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적


  "대충 여기쯤일 것 같은데..."

  현수는 명 선생이 알려준 주소와 약도를 들고, 골목을 한참 동안 서성였다. 그리고 마침내 오방기가 내걸린 양옥 대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황해도 장군 만신(萬神)의 집'

  군데군데 페인트칠이 벗겨진 초록색 대문은 활짝 열려있었다. 현수는 쭈뼛거리며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좀 낡은 2층 양옥집이 그곳에 있었다. 생각보다 꽤 널따란 마당에서는 장작불이 타닥타닥 소리를 내면서 타올랐다. 12월이기는 해도 갑작스럽게 시작된 한파에 사람들은 다들 놀란 모양새였다. 그 이전까지 날이 포근했기 때문이었다. 현수도 아침에 옷장에서 롱패딩을 꺼낸다고 부산을 좀 떨었다. 그렇게 챙겨입고 나왔는데도, 전철에서 나와서 주택가 골목을 꽤 걸었더니 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장작불이 타오르는 드럼통 근처에는 중년의 남자 둘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남자 하나가 현수의 인기척에 말을 걸어왔다.

  "굿 보러 왔어요?"
  "네."
  "그럼, 2층으로 가보쇼. 거기에 보살님이 있으니까."
 
  현수는 대답 대신에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2층 계단을 천천히 올라갔다. 현관문이 비스듬히 열려있었다. 현수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마루를 둘러보았다. 마루에서 보이는 주방에서는 중년의 여자들 서너 명이 음식을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이구야, 어디서 오셨어? 이렇게나 일찍 왔네."
 
  안방에서 쪽찐머리의 나이 든 보살이 나왔다.

  "저기, 명 선생님 소개로 왔는데요."
  "아, 명 선생님하고 아는 분이구나. 여기로 들어와요. 오느라 애썼네. 시장하지? 저기, 서천댁! 상 좀 차려봐."

  현수가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보살은 부엌 쪽을 향해 큰소리로 말했다. 나이가 꽤 들기는 했어도, 보살의 목소리는 쩌렁쩌렁했다. 저 양반이 장군 만신인가 보군. 정말 장군신(將軍神)을 모셔서 그런가, 늙은 보살에게서는 기백이랄지 그런 것이 있었다.

  "야, 너도 인제 그만 좀 일어나라. 손님도 왔는데."

  보살이 안방에 드러누워서 자던 남자에게 핀잔을 주었다. 키가 작고 마른 체구의 그 남자는 늘어지게 하품하면서 이내 일어났다.

  "아, 정말 잘 잤다. 일주일 내내 굿을 했더니, 너무 피곤해."

  한복을 입은 그 남자는 박수무당이었다. 현수는 작년 가을에 운현궁에서 있었던 굿판에서 그 박수를 본 적이 있었다. 저 양반이 이 만신과도 다 그리 연결되어 알고 지내는가 보다. 그것은 하나의 큰 가족이었다. 커다란 굿을 따내면, 함께 굿을 해서 수익을 나누는 믿음과 사업의 공동체 같은 것이었다.

  "제가 여기 들어와도 될지..."
  "아이고, 무슨 소릴. 배고플 텐데, 우선 식사나 해요. 어디, 굿판은 많이 좀 돌아봤수?"
  "아뇨. 그냥 명 선생님 따라서 서너 번 본 게 전부입니다."
  "그렇구나. 이왕지사 여기 왔으니까, 구경 잘하고 가요."

  보살이 사람을 대하는 데에는 나름 살가운 구석이 있었다. 그럼에도 갑작스레 보살의 집 안방에 앉게 된 현수는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때마침 방 안으로 밥상이 들어왔다. 작은 소반에 오징어무침, 잡채, 시금치나물, 겉절이, 시레기국, 쌀밥이 푸짐하게 차려져 있었다.

  "젊은 양반, 어여 들어. 나는 주방에 가서 일을 좀 도와야 해서."
  "네, 잘 먹겠습니다."

  현수는 추운 날씨에 낯선 길을 헤매느라 허기가 지기도 했다. 명 선생이 이르길, 저 장군 만신은 원체 배포가 크고 사람이 너그럽다고 했다. 모처럼 열리는 진적굿이니, 자기 이름을 대면 섭섭지 않게 대접해 줄 것이라고도 덧붙였다. 명 선생은 무슨 시 쓰는 양반이 언제 저렇게 보살을 알게 된 것일까? 현수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라며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밥을 먹었다.

  "고모님, 저희 왔어요."
  "아이구, 이게 누구야? 벌써 신혼여행 갔다 온 거냐? 여기로 들어와라."

  보살의 친척으로 보이는 젊은 남녀가 방으로 들어왔다. 현수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어떻게 해야할지 난감했다. 자기가 나가야 하는 거 아닌가? 현수가 밥을 먹다 말고, 어정쩡한 자세로 일어났다. 그러자 보살이 현수에게 그냥 앉으라고 손짓했다.

  "괜찮아, 괜찮아. 그냥 밥 먹어요. 여기는 내 조카 손주하고 며느리."
  "아, 네..."
 
  보살이 소개한 조카 손주는 삼십 대 초반, 그의 아내는 이십 대 후반으로 보였다.

  "굿 보러 오셨나 봐요."
  "네. 보살님이 이렇게 대접을 해주셔서..."
  "우리 고모님이 원래 손님 접대는 아주 잘하시는 분이세요. 저희 신경쓰지 마시고, 그냥 편하게 식사하세요."

  현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 어색한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래, 제주도는 잘 다녀왔어?"
  "네. 처갓집 심방(제주의 무당을 이르는 말) 어르신들 좀 뵈었습니다."
  "거기 일가분들은 아직도 굿을 하시나?"
  "웬걸요. 이제는 굿 일감도 들어오지 않고, 심방을 하려는 사람들도 거의 없답니다."
  "일이 그리되었나? 하긴, 사람도 시대도 많이 변했지."

  보살은 배자(褙子)의 안쪽 주머니에서 담배를 하나 꺼내어 불을 붙였다. 현수는 천천히 밥을 먹으면서, 그들의 대화를 가만히 들었다. 어색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조금은 긴장이 풀어졌다.

  "심방의 무구(巫具)는 제자들에게 물려주게 되어있는데, 하려는 사람들이 없답니다. 그러니 대개는 박물관으로 간다 그러더구만요. 박물관마다 그렇게 기증받은 무구들이 넘쳐난대요."
  "저런, 제주의 신령님들이 많이 서운하시겠구먼."
  "그래도 땅과 하늘에 깃든 신명이 어디 딴 데 가시겠습니까? 어찌됐든 제자들은 나올 테고, 당연히 받들어 모시겠지요."
  "그렇겠지. 정성을 다해 빌면, 그 공덕이 다 쌓이는 법이야."

  보살의 그 말은 현수의 마음 한구석을 툭, 하고 건드렸다. 정성을 다한다면, 그것이 모여서 무언가를 이룰 수 있을까? 소설을 쓴 지 5년. 응모한 공모전의 최종심에 올라가 본 것은 3번이지만, 아직 당선된 적은 한 번도 없다. 이제는 슬슬 글쓰기를 그만 두어야 할까 싶은 고민이 마음 깊숙한 곳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음식은 입에 맞으십니까?"
  "아, 네. 아주 맛있네요."

  보살의 조카 손주가 밥을 천천히 먹고 있는 현수에게 물었다.

  "어떤 일을 하시는지 물어도 실례가 되지 않을까요?"
  "대학원생이고, 글을 쓰고 있습니다."
  "글이라면..."
  "소설을 씁니다."

  현수의 말을 듣던 보살이 지그시 웃었다.

  "아, 소설이요? 그런데 고모님은 왜 웃으세요?"
  "아니야, 아니다. 내가 뭘 웃었다고 그래?"
  "에이, 내가 봤는데요. 하실 말씀이 있으면 저 손님에게 해주세요."
  "글쎄다."

  현수는 밥을 먹던 숟가락을 조심스럽게 놓았다. 보살이 자신에게 뭔가 말할 것이 있을지도 몰랐다.

  "학생은 내가 말하면, 듣고 싶은 생각이 있어?"
  "네. 저도 좀 답답한 것이 있어서..."
 
  보살은 재떨이를 끌어다가 이내 담배를 비벼서 껐다.

  "글월 문(文)자가 보이기는 하는데, 그거 가지고는 글밥 먹고 살기 어려워. 어째 들리는 소식도 없고, 신통치가 않지? 계속 갈까 말까, 속은 시끄럽고."
 
  현수는 대답 대신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보살이 하는 말을 들었다.

  "그냥 여기에서 그만두는 게 좋겠는데, 내가 보기엔 그래."
  "아이고, 고모님도 참. 뭘 그런 말씀을..."
 
  보살의 말을 들은 현수는 허를 찔린 것 같았다. 정말로 그만두어야 하는 걸까, 정말로? 그렇게 속으로 되묻고 있었다.

  "그래도 좀 더 노력하면 어떻게든 될 것도 같거든요. 글쓰기 말고, 딱히 다른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고요."
  "먹고 살 방도를 말하는 거지? 학생은 관운(官運)이 있긴 있으니까, 공무원이 되는 것도 괜찮아."

  현수는 나이 서른에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려 보니 심란해졌다. 차라리, 저 말은 안 듣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근데 본인이 고집이 세어서, 아마도 하던 걸 포기하기가 쉽지는 않을 거야."

  보살의 그 말에는 뼈가 있었다. 그건 사실이었다. 현수는 새삼 자신이 살아온 서른 해를 돌이켜 보았다. 이제껏 자신은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했다. 대학에서 종교학을 전공한 것도, 그리고 국문과 대학원에 진학한 것도, 소설을 쓰기로 한 것도. 모두다. 부모님을 비롯해 주변 사람들은 도무지 돈도 되지 않는 공부만 한다고 다들 싫은 소리를 했다. 현수의 그런 선택을 이해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공부에 뜻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죽자 살자 글을 치열하게 쓴 것도 아니었다. 어떤 면에서 그건 어설픈 자신을 증명하기 위한 몸부림인지도 몰랐다. 세상을 오래 산 어른들이 보기에, 현수는 그저 제멋대로 하는 철부지일 뿐이었다. 

  "탁, 탁, 탁!"

  보살은 성냥갑에서 성냥을 하나 꺼내어 담배에 불을 붙였다. '유엔(UN) 성냥'이라는 성냥갑의 글씨가 선명했다. 아니, 저 성냥이 아직도 나오나? 현수는 신기한듯, 성냥갑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현수는 아주 어렸을 적에 저 성냥갑을 본 적이 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사람의 고집은 이 성냥 같은 거야. 나도 이 나이 먹도록 성냥을 쓰지, 라이터는 어째 못 쓰겠더라고."
  "고모님은 신딸, 신아들한테도 초에 라이터 쓰지 말라 잔소리하시죠?"
  "그거야 당연하지. 신령님께 올리는 초를 켜는데, 정성을 들여야지. 어디 편하게 불을 켜면 쓰나?"
  "아이구, 우리 고모님도 참... 하여간 못 말려요, 못 말려."

  보살의 조카 손주가 그렇게 눙쳤다. 그 말을 들으니, 보살의 말에 경직된 현수의 마음도 조금은 누그러졌다.

  "이제 슬슬 가봐야겠네요."
  "벌써 가냐? 하긴, 여행 갔다가 와서 피곤하기는 하겠다. 어여 가서 쉬어."
  "네. 저희는 먼저 일어납니다. 굿 잘 보고 가세요."

  보살의 조카 손주 내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수는 어쩔 수 없이 앉아있었던 자신 때문에 그들이 서둘러 떠나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제가 자리에 있어서 불편하셨을 거 같아요."
  "그럴 리가요. 저희도 고모님께 짧게 인사드리고 가려던 참인데요."
  "잘 살아라. 잘 살 거야. 자식도 많이 낳고, 다복하게. 암, 그래야지."

  보살은 조카 손주와 며느리에게 축원의 말을 하며 대문 앞까지 배웅했다. 그들이 그렇게 떠난 방에서, 현수는 식어버린 밥과 국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든 상황이 너무나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전혀 알지도 못하는 무당의 진적굿을 보러 온 것부터 해서, 그 무당의 조카 손주 내외와의 만남, 그리고 자신의 미래에 대한 무당의 공수까지. 언젠가 소설을 쓸 때 써먹으면 되겠군. 현수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상에 남은 밥과 국을 마저 비웠다.

  "웬 손님이 안방을 차지하고 있네."

  한복을 입은 50대 중반의 여자가 방에 앉아있는 현수를 힐끗 보더니 그렇게 말했다. 뭐랄까, 참 무례하게 들리는 말투였다. 중년 여자의 옆에는 일행으로 보이는 젊은 여자가 있었다. 30대 초반쯤 되었을까? 얼굴이 무척 고왔다. 현수는 언젠가 저 두 여자를 TV에서 본 기억이 났다. 젊은 여자는 한때 잘 나가던 배우였으나, 갑작스럽게 신내림을 받고 무당이 되었다. 무례하게 말한 여자는 그 배우에게 내림굿을 한 신(神)엄마였다. 말하자면 그 젊은 여자는 보살에게는 손녀딸쯤 되는 관계였다. 진적굿은 무당이 오로지 자신을 위해 신령님들께 바치는 큰굿이다. 그런 중요한 행사를 위해 보살의 신딸과 신아들이 모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굿 보러 왔어? 이번에는 사람들이 많이 오려나 보네."

  현수는 자신에게 거리낌없이 말을 놓는 여자를 보고 기분이 확 상했다. 참으로 무례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군. 신을 모신다고 해서, 아무한테나 반말지거리해도 된다는 건 아닐 텐데. 현수는 다 먹은 밥상을 들고 일어섰다. 부엌에 상을 내려두고는, 잘 먹었다고 인사를 했다.

  "6시부터 굿이 시작되니까, 내려가 봐요."

  부엌에서 일하던 아줌마 하나가 현수에게 그렇게 일러주었다. 마루의 시계를 보니 5시 40분이었다. 현수는 안방 한구석에 놔둔 자신의 백팩을 한쪽 어깨에 대충 메었다. 옥색 치마저고리를 입은 젊은 여자는 기운 없는 표정으로 그곳에 앉아있었다. 여자에게는 생기가 없었다. 어딘지 모르게 불행해 보이는 여자의 얼굴을 보니, 안쓰러움이 느껴졌다. 아이 둘을 놔두고 신내림을 받았다고 했던가? 여자는 신병(神病)이 심해져서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현수는 TV에서 본 다큐의 내용을 떠올렸다. 현수가 본 여자의 신엄마는 무례하고 우악스럽게 느껴지는 인상이었다. 인생이란 것이 참으로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것이구나. 현수는 여자의 선택을 새삼 복기하면서 삶에서 되돌릴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밖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마당 장작불의 붉은 빛이 2층의 계단을 내려가는 현수의 눈에 환하게 비쳤다. 어느새 마당은 방문객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촬영을 위한 카메라 장비를 둘러멘 사람들이며, 종교 관련 연구자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각자 손마다 녹음기를 들고 서 있었다. 그들은 모두 보살의 굿이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보살이 마침내 화려한 무복(巫服)을 입고 나타났다. 보살이 제일 먼저 굿당에 들어갔고, 마당의 사람들은 그 뒤를 따랐다. 30평 정도 되는 굿당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현수는 가방을 끌어안고는, 굿당 뒷줄에 겨우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런데 현수의 주변에 앉은 이들은 모두 나이든 할머니들이었다. 굿을 보러 동네 노인들이 구경을 나온 모양이군. 현수는 그렇게 생각했다.

  굿을 하기 전에 제단을 정화하는 주당(周堂)물림은 오전에 이미 끝난 터라, 저녁의 굿은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보살이 주력으로 모시는 장군신을 비롯해 여러 신들을 청해서 제단에 좌정시키고 흥겹게 해드려야 한다. 보살은 처음에는 제자리에서 가볍게 뛰었다. 그러다 나중에는 신이 올라서 아주 힘있게 뛰더니, 덩실덩실 춤을 췄다. 현수는 늙은 만신의 몸 어디에서 저런 기운이 나오는가, 그저 신기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한참 동안 춤을 추며 사설을 풀어내던 보살이 갑자기 멈추더니, 출입구에 자리한 작은 옷장으로 달음질을 쳤다. 그러고는 그 옷장에 있는 온갖 무복들을 죄다 꺼내어서 바닥에 내던졌다. 아마도 여러 신들이 오시니까 거기에 맞는 무복을 골라 입으려고 하는 모양이었다. 그 작은 옷장에서 무복들이 무진장 쏟아져 나왔다. 현수는 옷장이 자리한 벽 안쪽에 어디 숨겨진 공간이라도 있나, 하는 생각을 했다. 참으로 희한한 일이었다.

  보살은 이 옷 저 옷을 몸에 대보고는 흥이 나서 신나게 춤을 추었다. 그러면서 앞자리에 앉은 이들도 일으켜 세우면서 춤을 추게 하였다. 아마도 평소에 보살을 찾는 단골들로 보이는 이들은 스스럼없이 일어나서 어깨를 들썩이며 분위기를 맞추었다. 현수의 옆자리에 앉은 노인들도 하나둘씩 일어났다. 덩실덩실 춤을 추는 모양새가 그 할머니들이 보살과 같은 무당임을 알려주었다.

  '그러니까 이 노인들은 모두 보살의 친구들이구나. 무당 친구들.'

  모두들 서서 춤을 추고 있는데, 오직 현수만 뻘쭘하게 앉아있었다. 현수는 마치 아르마딜로가 위기 상황에서 몸을 동그랗게 말듯, 백팩을 꼭 끌어안고 고개를 숙였다. 이 모든 상황이 현수에게는 낯설었다. 밖으로 나가고 싶었지만, 사람들로 꽉 들어찬 이 굿당에서 어떻게 나가볼 방법도 없었다. 그때였다. 누군가 현수의 어깨를 가볍게 툭, 쳤다. 춤을 추고 있는 허연 파마머리의 할머니였다. 노인이 입은 자주색 솜조끼의 노랑 꽃무늬가 나풀거리며 현수의 눈에 떨어졌다.

  "학생도 같이 춰. 어여!"

  현수는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람들 틈에서 가방을 혹시라도 잃어버릴까 봐 등에 백팩을 메었다. 그리고서 노인의 손짓을 따라 천천히 팔을 들었다 올렸다 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그렇게 춤을 따라 추기 시작하자, 자신도 모르게 어깨에 들어간 힘이 빠지면서 춤사위가 가벼워졌다. 현수의 팔은 자기 뜻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파도에 무언가가 떠밀리듯 들이쳤다가 나가기를 반복했다. 그런 현수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간 하나의 장면이 있었다. 8살 때, 아파트 주차장에서 있었던 사고였다.

  부주의한 트럭 운전사가 트럭을 후진하다가 그 뒤에서 놀던 현수를 쳤다. 현수는 다행히도 다리만 살짝 다치는 경상을 입었다. 트럭 운전자는 별다른 처벌도 받지 않았다. 현수의 집을 찾아 사과하지도 않았다. 함께 놀던 아이들이 경찰에게 증언도 했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그 사고는 현수의 종아리에 기다란 흉터를 남겼다. 만약에 그 빌어먹을 트럭 기사가 조금만 더 뒤로 세게 후진을 했다면 어땠을까? 현수는 비로소 8살 이후의 자신의 삶이 덤으로 얻은 것임을 깨달았다.

  현수의 손은 나비처럼 부드럽게 펄럭였고, 발은 가볍고 빠르게 움직였다. 이런 걸 보고, 신이 실렸다고 하는 것이겠구나. 어쩌면 현수가 쓰는 글도 그렇게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손끝에서 흘러나오는 것도 같았다. 어느 날에는 나이든 여자가, 또 다른 어느 날에는 아이가, 그다음날에는 젊은 남자가 머릿속에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면 현수는 컴퓨터 앞에 앉아서 이야기를 받아 적었다. 그것은 억지로 지어내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쓸 수밖에 없는 그런 이야기였다.

  '무당의 팔자나 작가의 팔자나 별반 다를 게 없군.'

  사람들을 따라 덩실덩실 춤을 추던 현수는 그렇게 혼자서 중얼거렸다. 그러던 현수의 등에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소리가 나지 않게 무음으로 해놓은 휴대전화의 진동이었다. 현수는 탁해진 공기와 사람들을 헤치고 겨우 굿당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전화에 찍힌 발신 번호는 명 선생이었다.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 굿은 잘 보고 있는 거야?"
  "굿당에서 떠밀려 춤추다가 이제 나왔네요. 선생님은 언제 와요?"
  "난 밀린 일 좀 해야 해서. 어차피 굿은 사흘 내내 이어지니까, 내일 아침에나 출발하려고. 거기서 밤샐 거야?"
  "어휴, 힘들어서 못 해요. 춤 좀 췄더니, 기운이 다 빠지는데."
  "그럼, 집에 갔다가 내일 다시 와서 봐."
  "네, 그러려고요."

  현수는 휴대전화의 시각을 확인했다. 9시 43분. 인천에서 지금 출발하는 전철을 타야만, 집으로 가는 심야버스 막차를 겨우 붙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바깥의 공기는 머리가 쨍하고 깨질 듯이 차고 매서웠다.

  "뭔 날씨가 이리 오지도록 추워."
  "그러게. 그런데 내년 별신굿 소식은 들었어?"
  "거기 굿하지 않은 지가 꽤 되었어. 한 6년 되었나? 박만출 만신이 세상 뜨고는 굿 보기 어렵게 되었지. 굿할 돈 걷기도 어렵다 그러던데. 인자는 다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사니까. 그런 큰굿에 돈이 오죽 드는가 말일세. 그러니 지금 진적굿도 여기 보살이 큰맘 먹고 5년 만에 하는 것이고."
  "세상이 너무 빠르게 변해가. 제대로 된 굿 한번 보기가 참 힘들어."
  "그러니까 굿도 짧아지는 거야. 이제는 무당들도 사설을 길게 안 하잖아. 사람들이 참을성이 없어서, 뭔가를 길게 못 본다고."

  두 명의 중년 남자는 드럼통에서 타는 장작불 옆에서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니, 벌써 가시게? 내일 또 와서 보구려. 이런 굿 또 보기 어려우니."
 
  불을 쬐던 한 남자 하나가 대문으로 가는 현수를 보더니 그렇게 말했다.

  "네, 그럴 생각입니다."
 

  현수는 남자에게 짧게 인사를 건네고는 보살의 집 대문을 나섰다. 늦은 시각의 골목길에는 인적이 느껴지지 않았다. 어느 집에선가 큰 개가 컹컹, 짖는 소리가 들렸다. 마침내 골목이 끝나는 곳에 이르렀다. 붕어빵을 파는 장사꾼의 노점이 보였다. 팔지 못한 붕어빵들이 주르르 늘어져 있었다. 남자는 히터 옆에서 꾸벅꾸벅 고개를 끄덕이며 졸고 있었다. 출출해진 현수는 붕어빵을 사려다가, 그냥 지나가기로 했다. 장사꾼의 잠을 깨우기는 싫었기 때문이다. 

  이제 보름 정도 남은 건가? 현수는 가만히 올해 남은 날들을 헤아려 보았다. 내년 봄부터 소설 공모전 일정이 시작된다. 문득, 쓰고 있는 중편을 장편으로 늘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어떻게든 써봐야지. 현수는 자신이 앞으로도 계속 글을 쓸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푸르고도 서글픈 예감이었다. 어쩌면 세상이 알아주지도 않은 글만 써내다가 그만두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더라도, 자신이 써내는 글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그 글의 모양새는 어떨지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괜찮아. 덤으로 주어진 인생, 아직은 써야 할 것이 있어. 현수의 얼굴에는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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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음 초단편은 주말쯤에 올릴 예정입니다.

2. 둘러 보는 문학 커뮤니티가 있습니다. 바야흐로 신춘 시즌이라 응모 열기가 대단하더군요. 나는 준비된 단편이 없어서 응모하지는 않았어요. 아니, 문학을 사랑하는 작가 지망생들이 이다지도 많단 말인가! 정말이지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한국 문학의 미래도 밝겠구나. 그런데 현재 돌아가는 문학 출판 시장을 보고 있노라면, 그것도 아니지 싶어서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지요. 그리고 신인이라도 처절하게 자신의 시장성을 증명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네, 그런 것 같더군요.

3. 그런 면에서 본다면, 시장성은 1도 없는 제 글을 찾아서 읽는 독자분들이 신기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4. 진정성이 있다고 반드시 좋은 글이 될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좋은 글에는 진정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알아봐주는 독자가 있다면, 그 글은 세상 밖으로 더 멀리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믿음을 가지고 글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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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오기 전에


  '우리 BP 그룹은 창사 50주년을 맞이하여, 새로운 도약을 준비합니다. 우리 그룹에는 새 시대에 맞는 인재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이에 따라 희망퇴직을 단행하고자 합니다. 희망퇴직 신청 요건은 다음과 같습니다. 만 40세 이상, 근속 연수 10년 이상... '

  사내 인트라넷 플로우(FLOW)에 올라온 글을 읽다가, 도경은 가슴이 조여드는 통증을 느꼈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가을부터 소문만 무성하던 2차 희망퇴직 계획이 결국 그렇게 발표되었다. 48살에 근속 연수가 20년. 차장이라는 직함을 달고서 벌써 3년. 부장으로의 승진은커녕, 이제는 희망퇴직 대상자에 자동으로 들어가는 신세가 되었다.

  "이 팀장은 어떻게 할 생각이야? 인력 개발팀의 박 팀장이 제일 먼저 신청서를 냈다고 그러던데."
  "생각해 봐야지, 뭐. 결국 눈치 싸움 아니겠어?"
  "글쎄. 작년의 1차 희망퇴직 때 생각하면, 아직도 오싹오싹하다니까. 끝까지 버티던 사람들, 그냥 지방 공장으로 다 밀어내고 말이지."

  영업 1팀의 송 팀장이 유들거리는 말투로 도경의 신경을 긁었다. 자기는 희망퇴직 대상자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걸까? 하긴, 송 팀장은 창업주 회장 쪽에 어떤 끈이 있다고 듣기는 들었다. 오늘따라 송 팀장의 얼굴에는 개기름이 더 번들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얼굴뿐만 아니라, 패딩 조끼 사이로 삐져나온 퉁퉁한 뱃살도 도경의 눈에 아주 거슬리게 보였다.

  근속 연수 10년에서 15년인 희망퇴직자는 퇴직금과는 별도로 20개월 치의 기본급을 수령한다. 도경은 거기에 해당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자신이 희망퇴직을 신청한다면 얼마를 받을 수 있을까? 퇴직금과는 별도로 지급되는 전직 지원금 1500만 원에 자녀 학자금 2000만 원이 더해질 뿐이었다. 그것도 희망퇴직을 신청했을 때에 받을 수 있는 돈이었다. 나중에 퇴직자 명단에 들어가면, 그 돈마저도 받을 수 없다. 도경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말하자면, 그냥 기계의 부속 같은 거지. 나사 같은. 언제든 빼버리고 갈아 끼울 수 있는."

  도경은 사무실로 가는 엘리베이터 대신에 비상구 계단을 내려가면서 그렇게 혼자 중얼거렸다. 비정하다. 더럽게도 비정하다. 최고의 직원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자신의 젊은 날을 갈아가며 여기까지 왔다. 20년. 먹고 살아야 한다는 삶의 명제와 회사의 발전이 기묘한 줄타기를 해온 세월이었다. 도경은 회사가 삼켜버린 자신의 육신과 정신을 생각했다. 이제 머리는 희끗희끗해졌고, 꼭 기억해야 할 것을 잊어버리는 때도 자주 있었다. 휴지 하나도 떨어져 있지 않은 이 정갈하고 매끈한 건물은 그런 도경의 일부를 게걸스럽게 먹은 것이다. 알 수 없는 분노와 허탈감이 계단을 내려가는 도경의 다리를 휘청거리게 했다.

  '은별 마을 1단지의 재건축 안전진단 통과를 축하합니다.'

  그날 저녁, 퇴근을 하는 도경의 눈에 아파트 입구의 커다란 현수막이 눈에 들어왔다. 도경이 사는 이 아파트는 45년이 된 낡은 아파트였다. 은행 융자를 무리하게 받아서 겨우 마련한 집. 도경이 자신의 집을 은행과 공유하지 않게 된 것은 이제 겨우 3년이 되었다. 집 한 채는 건졌군. 도경은 씁쓸하게 웃었다. 하지만, 이 아파트에 재건축 광풍이 몰아닥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몇억에 이른다는 재건축 분담금을 무슨 수로 마련한단 말인가? 어쩌면 자신의 인생에서 최대의 투자라고 할 수 있는 이 오래된 아파트는 멀리 날아가 버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당신, 왔어? 저녁은 먹었지? 난 너무 졸려서 일찍 자려고. 엊그제 김장해놓고 나니 진이 다 빠져."

  아내는 하품을 하더니 작은 방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내의 코 고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작년부터 부부는 각방을 쓰기 시작했다. 신경이 예민한 도경은 아내의 코 고는 소리를 더는 견디기 힘들어졌다. 그래서 부부는 각방 생활에 합의했다. 그즈음, 지방의 대학에 진학한 아들이 기숙사로 들어가면서 23평 아파트의 공간에는 여유가 생겼다. 아내는 아들이 가져가지 않은 짐들을 대충 정리해서 창고에 넣었다. 그리고 그 방을 자신의 방으로 꾸며서 썼다.  

  "어느덧 11월의 마지막 주말을 앞두고 있습니다. 이제 가을도 슬슬 막바지라고 할 수 있는데요. 다음주부터는 본격적인 겨울 추위가 시작됩니다. 그동안 포근했던 날씨 때문에 이 추위가 더 매섭게 느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집에 오면 습관적으로 틀어놓는 뉴스 채널에서는 기상 캐스터가 날씨 뉴스를 전하고 있었다. 이제는 겨울이군. 그럼, 그 영화를 봐야겠네. 해마다 겨울이 오기 전에 도경이 봐야만 하는 영화. 도경은 거실 TV 장식장의 맨 아래 서랍을 열었다. 거기에는 모서리가 닳은 대학 노트 1권과 DVD가 하나 있었다. 그러니까 언제부터였지? 이 영화를 보기 시작한 것이...

  "혹시 여기에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희생'이 있나요?"

  카운터 안쪽에 커튼이 쳐진 방에는 덩치 큰 남자들이 한창 포커를 치고 있었다. 주인 남자는 포커를 치다 말고, 마지못해 카운터로 나왔다.

  "그런 건, 우리 가게에 없어. 딴 데 가보는 게 좋을 거야."

  팔뚝에 푸른 닻 무늬의 문신을 한 남자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도경에게 말했다. 그러고는 다시 포커판으로 돌아갔다.

  "야, 가자. 좀 무섭네. 저 사람들, 조폭 똘마니들 같지 않냐?"

  도경이 가게 진열장에서 쉽게 발을 떼지 못하는 정운에게 말했다.

  "근데, 도경아. 여기 괜찮은 물건들 좀 있는데? '베니스에서의 죽음'도 있어. 이거 당연히 해적판이겠지만, 화질이 우리가 가진 것보다 좋을 수도 있잖아."
  "그만 해. 저 남자가 하는 말 들었지? 우리더러 나가라는 거야. 그냥 가자."
  "그래도..."

  정운은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진열장에서 몸을 돌렸다. 그 가게를 나온 도경과 정운은 대학로의 비디오 가게들을 하나씩 훑어나갔다. 하지만 두 사람이 찾는 타르코프스키의 '희생'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정작 그 영화를 구한 곳은 가톨릭 수도회에서 운영하는 성 바오로 서점에서였다. 미디어 선교를 하는 수도회에서 신자들의 영성 생활에 도움이 되는 비디오테이프도 대여하고 있었다. 도경은 서점에 가서 회원 가입을 하고, 비디오를 빌렸다.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복사본을 하나 만들었다. 그들이 속한 영화 동아리 회원들을 위한 소장 자료로 쓸 생각이었다. 그렇게 만든 복사본을 가장 먼저 빌려 간 사람은 정운이었다.

  시네필(Cinephile). 도경과 정운은 영화 동아리 시네필의 창립 멤버였다. 회원이라고 해봐야 일곱 명이었지만, 그마저도 동아리방에 나오는 사람은 도경과 정운, 영호, 이렇게 셋이었다. 영호는 영화 감상보다는 영화 연출에 더 관심이 많았다. 영호가 감독들의 영화 연출에 대해 열변을 토하면, 도경과 정운은 그냥 심드렁하게 들었다. 둘은 영화사 책에 나온 명작 영화들을 쉽게 구할 수 없는 현실에 답답함을 느꼈다. 그래서 틈만 나면 서울 시내 비디오 가게 곳곳을 누비며 다녔다. 가끔은 그들이 보고 싶은 영화를 구할 때도 있어서, 둘의 나들이는 주말의 순례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그 주말의 순례는 채 1년이 지나지 않은 그해 늦가을에 갑작스럽게 끝나버렸다. 타르코프스키의 '희생'을 찾아낸 지 1달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영호야, 정운이랑 연락이 안 되네. 혹시 너한테 전화 온 거 없어?"
  "야, 정운이는 너하고 더 친하잖아. 아, 잠깐. 그러고 보니까, 월요일 전공 필수 수업에 안 나오기는 했네. 전화를 안 받는 거야?"
  "응. 문자를 보내도 답이 없어. "

  영호와 정운은 경영학과 동기였다. 동아리방에는 줄이 나간 기타 하나가 있었다. 그 기타를 하릴없이 뜯던 영호가 기타를 내려놓았다.

  "뭐, 별일이야 있겠어?"
  "그렇겠지?"

  도경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정운은 도경과의 비디오 가게 나들이를 아주 즐거워했다. 오히려 도경이 귀찮아서 가지 않으려고 하면, 영화에 대한 열정이 부족하다면서 도경을 닦달할 때도 있었다. 그런 정운이 지난 주말에 전화도 받지 않고, 문자 메시지에도 답이 없었다. 어디가 심하게 아픈 건가? 독감이 유행이라는데, 독감이라도 걸려서 드러누웠나? 도경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화요일 오후를 보냈다. 영호에게서 전화가 온 것은 밤 9시 무렵이었다.

  "도경아. 여기, 한성 병원 영안실이야. 정운이가 여기 있어."
  "뭐? 그게 무슨 소리야? 걔가 왜 거기 있어?"
  "암튼 와봐라. 전화로는 말 못 해."

  영호의 쉬어버린 목소리는 뚜, 하는 신호음과 함께 끊어졌다. 영호의 말대로 정운은 영안실에 있었다. 그곳에서 도경은 정운의 아버지를 보았다. 갑작스럽게 자식을 잃은 정운의 부친은 황망한 표정으로 영안실 복도 의자에 앉아있었다.

  "이렇게 와줘서 고맙네. 정운이가 좀 험하게 가서, 장례식은 치르지 않기로 했어. 이해해 주게나."

  도경은 정운이 호텔에서 투신자살했다는 말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도경이 아는 정운은 영화에 대한 열정이 넘치는 친구였다. 타르코프스키의 '희생'을 볼 수 있게 되었다며, 정운은 얼마나 기뻐했던가? 그래서 도경은 정운이 동아리방에 있는 그 테이프를 빌려 가서 1달 동안 반납하지 않아도 내버려두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자신의 삶을 그렇게 마감한 것일까?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도경은 반쯤 넋이 나가서는 내려야 할 역을 한참이나 지나쳤다. 그런 도경이 집에 돌아온 시각은 자정 무렵이었다.

  "빌어먹을 자식. 그렇게 가는 법이 어디 있어? 멀쩡히 잘 살다가, 왜?"

  그런데, 도경은 과연 정운이 멀쩡히 잘 살았던 것인지 자신은 알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경이 정운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은 그저 가정 환경과 주변 인물들에 대한 파편적인 정보일 뿐이었다. 정운의 부친은 강남에서 잘 나가는 학원 강사이며, 정운이 중학교 3학년 때 부모가 이혼했다는 것. 정운에게는 6개월 정도 사귄 여자 친구가 있다는 것. 정운이 원래 가고 싶었던 학과는 영문학과였다는 것. 그 모든 것은 정운에게서 들은 이야기였다. 그런 사실 정도로는, 도경 자신이 정운을 안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영안실에서 도경이 돌아온 후 이틀이 지났다. 동아리방에서 도경은 혼자 영화를 보고 있었다. 프랑수와 트뤼포의 '400번의 구타'는 도경이 이미 여러 번 본 영화였다. 하지만 도경은 그냥 뭐라도 틀어놓아야 했다. 도경은 정운의 죽음이 슬프기는 했지만, 이상하게도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왜 그런지 알 수 없었다. 마침내 영화 속 주인공 소년은 바닷가에 도착했다. 정지 화면 속에 갇힌 그 막막한 눈빛이 어쩌면 정운과 닮아있는 듯싶기도 했다. 그때, 누군가 동아리방의 문을 노크했다.    

  "아, 자네가 있어서 다행이군."

  정운의 부친이었다. 아들의 사물함에 있는 물건을 챙겨가기 위해 학교에 들렀다고 했다.

  "사물함에 이게 있어서... 자네에게 주고 가는 게 맞을 것 같아서 말일세."

  정운이 부친이 흰색의 커다란 비닐봉지에서 주섬주섬 뭔가를 꺼냈다. 두꺼운 대학 노트와 비디오테이프 하나였다. 대학 노트의 표지에는 '영화 감상문'이라고 검정 사인펜으로 적혀있었다. 그리고 그 비디오테이프는 정운이 빌려 가서 1달 동안 돌려주지 않았던 '희생'이었다. 도경은 어정쩡한 자세로 정운의 부친이 건넨 그 물건들을 받았다. 비디오테이프는 동아리의 자료니까 돌려받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정운의 영화 노트를 받는 것은 좀 내키지 않았다.

  "이건, 정운이가 좋아한 영화를 기록한 것일 텐데요. 제가 받아도 될지."
  "어차피 나는 그걸 봐도 모르지 않나? 아는 사람이 보는 게 낫지. 보고 쓸모없다 생각하면 버려도 괜찮아."
  "아, 네..."

  정운의 부친이 그렇게 가고 나서, 그날 오후에 영호가 동아리방에 들렀다. 도경은 영호한테 정운의 아버지가 동아리방에 들렀다고 이야기했다.

  "아니, 그 노트를 왜 너한테 주냐? 아무리 정운이가 우리 친구라 해도, 이제는 죽었잖아. 너도 좀 꺼림칙할 거 아냐?"
  "그거야 그렇지만..."

  도경은 정색을 하면서 말하는 영호에게 왠지 모를 거리감을 느꼈다. 하긴, 영호는 정운과 그리 친한 사이가 아니기는 했다.

  "야, 그냥 버려. 버려도 된다고 했다면서. 내가 어디서 들으니까, 죽은 사람 물건, 함부로 보관할 거 아니라고 하더라. 더군다나 정운이 걔는..."
  "내가 알아서 할게."

  도경은 영호가 그 뒤에 덧붙일 말이 듣기가 싫어서, 영호의 말을 성급히 잘랐다. 저 녀석, 생각보다 아주 차갑네. 저렇게까지 말할 건 뭐람. 도경은 내심 영호의 반응에 서글픔과 분노가 밀려왔다.

  "그러니까, 벌써 25년이나 흘렀네."

  그 세월 동안 타르코프스키의 '희생'은 조악한 화질의 복사본 비디오테이프에서 DVD로, 그리고 영상 파일로 재생할 수 있는 시대로 바뀌었다. 도경은 낡은 비디오테이프를 버리고, 정식 발매된 DVD로 사서 보관했다. 그리고 1년에 한 번,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이 영화를 보았다. 그러니까 도경은 이 영화를 25번도 넘게 본 셈인데, 도경은 여태까지 '희생'이란 영화를 이해할 수 없었다. 영화는 너무나도 어려웠고, 너무나도 지루했다. 도경이 졸다가 눈을 뜨면, 주인공 남자는 자전거를 타고 어딘가로 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또 졸다가 눈을 뜨면 어느새 영화는 마지막에 이르렀다. 마침내 나무가 불타는 장면이 나오면, 도경은 정지 버튼을 눌렀다. 그렇게 '희생'을 보는 것은 도경이 한 해를 마감하기 위한 일종의 의식(儀式) 같기도 했다. 
 
  늘 그러했듯, 도경은 이번에도 '희생'을 보면서 꾸벅꾸벅 졸았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영화 속의 나무가 불타고 있었다. 정운은 저 나무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도경은 정운의 부친에게서 받은 영화 노트를 비닐로 밀봉해 놓았다. 그 노트를 보고 싶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들지 않았다. 그건 마치 온갖 불운과 저주가 들어찬 판도라의 상자 같았다. 영호가 말했듯, 그냥 내버리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하지만 도경은 차마 그 노트를 버리지 못했다.

  도경은 DVD를 케이스에 조심스럽게 넣고는, 그것을 원래의 자리에 두기 위해 장식장의 맨 아래 서랍을 열었다. 비닐 안에서도 노트는 세월에 삭는 중이었다. 누렇게 뜬 종이 위로 흐릿해진 '영화 감상문'이란 글씨가 드문드문 조각이 나 있었다. 언젠가는 뜯어서 봐야만 하는 노트였다. 어쩌면 그 언젠가가 오늘인지도 모르겠군. 도경은 비닐에 붙여놓은 스카치테이프를 떼었다. 접착력을 잃어버린 테이프가 가루가 되어서 떨어졌다. 25년. 무참히 흘러버린 시간을 생각하니, 마음이 쓰라렸다.

  노트에는 첫 장부터 정운이 감상한 영화의 리뷰가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정운이 쓴 첫 번째 영화는 장 뤽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였다. 도경은 트뤼포를, 정운은 고다르를 가장 좋아했었다. 그랬었지. 그렇게 도경은 정운과 함께했던 시네필의 기억을 더듬어가며 노트를 넘겼다. 정운의 영화 리뷰는 두꺼운 영화 노트의 중간 부분에서 끝났다. 그 마지막 영화는 도경도 알다시피 '희생'이었다. 그런데 정운은 리뷰라고 할 것도 없는 매우 짧은 문장만 적어놓았다.

  '어떤 삶은 그렇게 작별할 수밖에 없다.'

  정운의 그 짧은 문장은 도경에게는 심연(深淵)과도 같았다. 도경이 해마다 본 '희생'은 정운의 심연에 대한 막연한 탐색인지도 몰랐다. 그것은 도경이 죽을 때까지 풀 수 없는 수수께끼이기도 했다.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는 도경의 마음속 아래에 자리한 '왜 그랬을까?'라는 그 질문에 그 어떠한 답도 주지 않았다. 사실 그 답을 찾는다고 해도, 이제 도경에게는 그저 무익할 뿐이었다. 당장 도경이 풀어야 할 문제는 '희망퇴직을 신청할 것인가'이며, 반드시 그 문제의 답을 찾아야만 했다.          

  "어떻게든 버텨야지, 어떻게든."
 
  마음이 갑갑해진 도경은 거실에 드리워진 암막 커튼을 천천히 걷었다. 새벽 2시 37분. 건너편 아파트에서도 불이 켜진 집은 별로 없었다. 아파트 단지 출입구에 걸린 재건축 안전진단 통과 현수막이 초겨울 바람에 거칠게 펄럭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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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음 초단편은 주말에 올릴 계획입니다.

2. 어떤 글은 좀 더 길게 쓸 수 있을 것도 같은데, 시간이 늘 모자릅니다. 이런저런 일이 늘 생겨요. 그래도 일주일에 한 편씩은 써내려고 합니다.

3. 습작용 글이라도, 읽어주는 독자분들이 있어서 기쁘게 생각합니다. 다음에는 어떤 글을 쓸까, 항상 생각해 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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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Merry)


  "메리야, 오늘도 한번 나가볼까? 이리 와봐. 아줌마가 옷 좀 입혀줄게."

  아주머니가 내 이름을 다정하게 부릅니다. 아주머니의 목소리는 따뜻하고 부드러워요. 그 목소리에는 가식이 없는 친절도 담뿍 담겨있어요. 그래서 아주머니의 손님들도 물건을 잘 사주는 것일지도 몰라요. 아주머니는 솜이 누벼진 겨울옷을 나에게 입혀줍니다. 빨간색 원단으로 누벼진 내 옷의 가장자리에는 보글보글한 양털이 덧대어져 있어요. 그래서 겨울바람도 잘 막아준답니다. 나는 이 옷이 마음에 들어요.

  나는 아주머니가 입혀준 옷을 입고 아주머니의 품에 안겨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갑니다. 아파트 출입구에는 아주머니의 전동카트가 있어요. 아주머니가 파는 야쿠르트가 있는 카트입니다. 네, 우리 아주머니는 야쿠르트를 배달하고 판매합니다. 아주머니는 새벽 6시쯤에 지점에 가서, 자신의 카트에 물건을 담아 돌아옵니다. 그리고 가족의 아침 식사를 준비합니다. 7시 반, 아저씨와 아들 형석이가 일어나서 아침을 먹습니다. 오늘의 메뉴는 시금치 된장국과 계란말이, 엊그제 손님이 김장했다면서 건네준 겉절이군요. 아주머니는 내 밥그릇에도 사료를 부어줍니다. 오늘 먹을 물도 새로 갈아주고요.

  "오늘은 바람도 그렇게 불지 않고, 낮에도 그리 춥지 않대. 밖에서 지내기 괜찮을 거야."
  
  아주머니는 초록색의 예쁜 목줄을 나의 목에 조이지 않게 묶어줍니다. 아주머니는 작은 바구니에 나를 넣습니다. 흰색의 요크셔테리어인 나는 몸집이 자그마해요. 그래서 그 바구니에도 어렵지 않게 들어갑니다. 그렇게 나는 아주머니와 오늘 하루의 일과를 시작합니다. 오전의 일과는 물건을 배달하는 것으로 채워집니다. 아파트 2개 단지가 아주머니의 구역입니다. 아주머니의 야쿠르트를 받는 손님들의 집에다 물건을 걸어둡니다. 아주머니는 걷고, 또 걷습니다. 급하다고 뛰지는 않아요. 언젠가 그렇게 뛰다가 크게 다친 적이 있거든요. 그 일이 있고 난 뒤로, 아주머니는 아무리 바빠도 심호흡을 하면서 천천히 걸어요.

  대략 30집 정도를 배달하고 나면, 아주머니도 잠시 쉽니다. 보온병에 담아온 물로 커피믹스를 한 잔 타서 마셔요. 나한테도 개껌 하나를 주고요. 아주머니가 늘 카트를 세워두고 쉬는 장소가 있어요. 아주 삐딱하게 휘어진 커다란 소나무 아래 주차장입니다. 그 소나무는 너무 휘어져서 쓰러질 것 같은데, 작년에 관리사무소에서 단단한 철 받침대를 세웠어요.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아늑한 느낌이 드는 곳이지요. 아주머니가 이번에 사 온 개껌의 맛은 바베큐 맛인데, 좀 별로예요. 그래서 나는 조금만 씹다가 그냥 놔둡니다. 이러면 아주머니가 다음에는 이 개껌을 사지 않을 테니까요.

  "언니, 나왔구나. 나 늘 마시는 걸로 하나만 줘 봐."
  "자, 여기 있어. 오늘은 알바 안 나가?"
  "아휴, 나 그 일도 그만둘까 봐. 그 집 애들이 워낙 말도 안 듣고 까탈스럽게 구네."
  "애들이 많이 힘들게 해?"
  "내 자식이 울고 떼쓰는 것도 짜증나는데, 남의 자식은 뭐 말할 게 있어? 언니, 그 있잖아. 주는 것 없이 얄미운 사람. 그 집 애들이 그렇다니까. 큰 아이는 따박따박 말대꾸하고, 작은 애는 툭하면 울고. 아, 진짜 돌겠더라니까. 게다가 그 애들 엄마는 어떻고? 등하원 도우미를 무슨 지가 부리는 파출부쯤으로 생각하나 봐. 애들 샌드위치 만들어서 먹이세요, 학용품도 사다 놓으세요, 이러는 거야. 샌드위치는 자기가 알아서 만들어 놔야지. 나더러 음식까지 만들라고? 나 원 참."
  "그건 좀 그렇다. 간단한 간식 챙겨주는 것까지는 할 수 있지만, 만들어서 주라니."
  "하여간, 요새 젊은 엄마들 사고방식이란 게 그렇더라고. 돈을 좀 주면, 사람 마구 부리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해. 등골까지 빼먹으려고 들어. 말하자면 상식이란 게 없어. 기본적인 상식."
  "남의 돈 버는 일이 쉽지가 않지."
  "그래, 언니. 그거라도 좀 해서 애들 학원비라도 보태려고 했는데."
  "얇게 입고 나왔네. 날 추우니까 얼른 들어가."
  "언니도 오늘 하루 고생해."

  3단지의 슬비 엄마입니다. 나는 우리 아주머니한테 '언니'라고 불러서, 진짜 동생인가 했어요. 그런데 아주머니를 '언니'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많더라고요. 그래서 그 사람들이 아주머니의 손님인 줄 알게 되었지요. 손님들이 아주머니를 부르는 호칭도 다양해요. 저 할머니가 아주머니를 어떻게 부르나 들어보세요.

  "야쿠르트 여사님, 왔어?"
  "어르신, 아침 식사는 하셨어요?"
  "응, 그냥 대충. 늙으니까, 입맛도 없어. 하루 세 끼 먹는 것도 번잡스러워."
  "그래도 잘 챙겨서 드셔야죠. 오늘은 날도 추운데, 털모자하고 장갑 챙기신 건 잘하셨어요. 밖에 나오실 땐 꼭 그렇게 하세요."
  "우리 손녀딸이 꼭 현관 신발장에다 놔둬."
  "그런 손녀가 있어서 얼마나 좋으세요."
  "갸도 이제 짝을 만나서 결혼하니까."
  "아, 그래요? 언제요?"
  "내년 봄에. 이제 손주들도 다 여워버리면, 내 죽을 날만 남은 게지."
  "아이고, 무슨 말씀을 그리하세요. 제가 사탕 하나 드릴게요. 이거 커피 사탕인데, 맛있어요."
  "고마워. 난 야쿠르트 사 먹지도 않는데, 이런 것도 주고."
 
  고향이 해남이라 해남 할머니로 불리는 저 할머니는 매일 저렇게 아주머니를 찾아옵니다. 전동 휠체어를 힘겹게 끌고요. 아주머니에게 뭔가를 사는 일은 없지만, 아주머니는 늘 사탕이나 초콜릿 같은 것을 챙겨서 드려요.

  "아줌마, 나 커피 하나만 줘 봐."

  어휴, 저 중년 남자는 정말 재수 없어요. 반말지거리에다가 차에서 돈을 휙, 던지는 거 하며. 나 같으면 도로 돈을 내던지겠지만, 우리 아주머니는 바닥에 떨어진 돈을 얼른 주워요. 그리고 커피하고 거스름돈을 공손히 건넵니다.

  "찬 음료인데, 괜찮으시겠어요?"
  "응. 많이 팔아!"

  나는 저런 인간들을 보면요, 뭔가 인간의 밑바닥을 보는 것 같아요. 막돼먹은 인간이잖아요. 상대방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도 없고. 아주머니가 겉으로는 태연해 보여도, 마음이 안 좋은 것 같아요. 왜냐하면, 저런 사람들한테 물건 팔고 나면 꼭 내 머리를 쓰다듬으세요. 부드럽게, 하지만 거기에는 이상한 서글픔 같은 것이 느껴져요.

  "형석 엄마! 나, 오늘 정말 기분 좋다. 우리 민우가 코뿔소에 붙었거든."
 
  근데 저 민우 엄마가 말하는 '코뿔소'가 무엇일까요? 내가 보잘것없는 작은 강아지의 삶을 살아가고 있기는 하지만, 코뿔소가 머나먼 아프리카 대륙의 동물이라는 것은 알고 있어요. 민우 엄마가 말하는 코뿔소는 아프리카의 코뿔소는 아닌 것 같고. 좀 더 이야기를 들어봐야겠네요.

  "정말 잘 됐다. 거기 들어가기가 그렇게 힘들다면서."
  "아휴, 그러게. 오죽하면 코뿔소 붙으면 명문대 입학은 따 놓은 당상이라고 그러겠어."

  아, 이제 알겠어요. 저 코뿔소는 아마 어디 대단한 입시학원쯤 되나 봅니다. 민우 엄마는 자기 아들이 거기 붙었다고 저리도 자랑하는 것이고요. 그런데 저 이야기를 듣는 나는 은근히 부아가 치미네요.

  "이제 민우 엄마도 마음이 좀 놓이겠다. 다른 사람들은 준비를 많이 해도 떨어졌다 그러던데. 민우가 잘했나 보다."
  "우리 애가 아빠 머리 보다 내 머릴 닮아서 그래. 민우 아빠는 돈 버는 머리만 있지. 아우, 아무튼 기분 정말 좋아. 우리 민우 먹이게 제일 비싸고 기운 나는 걸로 한 10개만 줘."

  어휴, 저 말본새하고는. 아무튼 저 여자는 참 재수가 없어요. 남편은 돈 잘 벌고, 자기는 머리 좋다고 자랑 늘어지게 하고. 아주머니는 그저 조용히 미소 지으며 비닐봉투에 음료 10개를 담습니다. 여자가 가고 나서, 아주머니가 또 내 머리를 아주 많이 쓰다듬었어요.

  "메리야, 점심 먹으러 집에 갈까? 아줌마도 배가 좀 고픈데."

  아주머니는 오전 일과를 마무리하고 집으로 갑니다. 아주머니의 집은 아주 가까워요. 아주머니는 카트를 아파트 출입구 주차장에 놓고, 바구니에서 나를 꺼냅니다. 그리고 엘리베이터의 12층 버튼을 누릅니다. 나는 아주머니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오늘 아주머니의 얼굴은 좀 지치고 어두워 보이네요. 마침내 집에 도착했어요. 아주머니가 손을 씻고, 부엌에서 아침에 남은 국을 데웁니다. 나는 거실의 푹신한 러그에 앉아서, 거실 벽에 걸려있는 아주머니네 가족사진을 봅니다. 아주머니와 아저씨, 그리고 형석이. 아주머니는 통통하고, 아저씨도 키가 크고 체격이 좀 큰 편이에요. 형석이도 그런 부모님을 닮아서 살이 쪘어요. 나는 형석이의 유순하고 해맑은 미소를 참 좋아해요.

  아주머니가 국을 데우고 나서, 나한테 사료를 조금 덜어서 줍니다. 나는 밥 생각이 없어서 별로 먹지는 않았어요. 그 재수 없는 민우 엄마 때문에요. 아주머니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거든요. 아주머니는 밥상을 차려놓고는 드실 생각이 없는지, 그냥 가만히 있더라고요. 나는 식탁으로 가서 아주머니 옆에 앉아있었어요.

  "밥을 차려놓기는 했는데, 별로 먹고 싶지가 않네. 메리야, 밥맛이 없는 이런 날도 다 있어. 항상 아침 배달하고 나면 배가 고픈데 말이야."

  왈왈. 나도 아까부터 기분이 안 좋아서 좀 소리 내 짖고 싶더라고요. 그렇게 짖고는 거실과 부엌을 왔다갔다했지요. 아주머니는 데운 된장국을 음식물 쓰레기통에다 넣고는, 냉장고에서 요구르트 하나를 꺼내어서 마셨어요. 그거라도 먹지 않으면 오후 일을 할 수 없으니까요. 그러고 나서 아주머니는 소파에 앉아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어요. 피곤하시겠지요. 아침 6시부터 계속 일을 했으니까요. 나도 아주머니 옆에서 까박까박 졸았어요.

  아주머니가 다시 집을 나선 것은 오후 1시쯤입니다. 오후에는 거리 판매를 주로 해요. 정해진 장소에서 손님들을 기다리는 것이지요. 오전에는 주차장의 소나무 아래였다면, 오후에는 아파트 스포츠 센터 앞에서 손님들을 기다립니다. 거기는 스포츠 센터 이용객들도 있고, 유동 인구도 많은 대로변이거든요. 오늘은 날도 그리 춥지 않고, 햇빛도 따사롭게 느껴집니다. 아마 올해의 마지막 가을날일 거 같아요. 나는 아주머니의 카트에서 거리의 은행나무가 노랗게 흔들리는 것을 바라봅니다.

  "엄마, 아들 왔다."
  "왜 이렇게 일찍 온 거야? 오후 수업은 안 하고 조퇴한 거야?"
  "응, 머리가 아파. 그냥 공부하기 싫어."

  아주머니는 머리를 가볍게 두들기는 형석이를 보고 웃었어요. 형석이는 오늘도 오후 수업을 땡땡이치나 봅니다. 자주 그러는 편이에요.

  "엄마, 내가 의자 가져올게."
  "엄마 의자에 네가 앉아. 엄마는 좀 서 있어도 괜찮아."
  "아냐. 그건 엄마 꺼. 나는 내 꺼 가져올 거야."
  "괜찮대도 저러네."

  형석이는 스포츠 센터 주차장으로 가더니, 거기 화단 구석에 처박혀 있는 연두색 플라스틱 의자를 하나 가져옵니다.

  "엄마, 이거 봐. 이거 좋은 의자!"
 
  형석이는 기쁜지 큰 소리로 아주머니한테 말합니다. 의자를 가져오던 형석이가 함박웃음을 터뜨리자, 아주머니 얼굴에도 미소가 번집니다. 형석이는 카트 옆에 의자를 놓고 거기에 앉습니다. 그리고 바구니에 있는 나를 꺼내어 무릎 위에 올려놓았어요. 나는 산책가고 싶어서, 형석이의 무릎에서 발을 좀 굴렀지요.

  "엄마, 나 메리 산책 시킬래."
  "그럴래? 스포츠 센터 뒤쪽에 공원 있잖아. 그럼, 거기에서 메리하고 좀 놀아라."
  "응. 우리 엄마 사랑해. 화이팅!"

  형석이는 두 팔로 크게 하트를 만들어 보여주었어요. 형석이가 만든 하트를 보니, 나도 기분이 좋았어요. 그래서 왈왈, 하고 소리를 내었답니다. 원래는 아주머니가 오후에 이곳에 오기 전에 나와 산책하곤 하는데, 오늘은 좀 힘들어 보였어요. 아무튼 형석이가 일찍 와서 나도 콧바람을 쐴 수 있게 되었네요.

  "빨갛게 빨갛게 물들었네. 노랗게 노랗게 물들었네. 야호! 가을 길은 좋은 길."

  형석이는 나의 목줄을 느슨하게 하고서는, 그렇게 노래를 부르며 천천히 걸었어요. 형석이와 내가 그렇게 기분 좋게 산책을 하고 있었는데, 초록색 체육복에 교복 외투를 걸친 남자애 둘이 다가오더라고요. 형석이하고 같은 색의 체육복을 입었네요. 같은 학교에 다니는 애들인가 봐요.

  "어이, 이형석. 너 여기서 뭐 해?"

  더벅머리에 안경 쓴 남자애가 건들거리면서 그렇게 묻더군요. 나는 걔를 더벅머리라고 부를게요. 아무튼 그 더벅머리가 말하는 걸 보니, 어째 좋은 아이는 아닌 것 같았지요.

  "우리 메리, 산책시키고 있어."
  "메리? 이름도 존나 촌스럽네. 언제 적 메리냐? 지 닮은 강아지 새끼 데리고 다니는 바보 새끼."
  "내가 왜 바보야? 나 바보 아냐!"

  형석이는 그 녀석들과 맞닥뜨린 것이 놀라기도 하고 화가 나서 큰 소리로 외쳤어요. 그러자 더벅머리 옆에 있는 멀대같이 키가 큰 놈이 옆에 있는 단풍나무를 마구 흔들면서 그래요.

  "바보 새끼한테 바보라고 하지, 뭐라고 하냐? 꼭 저렇게 모자란 애들은 지가 바보인지 몰라. 등신같이."

  그 멀대 자식이 형석이한테 그런 말을 퍼붓자, 나는 있는 대로 화가 치밀었어요. 그냥 앞뒤 가리지 않고, 그 멀대의 체육복 바지를 물고는 마구 잡아당겼어요.

  "메리야, 안돼. 그러면 못써. 안돼, 다쳐. 하지 마."
  "야, 이 강아지 새끼가 성깔있네. 바보 주인도 지킬 줄 알고."

  멀대 새끼가 나한테 물어뜯기는 것을 보더니, 더벅머리가 나한테 달려들어서 발로 내 등을 갈겼어요. 나는 등짝이 쪼개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지만, 멀대 자식의 바지를 놓아줄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어요. 형석이는 어떻게든 나를 구해야겠다고, 내 목을 세게 잡아당겼어요. 나는 형석이의 아귀힘이 얼마나 센지 처음 알았어요.

  "개새끼, 지랄맞기는."

  마침내 형석이가 나를 멀대에게서 떼어놓자, 멀대 자식이 그렇게 욕설을 내뱉더군요. 나는 분이 풀리지 않아서, 그냥 고래고래 있는 대로 짖었어요. 형석이는 그런 나를 꽉 끌어안고 있었고요.

  "야, 가자. 저 바보 새끼, 지 강아지한테 물어뜯겨서 뒈지라지."

  더벅머리가 그렇게 지껄이면서, 흙바닥에 넘어진 멀대를 일으켜 세웠어요. 둘은 나와 형석이를 바라보며 쉴 새 없이 욕을 했어요. 그리고 그렇게 그곳을 떠났습니다.

  "메리야, 괜찮아? 어디 아프지 않니? 형아가 호, 불어줄게."

  형석이는 그렇게 말하고는, 단풍나무 아래 벤치에서 그냥 가만히 앉아있었어요. 형석이는 이 갑작스러운 상황에 몹시 놀랐는지, 거친 숨을 내쉬었어요. 나는 형석이의 심장이 쿵쾅거리는 소리를 들었어요.

  "바보, 바보, 바보!"

  형석이는 그렇게 혼잣말하면서, 자기의 머리를 쥐어뜯더군요. 도대체 저 쓰레기 같은 애새끼들의 마음속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어떻게 사람이 사람한테 저럴 수 있을까요? 나는 너무나도 가슴이 아팠어요. 나의 얼굴은 침과 눈물, 땀이 범벅이 되고 말았지요.

  네, 오늘은 정말 힘든 하루였어요. 나는 저녁에 밥을 먹을 기운도 없어서, 거실 러그에 그냥 드러누워 버렸어요. 형석이도, 아주머니도, 아저씨도 오늘은 모두 저녁을 먹지 않았어요. 아저씨는 늘 그렇듯, 아파트 공원에 운동하러 나갔어요. 형석이는 일찍 자러 들어갔고, 아주머니는 식탁에서 사탕 꾸러미를 나누어 포장했어요. 손님들에게 그렇게 소소한 선물이라도 돌려야, 요구르트 하나를 더 팔 수 있으니까요.

  나는 아주머니가 깔아준 전기매트에서 졸다가, 거실 창문으로 들어오는 찬바람에 눈을 떴어요. TV 장식장 위의 디지털시계가 11시 37분을 가리키고 있었어요. 다들 잠이 들었나 봐요. 거실에는 작은 무드 등 하나만 켜져 있었으니까요. 나는 조금은 기운을 차리고는, 거실 벽에 걸린 사진을 가만히 바라보았어요. 어딘지 모르게 그 사진에서는 가라앉은 서글픔이 느껴졌어요. 할 수만 있다면, 그 사진에 조금이라도 행복의 느낌을 불어넣고 싶다. 나는 그렇게 중얼거렸어요. 언젠가 아주머니가 알려준 내 이름이 생각났어요. 맞아요. 내 이름은 메리(Merry)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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