해 들어서 나에게 생긴 이런 저런 일들을 생각해 보니 그 말이 생각난다.


  엊그제의 일이다. 책상 스탠드 전구의 한 귀퉁이에 금이 가버렸다. 마침 전에 사놓은 전구가 있었다. 교체를 위해 스탠드에서 전구를 빼내려면 소켓 연결 부위를 앞쪽으로 당겨야만 했다. 전구가 단단히 결착되어 있어서 빼는 데에 애를 좀 먹었다. 그렇게 전구를 빼놓고 새것을 소켓 연결 부위에 끼웠다. 이제 전구를 스탠드 안쪽에 밀착시키기만 하면 되었다.

  전구가 스탠드에 딱 붙는 순간, 작은 유리 조각이 눈으로 튀었다. 아마도 사놓은지 오래된 전구의 유리에 문제가 있었던 모양이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얼른 눈을 씻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리 식염수로 여러번 눈을 헹구어 내었다. 거울로 이리저리 결막 쪽을 살펴보았다. 확실히 눈 안쪽에 뭐가 들어있는 불편한 느낌은 나는데, 유리 조각은 보이지 않았다.

  전구를 교체할 때, 안경을 쓰고 있었더라면 그 유리 조각은 안경알에 부딪혀 튕겨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전구가 잘 빠지지 않자 소켓을 자세히 들여다 본다고 나는 안경을 벗어두었다. 맨눈 작업에 오래된 유리 전구의 불운이 겹치면서 결국 눈에 유리 조각이 들어가 버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에게는 불운한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나는 이제까지 유리 조각 같은 것이 내 눈에 들어가는 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 다음날, 아침 일찍 안과에 갔다. 의사는 유리 조각은 투명하기 때문에 그걸 찾는 일이 쉽지 않다고 했다. 의사가 현미경을 들여다 보면서 눈꺼풀 안쪽을 면봉으로 살살 쓸어내렸다. 그리고 마침내 반짝이는 흰색 유리 조각 하나를 빼내었다. 더이상의 조각은 찾을 수 없었다. 다행히 각막에 상처는 생기지 않았다고 했다.

  병원에서 돌아온 뒤로도 눈에 무언가 있는 이물감과 통증이 계속 되고 있다. 아주 미세한 유리 조각이 아직도 결막에 남아있는 것인지 나도 알 수는 없다. 전구 갈다가 눈에 유리 조각이 들어가다니, 참 재수도 없지 싶다. 이런 안좋은 일을 겪을 때는 좀 달리 생각해야만 한다. 그래도 유리 조각이 각막에 박히거나 하는 것 보다는 낫다. 이만하길 다행이라고 말이다.

  이 글을 세 줄로 요약하면 이렇다. 1. 눈에 이물질이 들어가면 생리 식염수, 또는 흐르는 물에 눈을 씻어낸다. 2. 이물질이 들어간 눈은 비비거나 만지지 않는다. 3. 가급적 빠른 시간 안에 안과를 방문한다. 눈에 들어오는 순간의 유리의 느낌은 정말로 차가웠다. 그런 일은 다시는 겪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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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자분, 잘 들으세요. 백내장은 약 먹어서 낫는 병이 아닙니다. 수술을 해야한다구요. 그 약들 다 소용없단 말입니다."

  의사의 목소리가 다소 신경질적으로 들렸다. 이 안과의 진료실은 문이 다 열려 있어서 대기실에서 의사와 환자의 이야기가 다 들렸다. 그렇군. 눈에 좋다는 무슨 무슨 영양제 같은 것은 다 소용이 없나 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이가 지긋한 노인 환자가 진료실에서 나왔다. 간호사가 내 이름을 불렀다.

  올해 들어 부쩍 눈이 침침해져서 나는 안과에서 정밀 검진을 받아보기로 했다. 세 명의 안과 전문의가 보는 이 병원은 환자들로 미어터졌다. 말 그대로 돈을 쓸어담는듯 했다. 검사하는 데만 1시간이 걸렸다. 그나마 대기실에서의 시간은 짧았다. 의사를 만나보니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의사는 간결하게 이야기를 전달했다. 아마도 채 5분이 되지도 않는 시간이었다. 아직까지 큰 문제는 없고, 백내장이 시작되고 있지만 아주 초기 단계라고 했다. 그걸로 끝이었다.

  '백내장'이라는 단어를 들은 것은 나름대로 충격이었다. 나는 그것이 아주 나이든 노인 환자들의 질병이라고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말하자면 백내장은 눈의 노화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의사가 보여준 모니터에는 작은 유리 알갱이가 반짝이는 내 수정체 사진이 있었다. 언젠가 저 유리 알갱이가 더 많아져서 뿌옇게 되면 수술을 해야할 것이다. 백내장의 진행을 막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 눈을 덜 쓰면 되나? 나는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눈이 건조하고 피로하다면 사유(蛇油)성분이 들어있는 영양제를 추천합니다."

  그날 저녁, 인터넷 검색창에 '눈 영양제'를 넣고 이리저리 사이트를 들쑤시다가 나는 그런 글을 읽었다. 사유(蛇油)는 말 그대로 '뱀기름'을 의미했다. 아니,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야? 뱀기름하고 눈 건강하고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어? 나는 '비타민A', '루테인', '지아잔틴', 이런 것들은 들어봤어도 '뱀기름'은 처음 들어봤다. 뱀기름은 뱀을 잡아서 어떻게 특수한 과정을 거쳐 쥐어짜내는 것인가? 호기심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실제로 '뱀기름' 영양제는 몇몇 제약회사에서 일반의약품으로 나오고 있었다. 아, 아무리 그래도 뱀기름을 어떻게 먹어? 그건 좀 그렇다.

  눈 영양제 따위는 소용없다는 의사의 말이 귓가에서 맴돌았다. 그래도 '뱀기름' 영양제에 대한 일말의 기대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오랫동안 안구건조증으로 고생해왔다. 이젠 거기에다 백내장도 서서히 시작되고 있었다. 불안과 호기심이 뒤엉켜져서 '뱀기름'에 대한 나름의 인터넷 연구를 이어가게 만들었다.

  도대체 '뱀기름'은 어떻게 눈에 효과가 있단 말인가? 뱀기름에는 오메가 3의 성분으로 알려진 EPA가 들어있는데, 그것이 눈의 건조함을 덜어주는 모양이었다. 아니, 그렇다면 오메가 3를 먹으면 되잖아. 그런데 뱀기름에 있는 성분이 일반적인 오메가 3와는 좀 다른 모양이었다. 오랫동안 오메가 3는 안구건조증, 고혈압을 비롯해 우울증까지 개선시킬 수 있다고 여겨졌다. 하지만 막상 임상 연구 결과를 보면 그 효능을 명확히 입증할만한 것이 없었다. 나는 '뱀기름' 영양제도 그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혹시 뱀기름에 대한 임상 논문이 있나 찾아보자. 나는 구글 검색창에 'snake oil'을 입력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쏟아져 나온 것은 '뱀기름'에 대한 서양의학계의 준엄한 꾸짖음과 멸시였다. 서양 의학이 발달하기 이전에 유럽과 미국에서도 이 '뱀기름'을 만병통치약으로 팔아먹은 약장수들이 있었다. 그런 이유에서 영어 단어 'snake oil'은 관용적으로 돌팔이 약장수의 사기 수법을 의미하게 되었다. 물론 '뱀기름'에 EPA 성분이 들어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서양의 안과 관련 학회와 의사들은 '뱀기름'을 신뢰할 수 없는 동종 요법(同種療法)으로 취급하는듯 했다.  

  "딸이 지독한 안구건조증으로 고생했는데, 사유 성분 영양제 먹고 많이 나아졌습니다. 효과 좋아요."

  '뱀기름' 영양제에 대한 좋은 후기도 있었다. 그래, 제약회사에서 저렇게 약으로 만들어 판매할 때에는 뭐 나름의 근거가 있겠지. 그냥 속는 셈치고 한번 먹어보자. 나는 약국에 가서 그 뱀기름 영양제를 사볼 요량이었다. 어느 회사 제품이 좀 나은지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이제 이 뱀기름 영양제는 쉽게 구할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아마도 '뱀기름'이라는 동물성 생약에 대한 사람들의 거부감과 '루테인'의 무지막지한 파워에 밀려서 그리된 모양이었다. 검색을 해보니 뱀기름 영양제를 만들었던 제약 회사들이 해당 제품에 대한 품목 허가를 반납하고 생산을 중단했다는 2021년도 기사들이 주르륵 떴다.

  시중 약국에서 씨가 마른 뱀기름 영양제를 찾아 발품을 팔고 다녔다는 사람의 이야기도 있었다. 그런 이들처럼 내가 그 눈 영양제를 간절히 원하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정말로 '뱀기름'이 들어있는 그 약을 먹으면 건조한 눈이 촉촉해지고 좀 나아질까 궁금하기는 했다. 누군가에게 정말로 효과가 있다면 그 사람에게 뱀기름은 결코 돌팔이 약장수의 협잡을 뜻하는 'snake oil'이 아닐 터였다. 그렇게 '뱀기름' 영양제에 대한 내 인터넷 검색의 여정은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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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모친이 치매 진단을 받은지 1년이 되었다. 지난 1년 동안 어머니의 치매 진행을 늦추기 위해서 매일 한 것이 있다. 바로 '인지 학습'이다. 인지 학습은 뇌 기능의 활성화를 위한 여러 학습 활동을 가리킨다. 낱말 풀이, 숫자 계산, 그림 그리기, 퍼즐 맞추기, 종이 접기와 같은 것이 그에 해당한다. 고시 공부 교재를 사들이듯 많은 교재를 사보고 어머니와 함께 공부를 해나갔다. 오늘 글은 치매 환자의 인지 학습에 대한 내 생각을 적어보려 한다.

  사실 치매 환자의 인지 학습이 정확히 어떤 것인가에 대한 표준적 지침이나 학습 도구가 있는 것은 아니다. 현재 각 지역마다 있는 보건소 부설 치매 안심 센터에서 진행하고 있는 인지 학습 프로그램이 있기는 하다. 그런 프로그램들도 아직까지는 시범 사업적 측면이 강하다. 인지 학습을 진행하려면 무엇보다 교재의 개발이 선행되어야 하는데 거기에는 당연히 국가 예산이 투입되어야 한다. 나는 보건복지부가 치매 환자의 인지 학습 교재 개발에 어느 정도의 예산을 쓰고 있는지는 알지 못한다. 이 부분에 있어서 정부의 향후 정책 방향을 알 수 있는 자료는 '제 4차 치매 관리 종합 계획(2021년-2025년)'에 있다. 그것은 선제적 치매 예방과 관리, 치매 환자 치료의 초기 집중 투입, 치매 돌봄의 지역 사회 관리 역량 강화, 치매 환자 가족의 부담 경감을 위한 지원 확대, 이렇게 구성된다.

  거기에서 '선제적 치매 예방과 관리'와 '치매 환자 치료의 초기 집중 투입', 이 두 분야는 치매 환자의 인지 학습과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일단 의료계는 인지 학습을 '인지 중재 치료'라는 이름으로 병원을 거점으로 한 치료 모델로 끌고 가려는 입장에 서있다(출처: 메디칼업저버 www.monews.co.kr의 2021년도 기사). 나는 치매 환자의 인지 학습을 '질병-치료 모델'에 끼워 맞추는 것이 그다지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만약에 인지 학습을 병원에서 '중재 치료'로 시행하게 된다면 반드시 '의료 수가'가 매겨져야 한다. 수가의 문제는 정부의 한정된 의료 재정과 연결된다. 또한 치료의 주체를 누구로 할 것이냐도 문제다. 의사가 치매 환자의 인지 학습을 직접적으로 주도하는 일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아마도 종합 병원급 이상 대형 병원의 경우, 임상심리사들이 치료팀으로 참여해 해당 학습 치료가 이루어질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병원 주도의 인지 중재 치료가 치매 환자에게 효과적일까? 병원에서 치매 환자의 인지 학습을 얼마나 자주 수행할 수 있을지에 대한 것도 생각해 봐야 한다. 치매 환자의 인지 학습은 매일 꾸준히 해야하는 것이 최상이다. 현재 초기 치매 환자의 인지 학습은 주간 보호 센터, 보건소 부설 치매 안심 센터, 요양보호사에 의해 보조적으로 이루어지는 학습, 이러한 세 가지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주간 보호 센터의 경우에는 정부에서 인지 학습에 대한 인증을 받은 곳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런 주간 보호 센터는 그리 많지가 않다. 대다수의 주간 보호 센터에서 이루어지는 인지 학습은 아주 기초적인 수준에 머물고 있는 실정이다. 일종의 개인 사업적 측면을 지닌 주간 보호 센터가 인지 학습과 관련된 전문 인력을 채용하는 일도 드물다. 요양보호사는 주로 신체 활동의 보조, 돌봄에 집중하기 때문에 그 자격증에 인지 학습에 대한 전문적 이해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치매 안심 센터의 경우 인지 학습 프로그램 자체는 무료로 이루어진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소수의 프로그램에 늘 신청자는 넘쳐 나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치매 안심 센터의 인지 학습에 참여하는 일은 쉽지가 않다. 무엇보다 치매 안심 센터의 프로그램 참여는 접근성과 이동 수단의 제한이라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환자의 보호자가 직접 환자를 매번 데리고 가서 학습 과정 동안 함께 해야 한다. 자가용이 없는 보호자는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환자와 동행할 수 밖에 없다.

  나는 '접근성'이라는 측면에서 초기 치매 환자의 인지 학습에 좀 더 나은 선택지가 주어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국가가 자격을 검정하는 '청소년 상담사'처럼 치매 환자의 통합적 학습, 관리에 대한 국가 전문 자격증을 신설하는 것도 하나의 대안이다. 현재 기관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치매 환자의 인지 학습에는 체계성과 전문성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 이유에서 보건 복지부가 이 부분에 대한 로드맵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 그런 전문 인력이 양성된다면 치매 요양 관련 기관과 단체에서 활동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환자의 요청이 있다면 그러한 전문 인력의 치매 환자 가정 방문 학습을 지원해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 부분은 장기 요양 보험의 예산에 배정하면 된다.

  나는 정부가 장기적으로는 치매 환자의 가족 지원에 좀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재의 치매 환자의 돌봄 서비스는 요양 보호사 파견과 기관에 대한 장기 요양 보험 예산 지원에 치중되어 있다. 거기에서 더 나아가 치매 환자를 가장 가까이에서 돌보는 가족에 대한 경제적, 정서적 지원 서비스가 확대되어야 한다. 치매 가족을 돌보기 위해 가족 구성원이 직접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따면 그에 따른 수당을 지급받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특수한 경우이다. 아동 양육 수당처럼 치매 환자를 돌보는 가족에게 수당을 주고, 심리 상담과 같은 정서적 지원 서비스를 신설하는 것도 시급한 일이다.

  나의 어머니와 우리 가족은 '치매'라는 낯선 길을 걸어가고 있는 중이다. 이 길을 걷는 것은 참으로 힘들고 고통스럽다. 그리고 가족 구성원 모두의 지치지 않는 인내심을 필요로 한다. 이 길을 걷는 많은 치매 환자와 가족들에게 국가가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줄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오늘의 이 글은 그런 생각에서 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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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주 가끔 구글의 검색창에 내가 알고 지냈던 사람들의 이름을 써넣어 본다. 어젯밤 늦게 그렇게 누군가의 이름을 써보았다. 바로 검색 결과가 나온다. 편의상 그 사람을 'H'라고 부르겠다. 내가 H의 근황을 확인해본 것은 20년만의 일이었다. H는 어느 대학교의 교수가 되어있었다. 당시에 H는 박사 과정 중이었다. 공부를 업으로 삼은 사람이 결국에는 교수가 되었으니 참 잘 되었다 싶었다. 생각난 김에 모교 대학교의 학과 홈페이지에도 들어가 보았다. 나를 가르쳤던 교수님은 이제 은퇴해서 명예 교수의 직함으로 소개되고 있었다. 새삼 세월의 흐름을 실감했다.

  나는 내 기억 속의 누군가를 인터넷의 바다에서 끌어올리는 일은 거의 하지 않는다. 더러는 H처럼 교수가 되었고, 또 어떤 이들은 번듯한 기관이나 단체에서 직함을 달고 있다. 사실 그런 것을 확인하는 일은 꽤나 오래도록 씁쓸함을 남긴다. 그 씁쓸한 감정은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과는 그다지 상관이 없다. 나는 타인의 삶을 시기하지 않는다. 다만 나 스스로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되는 것이 싫을 뿐이다.

  "나는 지금 무얼 하고 있는 것일까?"

  언젠가 인터넷 자유 게시판에 이런 글이 올라온 것을 읽었다.

  '독일어로 된 칸트 전집을 갖고 있어요. 이거 인터넷 장터에 내놓으면 사갈 사람이 있을까요? 독일에서 유학할 때 산 책인데 앞으로 더 볼 일이 없을 것 같아요. 지금은 그냥 밥솥 운전하면서 살고 있거든요.'

  철학 전공으로 독일 유학까지 갔지만 이제는 주부로 살고 있는 이의 글이었다. 거기에 이런 저런 댓글이 달렸다. 유학까지 가서 공부한 것이 아깝지 않느냐고 묻는 이도 있었다. 그러자 글을 올린 이는 현재 자신의 삶에 만족하고 있다고 했다. 다만 자신의 책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나는 지난 세월 내가 공부했던 것들이 그 주부의 '칸트 전집'과도 같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어찌어찌 2개의 대학교에서 10년이란 시간을 공부에 쓰고도 그걸 제대로 써먹은 적이 없다. 그건 어떤 면에서는 '낭비'와 '무의미'에 가까운 시간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내가 하고 싶었던 공부를 했으니 되었다, 라는 생각은 그다지 위안이 되지 않는다.

  내가 늘 다니는 산책길에는 3개의 화단이 자리하고 있다. 아마도 아파트 1층에 거주하는 이가 가꾸는 그 화단들은 나름의 특색을 가지고 있다. 두 개의 화단은 계절에 맞추어 아름다운 꽃들이 오밀조밀하게 심어진다. 나는 그 화단을 지나칠 때마다 'have a green thumb'이라는 영어 표현을 떠올린다. 영어에서는 누군가 식물을 가꾸는 재능이 있을 때 그렇게 말한다. 그 화단을 가꾸는 이들은 바로 'green thumb'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나머지 한 군데 화단은 뭐랄까, 'green thumb'과는 거리가 멀어보였다. 무척 넓은 공간에 오만 잡다한 꽃나무들이 자리하고 있기는 했다. 하지만 거기에서 조화나 아름다움을 발견하기는 어려웠다. 되는대로 늘어놓은 화분과 지주(支柱)대며, 흔하디 흔한 꽃들이 무질서하게 심어졌기 때문이다.

  초봄의 문턱에서 나는 그 화단을 지나가다 주인을 보게 되었다. 나이가 좀 든 영감이었다. 그는 봄을 맞아 겨우내 비워둔 화단을 정비하느라 나름 분주해 보였다. 나는 화단 주인에 대해 잠깐 생각했다. 도대체 무엇이 저 사람을 화단 가꾸기에 몰두하게 만드는가? 내가 보기에 그 주인은 'green thumb'의 재능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그 영감에게는 식물에 대한 엄청난 애정이 있었다. 그것이 그를 화단으로 이끄는 원동력이었다. 화단을 가꾸면서 느끼는 보람과 기쁨은 온전히 그 자신의 몫이었다. 거기에 나와 같은 남의 시선과 생각은 끼어들 자리가 없었다.

  나는 오늘 그 화단에서 무리를 지어 피어난 노란 수선화를 보았다. 그 주변에는 볼품없어 보이는 몇 가지 다른 꽃들도 있었다. 그다지 어울리는 모양새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나는 화사하게 핀 수선화를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졌다. 그리고 어젯밤 H의 근황을 확인하고 나서 나 자신에게 던졌던 질문에 답을 할 수 있었다.

  "나는 지금 살아있고, 써야할 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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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지 발톱이 자라지 않은 것이 벌써 2달이 지났다. 걱정이 되어서 피부과에 갔더니 의사는 그냥 두고 지켜보아도 괜찮다고 했다. 약간씩 기분나쁘게 욱신거리는 통증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궁금증이 생겼다. 대체 왜 발톱이 자라지 않는가? 인터넷으로 열심히 검색을 해보았다. 찾아보니 조갑탈락증()이라는 병명이 나온다. 조갑탈락증(onychomadesis)은 갑자기 손발톱의 성장이 멈추어서 결국에는 손발톱이 빠지는 것을 말한다. 조갑탈락증은 무좀균이나 기타 다른 감염균에 의해 손발톱의 일부분이 떨어지는 조갑박리증(onycholysis)과는 다른 질환이다.

  그런데 이 조갑탈락증을 일으키는 원인이 불분명하다. 어린아이들의 경우 수족구병(手足口病)을 앓고 바이러스 감염으로 조갑탈락증이 나타나기도 한다. 하지만 성인의 경우에는 별 다른 원인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조갑 부위에 가해지는 충격에 의한 외상도 원인으로 꼽기는 한다. 그리고 거기에 스트레스도 포함된다. 스트레스는 손발톱의 성장도 멈추게 만든다. 문제는 조갑탈락증에 대한 명확한 치료법이 없다는 데에 있다. 나를 진찰했던 피부과 의사의 말대로 그냥 내버려 두는 방법 밖에 없다. 그러다 발톱이 빠지던지, 아니면 조금씩 이전의 발톱을 밀어내면서 새로 자라던지 그렇게 되는 모양이었다.

  정신적 스트레스가 주요한 요인으로 작용하는 대표적 질환으로는 가려움증(pruritus)가 있다. 오래전에 인터넷으로 UC 버클리 의대 교수가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강의를 본 적이 있다. 바로 '가려움증'에 대한 강의였다. 그 교수는 고대 아리스토텔레스의 감각에 대한 이론에서부터 시작해서 데카르트의 지각, 그리고 현대 의학에 이르기까지 가려움증에 대한 이야기를 술술 풀어내었다. 그는 스트레스가 가려움증을 일으키는 절대적 요인이라고 말했다. 당뇨병과 같은 만성 질환에 의한 가려움증이 차지하는 비중은 5%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게 스트레스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또 다른 무시무시한 병이 있다. 바로 대상포진(Shingles)이다. 나에게 3월은 대상포진을 호되게 앓았던 기억과 결부되어 있다. 피부에 수포와 발진이 나타나기 전에 나는 일주일 동안 극심한 통증에 시달렸다. 그 통증은 일찌기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엄청난 통증이었다. 결국에는 종합 병원에 일주일 동안 입원을 해야만 했다. 퇴원을 하는 것으로 병이 끝나지는 않았다. 나는 한동안 대상포진후 신경통(Postherpetic neuralgia)으로 꽤나 고생했다.

  대상포진을 호되게 앓고 난 뒤에 이 질병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싶어졌다. 그래서 인터넷으로 대상포진에 대한 해외 논문들을 죽 찾아서 읽어보았다. 대상포진의 발병 기전은 대략 이러하다. 일반적으로 바이러스는 인체에 질병을 일으킨 이후 면역 시스템에 의해 사멸되는 과정을 거친다. 그런데 이 수두-대상포진 바이러스(Varicella-zoster virus, VZV)는 죽지 않고 살아남는다. 인체 내부에서 살아남은 VZV는 신경절(神經節, ganglia)에 숨어든다. 일종의 동면 과정에 들어가는 셈이다. 인류가 우주를 탐사하는 지금의 시대에도 어떻게 이 바이러스가 면역 시스템을 교묘하게 회피하는지 그 기전을 알지 못한다. 참으로 놀라운 바이러스이다.

  그렇게 잠들어 있던 바이러스가 어느 순간이 되면 깨어난다. 체력이 저하되고 스트레스가 가중되는 상황이 그때이다. VZV는 자신이 활동할 때가 왔음을 직감한다. 기지개를 켜고 슬슬 활동을 개시하려는 이 바이러스는 일단 자신이 숨어있던 굴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대상포진의 극심한 통증은 바로 바이러스가 신경절을 뚫고 나오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그렇다. VZV는 신경을 조각 조각 절단내면서 자신의 화려한 부활(!)을 통증으로 알린다.

  대상포진은 신경에 비가역적인 손상을 남길 수 있기 때문에 결코 가볍게 보아서는 안되는 질병이다. 통증의 정도가 심하고 특히 발병 부위가 안면과 머리에 해당한다면 대학 병원의 응급실을 찾는 편이 낫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시간이다. 48시간은 대상포진 치료의 골든 타임이다. 오직 빠른 치료만이 대상포진으로 인한 신경손상과 후유증을 최소화할 수 있다. 표준적인 치료법은 피부에 발진이 생긴 후 48시간 이내에 항바이러스제와 스테로이드제를 투여받는 것이다.   

  스트레스와 질병에 대한 나의 글은 이렇게 대상포진에 대한 몸서리처지는 기억으로 끝이 난다. 최근에 내가 석 달 넘게 신경을 쓰는 일이 있었다. 애면글면 속을 끓이는 동안 내 발톱은 성장을 멈추어 버렸다. 내가 바라는 결과는 아니었지만 결국 그 일도 마무리되어가는 참이다. 그러고 보면 병에 걸리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은 스스로의 마음을 잘 살펴보고 다독이는 데에 있다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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