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치먼드 북쪽의 부자들


난 내 영혼을 갈아넣으면서 매일 죽도록 일하고 있지
쥐꼬리만한 월급을 받아가면서 말야
그 결과 내 인생이 이 모양 이 꼬라지인 거야
매일 지친 몸을 이끌고 집구석에 들어가고 있어

정말 빌어먹을 세상이야
나나 당신이나 다 같은 처지 아닌가
난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이게 현실이 아니길 바라
아, 하지만 절대 그럴 리가 없지

우린 말야 새 시대에 낡은 영혼으로 살고 있는 것 같아
리치먼드의 부자들은 모든 걸 손아귀에 쥐고 뒤흔들고 싶어해
우리의 생각, 우리가 하는 일
그 작자들은 우리가 결코 모를 거라 믿는 것 같아
그러나 우린 그 속셈을 알고 있지
우리의 빌어먹을 월급은 세금으로 족족 나가버리지
이게 다 리치먼드의 부자놈들 때문이라니까

정치하는 것들 말야 불쌍한 광부들이나 돌보라고 해
아, 물론 광부들도 생각하고 외딴 섬에 갇힌 누군가도 잊어서는 안돼
하느님, 먹을 게 없어서 길바닥에 널브러진 사람을 버리지 마세요
정부보조금 타먹으며 돼지처럼 살찐 인간들도 외면할 수는 없겠죠

만약에 말이야, 댁이 키 160cm에 136kg의 몸뚱이를 가졌다면
내가 낸 세금은 당신이 쓰레기 같은 초코과자를 사는 데에 퍼주면 안된다고
젊은 애들이 생때같은 목숨을 내던지고 있어
이 빌어먹을 나라가 계속 그들을 그렇게 몰아가고 있는 거야

번역: 푸른별


  미국 버몬트주 출신의 컨트리 가수 Oliver Anthony는 8월에 이 노래 'Rich Men North Of Richmond'를 발표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이제 이 노래를 듣는다. 노래를 들은 후 당신의 반응은 다음 중 무엇인가?

1번: 부자를 싫어하는 걸 보니 전형적 좌파주의자의 노래군.
2번: 아냐. 이 노래는 퍼주기식 복지 정책을 비난하고 있어. 그러니 공화당 지지자들에게 어울리는 노래야.
3번: 글쎄. 뭔가 말하고 있기는 한데 그 메시지가 우파쪽인지 좌파쪽인지 모르겠는 걸.
4번: 노래에 정치적 신념 따위가 중요해? 그냥 마음에 들면 좋은 거고 안들면 별로지. 어쨌든 노래 괜찮은데.
5번: 이 정신나간 가사는 뭐야. 리치먼드의 부자는 뭐고 광부는 왜 나와? 이런 노래를 누가 들어?

  지금 미국에서는 바로 이 노래 'Rich Men North of Richmond'가 온 나라를 헤집어 놓고 있다. 노래는 나오자마자 곧장 Billboard Hot 100의 1위를 차지했다. 빌보드 역사상 어떤 노래가 다른 차트에 오르지 않고 바로 빌보드 1위에 오르는 일은 없었다고 한다. '리치먼드 북쪽의 부자들'이 이토록 뜨거운 반응을 이끌어내는 것은 노래의 가사가 매우 정치적으로 들리기 때문이다. 8월 23일, 밀워키(Milwaukee)에서 열린 공화당 대선 후보 토론회에서는 이 노래가 당당히 울려퍼졌다. 후보들은 바이든 정부의 퍼주기식 복지가 나라를 망치고 있다면서 이 노래는 그 울분을 표현한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자, 그렇다면 당신은 앞의 질문에 어떤 답을 골랐는가? 거기에 대한 답은 당신의 정치 성향을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다.   

  내가 이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 나는 노래의 가사 자체에 흥미를 느꼈다. '리치먼드 북쪽의 부자들'은 작가 조지 오웰(George Orwell)이 '1984'에서 그려낸 빅 브라더(Big Brother)의 현실 버전인가? 모든 것을 소유한 부자가 쥐락펴락하는 세상, 그 세상에서 영원히 고통받는 평범한 소시민. 그런 구도로만 본다면 이 노래는 좌파주의자들의 입맛에 맞는 노래일 것이다. 노래의 가사는 부자들만 비난하지 않는다. 정치인들은 나라를 좀먹는 모리배로 그려진다. 그들의 정치는 그 어떤 희망도 주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젊은이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다고 올리버 앤서니는 일갈한다. 

  그런데 노래의 제목이기도 한 리치먼드 북쪽의 부자들은 과연 누구일까? 노래를 부른 올리버 앤서니도 그들이 누구인지 말한 적이 없다. 나는 미국의 지도에서 리치먼드를 찾아본다. 리치먼드(Richmond). 미국 버지니아주(Virginia)의 주도인 이 도시는 꽤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 도시는 과거 남부 연합(Southern Confederacy)의 수도였다. 그렇다. 노예 제도를 두고 미국이 피터지는 내전(Civil War)을 했을 때, 리치먼드는 남부의 정신적 구심점이었다. 미국에 부자들이 모여사는 곳이 리치먼드 북쪽에만 있을까? 왜 올리버 앤서니는 하필 '리치먼드'라는 도시를 골랐을까? 어떤 면에서 남부 출신인 이 가수에게 있어 익숙한 세계는 남부를 아우르는 지형적 경계에 국한되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노래 가사의 리치먼드 북쪽은 명백한 계급적 상징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보다는 기득권을 가진 이들에 대한 막연한 분노를 형상화하기 위해 끌어온 지형적 표지물로 보는 편이 맞다.    

  리치먼드와 같은 지형적 표지는 앤서니가 호명하는 '광부들(miner)'에도 내재되어 있다. 이 노래에서 언급되는 광부들은 '애팔래치아 산맥(Appalachian Mountains)'을 대표하는 거주민이다. 미국의 남서부에서 북부를 가로지르는 이 광대한 산맥은 개척시대부터 피비린내 나는 역사를 지니고 있다. 미국 정부는 원주민인 인디언들을 무자비하게 몰아냈고, 그곳에 일꾼으로 써먹기 위한 흑인 노예들을 데려왔다. 그러다 광산업이 흥하기 시작하자 백인 이주민들이 몰려왔다. 곧 흑인들은 이전의 원주민 신세가 되었다. 하지만 좋았던 시절도 잠시, 광산업이 쇠락하자 많은 이들이 그곳을 떠났다. 남은 이들은 가진 것 없는 백인들 뿐이었다. 애팔래치아는 잊혀진 곳, 빈곤과 무지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므로 어떤 이들은 이 노래가 '광부들'을 하층민으로 규정했을 뿐만 아니라, 애팔래치아의 역사성을 모독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노래에서 가난한 '광부들'보다 더 안좋은 취급을 당하는 이들은 따로 있다. 바로 160cm의 키에 136kg의 몸을 가진 사람이다. 가사의 묘사대로라면 그 사람은 고도비만에 정부의 수급보조금으로 연명하는 가난한 사람이다.
그들이 즐기는 간식은 '퍼지 라운드(fudge rounds)'라는 과자다. 당분과 싸구려 초콜릿으로 범벅이 된 이 과자를 사먹는 이들은 성실한 월급쟁이의 삶을 질식시키는 주범으로 등장한다. 물론 그것은 그들에게 세금을 퍼주는 정치인들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공화당 후보들과 그 지지자들이 이 노래에 환호할 수 있는 지점은 바로 거기에 있다. 우파주의자들은 복지 정책이 가난한 이들은 삶을 개선하는 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믿는다. 비만과 나태함으로 묘사되는 하층민은 이 노래에서 그렇게 조롱당한다.

  그렇다면 '외딴 섬의 누군가(an island somewhere)'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제프리 엡스틴(Jeffrey Epstein)은 미성년자 성착취 범죄로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그곳에서 사망했다. 엡스틴이 은거하면서 그런 추악한 범죄 행각을 벌인 곳이 그가 소유한 섬들에서였다. 올리버 앤서니가 가사에서 언급한 '섬'이 엡스틴의 그 섬들을 지칭하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럼에도 '외딴 섬의 누군가'는 '광부들'과 계층적 동일선상에 놓인다. 그들은 권력과 부를 가진 자들에 의해 유린된 약자, 피해자들이다.   

  이 노래를 두고 정치적 메시지에 대한 갑론을박이 격화되자, 올리버 앤서니는 자신은 '비당파적인(nonpartisan)' 사람이라고 밝혔다(출처: en.wikipedia.org). 올리버 앤서니는 자신의 노래가 공화당 후보 토론회에서 울려퍼질 것을 예상했을까? 2013년에 뇌를 다치는 사고를 겪은 후, 그의 삶은 많은 면에서 불안정해졌다. 제대로 된 직업은 얻을 수 없었고, 정신적으로는 우울과 불안에 시달렸다. 그러한 개인적인 좌절을 겪은 백인 컨트리 가수는 자신의 경험을 남부 토박이의 체화된 신념과 결부시켜 노래를 만들었다.

  나는 이 노래가 당파적이라기보다는, '남부'라는 지역성과 신념 체계에 더 많은 부분을 기대고 있다고 본다. 외국인으로서 나는 미국에서 '남부'사람으로 산다는 것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다. 내가 그들에 대해 알고 있다면 책에서 배운 지식이 전부이다. 그들에게 남북 전쟁은 패배와 수치의 기억으로 남았다. 남부인들에게 그 전쟁은 그들이 외친 올바름에 대한 가치가 짓밟힌 역사적 사건이었다. 재건 시대를 거치면서 남부인들은 서서히 자신감을 회복해 갔다. 노예 제도에 대한 옹호는 뿌리깊은 인종 차별과 직결되었다. 남부인들만이 공유하는 신념의 체계는 근본주의적 기독교 교리와 배타적인 정치의식 속에서 배양되었다. 이 노래의 가사에서 반복해서 언급되는 '하느님(Lord)'은 부조리한 현실에서 화자가 의지하는 유일한 존재이다. 이는 올리버 앤서니가 이 노래 이후에 발표한 'I Want To Go Home'에서 더욱 명확해진다.

  불합리하고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종교는 삶을 견디게 만들어 준다. 올리버 앤서니는 정치인들과 부자들은 어리석으며 그들이 저지르는 악행은 약자들의 삶을 더욱 고통스럽게 만든다고 외친다. 그것은 결코 당파적인 메시지가 아니다. 노예 제도에 대한 정당성을 부르짖던 남부의 사람들은 이제 정의로움과 공정에 대한 자신들만의 독자적 감각을 계발했다. 세금은 게으른 빈자에게 물쓰듯 쓰여져서는 안된다. 타락해버린 리치먼드의 부자들과 정치인은 도덕성을 회복해야만 한다. 그런 면에서 나에게는 '리치먼드 북쪽의 부자들'이 뼛속 깊이 남부인의 내면에 호소하는 남부 찬송가처럼 들린다.         


*사진 출처: whiskeyriff.com




**Oliver Anthony노래 Rich Men North Of Richmond
유튜브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sqSA-SY5Hro



***'Rich Men North Of Richmond' 가사 전문

I've been sellin' my soul, workin' all day
Overtime hours for bullshit pay
So I can sit out here and waste my life away
Drag back home and drown my troubles away

It's a damn shame what the world's gotten to
For people like me and people like you
Wish I could just wake up and it not be true
But it is, oh, it is

Livin' in the new world
With an old soul
These rich men north of Richmond
Lord knows they all just wanna have total control
Wanna know what you think, wanna know what you do
And they don't think you know, but I know that you do
'Cause your dollar ain't shit and it's taxed to no end
'Cause of rich men north of Richmond

I wish politicians would look out for miners
And not just minors on an island somewhere
Lord, we got folks in the street, ain't got nothin' to eat
And the obese milkin' welfare

Well, God, if you're 5-foot-3 and you're 300 pounds
Taxes ought not to pay for your bags of fudge rounds
Young men are puttin' themselves six feet in the ground
'Cause all this damn country does is keep on kickin' them down

Lord, it's a damn shame what the world's gotten to
For people like me and people like you
Wish I could just wake up and it not be true
But it is, oh, it is

Livin' in the new world
With an old soul
These rich men north of Richmond
Lord knows they all just wanna have total control
Wanna know what you think, wanna know what you do
And they don't think you know, but I know that you do
'Cause your dollar ain't shit and it's taxed to no end
'Cause of rich men north of Richmond

I've been sellin' my soul, workin' all day
Overtime hours for bullshit p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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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22598 2023-08-29 02:45   좋아요 0 | URL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덕분에 노래도 알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푸른별 2023-08-29 09:34   좋아요 0 | URL
han22598님 반갑습니다. 흥미있는 노래라서 한번 글을 써보았네요. 노래가 들어보면 가수의 진정성이랄까, 그런 게 느껴집니다. 댓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