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의 글: 개별난방 공사에 대해 생각함 1편 링크
https://blog.aladin.co.kr/sirius7/15583628
폭풍 전야. 드디어 내일은 대망의, 아니 그 빌어먹을 보일러 공사가 있다. 오늘은 바로 옆라인 공사였는데, 하루 종일 들리는 공사 소음에 귀가 먹먹해졌다. 이번 기회에 새롭게 알게 된 것은 '보일러'라는 기계는 전자레인지나 세탁기와 같은 가전제품이 아니라는 점이다. 보일러는 가스와 냉온수 배관, 난방 분배기와 연결을 해야 하는 복잡한 기계이다. 당연히 보일러의 설치 과정은 까다롭다. 집안에 그런 기계가 들어온다는 건, 지속적인 관리가 필요한 골칫덩이를 장만하는 것과 같다. 한마디로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다. 내 생각에는 개별난방이 기존의 중앙난방보다 더 좋은 점은 약간의 난방비 절약밖에 없을 것 같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아파트 단지의 90퍼센트의 입주민들은 도대체 무슨 이유에서 개별난방 전환을 찬성했을까? 물론 기존 중앙난방으로 부과되는 난방비에 대한 불만도 존재한다. 하지만 그보다 아파트 소유주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집값 상승'에 대한 기대였을 것이다. 아파트 인근의 2개 단지는 여전히 중앙난방 방식으로 운용되고 있다. 그러니까 개별난방 방식으로의 전환은 매매(賣買) 시, 그 아파트 단지 대비 장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 아파트 단지 보다 더 오래된 그 아파트는 왜 개별난방 전환을 고려하지 않는가? 그곳은 그런 공사 따위에 관심이 없다. 그 아파트 단지에서는 '재건축'을 밀어붙이는 중이다. 어차피 재건축할 거, 개별난방 공사를 해서 뭐하겠는가? 거긴 재건축 추진 위원회가 열심히 활동 중이다. 어떻게든 집값을 올리고자 하는 사람들의 열망은 그야말로 무시무시하다. 한국에서 '아파트'는 단순히 먹고 자고 쉬는 곳이 아니라, 거대한 물질적 욕망의 집합체라고 할 수 있다.
나처럼 공사 소음과 먼지가 귀찮아서 개별난방 전환에 '반대' 표를 던진 사람은 어떤 면에서 참으로 나이브한 것일지도 모른다. 중앙난방의 비효율성이 정말로 어떻게 해결할 수 없는 것이라면 우선은 주민들의 전반적인 양해를 얻어서 해나가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동대표 회장의 독단적인 안건 상정에 이어 단 한 번의 설명회, 주민 투표, 공사 착수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은 한마디로 총체적인 불합리성을 내포하고 있다.
개별난방 전환 공사는 전체 입주민의 80퍼센트 이상이 동의해야 한다. 그렇다면 투표가 부결되면 공사가 이루어지지 않는가? 반드시 그렇다고 할 수 없다. 입주자 대표 회의는 반대표 세대를 설득해서 정족수에 필요한 찬성표를 받아내면 된다. 기존의 찬성표는 그대로 유효표 수로 인정되기 때문이다. 그건 최근의 법원 판례를 근거로 한다. 법원은 입주자 대표 회의의 신속한 사업 추진이 타당하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사에 반대하는 개별 세대의 선택권은 없다고 봐야 한다.
지난번 글에서 이제 개별난방 공사에 불만을 가진 이들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다고 언급했다. 가칭 '개별난방 공사를 우려하는 입주민 모임'이 실제적인 행동에 나섰다. 주민들의 의견을 수렴한 그들은 구청에 민원을 제기했다. 그들이 오늘 엘리베이터에 붙인 종이 쪼가리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1) 다음 주에는 담당 주무관이 아파트로 현장 실사를 나오기로 예정되어 있다. 2) 보일러 공사 대금을 업체에 납부하는 일을 유예해달라. 그들이 부과한 보일러 가격과 공사비는 공동구매임에도 별로 저렴하지 않기 때문이다. 구청의 현장 실사가 끝난 후에 납부해도 늦지 않다. 뭐 대충 이런 내용이다.
그런데 담당 공무원이 나와서 점검한다 한들 뭐가 달라질까? 시공 과정에서 행정 절차상의 심각한 문제가 없는 이상 공사가 중단되기도 어렵고, 이제는 결코 이전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 구청 공무원이 가진 권한은 아주 제한적이다. 그들은 관련 법 규정에 근거한 위법적인 사항만을 지적하고 행정적인 조치만을 부과할 수 있을 뿐이다. 실제로 그런 부분에서 발생한 문제가 아니라면, 시장이 온다고 해도 아파트 입주자 대표회의의 결정을 바꿀 수 없다. 그런 면에서 그 기구가 가진 권한은 막강하다. 아파트 입주자 대표회의는 아파트 단지의 최종 의사 결정 기구로, 입주민은 자신들의 권리를 각 동의 입주자 대표들에게 양도한 것으로 간주된다. 아마도 그 담당 공무원이 할 수 있는 이야기란, '어떻게 싸우지 말고 잘 알아서 하세요', 정도일 것이다.
오늘 엘리베이터에는 새로운 공사 일정이 나붙었다. 아파트 단지의 주변 도로를 다 파헤쳐서 새롭게 도시가스 배관을 설치할 거라는 공사 공지였다. 이 작은 아파트 단지는 재건축의 전망은 거의 없다. 그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재건축에 필요한 용적률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재건축 가능성은 별로 없으니, 개별난방 전환으로 집값이나 올리자, 이런 생각으로 90퍼센트의 주민들은 기꺼이 찬성표를 던졌다. 집안 곳곳을 죄다 들쑤시고 뒤집어엎으면서, 거대한 흰 벌레 같은 보일러 호스가 덕지덕지 연결된 거실의 정경은 누군가에게는 참으로 감격스러울 것이다. 그것이 과연 입주민들의 기대대로 집값 천만 원의 상승을 가져다주겠는가? 내가 살고 있는 이 낡은 집은 그렇게 엄청난 물욕과 총체적인 불합리성이 조우하는 장소가 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