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기분


수옥아, 너 서른다섯이라고 했지
이제 늙은 기분이 든다고 그랬지
네가 말하는 걸 들으니 웃음이 나와
그래, 웃음이 미치도록 터져 나와
겨우 서른다섯 처먹고 뭐, 늙은 기분?

조금 늘어진 뱃살 때문에
옷장에 맞는 옷이 없다며 징징거리는 게
늙은 기분이냐?
머리털 좀 빠지고 팔자주름이 생겼다고
늙은 기분이야?

야, 넌 뭐 이제 겨우 서른다섯 처먹고
그렇게 얼간이처럼 사냐?

얘야, 늙는다는 건 말이다
후우, 한숨 좀 쉬자
그러니까 말이야,
늙는다는 건 아주 기분 더러운 일이지
암, 그래, 그렇구 말구
적어도 늙은 기분을 느끼려면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데도
저녁에 졸음을 주체하지 못해
소파에 몸을 구겨 넣고
바닥을 박박 긁는 저질 체력으로
여름을 나면서 땀을 미친듯이 흘릴 때
그게 눈물인 줄 착각하는 거야

팔아먹을 게 없어서
너의 그 병신같은 서른다섯 늙음을
팔아먹고 다니니?
좀 창피한 줄 알아

좌절은 그만
이 늙은 언니가 진심으로 충고할게
정신의학과에 가서
항우울제 처방을 받아
그럼 너의 늙은 기분은
쥐죽은듯이 사라질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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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뚜기


우간다에는 메뚜기 사냥꾼이 있다
그곳에서 메뚜기는 인생역전의 아이템이다
메뚜기가 지나가는 언덕배기
작은 발전기에다 수십 개의 전구를 연결한다
사람의 눈을 멀게 만드는 미쳐버린 빛
메뚜기들은 빛의 덫에 걸려
양철판때기에 우르르 쏟아진다
거대한 메뚜기의 무덤은 돈다발이 되고
사냥꾼들은 집을 사고, 결혼을 하고,
다시 메뚜기를 잡으러 간다

시장의 여자들은
메뚜기의 날개와 다리, 더듬이를
똑똑 떼어서 다듬는다 그리고는
펄펄 끓는 기름에 풍덩,
맛있는 메뚜기튀김 한 접시 뚝딱,
우간다의 국민 간식 메뚜기

메뚜기 다큐를 보던 가난한 시인은
자신도 메뚜기튀김과 같은 시를
써야겠다고 생각한다

구멍이 숭숭 뚫린 뜰채로
시어(詩語)를 잡으러 나간다
그가 원하는 알맞은 단어들은
좀처럼 걸리지 않는다

겨우 잡은 비실거리는 몇 개의 글자
비닐봉지에 주섬주섬 넣고는 컴퓨터를 켠다
2시간째, 모니터의 화면은 텅 비어 있다

시는 튀겨낼 수 없다
시를 먹는 사람은 없다
시는 메뚜기가 아니다
그러나 메뚜기는 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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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시(詩)


시를 몇 년 썼죠
그런데 돈도 안 되고
잘 써지지도 않아서
시를 버렸어요
아니, 어쩌면 시가
나를 버린 것인지도 몰라요

그럴 리가요
우리의 시는 당신을 버리지 않아요
우리의 시는 당신과 함께 행진했고
우리의 시는 당신과 함께 울었어요

물론, 우리의 시는 당신을 아프게도 했어요
당신의 속을 헤집어 놓고
당신을 막막하게 만들며
당신을 길 가장자리로 밀쳐냈지요

당신은 늙은 사람인가요?
나이는 중요하지 않아요
당신의 목소리는 무슨 색깔인가요?
말하는 법을 잊어버렸다면
천천히 숨을 내쉬며 이렇게,

아, 에, 이, 오, 우

아름다움은 비참함에서 나오며
에러 코드(error code)가 떠도 당황하지 말고
이번 생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오, 가을이 오는 소리를
우리의 시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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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한 톨


아버지는 금식 중이었다

나, 저 밤 한 톨만 다오

호스피스(hospice) 병실의 누군가 건네준 삶은 밤을
아버지는 간절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비닐봉지에 담긴 밤은 따뜻했다

의사가 아무것도 먹으면 안 된다고 했어요

아버지는 다음날 새벽에 눈을 감으셨다
그까짓 의사 말이 뭐라고
노란 밤 한 톨을

바람이 삐딱하게 걷는다
지 성질을 못 이겨
어느 산기슭의 밤나무를
후들겨 팰 때
늦여름의 밤 한 톨
가만히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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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


미학(美學) 선생이 말했다

사과나무의 사과를 보고
따먹을 생각을 하는 사람은
그냥 세상 사람인 거죠
미학(美學)이란 말입니다,
사과의 그 빛깔, 그 모양의
아름다움을 생각하게 만드는

30년이 다 되도록 그 사과는
내 머릿속에서 매달려 있다
글을 써서 먹고 살 궁리를 하느니
손가락을 분질러 버려야지

자신에게 솔직해질 것
타인의 불행을 비웃거나 팔아먹지 말 것
통장의 잔고에 초연해질 것
실현 불가능한 글쟁이의 미학

찌그러지고,
흠이 있으며,
못생긴 풋사과 한 알
그러나, 아직 썩지는 않았어
사과를 한 입 베어 문다
미쳐버린 여름이 돋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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