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뜸과 눈멂의 계보학:
하나의 시점, 두 개의 시선, 세 개의 시각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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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두 개의 시선: 모든 것을 볼 수는 없는 눈(들)
 

1) 그러나 아무것도 아니면서 동시에 모든 것이 되기란 어떻게 가능한가? 아무것도 아닌 것을 계속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드는 동어반복적 재생산의 장치(파놉티콘), 그 유일무이한 절대적 시점으로부터 벗어나, 위에서 아래를, 아래에서 위를, 그렇게 함께 보는 또 다른 하나의 시점은, 그 또 다른 유일무이한 (그러나 '절대적'이지 않은) '전능한 무능'의 시선은, 그 '거리의 관계성'은 어떻게 가능해지는가? 앞서 밝혔던 하나의 알레고리를 통해 말하자면, 오디세우스와 동류(아무개)인 우리는, 어떻게 저 외눈박이 폴리페모스의 눈을 찔러 '눈멀게' 할 수 있을 것인가? 또는, 침소봉대(針小棒大)와는 정확히 반대되는 의미와 몸짓으로, 그렇게 '축소'하여 빗대자면, 마치 '양식화'하듯 비유하자면, 이는 마치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거나 낙타를 바늘 구멍 안으로 빠져나가게 하는, 실로 '마법'에 가까운 일이 아닌가? 다시 말하자면, 마지막으로 묻자면, 나와 당신은 이 하나의 근본적 '불가능성'을 어떻게 마주하여야 하는가? 하여 나는 이번에는 두 개의 이미지로부터 시작할 것이다. 아주 예전부터 몰래 짝사랑해 오고 있는(그런데 '짝사랑'이란 언제나 '몰래'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일 텐데, 그리고 이미 오래 전에 죽은 이가 나의 사랑에 응답할 리가 만무하므로, 나의 이 짝사랑은 그렇게 '불완전'하기에 무엇보다 가장 '완벽'한 것일 텐데, 게다가 나는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직 17세기 이탈리아어로 사랑을 고백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는데) 미켈란젤로 다 카라바조(Michelangelo da Caravaggio)가 그린 두 장의 그림, 부재하면서 동시에 존재하는 두 장의 그림이 바로 그것이다. 

  

▷ 카라바조가 마태오를 바라보는 두 개의 시선.

2) 이 두 장의 그림은 모두 마태오(Ματθαίος)가 그의 복음서(마태오 복음서)를 기술하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같은 소재를 그리고 있음에도 이 두 그림은 서로 전혀 다른 그림이다. 이 두 그림 사이의 '결정적' 차이를 열아홉 살의 내게 처음으로 가르쳐준 책은 에른스트 곰브리치(Ernst Gombrich)의 『서양미술사(The Story of Art)』였다. 이 그림들에 대한 그의 문장을 읽으면서 볼을 타고 뜨겁게 흘러내리던 그때의 눈물을 나는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왜 나는 시나 소설이 아니라 소위 '이론서'를 읽을 때 엄청난 눈물을 흘리는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내게 개인적으로 하나의 '변태적 신비'이지만, 이러한 '신비'는 단순히 내가 지닌 어떤 '변태적' 취향만으로는 [그렇게 쉽게 분리되어] 설명될 수 없을 것이란 묘한 확신을 갖고 있기도 하다). 하여 곰브리치의 그 문장을 여기에 그대로 옮겨본다, 열아홉 살 때의 열정을 그대로 추억하며, 하지만 동시에 그때와는 전혀 다르게 읽히기를 또한 희망하며: "사실상 성서에 나오는 사건들을 마음속에 전혀 새롭게 그려보기 위해 비상한 정열과 주의력을 가지고 성경을 읽은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미술가들이었다. 그들은 그들이 과거에 보아온 모든 그림들을 잊어버리려고 노력했으며, 아기예수가 구유에 누워 있고, 목자들이 그를 찬미하러 찾아들고, 한 어부가 복음을 전도하기 시작하는 당시의 정경이 과연 어떠했을까 하고 상상하려고 노력했다. 오래된 성경을 아주 참신한 안목으로 해독하려는 위대한 미술가들의 그러한 노력이 분별없는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고 분노케 한 경우가 수없이 발생했다. 이러한 물의의 전형적인 예로서 1600년 전후로 작품 활동을 한 매우 대담하고 혁명적인 이탈리아 화가 카라바조가 있다. 그는 로마의 한 교회 제단을 장식하기 위한 성 마태의 그림을 부탁받았다. 그가 받은 주문은 성 마태가 복음서를 기술하고 있는 장면과, 그 복음서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점을 보이기 위해 그가 글을 쓸 때 영감을 불어넣어주는 한 천사를 그려넣는 것이었다. 매우 상상력이 풍부하고 타협을 거부하는 젊은 화가 카라바조는 한 늙고 가난한 노동자이며 단순한 세리(稅吏)가 갑자기 책을 저술하려고 쭈그리고 앉은 모습을 그리기 위해 깊이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대머리에 먼지 낀 맨발로 커다란 책을 어색하게 붙들고 있으며 손에 익지 않은 필기(筆記)를 하기 위해 애써 이마를 찡그리고 있는 <성 마태>[첫 번째 그림]를 그렸다. 마태의 옆에 있는 젊은 천사는 방금 천상으로부터 날아와 어린아이를 가르치는 선생처럼 그 노동자의 손을 우아하게 인도하고 있다. 카라바조가 이 그림을 제단에 모실 교회로 가져가자 사람들은 이 작품 속에 성 마태에 대한 경의가 들어 있지 않다고 분개했다. 사람들은 이 그림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카라바조는 성 마태를 다시 그려야 했다. 이번에는 그에게 선택의 여지가 많지 않았다. 그는 천사와 성자의 모습에 대한 전통적인 관념을 엄격하게 준수했다[두 번째 그림]. 그 결과로 나온 작품은 카라바조가 생생하고 흥미있게 보이도록 노력했으므로 지금도 명화에 속하지만, 우리에게는 이 작품보다는 첫번째 그림이 더 정직하고 진실해 보인다."(곰브리치, 『서양미술사(上)』, 열화당, 23-24쪽)

3) 하여 나는 당신과 함께 다시 저 두 개의 그림, 두 개의 시선을 마주 바라본다. 그림이라는 것에 대해, 곧 하나의 '재현 방식'[에 불과한 것]에 대해 우리는 무엇이 더 정직하고 진실하다는 '도덕적' 술어의 형식들을 [여전히] 사용할 수 있는 것일까?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말하게 만드는 힘, 어떤 재현이 더 정직하고 진실하다고 말할 수 있게 하는 그 힘의 효과는 무엇인가? 이 일견 가장 '도덕적'으로 보이는 물음들은 사실 가장 '미학적'인 질문들이며, 또한 일견 이 가장 '미학적'으로 보이는 질문들은 오히려 가장 '정치적'인 물음들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이 점이 가장 예민하게 인식되어야 한다. 왜 그런가? 무엇이 더 '진실하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 진리의 물음이 아니라 무엇을 더 '아름답다'고 생각하는가 하는 의 물음이기 때문이며, 동시에 우리의 정치란 바로 그러한 미추(美醜)의 분류법과 판단법 위에 위치하고 있는 지극히 감성적이며 감각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카라바조의 저 두 그림, 두 시선을 마주하며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은, 하나의 진실을 추구하기 위해(게다가 그 진실 역시 '구성된' 진실인데) 치열하게 자신의 작업에 임했던 한 예술가의 영혼이라기보다는, 왜 당시 사람들은 저 첫 번째 그림을 거부했는가, 그들은 무엇을 더 아름답다고 생각했고 무엇을 더 옳다고 생각했는가 하는, 미학-정치의 고고학과 계보학이라는 문제이다. 천사의 손에 이끌려 어물쩡 어설프게 펜을 잡는 마태오의 어리어리한 모습은 어째서 그 시대의 그들에게 전혀 아름답지도 옳지도 않다고 여겨졌는가, 그리고 그 같은 모습이 어째서 이 시대의 '우리'에게는 어떤 시작의 설렘을 간직한 지극히 진실하고 정당하며 심지어 '아름다운' 것으로 보이는가? 우리가 관통해야 하는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4) 바로 이 지점에서, 나는 마치 여담처럼, 하나의 스쳐 지나가는 이야기처럼, 다시 저 두 시선으로부터 시작할 것이다. 나는 아주 슬픈 이야기로 시작할 생각이다(그러므로, 당신은 각오해야 한다, 슬퍼할 것을 미리 각오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슬픈' 이야기 앞에서 오히려 전혀 슬퍼하지 않을지도 모를 당신 자신에 대해, 단단히 각오해야 한다). 저 두 개의 마태오 그림 중에 첫 번째 것이 흑백 사진으로밖에 존재할 수 없는 데에는 아주 슬픈 이유가 있다. 그 그림이 컬러 사진으로 찍힐 기회를 갖기 전에 전쟁 중 불타서 파괴되어버렸기 때문이다(하여, 넘겨짚자면, 우리의 시대는 만약 '우리의 시대'라고 부를 수 있는 시간성이 있다면 바로 우리 시대에 가장 결정적일 아름다움을, 미리, 앞서, 파괴하는 기이한 시대일지도 모른다). 왜 두 번째 것이 아니라 첫 번째 것이 파괴되[어야만 했]었을까: 나는 이렇게, 가정이 불가능하다고 이야기되는 역사를 향해, 실로 지극히 가정적인 질문을 던지며, 무언가를 힐난하거나 질책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엇을 향해? 누구를 향해? 역사를 향해? 가정 자체를 용납하지 않는다고 이야기되는 견고한 하나의 역사, 대문자로 쓰인 역사(History)를 향해? 그 역사라는 거대서사, 그 거대한 바퀴에 매달리고 짓이겨지는 무수한 벌레들로 비유되곤 하는, 우리들, 아무개들, 아무것도 아닌 자들을 향해? 나는 인격적 실체로서의 신(神)을 믿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러나 분명 '신적 질서'에 관한 일종의 '믿음'은 갖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또한 이러한 의미에서, 그리고 오직 이러한 의미에서만, 나는 내 자신을 '무신론적 신학자' 혹은 '종교적 유물론자'라는 자기-모순적인 언사로 규정할 수 있는 것일 텐데), 이는 분명, 곰브리치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이른바 "분별없는 사람들"에 대한 신의 경고이자 분노라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이렇게 생각하고 믿는 것이 나의 종교-유물론적 양생술, 무신론적 신학의 건강법이기도 하다.

5) 진정한 '여담'이란 이런 것인지도 모른다: '미술사'라는 것은 하나의 개념이다. 그리고 개념이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역사적인 성격을 띤다. 우리 모두 목격하고 주지하다시피, '미술사'라는 개념은 '미술'과 '역사'라는 두 개의 개념으로 이루어져 있다(마치 '세계문학'의 개념이 '세계'와 '문학'이라는 두 개의 개념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처럼, 그렇게 당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또한 전혀 당연하지 않은 것처럼). 문제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미술사가 일견 선사시대 미술부터 현대의 미술까지를 아우르고 또 그렇게 아우를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선사시대에는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미술'이라는 개념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또한, 말할 것도 없이, 그 '시대'에는 '역사'라는 개념조차 불분명한 것으로 남아 있다). 이것이 바로 미술사라는 체계의 허상이고 빈틈이다. 다시 말해서 선사시대에는 우리가 현재 '미술'이라고 부르는 것도, '역사'라고 부르는 것도 없었다(따라서 흥미로운 것은, [문헌화된] 역사 이전의 시대를 의미하는 '선사(先史)시대'가 소위 '역사'라는 [문헌적] 술어와 체계 안으로 포섭되고 포착되는 몸짓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그것들을 우리 시대만의 역사적인 개념인 '미술(fine arts)'로써 아우르고 그렇게 쉽사리 '미술사'라는 근거 없는 역사 속으로 편입시키는 작업을 매우 당연한 것으로 상정한다. 그러므로 사실 미술사는 바로 자신의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전제 조건 자체, 곧 자신의 서술 방식과 방법론에서부터 일종의 불가능한 문제를 끌어안고 있는 것(따라서 미술사 또한 하나의 이데올로기이다). 이 불가능성을 바라보는 두 개의 시선이 있다: 하나는 그 불가능성을 '없는 문제'로 덮으며 완전한 체계와 닫힌 역사를 꿈꾼다. 또 다른 하나는 바로 그 자신의 존재조건이자 가능조건 자체인 그 불가능성을 열어젖힌다. 미술사의 대표적인 '교과서'로 오랜 시간 인정받고 있는 잰슨(Janson)의 『미술사(History of Art)』는 바로 그러한 미술사의 아킬레스건, 그 불가능한 가능조건을 아무런 회의 없이 그대로 안고 가는 책이다. 그런데 곰브리치 '미술사'의 원제는 'Story of Art'이다. 곰브리치 또한 이미 언급했던 그릇된 전제로부터 출발하는 미술사의 서술 방식으로부터 크게 자유롭지는 못하다(그러나 우리는 이후 아비 바르부르크(Aby Warburg)와 관련하여 다시 이 문제로 돌아올 것이다). 하지만, 다소 부박하게 말하자면, 그는 역사(History)라는 체계로 도배하려 하지 않고 단지 담담히 이야기(Story)를 전해줄 뿐이다. 그리고 이 두 단어, 두 개념의 차이는, 어쩌면 카라바조의 저 두 개의 마태오 그림들 사이의 차이, 그 두 개의 시선들 사이의 차이와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고, 나는 넘겨짚는다, 가정이 불가능한 곳에서, 그렇게 가정적으로, 확언한다.

 

 

▷ '예술작품'을 바라보는 두 개의 시선: 미국 역대 대통령들의 얼굴을 조각한 러시모어(Rushmore)산과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새겨넣은 바위가 있는 금강산, 이 두 개의 사진, 두 개의 시선을 나란히 놓고 비교해본다. 이 두 개의 '예술작품'들은, 양각과 음각이라는 조각 방식의 차이를 제외한다면, '미학적'으로 서로 어떤 차이를 지니는가(최정우, 『사유의 악보』, 자음과모음, 2011, 500-501쪽 참조). 예를 들어, 어떤 이가 금강산 바위에 붉은 글씨로 새겨진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자연에 대한 만행'이라고 비난하면서 러시모어산에 웅장하게 조각된 미국 대통령들의 얼굴에는 침을 뱉지 않는 이유란 과연 무엇인가. 다시 묻자면, 이 둘 중에서 무엇이 더 "정직하고 진실해" 보이는가, 아니, 무엇이 더 '아름답게' 보이는가.

6) 이 두 개의 시선은, 말하자면, 그 각각, 모든 것을 볼 수 없는 눈(들)이다. 아마도 그리하여 우리는 두 개의 눈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자연과 진화에 대한 목적론적이고 인과론적인 전제 때문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라는 원인의 문법으로 이야기되는 모든 것들 또는 '그럴 수 있기 위해서'라는 목적의 어법으로 이야기되는 모든 것들 때문에 우리가 두 개의 눈을 갖게 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좀 더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여기서 완벽한 아름다움의 동의어로 상정된 '대칭성'의 테제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 곧, 왜 하나의 절대적인 시점에서 벗어나 두 개의 상대적인 시선으로 내려가는 길이 결코 대칭성에 대한 소위 '보편적'이고 '균형적'인 추구와는 다른 것이 될 수밖에 없는가를 밝히고 물어보고 있는 것. 조화와 비례에 대한 심미적/미학적 태도에 기반한 대칭성은 그것이 어떤 진리이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오히려 대칭성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미학적 태도 자체가 우리의 진리와 정치를 구성하는 것이다. 나와 당신은 다시 카라바조의 두 그림을 함께 바라본다. 저 두 개의 시선은, 그 시선들이 각각 모든 것을 볼 수는 없다는 바로 그 불완전성과 불가능성 때문에, 오히려 전체에 대한 비-전체(pas-tout)를 가능케 한다. 하여 저 두 개의 시선이란, 둘 중의 하나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선택 가능한' 대상들이 아니라, 우리가 그 둘 사이에서 끊임없이 동요하고 왕복해야 하는 두 개의 극, 그 자체가 일종의 가능조건이 되는 불가능한 하나의 극성(polarity)이다. 우리는 바로 이 두 극, 하나의 극성 안에서 가장 불완전하게 완전하며 매순간 그렇게 미완의 모습으로 스스로를 완성한다. 그러므로 양생술과 건강법에 대한 나의 말들이 단순한 농담이나 여담은 아니었음이 여기서 [쑥스럽게] 다시 확인되는바, 어쩌면 나는 그런 농담과 여담들로 나의 진담과 본심을 토로하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그것도, 도래할 것으로 기대되는 다른 어떤 시간에서가 아니라, 계속해서 도래하고 있는 중인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우리의 두 눈은 모든 것을 바라볼 수는 없는 눈(들), 일견 대칭적이고 균형적으로 보이는 그 두 개의 눈은 실로 당파적이고 편파적이며, 그렇게 당파적이고 편파적인 불균형 위에 설 때에만 우리의 두 눈은 비로소 바로 그렇게 '두 개'로 기능한다. 그리고 우리가 이 두 개의 시선을 실제로 '선택'하는 지점과 방법은, 이렇듯 가장 불균형적인 어떤 선택 불가능성의 지점, 가장 생물학적인 비유를 통해 오히려 가장 물질주의적이지 않은 어떤 곳에 가닿는, 역설적 유물론의 방식이다.

─ 襤魂, 合掌하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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