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비싼 사탕이 아니냐? 먹을 때마다 느끼는 건데 이 사탕 참 맛있구나. 엄마 어렸을 적엔 이런 사탕이 어딨어? 명절 때나 친척 어른들이 용돈 좀 주면 그걸로 뭘 사먹을 수 있었지. 동네 문방구에 가면 커다란 유리병에 눈깔사탕이 잔뜩 들어있었어. 그거 한 봉다리 사와서 조금씩 아껴먹었더랬지. 사탕이 얼마나 큰지 입에 넣으면 아주 오랫동안 먹을 수 있었거든. 그거 먹고 있으면 애들이 엄청 부러워했어. 애들은 조금만 떼어주라고 막 조르고 난리야. 그럼 사탕을 콱 깨물어서 조각을 내. 그걸 친한 애들한테 나눠주는 거지.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비위생적이냐. 그런데 그땐 그게 더럽다는 생각도 못했어. 그냥 사탕 얻어먹을 수 있어서 애들이 좋아했더랬지.

  모든 게 다 귀하던 시절이었으니까. 사탕보다 더 귀했던 건 껌이었어. 애들 중에 누가 껌을 씹고 있으면 가서 그러는 거야. 나도 좀 줘. 그럼 씹던 껌을 조금씩 떼어서 주곤 했지. 남이 씹던 껌 나눠 씹으면서도 애들이 다들 즐거워했어. 원래 껌이 색색가지로 물이 들어있잖니. 근데 오래 씹으면 그 물이 다 빠지잖아. 그러면 어쩌는 줄 아냐? 크레파스로 껌에다 칠을 해서 씹었단다. 그렇게 몇 시간을 씹고 나서도 버리지 않아. 내 방의 벽에다 붙여놓고 다음날에도 또 씹었지. 아휴, 생각해 보면 참으로 무지했던 시대였지 뭐냐. 그래도 어린 시절을 생각해 보면 즐거운 추억이 많아.

  물론 가난한 애들은 무척 많았어. 고아원에서 학교 다니는 애들도 꽤 있었구. 걔들은 뭘 잘 못먹고 다녔던 것 같아. 엄마는 집에서 농사를 크게 지었으니까 먹고 사는 걱정은 안하고 살았지. 그래도 시내 애들하고는 사는 형편이 차이가 날 수 밖에 없지. 언젠가 한번 시내에 사는 애 집에 놀러간 적이 있었어. 장사를 하는 집이었던 것 같은데 집이 꽤 잘 살았어. 걔네 집에서 뭘 차려줘서 밥을 먹고 왔는데, 밥상이 우리집하고는 다르더라. 생활 수준의 차이란 게 느껴지더라고. 어린 마음에도 뭔가 내 마음이 그랬던 것 같아. 아, 이렇게 사는 사람들도 있구나. 뭐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 그 아이하고는 더 가깝게 지내질 않았지. 거리감을 느껴서 그랬던 거 같아.

  여름만 되면 아직도 기억에 남는 게 있어. 그 생각을 하면 마음이 짠해진다. 아이스케키라고 들어봤니? 설탕 넣어 얼린 얼음 과자 말이다. 그걸 애들이 팔았거든. 체구는 조그만 애들이 지들 몸의 반만한 커다란 나무 상자를 어깨에 메고 다녔지. 그 애들은 학교도 안가고 그렇게 여름 한철 아이스케키 장사를 하는 거야. 한여름 대낮이 좀 더우냐. 땀을 삐질삐질 흘려가며 '아이스케키 사요, 아이스케키'하고 외치는 거야. 애들 얼굴은 더위에 빨갛게 익어버리지. 아직도 그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이런 이야기 하면 마음이 좀 아파.

  오늘이 몇일이냐. 아이구, 벌써 그렇게 날이 되었구나. 그러니까 내일이 9월 1일이지. 오늘은 바람도 불고 날도 그렇게 덥지 않구나. 이제 여름도 다 가고 가을이 오겠구나. 좀 있으면 추석이네. 엄마 어렸을 적엔 추석에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강강수월래를 했었어. 동네에 가장 잘 사는 집이 있었거든. 그 집 마당이 엄청 컸어. 거기 다들 모여서 명절날 저녁에 강강수월래도 하고 놀았어.

  그 집엔 엄마 친구도 살았어. 복순이라고. 정말이지 너무나도 착한 친구였어. 그렇게 마음씨 고운 애는 없었단다. 근데 그 친구 생각하니까 막 눈물이 나려고 그러네. 왜 그러냐고? 걔가, 그러니까 복순이가... 중학생 때쯤에 복순이 귀가 멀어버리더라고. 그 때문에 고등학교도 못갔던 것 같아. 정말 착하고 좋은 애였는데. 어찌 그리 되었는지. 시집은 가서 잘 살았을까? 근데 엄마도 그 후 소식은 몰라. 엄마는 고등학교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왔으니까. 근데 왜 이렇게 눈물이 날까? 아무튼 복순이 생각만 하면 마음이 슬퍼지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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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치먼드 북쪽의 부자들


난 내 영혼을 갈아넣으면서 매일 죽도록 일하고 있지
쥐꼬리만한 월급을 받아가면서 말야
그 결과 내 인생이 이 모양 이 꼬라지인 거야
매일 지친 몸을 이끌고 집구석에 들어가고 있어

정말 빌어먹을 세상이야
나나 당신이나 다 같은 처지 아닌가
난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이게 현실이 아니길 바라
아, 하지만 절대 그럴 리가 없지

우린 말야 새 시대에 낡은 영혼으로 살고 있는 것 같아
리치먼드의 부자들은 모든 걸 손아귀에 쥐고 뒤흔들고 싶어해
우리의 생각, 우리가 하는 일
그 작자들은 우리가 결코 모를 거라 믿는 것 같아
그러나 우린 그 속셈을 알고 있지
우리의 빌어먹을 월급은 세금으로 족족 나가버리지
이게 다 리치먼드의 부자놈들 때문이라니까

정치하는 것들 말야 불쌍한 광부들이나 돌보라고 해
아, 물론 광부들도 생각하고 외딴 섬에 갇힌 누군가도 잊어서는 안돼
하느님, 먹을 게 없어서 길바닥에 널브러진 사람을 버리지 마세요
정부보조금 타먹으며 돼지처럼 살찐 인간들도 외면할 수는 없겠죠

만약에 말이야, 댁이 키 160cm에 136kg의 몸뚱이를 가졌다면
내가 낸 세금은 당신이 쓰레기 같은 초코과자를 사는 데에 퍼주면 안된다고
젊은 애들이 생때같은 목숨을 내던지고 있어
이 빌어먹을 나라가 계속 그들을 그렇게 몰아가고 있는 거야

번역: 푸른별


  미국 버몬트주 출신의 컨트리 가수 Oliver Anthony는 8월에 이 노래 'Rich Men North Of Richmond'를 발표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이제 이 노래를 듣는다. 노래를 들은 후 당신의 반응은 다음 중 무엇인가?

1번: 부자를 싫어하는 걸 보니 전형적 좌파주의자의 노래군.
2번: 아냐. 이 노래는 퍼주기식 복지 정책을 비난하고 있어. 그러니 공화당 지지자들에게 어울리는 노래야.
3번: 글쎄. 뭔가 말하고 있기는 한데 그 메시지가 우파쪽인지 좌파쪽인지 모르겠는 걸.
4번: 노래에 정치적 신념 따위가 중요해? 그냥 마음에 들면 좋은 거고 안들면 별로지. 어쨌든 노래 괜찮은데.
5번: 이 정신나간 가사는 뭐야. 리치먼드의 부자는 뭐고 광부는 왜 나와? 이런 노래를 누가 들어?

  지금 미국에서는 바로 이 노래 'Rich Men North of Richmond'가 온 나라를 헤집어 놓고 있다. 노래는 나오자마자 곧장 Billboard Hot 100의 1위를 차지했다. 빌보드 역사상 어떤 노래가 다른 차트에 오르지 않고 바로 빌보드 1위에 오르는 일은 없었다고 한다. '리치먼드 북쪽의 부자들'이 이토록 뜨거운 반응을 이끌어내는 것은 노래의 가사가 매우 정치적으로 들리기 때문이다. 8월 23일, 밀워키(Milwaukee)에서 열린 공화당 대선 후보 토론회에서는 이 노래가 당당히 울려퍼졌다. 후보들은 바이든 정부의 퍼주기식 복지가 나라를 망치고 있다면서 이 노래는 그 울분을 표현한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자, 그렇다면 당신은 앞의 질문에 어떤 답을 골랐는가? 거기에 대한 답은 당신의 정치 성향을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다.   

  내가 이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 나는 노래의 가사 자체에 흥미를 느꼈다. '리치먼드 북쪽의 부자들'은 작가 조지 오웰(George Orwell)이 '1984'에서 그려낸 빅 브라더(Big Brother)의 현실 버전인가? 모든 것을 소유한 부자가 쥐락펴락하는 세상, 그 세상에서 영원히 고통받는 평범한 소시민. 그런 구도로만 본다면 이 노래는 좌파주의자들의 입맛에 맞는 노래일 것이다. 노래의 가사는 부자들만 비난하지 않는다. 정치인들은 나라를 좀먹는 모리배로 그려진다. 그들의 정치는 그 어떤 희망도 주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젊은이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다고 올리버 앤서니는 일갈한다. 

  그런데 노래의 제목이기도 한 리치먼드 북쪽의 부자들은 과연 누구일까? 노래를 부른 올리버 앤서니도 그들이 누구인지 말한 적이 없다. 나는 미국의 지도에서 리치먼드를 찾아본다. 리치먼드(Richmond). 미국 버지니아주(Virginia)의 주도인 이 도시는 꽤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 도시는 과거 남부 연합(Southern Confederacy)의 수도였다. 그렇다. 노예 제도를 두고 미국이 피터지는 내전(Civil War)을 했을 때, 리치먼드는 남부의 정신적 구심점이었다. 미국에 부자들이 모여사는 곳이 리치먼드 북쪽에만 있을까? 왜 올리버 앤서니는 하필 '리치먼드'라는 도시를 골랐을까? 어떤 면에서 남부 출신인 이 가수에게 있어 익숙한 세계는 남부를 아우르는 지형적 경계에 국한되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노래 가사의 리치먼드 북쪽은 명백한 계급적 상징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보다는 기득권을 가진 이들에 대한 막연한 분노를 형상화하기 위해 끌어온 지형적 표지물로 보는 편이 맞다.    

  리치먼드와 같은 지형적 표지는 앤서니가 호명하는 '광부들(miner)'에도 내재되어 있다. 이 노래에서 언급되는 광부들은 '애팔래치아 산맥(Appalachian Mountains)'을 대표하는 거주민이다. 미국의 남서부에서 북부를 가로지르는 이 광대한 산맥은 개척시대부터 피비린내 나는 역사를 지니고 있다. 미국 정부는 원주민인 인디언들을 무자비하게 몰아냈고, 그곳에 일꾼으로 써먹기 위한 흑인 노예들을 데려왔다. 그러다 광산업이 흥하기 시작하자 백인 이주민들이 몰려왔다. 곧 흑인들은 이전의 원주민 신세가 되었다. 하지만 좋았던 시절도 잠시, 광산업이 쇠락하자 많은 이들이 그곳을 떠났다. 남은 이들은 가진 것 없는 백인들 뿐이었다. 애팔래치아는 잊혀진 곳, 빈곤과 무지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므로 어떤 이들은 이 노래가 '광부들'을 하층민으로 규정했을 뿐만 아니라, 애팔래치아의 역사성을 모독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노래에서 가난한 '광부들'보다 더 안좋은 취급을 당하는 이들은 따로 있다. 바로 160cm의 키에 136kg의 몸을 가진 사람이다. 가사의 묘사대로라면 그 사람은 고도비만에 정부의 수급보조금으로 연명하는 가난한 사람이다.
그들이 즐기는 간식은 '퍼지 라운드(fudge rounds)'라는 과자다. 당분과 싸구려 초콜릿으로 범벅이 된 이 과자를 사먹는 이들은 성실한 월급쟁이의 삶을 질식시키는 주범으로 등장한다. 물론 그것은 그들에게 세금을 퍼주는 정치인들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공화당 후보들과 그 지지자들이 이 노래에 환호할 수 있는 지점은 바로 거기에 있다. 우파주의자들은 복지 정책이 가난한 이들은 삶을 개선하는 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믿는다. 비만과 나태함으로 묘사되는 하층민은 이 노래에서 그렇게 조롱당한다.

  그렇다면 '외딴 섬의 누군가(an island somewhere)'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제프리 엡스틴(Jeffrey Epstein)은 미성년자 성착취 범죄로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그곳에서 사망했다. 엡스틴이 은거하면서 그런 추악한 범죄 행각을 벌인 곳이 그가 소유한 섬들에서였다. 올리버 앤서니가 가사에서 언급한 '섬'이 엡스틴의 그 섬들을 지칭하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럼에도 '외딴 섬의 누군가'는 '광부들'과 계층적 동일선상에 놓인다. 그들은 권력과 부를 가진 자들에 의해 유린된 약자, 피해자들이다.   

  이 노래를 두고 정치적 메시지에 대한 갑론을박이 격화되자, 올리버 앤서니는 자신은 '비당파적인(nonpartisan)' 사람이라고 밝혔다(출처: en.wikipedia.org). 올리버 앤서니는 자신의 노래가 공화당 후보 토론회에서 울려퍼질 것을 예상했을까? 2013년에 뇌를 다치는 사고를 겪은 후, 그의 삶은 많은 면에서 불안정해졌다. 제대로 된 직업은 얻을 수 없었고, 정신적으로는 우울과 불안에 시달렸다. 그러한 개인적인 좌절을 겪은 백인 컨트리 가수는 자신의 경험을 남부 토박이의 체화된 신념과 결부시켜 노래를 만들었다.

  나는 이 노래가 당파적이라기보다는, '남부'라는 지역성과 신념 체계에 더 많은 부분을 기대고 있다고 본다. 외국인으로서 나는 미국에서 '남부'사람으로 산다는 것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다. 내가 그들에 대해 알고 있다면 책에서 배운 지식이 전부이다. 그들에게 남북 전쟁은 패배와 수치의 기억으로 남았다. 남부인들에게 그 전쟁은 그들이 외친 올바름에 대한 가치가 짓밟힌 역사적 사건이었다. 재건 시대를 거치면서 남부인들은 서서히 자신감을 회복해 갔다. 노예 제도에 대한 옹호는 뿌리깊은 인종 차별과 직결되었다. 남부인들만이 공유하는 신념의 체계는 근본주의적 기독교 교리와 배타적인 정치의식 속에서 배양되었다. 이 노래의 가사에서 반복해서 언급되는 '하느님(Lord)'은 부조리한 현실에서 화자가 의지하는 유일한 존재이다. 이는 올리버 앤서니가 이 노래 이후에 발표한 'I Want To Go Home'에서 더욱 명확해진다.

  불합리하고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종교는 삶을 견디게 만들어 준다. 올리버 앤서니는 정치인들과 부자들은 어리석으며 그들이 저지르는 악행은 약자들의 삶을 더욱 고통스럽게 만든다고 외친다. 그것은 결코 당파적인 메시지가 아니다. 노예 제도에 대한 정당성을 부르짖던 남부의 사람들은 이제 정의로움과 공정에 대한 자신들만의 독자적 감각을 계발했다. 세금은 게으른 빈자에게 물쓰듯 쓰여져서는 안된다. 타락해버린 리치먼드의 부자들과 정치인은 도덕성을 회복해야만 한다. 그런 면에서 나에게는 '리치먼드 북쪽의 부자들'이 뼛속 깊이 남부인의 내면에 호소하는 남부 찬송가처럼 들린다.         


*사진 출처: whiskeyriff.com




**Oliver Anthony노래 Rich Men North Of Richmond
유튜브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sqSA-SY5Hro



***'Rich Men North Of Richmond' 가사 전문

I've been sellin' my soul, workin' all day
Overtime hours for bullshit pay
So I can sit out here and waste my life away
Drag back home and drown my troubles away

It's a damn shame what the world's gotten to
For people like me and people like you
Wish I could just wake up and it not be true
But it is, oh, it is

Livin' in the new world
With an old soul
These rich men north of Richmond
Lord knows they all just wanna have total control
Wanna know what you think, wanna know what you do
And they don't think you know, but I know that you do
'Cause your dollar ain't shit and it's taxed to no end
'Cause of rich men north of Richmond

I wish politicians would look out for miners
And not just minors on an island somewhere
Lord, we got folks in the street, ain't got nothin' to eat
And the obese milkin' welfare

Well, God, if you're 5-foot-3 and you're 300 pounds
Taxes ought not to pay for your bags of fudge rounds
Young men are puttin' themselves six feet in the ground
'Cause all this damn country does is keep on kickin' them down

Lord, it's a damn shame what the world's gotten to
For people like me and people like you
Wish I could just wake up and it not be true
But it is, oh, it is

Livin' in the new world
With an old soul
These rich men north of Richmond
Lord knows they all just wanna have total control
Wanna know what you think, wanna know what you do
And they don't think you know, but I know that you do
'Cause your dollar ain't shit and it's taxed to no end
'Cause of rich men north of Richmond

I've been sellin' my soul, workin' all day
Overtime hours for bullshit p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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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22598 2023-08-29 02:45   좋아요 0 | URL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덕분에 노래도 알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푸른별 2023-08-29 09:34   좋아요 0 | URL
han22598님 반갑습니다. 흥미있는 노래라서 한번 글을 써보았네요. 노래가 들어보면 가수의 진정성이랄까, 그런 게 느껴집니다. 댓글 고맙습니다.
 

  

  EIDF가 올해로 20주년을 맞이했다. 나는 2004년부터 매년 빠지지 않고 이 다큐 영화제를 챙겨서 보아왔다. 20년이라는 세월 동안 EIDF가 쌓아온 내공이 있을 텐데, 내 눈에는 그것이 잘 보이지 않는다. 최근 몇 년 동안 나는 이 영화제에서 활기나 창의성 같은 것을 찾을 수 없었다. 새로운 다큐멘터리를 소개하는 시의성도 실종되었고, 다양한 주제의 다큐를 다루는 포용성도 옅어졌다. 아마도 올해는 이제까지 내가 보아온 EIDF에서 가장 실망스러운 한 해가 될듯 하다.

  EIDF 기간 동안 상영 다큐멘터리를 볼 수 있는 D-Box의 유료화(2021년부터 시행)는 매우 유감스럽다. 나는 'Festival'이 가진 환대와 참여의 정신을 EBS가 돈벌이로 환산했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축제 기간 동안에는 관객이 출품작들을 무료로 볼 수 있게 해야하는 것 아닌가? 그 덕분에 나는 본방송으로 열심히 출품작들을 챙겨서 보기는 했다. 그렇게 해서 이번에 보았던 다큐들에 대한 짤막한 감상평들을 적어보려고 한다.


1. 이니나와(Ininnawa: An Island Calling, 2022)
   Arfan Sarban, 인도네시아


  라비아는 오랫동안 간호사로 일하면서 섬주민들의 건강을 보살펴왔다. 라비아는 은퇴를 준비하면서 딸 미미에게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전수하려고 노력한다. 미미는 섬주민들의 건강을 보살핀다는 사명감과 두 아이의 엄마로서 느끼는 모성 사이에서 고군분투한다. 다큐는 인도네시아 도서 지역의 열악한 의료환경을 부각시킨다. 두 모녀가 보여주는 직업적 연대의식과 감정적인 유대는 척박한 현실에서 더욱 소중하게 느껴진다. 미미가 주민들, 특히 여성들의 질병을 진료하고 출산을 돕는 장면은 인상적이다. 이는 이슬람 국가에서 여성 의료인이 보건 정책에서 담당하는 특수한 위치를 보여준다. 평이하지만 나름의 울림을 가진 다큐.


2. 침묵의 집(Silent House, 2022)
  Farnaz Jourabchian, Mohammadreza Jourabchian, 이란


  파르나즈와 모하마드레자 남매는 자신들이 살아온 집의 역사를 탐구한다. 100년이 된 그 집을 통해 관객은 격동기 이란의 사회상을 관조한다. 3대에 걸친 가족의 고난과 시련은 '이란 혁명'이 보통의 이란 사람들에게 미친 미시사적 파장을 보여준다. 사진과 영상물을 비롯해 풍부하게 축적된 가족의 기록은 다큐의 사실성을 더한다. '침묵의 집'은 사적 다큐의 지평을 역사적, 정치적 지평으로 확장시킨다. 매우 잘 만든 다큐이다.


3. B급 며느리(선호빈, 2017)

  EIDF 2023에서 눈에 띄는 편성은 '다시 보는 다큐시네마'라는 섹션이다. 이것은 프로그램의 빈곤함을 메꾸려는 무성의한 시도처럼 보인다. 그 상영작으로 선정된 'B급 며느리'는 나름의 주제 의식을 갖고 있지만 시의성을 갖지는 못한다. 차라리 마민지의 '버블 패밀리(2018)'를 보여주는 편이 더 나았을 것이다. 이 다큐는 부동산 공화국이라는 작금의 대한민국의 현실에서 여전히 공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4. 백래시: 디지털 시대의 여성 혐오(Backlash: Misogyny in the Digital Age, 2022)

  온라인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여성 혐오에 대한 사회영상학적인 다큐. 미국, 캐나다, 이탈리아의 피해자들은 자신이 겪은 온라인상의 협박과 괴롭힘에 대해 증언한다. 인터넷에서 일어나는 차별과 폭력은 실제 현실의 범죄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런 면에서 이 다큐는 온라인 혐오 범죄의 가해자들을 처벌할 법적 근거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현시점에서 매우 시의적절한 다큐.


5. 사빈 바이스, 한 세기의 기록(Sabine Weiss, One Century of Photography, 2022)

  사빈 바이스(1924-2021)는 프랑스의 여성 사진 작가이다. 남성들이 주류였던 사진계에서 바이스는 끈기와 창의성으로 자신의 사진 세계를 만들어 나갔다. 다큐는 자신의 진정성과 시대 정신를 사진에 녹여낸 바이스의 작품 세계를 관조한다.


6. 버퍼존(The Bufferzone, 권성윤, 2023)

  길 잃은 다큐. 이 다큐는 네팔의 치트완 국립 공원을 둘러싼 여러 관점을 보여준다. 야생 동물 보호와 원주민들의 삶이 충돌하는 지점은 그리 새로울 것이 없다. 나름대로 시간과 노력을 들였음에도 이 작품은 주제의 선명성을 확보하는 데에 실패했다. 108분에 이르는 러닝타임은 도대체 무얼 말하고 싶은 것인지 알 수 없게 만든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빈곤한 다큐 미학을 여실히 입증하는 작품. 


7. 안개 속의 아이들(Children of the Mist, 하레 지엠, 2021)

  EIDF에서 반드시 주목할 작품이 있다면 이 다큐이다. 베트남 소수 민족 소녀의 성장기는 여성이 견고한 인습의 벽과 마주하는 고통의 기록이기도 하다. 이 다큐에 대한 리뷰를 나는 이전에 썼었다.

리뷰 링크: 소녀의 어린 시절이 끝나갈 때, Children Of The Mist(2021)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3/04/children-of-mist2021.html



8. 그녀의 키친, 쉬 셰프(She Chef, 2022)

  재능있는 젊은 셰프 아그네스의 이야기. 관객은 요리에 대한 열정을 지닌 아그네스가 자신만의 요리 경력을 쌓아나가는 과정을 보게 된다. 아그네스는 전쟁터 같은 주방에서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인간미 넘치는 동료들은 아그네스가 한 인간으로서 성장하는 데에 도움을 주기도 한다. 아그네스는 마침내 페로 제도의 소박한 식당에서 자신이 꿈꾸던 요리의 세계를 만난다.  


9. 다크 레드 포레스트(Dark Red Forest, 2021)

  EIDF 20주년 회고작. 이 다큐에 대한 리뷰는 작년에 작성했었다.

리뷰 링크: 수행자로 살아간다는 것: 다크 레드 포레스트(Dark Red Forest, 2021)
https://sirius1001.blogspot.com/2022/08/eidf-2022-1-2021-2021.html


10. 세자리아 에보라, 삶을 노래하다(Cesaria Evora, 2022)
   Ana Sofia Fonseca, 포르투갈


  카보베르데(Cape Verde) 출신의 세계적인 가수 세자리아 에보라의 삶을 만난다. 다큐는 세자리아 에보라의 노래 속에 스며든 카보베르데의 정서, 파란만장한 개인사를 담담하게 풀어놓는다. 세자리아 에보라의 팬이라면 이 다큐는 거를 수가 없다.


11. 헤어날 수 없는 아름다움, 밀로의 비너스(Venus de Milo Disarming Beauty, 2022)
   Natacha Giler, 프랑스


  '밀로의 비너스'는 루브르 박물관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다큐는 이 조각상을 둘러싼 역사적, 미학적 관점의 변천사를 보여준다. 관객은 하나의 예술 작품이 시대와 사람들 사이에서 공명하는 과정을 만화경처럼 볼 수 있다.


12. 콜 미 댄서(Call Me Dancer, 2023)

  20살, 인도 뭄바이에 사는 평범한 대학생 마니쉬는 춤의 매력에 빠져든다. 대학을 그만 두고 댄스 아카데미에서 발레를 배우기 시작한 마니쉬. 다큐는 5년에 이르는 시간 동안 꿈을 가진 청년이 그것을 이루기 위해 겪는 역경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마치 한편의 영화를 보는듯한 극적인 구성을 가진 다큐. 마니쉬는 결국 춤꾼으로 불릴 수 있을까? 답은 다큐 속에 있다.


13. 안녕 내 사랑(Bella Ciao, 2022)
    Giulia Giapponesi, 이탈리아


  전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이탈리아 민요 'Bella Ciao'는 언제, 누가 부르기 시작한 것일까? 다큐는 노래의 기원을 찾아나선다. 2차 대전 당시, 나치에 맞서기 위해 파르티잔들은 자유를 향한 열망을 이 노래에 담아 불렀다. '노래의 사회사'라는 주제를 흥미롭게 풀어낸 다큐. '안녕 내 사랑'은 재미와 유익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멋지게 잡아낸다.



*사진 출처: facebo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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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쿠르트 아줌마. 그 회사에서는 오래된 그런 명칭 보다는 '프레시 매니저'를 내세우는 모양이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 옆 도로에는 그 프레시 매니저의 전동 카트가 오전과 오후, 정해진 시간대에 서있다. 요즘같이 더울 때에도 여자는 아침 나절에 잠깐, 그리고 오후 시간대에도 꽤 오랫동안 카트를 세우고 있었다. 우리 동네의 그 매니저에게는 중학생 아들이 하나 있다. 가방을 둘러멘 아이가 학교가 끝날 때쯤에 전동 카트를 찾아온 것을 나는 몇 번 보았다. 아이는 다소 퉁퉁한 체격의 엄마를 꼭 빼닮았다. 그래서 나는 그 아이가 매니저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멀리서 보기에 그 모자(母子)의 다정한 모습은 혈육지친의 의미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 나이대의 아이가 저렇게 엄마를 따르는 것이 흔한 일이 아니기도 했다. 일이 고단하기는 해도 저 여자는 아들을 보면서 살아갈 힘을 얻겠구나. 나는 더운 여름날에 카트를 지키고 있는 여자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오늘도 엄마네 집에 들러서 엄마를 챙기고 돌아오는데, 전동 카트의 그 매니저와 아들이 보였다. 아이는 플라스틱 의자를 들고 오면서 여자에게 큰소리로 뭔가를 말하는듯 했다.

  나는 그제서야 아이가 좀 남다르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그 아이의 말하는 모습과 행동은 아이에게 지적 장애가 있음을 알려주는 표지였다. 아이는 엄마 옆에 앉아있기 위해 어디선가 의자를 하나 구해온듯 했다. 여자는 그런 아이를 보면서 미소를 지어보였다. 뜻밖의 풍경을 마주한 나의 마음 한구석에 날카로운 돌조각이 콱, 하고 와서 박힌 것만 같았다. 

  그냥 아이가 좀 평범했더라면... 나는 안타까운 마음에 그렇게 혼잣말을 했다. 나는 그 여자가 짊어진 삶의 무게를 결코 가늠할 수 없다. 때론 평범함에 대한 열망은 커다란 고통의 근원이 된다. 그것은 내 모친을 보면서 내가 느끼는 감정과도 맞닿아 있다. 우리 엄마가 치매 환자가 아니라면 얼마나 좋을까. 돌이켜 생각해 보니 지난 3년은 그 슬픔과 고통을 받아들이기 위해 우리 형제가 끊임없이 타협해온 시간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타협의 시간이 끝나고 그저 묵묵히 받아들이는 매일의 일상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나마 온전했던 엄마의 언어능력과 수리 능력은 마치 풍화되는 돌멩이처럼 닳아 없어지고 있다.  

  "그래도 나는 **씨가 부러워요. 엄마가 옆에 있으니까요."

  오랫동안 알고 지낸 지인은 치매 모친을 보살피고 있는 나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의 모친은 암투병 끝에 세상을 뜨셨다. 보살핌이 필요한 늙은 아기가 되어버린 엄마. 지인이 그런 엄마와 단 하루라도 지내본다면 저렇게 말할 수 있을까? 물론 나는 지인의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안다. '엄마'라는 존재가 가지는 커다란 그늘이 어떠한 것인가를 자식이 온전히 깨닫기란 불가능하다. 어머니를 먼저 보낸 지인은 그 그늘에 대해 나에게 말한 것이다.

  이 블로그에 오는 이들이 내 글을 읽는다면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이 사람의 모친은 치매를 앓고 있구나. 참 힘들겠네.'

  어떤 이는 거기서 더 나아가 이런 생각도 할지 모른다.

  '그래도 우리 부모는 치매 환자가 아니라서 다행이야.'

  그렇게 때로 타인의 고통은 얄팍한 자기 위안의 근거가 된다. 나 또한 이제껏 그런 위안을 찾은 적이 없노라고 말하기 어렵다. 하지만 치매를 앓는 엄마와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나는 그런 위안이 자기기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각 사람이 짊어진 삶의 고통을 비교하는 일, 또한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며 내 삶의 만족과 평안을 규정하는 일은 어리석음에 가깝다.

  내가 더이상 엄마가 치매가 아니기를 바라지 않는 것처럼, 그 아이의 엄마는 자신의 아이가 어느 날 갑자기 평범해지길 꿈꾸지 않을 것이다. 매일의 일상 속에서 소소한 행복을 찾아내는 것. 그것은 인생의 불운과 고통을 마주하는 이들에게는 버팀목이 되어준다. 여자가 아들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은 이유를 나는 비로소 알 것도 같았다. 아이는 엄마의 카트를 찾아온 동네 할머니들 옆에서 웃으며 서있었다. 나는 그 아이가 세상 속에서 잘 살아주길, 그 엄마가 앞으로도 아이와 함께 작은 행복을 찾아내길 진심으로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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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이메일 박스에는 매일 이런저런 뉴스레터가 들어온다. 그 가운데에서 요즘 자주 다루어지고 있는 해외 뉴스는 마우이(Maui)섬의 산불(wildfire)이다. 도대체 무슨 산불이 섬의 대부분을 집어삼킬 정도로 무시무시한 걸까? 그리고 왜 불길은 쉽게 잡히지 않는가? 나의 그런 궁금증에 미국의 대안 언론 'vox.com'은 명료한 설명이 곁들여진 기사를 보내왔다.

  원래 마우이의 산불은 연례적인 행사였다. 이 시기의 마우이는 건기에 해당하는 날씨이다. 건조한 날씨로 인해서 일어나는 산불은 이제까지 마우이 섬에 심각한 위협을 준 적은 없었다. 그러던 것이 올해는 여러가지 악조건이 겹쳤다. 첫번째 요인은 기후변화(Climate change)이다. 전지구적 기상 이변은 기후변화의 산물임이 명백해지고 있다. 마우이섬도 예외가 아니다. 해가 거듭할수록 마우이섬의 건기는 더 길어지고 심해지는 양상을 보였다. 그런 가운데 일어난 산불이 치명적인 재난으로 돌변한 데에는 '바람'이 한몫을 했다. 마우이 섬 인근에서 발생한 허리케인이 지속적인 바람을 불어넣었다. '불난 집에 부채질 한다'는 속담은 매우 과학적인 명제이기도 하다. 바람과 만난 불은 사방팔방으로 흩어지며 확산되었다.

  기후변화와 허리케인의 조합. 거기에 땔감을 더한 '풀'이 있다. 마우이 섬의 사람들은 원래 섬에서 자라고 있던 재래종 풀들을 제거했다. 그 풀들 대신에 심은 것은 빠르게 자라는 목초지용 풀과 조경에 적합한 잔디였다. 재래종 풀들 보다 더 잘 타는 그 풀들은 산불의 지속적인 연료가 되었다. 그러니까 2023년의 마우이 섬 산불은 자연재해와 인간의 탐욕이 겹친 결과물인 셈이다. 8월 21일 현재, 마우이 섬의 산불로 인한 사망자수는 114명에 이르고 있다.

  마우이 섬이 불타고 있는 동안 남미의 에콰도르(Ecuador)에서는 대선 유세중인 후보가 총에 맞아 죽는 사건이 발생했다. 총격으로 사망한 페르난도 비야비센시오(Fernando Villavicencio) 후보는 평소 마약 카르텔(Drug Cartel)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을 피력해 왔다. 총격의 배후에는 콜롬비아 마약 카르텔이 있다는 후속 보도가 나오고 있다.

  콜롬비아의 마약 갱단은 자국내의 마약 시장 확장을 넘어 이웃 에콰도르까지 진출했다. 그들에게 있어 비야비센시오 후보는 눈엣가시였을 것이다. 비야비센시오 후보는 지지율 5위를 차지하고 있어서 유력 대선 후보는 아니다. 그럼에도 후환을 제거한다는 의미에서 카르텔은 그런 암살을 감행한 것일까? 현재 에콰도르 경찰이 전방위적인 수사를 펼치고 있기는 하다. 이 사건은 막강한 자금력과 무기로 무장한 마약 카르텔이 인근 국가의 시스템을 뒤흔들 수 있음을 보여준다. '카르텔'이란 단어는 이런 극악의 현실을 설명하기 위해 존재한다. 그런 면에서 요즘 우리나라 뉴스에서 보이는 '카르텔'이란 단어 사용은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다.

  미국에서 요새 한창 화제가 되고 있는 영화는 '오펜하이머(Oppenheimer, 2023)'이다. 그런데 그 영화 보다 훨씬 오래전 영화 한 편이 뉴스의 중심에 등장했다. 산드라 불럭(Sandra Bullock)이 주연한 영화 'Blind side(2009)'가 그것이다.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영화의 시놉시스는 이러하다. 운동에 재능이 있지만 가난과 불운에 갇힌 흑인 청소년 Michael Oher는 선량한 후원자를 만나게 된다. 백인 중산층의 가정주부 Leigh Anne Tuohy는 기꺼이 마이클을 돕기로 한다. 마이클은 투오이 부부의 적극적인 격려와 지원을 받아 미식 축구 선수가 되는 꿈을 이룬다.

  이 영화는 흥행에 성공했고, 산드라 불럭에게는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의 영예를 안겨주었다. 그런데 영화가 개봉되고 14년이 지난 지금, 영화의 실제 주인공 마이클 오어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여러분들이 영화에서 봤던 이야기는 사실과 많은 부분이 다릅니다."

  마이클 오어는 투오이 부부가 자신과 그들의 관계를 사실과 다르게 날조했고, 그것으로 만들어진 책과 영화로 부당한 이득을 얻었다고 말했다. 현재 오어는 투오이 부부를 상대로 법정 소송중이다. 이 소송과 관련된 뉴스들에서는 흥미로운 사실들이 밝혀지고 있다. 투오이 부부가 마이클의 후원자가 되기로 결심한 데에는 마이클이 가진 미식축구에 대한 재능이 돈벌이가 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또한 영화와는 달리 투오이 부부는 마이클을 정식으로 입양한 적이 없다. 투오이 부부는 책과 영화 제작으로 이어진 일련의 이벤트에서 상당한 금전적 댓가를 받았다. 문제는 마이클이 그 수익 분배에서 제외되었다는 사실이다.

  "좋은 게 좋은 거다. 이제까지 난 그런 생각으로 마음을 다잡으려고 했어요. 하지만 이제는 진실을 밝힐 때가 왔다고 생각해요."

  이러한 뉴스는 영화가 어디까지나 가공된 현실임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말 그대로 영화 '블라인드 사이드'는 진짜가 아닌 '영화 같은 이야기'였을 뿐이다. '돈벌이가 될만한 이야기'에 대한 유혹이 진실을 왜곡하는 경지에까지 이르면 그것은 '사기극'이 된다. 개봉 당시에는 찬사를 받았던 영화 '블라인드 사이드'는 이제 지난한 법정 소송의 배경으로 자리한다. 14년이란 시간이 흐른 후, 관객으로서 우리는 그 영화가 가리고 있는 추악한 진실을 마주하게 된 셈이다.


*사진 출처: voanews.com

불타고 있는 마우이 섬


대선 후보의 암살 사건 이후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한 에콰도르



**사진 출처: themoviedb.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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