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학동네』 59호, 2009년 여름.
1) 『문학동네』 2009년 여름호(59호)에 기고한 글을 옮겨놓는다. '폭력의 성찰'이라는 특집을 여는 원고로 지난 4월부터 5월 초에 걸쳐 개인적으로 매우 '고통스럽게' 써나갔던 글인데, 이제 와서 돌이켜 다시 읽어보니, 그때 내게 어떤 '예감'이 일었던 건 아닌가 하는 섬뜩한 느낌마저 들기도 한다(그렇다면,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어떻게 '용서'할 것인가, 혹은 반폭력과 불가능성의 정치는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이 질문들이 바로 지금 여기서 내게 더욱 첨예해진다). 어제(5월 29일)는 도쿄 공연을 위한 연습을 마치고 늦은 시각 대학로에서 출발해 창경궁과 인사동, 광화문을 거쳐 시청까지 내리 걸었다. 산책이었을까, 순례였을까. 그 길은 또한, 걸어가면 갈수록 점점 더욱 더 촘촘해지는, 일렬로 주차된 전경 버스들의 비좁은 틈들을 비집고 헤치며 걸어가는 길이기도 했다. 전경들은 노예선 안에서처럼 포개 누워 도로 위에서 새우잠을 청하거나 부대별로 모여 큰 그릇에 밥을 하고 라면을 끓이고 닭다리를 뜯으며 허기를 달래고 있었다. 광화문 앞에서는 소규모이긴 하지만 전경과 시민들이 뚜렷한 선을 그어 대치하고 있었다. 덕수궁 앞에서는 새벽 4시까지도 조문 행렬이 계속되고 있었다. 이 모두 한 어둡고 흐린 밤의 '소소하고 익숙한' 풍경들이다. 시청광장에서 자유발언대에 나온 한 철학과 대학원생은 이렇게 말했다: "서양철학적으로 말해봅시다! 그들은 얼마 전까지도 노무현을 포괄적 뇌물 수수 혐의로 구속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국민장을 하겠다고 말합니다. 물어봅시다! 포괄적으로 뇌물을 수수한 파렴치범에 국민장이 가당키나 합니까? 따라서 둘 중의 하나는 거짓말입니다. 한 마디로 이명박 정부는 뻥치고 있는 겁니다! 이를 서양철학적으로 '이율배반'이라고 합니다! 얘들아, 전경들아, 니들이 늦게까지 '고생이 많다'~, 대통령 잘못 뽑으면 '개고생'이다~!" 여기에는 하나의 화두가, 너무나 익숙해서 진부하게까지 느껴지는, 하지만 언제나 던질수록 다시금 아포리아를 산출하는 하나의 화두가 있지 않은가.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라는 화두가. 이른바 '촛불 논쟁'이라는 '지적 소모전'ㅡ내게는 개인적으로 촛불을 두고 벌어진 저 말과 글들의 잔치가 그렇게 느껴졌는데, 이 글은 말하자면 그러한 '소모적 논쟁'에 대한 내 나름의 대답일 터ㅡ앞에서 이 극명한 '서양철학적' 분석과 '이율배반'이라는 풍자적 어법은 실로 가장 단순하며 간단한 불화를 노출시키고 있지 않은가. 다중을 이야기하고 대중을 이야기하며 혁명을 이야기하고 전복을 이야기하는 이 모든 이야기들은, 이러한 극명한 불화와 작은 촛불들 앞에서, 너무 과도하거나 너무 부족하지 않은가. 하여 다시금,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이 물음 한 자락이 실로 너무나 중요해지고 간절해지지 않는가(그런데 또한 이명박 정부의 '5년 동안의 레임덕' 혹은 '전임기 동안의 레임덕'이 가져왔고 가져오고 가져올 폐해는 고스란히 우리의 몫이 아닌가, 하여, '국가'를 내세우며 '국민'을 깔아뭉개는 이 정부, '정부'와 '국가'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그것이 되어버린 이 정부가 어떻게 끝장나고 파탄나는지를 '통쾌'하게만 지켜볼 수는 없다는 데에 우리의 딜레마가 있는 것은 아닌가).
ㅡ 2009. 5. 30. 떠나는 襤魂 올림.
2) 도쿄에서의 공연을 잘 마무리하고 나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오랜만에 다시 공연하게 된 <블라인드 터치>의 대사들은 전혀 다른 의미와 맥락에서 다시금 내 가슴에 깊이 꽂혔다(조만간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이곳에 자세한 도쿄 공연 후기를 올리기로 한다). 이 땅에서는 '때 아닌' 시국선언들이 줄을 잇고 있었다. 익숙하면서도 동시에 낯선 풍경들이었다. 이러한 '시대착오적' 선언의 형식들이 다시 가능하게 된 것은, 그러한 선언들을 하지 않고는 어쩔 수 없게 돼버린 저 '시국' 때문이라는 사실을, 굳이 다시 입을 열어 입 아프게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 지독한 '폭력의 시대'에 우리는 또 다시 어떤 '폭력'을 사유하고 실천해야 할 것인가, 실로 가슴 저미는 물음이 아닐 수 없다. 하여, 나는 또 다시 펜을 든다, 들지 않을 수 없으므로, 나 혼자만이 아니니까, 펜이 칼을 이긴다고 했으니, 죽창보다도 무서운 이 펜을 막을 테면 막아보라, 막을 수 있는 데까지 막아보라. 죽창보다도 무섭고 칼보다도 무섭고 펜보다도 무섭고 말보다도 무서운 것이 무엇인지, 아마도 너는 곧 알게 될 것이다. 우리의 춥고 어두운 밤을 외면하는 너의 평온하고 따뜻한 잠을 위해, 전경 버스로 푸른 기와 집 주위를 열심히 꽁꽁 둘러싸라. 그러지 않고서는 어차피 단 한 숨의 잠도 제대로 못 이룰 테니. 너의 그 안온한 수면을 위해, 네 충직한 개들을 밤새도록 깨어 있게 하라, 주위를 경계케 하라. 그러면 진정 무서운 것이 무엇인지를, 그들이 너를 대신해서 두 눈 똑똑히 보게 될 테니. 그리고 고개를 돌려 이번엔 너를 향해 짖게 될 테니, 그 안온한 잠은 이제 끝났다고.
ㅡ 2009. 6. 10. 돌아온 襤魂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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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인가 불가능성인가: 폭력의 아포리아와 유토피아
ㅡ 폭력의 이데올로기 비판을 위하여
최 정 우
1. 폭력에 대한 글쓰기: 아포리아를 사유한다는 것
폭력에 대해 말하고 쓴다, 아니, 말하지 않고, 쓰기만 한다, 쓰디쓰기만 하다. 이 글은 폭력의 한 역사, 혹은 더 정확하게는, 폭력에 관한 개념과 담론들의 한 역사를 다루려고 작정한다, 약속한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는 개념과 담론들의 일반적 약사(略史)라는 '폭력적' 요약의 형태와는 거리를 둘 것이다(말하자면, 그와는 다른 '폭력'의 방식을 취할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제까지 수많은 이들에 의해 수많은 방식으로 이루어진 폭력에 관한 이 말들의 잔치—그러므로 이 '잔치'란 풍성한 동시에 그 자체로 얼마나 '폭력적'인가—에 다시금 폭력에 관한 다른 말을 따로 덧붙이고 싶지는 않다, 적어도 일반적 역사 서술의 형태로는(그러나 필시 우리는 또한 종국에 가서 같은 말들을 다른 말로, 또한 같은 요소들을 다른 조합의 방식으로 이야기해야 할 텐데, 아마도 이것이 '덧붙이지 않으면서도 또한 다시 덧붙이고자 하는' 나만의 접합 방식, 곧 폭력에 대한 나만의 환대법(歡待法)이 될 것이며, 이로써 나는 나 자신의 약속을 배반하면서 동시에 이행할 것이다). 폭력은 말이 아니며 말로써 이루어질 수도 없는 것이겠지만, 또한 이와 완전히 '상동적'인 의미에서, 무엇보다 말은 언제나 하나의 '폭력'이 되기 때문이다(이러한 말과 폭력의 관계에서 '언어폭력' 같은 차원은 하나의 하위개념에 '불과'하다). 말과 폭력의 상동성이란, "우리의 말이 우리의 무기입니다(Our word is our weapon)"라고 말하는 마르코스의 말이 대항폭력의 '정치적' 정당성과 '도덕적' 우월성을 증언하고 있는 바로 그 지점에서, 또한 역설적으로 가장 오롯이 드러난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과 폭력의 관계란 은유이자 환유이며 동시에 하나의 '실재'이기도 한 것.
▷ 사파티스타 부사령관 마르코스: 우리의 '말'은 우리의 '무기'인가?
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 글은 일단은 당연하게도 그런 '말'들로 시작해서 그런 '말'들로 이루어져야 할 운명에 처해 있다. 그것은 다른 모든 글의 형식에 공통되는, 혹은 더 나아가, 폭력에 대한 글쓰기라는 하나의 형식 안에서 유독 도드라지게 되는, 글쓰기의 역설적 가능조건 그 자체일 것이다. 따라서 나는, 어쩔 수 없이, 폭력의 역사에 대한 기존의 언설들에 다시금 폭력에 관한 말을 하나 더 더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그리고 폭력에 관해 내뱉는 나의 이러한 말은, 어쩌면 또 하나의 '상징폭력'이 되는 수순을 밟을지도 모른다). 이는 일종의 '순환', 혹은 가치판단의 어법을 조금 더 적극적으로 가미해보자면, 하나의 '악순환'이다. 그런데 이러한 순환의 구조가 실은 언제나 저 개념적이고 철학적인 아포리아가 지닌 일종의 '숙명'이자 '보편성'이기도 했다는 사실에 바로 이 순환의 '폭력적' 핵심이 놓여 있다.'predicament'라는 단어가 뜻하는 이중의 의미대로, 이러한 보편성으로서의 아포리아는 '곤궁'이기도 하며 또한 그 이전에 이미 하나의 '빈사(賓辭)'이기도 한 것. 그러므로 또한 이 아포리아는 일종의 '빈사(瀕死)' 상태, 곧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어떤 결정적 곤궁의 모습으로서, 어떤 '반죽음'의 형태로서 먼저 제시될 것이다. 마치 알바니아의 관습법인 '카눈'이 그러한 것처럼.
2. 폭력 개념의 역설과 양가성: '카눈'이란 무엇인가
따라서 나는 폭력에 관한 나의 말을 하나의 소설로부터 시작해 하나의 소설로 관통해 나갈 것이다. [이는 폭력의 개념에 대한 역사적 서술을 문학을 통해 '돌파'하려는 소급적 몸짓, 곧 하나의 실제적 역사를 하나의 문학적 허구로 '치환'하려는 환원적 몸짓처럼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내가 여기서 시론(試論)의 형태로 시도하고자 하는 것은 사실 폭력 개념의 어떤 일직선적인 '역사'가 아니라 폭력 개념의 '구조' 분석임을 이참에 더욱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내가 역사의 해설이 아닌 구조의 분석을 통해 무엇보다 반대하고 문제 삼고자 하는 것은 바로 저러한 '문학적 치환'의 몸짓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 문학은 이론을 위해 사용되거나 예시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론 그 자체의 구조적 뼈대를 이룬다는 점에서 일반적 역사 서술의 대척점에 있다.] 이스마일 카다레는 소설 『부서진 사월』에서 '카눈'에 대해, 그 끝없이 이어지는 숙명적 복수와 폭력의 역사에 관해 쓰고 있다. 주인공 그조르그는 형의 원수를 갚음으로써, 곧—'카눈'의 언어로 말하자면—형이 흘린 피를 회수함으로써, 이번엔 오히려 그 자신이 복수의 대상이 된다. 이것이 바로 피할 수 없는 '카눈'의 경제이다. 여기서 폭력의 순환은 지연되거나 연기될 수는 있지만 결코 그 '지불' 자체가 불이행되는 일은 없는, 그런 면책 없는 하나의 '경제적' 순환이다. '카눈' 안에서는, 누군가가 흘린 피란 반드시 다른 누군가에 의해 회수되고 상환되어야 하는 것이기에. 이러한 복수는 대물림을 하며 일종의 '폭력의 역사'를 구성한다. 복수의 피가 또 다른 복수의 피를 부를 뿐만 아니라, 그러한 복수의 피가 가문의 피 안에 새겨져 있다는 이중의 의미(혈흔)에서, 그러한 폭력의 역사는 또한 피의 역사, 핏줄로서의 가족사이기도 하다. "그러다 그는 아버지가 그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네가 네 형의 피를 회수하지 않는 한, 너는 다른 어떤 것을 위해서도 살 수 없다./ 그는 하마터면 웃을 뻔했다. 사람을 죽이기 전에는 살 권리가 없다니! 오직 사람을 죽인 연후에야, 그리하여 이번에는 그 자신이 죽음의 위협을 받을 때에라야 그의 삶이 이어질 거라니!"(이스마일 카다레(Ismail Kadaré), 『부서진 사월』, 유정희 옮김, 문학동네, 1999, 32-33쪽) 따라서 그조르그의 삶은 그의 복수 이후에, 정확히 '반죽음'의 삶,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삶, 역설적으로 오직 죽음의 표식으로서만 살아 있는, 그런 빈사 상태의 삶으로 바뀐다. 그에게 남은 시간은, 상대방의 복수가 수행되기까지 유한/무한으로 유예된 시간, 매순간 죽음을 기다리고 경계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죽은 자의 시간이라는 역설적 성격을 갖게 되는 것이다. 삶은 죽음으로 형용되고 수식되며, 오로지 죽음이라는 술어를 갖는 한에서만 '삶'이 된다.
▷ 이스마일 카다레, 『 부서진 사월 』(유정희 옮김), 문학동네, 1999.
그러므로 이러한 삶과 죽음의 부조리한 연결과 상호의존은 그 자체로 빈사(prédicat)가 지닌 '기원적' 폭력성을 가리키고 있는 것. 데리다가 「폭력과 형이상학」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빈사/술어 기능(prédication)은 최초의 폭력"이기도 하므로.(Jacques Derrida, "Violence et métaphysique", L'écriture et la différence, Paris: Seuil, 1967, p.218) 그런데 돌이켜보자면, '죽음'을 술어로 갖지 않는 '삶'은 한시라도 가능했던가, 혹은 바꿔 말하자면, '빈사(瀕死)'를 빈사(賓辭)로 갖지 않는 언어는 과연 한 순간이라도 가능했던가. 폭력이라는 개념은, 그것이 언제나 검은 리본이라는 죽음의 표식을 달고 진행되는 삶의 문제, 곧 되갚을 수도 없고 되찾을 수도 없는 죽음(삶)을 삶(죽음)으로 회수하고 상환하려는 역설적 문제와 항상 결부된 것이기에, 바로 그 이유에서 항상 '문제적'인 개념이 된다. 빈사(賓辭) 안에는 이미 이러한 빈사(瀕死)의 상태가 하나의 필연처럼 포함되어 있다는 의미에서, 곧 삶을 수식하고 설명하는 술어 속에는 언제나 죽음이 함유되어 있다는 의미에서, 삶의 빈사가 되는 죽음의 술어는 그 자체로 삶에 대해 하나의 '근원적' 폭력을 구성한다. 그러므로 '카눈'의 법칙은 그 자체로 이미 폭력의 양가적 역설을 가리키고 있다. 이러한 폭력은 제거하거나 벗어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며, 존재와 언어 안에, 존재자를 '존재'하게끔 하는 언어의 분절 속에, 하나의 상징처럼 각인되어 있다. 폭력과 반대되는 비폭력이 따로 있다기보다는, 죽음과 구별되는 삶이 따로 존재한다기보다는, 폭력은 그 자체로 내재적 양가성을 띠고 있는 이중의 개념인 것이다. 에로티즘이 "죽음 안에서까지 삶을 예찬하는 것"(Georges Bataille, L'érotisme. Œuvres complètes, tome X, Paris: Gallimard, 1987, p.17)이라는 바타이유의 말은, 그래서 삶의 '치명적' 아름다움에 대한 (후기)낭만주의적 데카당스의 상찬이 아니라, 바로 삶에 깃든 죽음의 '폭력성', 그 양가적 성격에 대한 일종의 '뒤틀린' 직시가 되고 있다.
▷ James Joyce, Ulysses, Oxford/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93.
설명과 수식 속에 명쾌한 해석보다 오히려 수수께끼 같은 양가적 아포리아를 담는 것이 바로 술어이자 빈사라면, 언어 속에서 이러한 폭력은 계사(copule)로서 완성되고 다시 계사로써 이탈한다. 제임스 조이스는 『율리시즈』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유대희랍은 희랍유대야(Jewgreek is greekjew). 극단은 서로 통하거든. 죽음은 삶의 최고 형식이지."(James Joyce, Ulysses, Oxford/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93, p.474) 데리다가 반문하는 것처럼, 여기서 "계사의 의미는 무엇"이며 또한 "계사의 정당성은 무엇"인가?(Jacques Derrida, "Violence et métaphysique", 앞의 책, p.228) 죽음이 삶의 최고 형식이 되듯이, 또한 비폭력 혹은 대항폭력이야말로 어떤 의미에서 폭력의 최고 형식이 되고 있는 역설적 장면을 목격할 때, 나는 다시 한 번 폭력에 대한 글쓰기가 지닌 어떤 '불가능성'을, 말 안에 이미 포함되어 있지만 동시에 그 말을 넘어서 있는 폭력의 양가적이고 역설적인 어떤 '내재적 초월성'을, 다시 한 번 쓰디쓰게 확인하게 된다. 조이스의 저 문장을 다시 곱씹어보자면, 폭력의 개념 안에서 '유대적인 것'과 '희랍적인 것'이란 어떤 특정한 민족이나 국적만의 문제는 아니다. 흘린 피는 반드시 그에 합당한 피의 값을 치러야 한다고 말하는 냉혹한 경제적 '상호주의 이론'과, 문을 두드리는 손님은 주인에게 무조건적 환대를 받아야 할 반신적(半神的) 존재가 된다고 말하는 호의의 종교적 '타자 이론'은, 어떻게 하나의 폭력, 곧 하나의 '카눈' 안에서 양립할 수 있는가? 혹은, 이 '이국적인' 관습법은 동시에 그 자체로 유대적인 것과 희랍적인 것 사이의 어떤 교통과 불화를 증거하고 있지 않은가? 다시 말하자면, 벤야민이 말하는 신화적 폭력과 신적 폭력 사이의 극명한 동요와 모호한 경계는 사실 바로 이러한 '양립할 수 없는 것들의 양립' 속에 있지 않은가? 이후 우리는 민족적 개념이 아닌 것을 민족적 언어로 말하는 이 폭력의 한 분류법으로, 저 '폭력적' 계사 "is"가 이어주고 있는 어떤 아포리아적인 동어반복(tautology)으로,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 사이의 교통 혹은 불화, 서로에게 흘레붙고 서로를 겁탈하고 있는 이 두 거대한 정신성 사이의 '폭력적' 에로티즘으로, 그렇게 다시 돌아오게 될 것이다. 말하자면, 극단은 서로 통(通)하고 있기에, 그리고 '계사(copule)'가 지닌 다른 의미는 또한 '성교'이기도 하기에.
3. 폭력의 '근대성'과 '전근대성' 사이: 폭력과 대항폭력의 은유와 조건들
우선 우리에겐 '미개한' 폭력과 '계몽된' 폭력이라는, 혹은 '불법적' 폭력과 '적법한' 폭력이라는 두 개의 대립항으로 구성된 하나의 분류법이 존재한다. 『부서진 사월』 안에서 일견 그조르그와 베시안은 각각 이 두 개의 폭력, 이 두 개의 체계를 상징하고 대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폭력의 분류법은 그 자체로 결코 '중립적'인 것이 되지 못한다. 두 가지 원인으로 인해서 이 두 대립항 사이의 균형은 깨지게 되는데, 첫째, 일견 미개한 '전근대적' 관습으로만 여겨지는 가시적 폭력에 대해 '적법하고 근대적인' 방식으로 추상화된 비가시적 폭력이 지니게 되는 어떤 합리적 '우월성', 그리고 둘째, 반대로 일견 합리적이고 적법한 것으로 보이는 '근대적' 폭력의 체계에 대해 피와 죽음의 '전근대적' 폭력이 지니게 되는 어떤 치명적 '침투성'이 바로 그 원인들이다. 이러한 두 개의 불균형 속에서 폭력의 개념은 동요한다. 따라서 비극은 두 개의 방향에서 시작하여 다시 두 개의 방향으로 진행된다. 오래된 복수의 사슬이 낳은 폭력의 순환, 그 원환과 원한의 고리 안에 위치한 한 개인의 삶 아닌 삶이 지니게 되는 어떤 '비지(non-savoir)'의 비극성(그조르그의 경우), 그리고 신화적 폭력에 대한 섣부른 '모더니즘적' 열광과 추상적 포착이 오히려 그 폭력의 세계에 마치 조공처럼 바쳐지고 희생될 수밖에 없었던 어떤 '무지한' 상처의 비극성(베시안의 경우). 그조르그의 비극과 베시안의 비극은, 말하자면 사물의 연장성(extensity)이 적용되지 않는 반신화적(半神話的) 세계 안에서, 서로 중첩되면서 또한 평행한다. 이 두 개의 선은, 서로를 쫓으면서도 동시에 서로를 비껴가는, 두 개의 길과 겹쳐진다. 그렇다면 이 '특수하면서도 보편적인' 알바니아라는 땅, 그 땅 속 깊이 뿌리내린 '카눈' 안에서, 그만큼이나 특수하고도 동시에 보편적인 '희랍적인 것'과 '유대적인 것' 사이의 공존과 불화란 과연 무엇인가?
베시안은 카눈의 법칙이 지배하는 세계에 관념적으로 매료된 채 자신의 아름다운 신부 디안과 함께 알바니아의 고원지대로 신혼여행을 온다. 따라서, 첫 번째 계열: 디안에 대해 지적이고 관념적인 우월성을 품고 있던 베시안이 종국에 맛보는 어떤 지성의 패착이 있다. 반면 그조르그는 '피의 세금'을 지불하러 떠난 여행길에서 이 부부와 순간적으로, 하지만 숙명적으로 맞닥뜨린다. 고로, 두 번째 계열: 유예된 죽음으로서의 삶, 그 삶이 펼쳐놓은 길 위에서 우연히 마주친 디안에 대해 그조르그가 품게 되는, 파국이 예정된 어떤 삶/죽음의 열정과 충동이 있다. 그조르그의 길과 베시안의 길, 이 두 개의 계열과 방향은 그 자체로 서로에 대한 대결과 갈등을 내포한다(그리고 그 둘 사이에, 폭력에 오염된 '희생자'이자 그 폭력을 다시 전염시키는 '매개체'로서, 디안이, 일종의 '사이-존재'로서, 존재한다). 근대적 법체계는 '미개하며 미신적인' 것으로 치부되는 '카눈'적 복수의 원환/원한을 그 자체로 중지할 것을 '정당하고 적법하게' 요구한다. 따라서 이는 폭력에 대한 '합법적' 중지의 명령이라는 외양을 갖춘다. 그러한 체계의 공인된 폭력 앞에서 기존의 관습법적이고 개인적인 폭력의 순환은 일견 무력하고 낡은 듯이 보인다(하지만 이 폭력에 관한 관습적 규범인 '카눈'은 그 자체로 전혀 '개인적'이지도 않고 '비합리적'이지도 않다). 하지만 외려 근대적 법체계에 상처를 입히는 것은 바로 그 자신이 제거하고자 했던 폭력의 거부할 수 없는 힘이라는 사실에 이러한 폭력의 '폭력적' 분류법이 지닌 역설이 있다. 마치 박물관에 박제된 폭력의 '사체'를 견학하는 마음으로, 온전히 안전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 폭력의 전근대적 '풍경'을 단지 감상하고 음미하는 마음으로 길을 떠났던 베시안은, 그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전염성'에 의해, 곧 죽음과 폭력의 어떤 치명적 마력에 의해 아내인 디안이 '전염'되었음을 무력하게 바라봐야만 할 뿐,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베시안은 속으로 읊조린다. "반(半)장님인 폴리페모스들이 자신을 어떻게 하기라도 했단 말인가? 라고 그는 자문했다. 그리고 인간 존재 전부를 채울 수 있는 문제가 바로 이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이스마일 카다레, 『부서진 사월』, 240쪽) 특정한 국적이 아니라 하나의 보편적 정신성을 가리키는 이름이라는 의미에서, 이 '희랍'으로부터 온 철학자는 그러한 폭력에 대해 일종의 무력감을 경험한다. 그런데 이 무력감과 불능의 감정은 어디에서 연유하는가?
▷ 티쉬바인(Tischbein)이 그린 폴리페모스의 얼굴.
가장 일차적인 문제는 근대적 법체계가 '합법'과 '불법'이라는 폭력의 분류법을 시도하며 또 그것에 나름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이다. 마치 '카눈'이 오래된 저주처럼 걸려 있는 알바니아 북부 고원지대의 비극성 자체에 관념적으로 매료되었던 베시안처럼, 우리는 그 폭력의 모든 항목들을 나열할 수 있고 그 모든 힘들을 측정할 수 있으며 그것을 마치 관객처럼 바라보며 평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산악지방 사람들의 손목에 매달려 있는 검은 띠, 그 죽음의 표식을 보고 공포심을 갖거나 연민을 품기는커녕 자신의 관념적 지식과 체계를 재차 확인하고 확신하면서 오히려 열광하고 흥분한다. 우리는 대부분의 경우 그렇게 '순수한' 관찰자의 입장에서 '신화적' 세계에 한 발을 내딛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베시안에게 의사는 격분하여 따끔한 일침을 놓는다. "당신의 책들, 당신의 예술에서는 범죄의 냄새가 나오. 이 불행한 산악 지방 주민들을 위해 무엇을 하기는커녕, 당신은 관객이 되어 그들의 죽음을 구경하고, 재미있는 소재나 찾고 있소. 당신은 당신의 예술을 살찌우기 위해, 미(美)를 찾기 위해 이곳에 왔소. 십중팔구 당신이 좋아하지 않을 어떤 젊은 작가가 지적했듯이, 당신은 그것이 살인의 미학이라는 것을 보지 못하오. 당신은 내게 러시아 위선자들의 궁전에서 상연되던 연극을 연상시키오. 그곳의 무대는 수백 명의 연기자들이 공연을 할 수 있을 만큼 넓은 반면, 객석은 오직 왕가만을 수용할 수 있는 크기요. 당신이 나에게 연상시키는 것은 바로 그 위선자들이란 말이오. 한 민족 전체를 피비린내 나는 연극을 공연하도록 몰아넣고는, 당신은 귀부인들과 함께 박스 좌석에서 그 연극을 관람하는 거요!"(같은 책, 231-232쪽) '카눈'적 폭력을 하나의 풍광과 경치와 유물로서 대하는 베시안의 이 '고고학자적'이며 '심미적'인 열광은 그 자체로 '근대적'인 것인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가 이러한 자신만의 관념과 감정 안에 빠져서 보게 되는 것이 '환상'이며 보지 못하는 것이 '실재'라는 사실이다. 폭력의 순환이라는 '카눈'의 '전근대성'에 대한 베시안의 '근대적' 시각과 포착은 종국에 가서 그 '근대성' 자체의 내재적 이유로 인해 힘없이 붕괴하고 내파한다. 이것이 바로 그가 느끼는 무력감과 불능의 정체이자 효과인 것. 보다 진보하고 우월한 것으로 상정된 '근대적' 법체계의 테두리 안에서 일견 '전근대적'으로 보이는 '카눈'의 폭력을 방관자적으로 바라보았던 그 시선은, 바로 그 근대적 법체계가 결코 폭력의 '외부'에 있지도 않고 폭력의 '미래'도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눈이 먼다. 다른 의미에서, 곧 그 자신도 알 수 없는 어떤 체념적 열정에 사로잡혀 있다는 의미에서 역시나 눈이 먼 그조르그의 정확히 반대편에, 또 한 명의 맹인 베시안이 존재한다. 이 '외눈박이' 맹인들에게 진정 '개안(開眼)'은 요원한 것일까? 폴리페모스(Polyphemos)와 오클로스(Ochlos)로서의 개인과 집단은 공히 하나의 눈을, 그것도 멀어버린 하나의 눈을 갖는다. 그러나 송과선을 뚫고 자라날 제3의 눈은, 태양과 죽음을 정면으로 마주보게 될 새로운 하나의 눈은, 언제 개안하는가? [여기서 우리는 라로슈푸코의 잠언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곧 "태양과 죽음은 똑바로 바라볼 수 없다"는 명제는, 하나의 '사실'을 제시하면서 동시에 하나의 '전복'을 종용한다. La Rochefoucauld, Maximes, Paris: Garnier-Flammarion, 1977, p.47.]
▷ 크로넨버그 감독의 '폭력 2부작', <폭력의 역사>와 <이스턴 프로미스>의 장면들.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의 영화 <폭력의 역사>의 주인공을 통해서 우리는 그조르그와 베시안 사이의 어떤 '공생'을, 하나의 눈이 열리고 닫히는 두 가지의 양태를 본다. 그 외눈의 깜빡거림은 먼저 하나의 '이름'으로 온다. 그 이름은 우선 가명과 가면의 형식을 빌려 스스로를 감추고 있지만, 그 이름이 상환하고 그 이름으로부터 회수해야 할 피의 값은 청구서의 형태로 끈질기게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한다. 이름을 바꾼다고 해도, 과거를 지운 채 평범하고 단란한 가정을 이룬다고 해도, 청산하고 지불해야 할 피 값의 청구서라는 편지는 언제나 목적지에, 수신자에게, 정확히 도착한다. 이는 '카눈'이라는 규범 안에서 어떤 '윤리성'을 찾아볼 수 있는 한 이유이기도 하다. 이것은 왜 하나의 윤리가 되는가? '카눈'은, 또한 그 어원처럼, 일종의 '카논(canon)'이기도 한 것. '카눈'은 복수의 법칙이면서 동시에 또한 환대의 법칙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이중적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카눈'이야말로 데리다가 말하는 '환대(hospitalité)'의 역설적이고 양가적인 어원에 가장 부합하고 근접하고 있지 않은가? '카눈' 안에서 손님은 주인에 대해 '반신적(半神的)' 위치를 갖는 무조건적 호의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피의 순환이라는 폭력적 재앙을 불러오는 적대의 대상이기도 하다. 주인/손님(hôte)의 양가적 성격은 이러한 의미의 고리 안에서 완성되고 노출된다. 여기서 <폭력의 역사>의 주인공이 선택/은폐한 '개과천선'의 직업이 식당 주인이라는 사실은 특별히 흥미롭다. 그는 경제적/직업적 질서에서든 도덕적/주체적 위치에서든 어쨌든 손님을 무조건적으로 환대해야만 하는 주인의 입장에 서 있는 것이다(손님은 '왕'이자 '신'이다). 비록 그 손님이 자신의 과거를 상환하고 피 값을 회수하러 온 죽음의 표식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가족'을 지키려는 주인공의 폭력은 그래서 일단은 하나의 대항폭력이겠지만, 역설적으로 그러한 대항폭력은 오히려 폭력의 기원에 대해, 폭력의 역사적 시발점에 대해, 일종의 '근원적' 책임이 있는 그런 폭력이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대항폭력은 그 자체로 이미 '카눈'의 경제 안에 포함되어 있는 핵심적 요소인 것(이러한 폭력과 대항폭력 사이의 어떤 '혼혈'과 '잡종'과 '결정불가능성'이라는 주제는, 크로넨버그의 다음 영화 <이스턴 프로미스>에서 더욱 확장된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 무어/기번스의 그래픽 노블 『왓치맨』의 한 장면: 누가 감시자들을 감시할 것인가?
올해 초 잭 스나이더 감독의 영화로도 만들어진 바 있는 무어/기번스의 그래픽 노블 『왓치맨』에서는 또 다른 대항폭력의 형태가 드러나고 있는데, 말하자면 이는 대항폭력이 지닐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인 형태, 최고로 전도된 형태를 보여준다(또는 『왓치맨』이 대항폭력이 지닐 수 있는 가장 양가적이고 역설적인 형태를 가장 극명하게 형상화하고 있다고 말해도 좋다). 도구적이고 수단적인 폭력이긴 하지만 '폭력' 그 자체의 종식을 가져다줄 것으로 예상되고 기대된다는 의미에서, 그 대항폭력은 일종의 '폭력-파괴적'이며 동시에 '법-정초적'인 폭력이 되고 있다(혹은 그렇게 기대되고 있다). 이는 어쩌면, 그 스스로 '신적' 폭력이 되고자 했으나 결국 정초와 보존의 법적 '악순환'에 다시금 빠지고만 하나의 거대한 '신화적' 폭력이라 할 것인가? 오즈맨디아스는 목적의 정당성이—이러한 목적이란 어쩌면 칸트적인 '영구평화'일 것인가?—수단의 폭력성을 정당화한다는 자연법적 신념을 그 극단과 한계에 이르기까지 밀고 나간다. '감시자들을 누가 감시할 것인가(Who watches the watchmen?)'라는 질문은, '폭력을 어떻게 제거할 것인가(혹은, 고양이 목에 누가 방울을 달 것인가)'라는 질문과 동일한 구조를 가지면서, 그 질문에 대해 정확히 거꾸로 선 거울상의 모습으로 제기되는 물음, 동시에 대항폭력이 지닌 아포리아를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물음이 된다(그러나 감시자를 만든 것은, 고양이를 창조한 것은 누구인가, 혹은, 고양이보다는 쥐의 목에 방울을 달기가 오히려 더 어려워진 세상 아닌가). 『왓치맨』에서 오즈맨디아스가 계획하고 실행하는 이 '궁극적 해결책'은 기본적으로 냉전시대의 정치적 아포리아가 일종의 '이상적' 반대급부로 낳은 극단적 상상의 산물이지만, 그 절정의 대항폭력은 기묘하게도 그보다 훨씬 후에 실제로 있게 될 9.11 테러의 이미지와 역설적인 형태로 겹쳐진다(바로 이러한 점에서도 이 하나의 거대하며 역사적인 '대항폭력'에 대한 미국의 반응과 대응은 그 자체로 부조리한 것이었지만, '우리'는 그것이 잘못된 것인 줄 '알면서도' 그렇게 했고 또 그렇게 한다). [이러한 부인(disavowal)의 심리적 기제에 관해서는 Slavoj Žižek, Violence, New York: Picador, 2008, 특히 p.52를 참조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물신(Fetisch)을 설명하는 마르크스의 저 유명한 '심리적 기제' 또한 함께 상기해야 한다. "그들은 그것을 알지 못하면서 그것을 행한다."(Karl Marx, Das Kapital, Band 1. MEW Band 23, Berlin: Dietz, 1962, p.88) 그렇다면 폭력은 '아는' 것인가, '알지 못하는' 것인가?] 그러나 또한 『왓치맨』의 마지막 장면이 강하게 암시하고 있듯, 이 '궁극적' 대항폭력이 가져다준 일시적 평화와 화해의 기류는 그리 오래가지 못하고 곧 그 '기원적' 폭력성을 노출하게 될 운명에 처할 것이다. '감시자를 누가 감시할 것인가'라는 물음처럼, 이러한 폭력은 일종의 이중구속, 하나의 악순환을 이룬다. 이러한 순환에서 어떻게 탈출할 것인가, 혹은 이러한 순환을 어떻게 탈구시킬 것인가?
▷ Slavoj Žižek, Violence, New York: Picador, 2008.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영화 <그랜 토리노>는 이러한 탈출과 탈구의 주제와 관련하여 하나의 흥미로운 물음을 던진다. 이 영화가 가장 기본적으로 제기하는 것은 먼저 폭력에 '어떻게' 대항할 것인가 하는 물음이 되고 있다. 주인공의 선택은 비폭력도 아니고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대항폭력도 아니다. 그는 가장 극명하고 단순한 폭력을 '단지' 유발하기만 함으로써 그 자신의 죽음을 무릅쓰고 불러낸 이 '불의의' 폭력을 합법적 폭력과 적법한 형벌의 지배 아래로 돌려놓는다. <그랜 토리노>의 주인공이 어떤 '건강한' 보수성을 대표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이러한 독특한 '희생'의 논리와 그에 기초한 '법치'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기인하는 것이다(이러한 지극히 '기본적인' 믿음이 죽음과 희생을 통해 가장 '순수하고 직접적으로' 드러나고 증명된다는 이 영화적 사실은 그 자체로 지극히 역설적이지 않은가, 합법적 폭력의 이상성은 그 자체로 '피'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므로). 이스트우드 감독 자신이 분(扮)한 <그랜 토리노>의 주인공은 동일한 감독의 과거 페르소나인 '더티 해리'와 정확히 반대되는 하나의 거울상으로 기능하고 등장한다. 스필레인의 페르소나였던 '마이크 해머'와도 같은 신념으로, 곧 (법이 아니라) '내가 심판한다'는 원칙 위에서 말하고 행동하던 그 '더티 해리'는, 이제 <그랜 토리노>에서 맞이한 노년에 이르러 적법하고 합법적인 폭력의 체계에 마치 늙은 현자처럼 순응하는 듯이 보인다. 이러한 '적법성'의 복수, '합법성'의 눈먼 틈새를 적극 차용하고 활용하는 피의 복수가 일견 감동적이고 통쾌하면서도 그 희생의 '영속성'과 그 윤리의 '정치성'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남는 이유이다. 그러면서도 또한 이 영화는 은연중에 가장 확실하게 말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법치라는 것이 '언제' 그리고 '어떻게' 작동하게 되는지를. 왜 모든 범죄 영화에서 경찰은 언제나 그렇게 뒤늦게, 언제나 그렇게 모든 상황이 정리되고 난 후 가장 나중에 등장하게 되는가? 이러한 등장의 지연에는 어떤 특정한 '기호학'이, 어떤 특수한 '미학-정치학'이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이러한 지연은 단순히 주인공의 모든 '영웅적' 행동들의 효과와 결과가 드러나고 실현되기를 '친절히' 기다려주는 영화미학적인 배려의 장치인 것만은 아니다. 폭력의 경제 안에서 '법치' 혹은 '치안'이 갖는 징후적 성격은 이러한 '늑장 출동' 혹은 '지연된 최종적 마무리' 안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고 진단되고 있기도 한 것이다(이러한 영화적 상투성(cliché)을 가장한 법치에 대한 '무의식적' 믿음과 문법은 또한 우리들이 법치 일반에 대해 가장 '나이브하게' 품고 있는 뿌리 깊은 불만과 불안을 역시나 가장 '나이브하게' 드러내주고 있지 않은가). <그랜 토리노>의 '복수'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역설적이게도 바로 이러한 지연과 그에 대한 자연스러운 불안의 감정, 곧 법치에 대한 일종의 '뒤틀린' 믿음 그 자체 때문이었던 것. [<그랜 토리노>에서 폭력의 가장 극명한 이미지는, 폭력의 행위와 동선이 아니라 폭력이 남긴 어떤 결과를 통해, 곧 흐몽(Hmong) 소녀—그러나 이 '흐몽' 소녀는 또한 분명 한 명의 '미국인'이기도 한데—의 멍들고 피 흘리는 얼굴을 통해, 가장 강력하게 드러난다(여기서 '희생자'가 아시아계이고 '구원자'가 백인-코카시아인종이라는 지극히 '민족지적'인 사실은 잠시 접어두기로 하지만, 이 '접어둠'을 언급하는 시점에서부터 오히려 이는 결코 '접어둘' 수 없는 문제가 된다는 역설이 있다). 카메라가 이 소녀의 얼굴을 화면 가득 잡는 시퀀스 전후로, 곧 '극단적 폭력'의 이미지를 하나의 얼굴 안에 담는 '결정적' 장면을 전후로 하여, 이 영화는 두 개의 부분으로 갈린다. 단순한 '사회적'인 의미에서든, 아니면 복잡한 '민족지적'인 의미에서든, 이 완벽한 '타자'와 '상처'의 얼굴이 일종의 윤리로서(그러므로 또한 하나의 '폭력'으로서) '대항폭력'을 유발하고 요청하고 있는 이 지극히 '레비나스적'인—혹은, 같은 의미에서, '반(反)레비스나스적'인—장면이 결국 법치에 대한 뒤틀린 믿음에 의지하고 호소할 수밖에 없게 되는 영화적 해결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또한 유대적인 것과 희랍적인 것 사이의 어떤 '교착적'이고 '도착적'인 만남을 목격하게 된다.]
▷ 합법적 폭력과 불법적 폭력 사이에서: 이스트우드 감독의 <그랜 토리노>.
4. '법치'라는 환상의 기제: 폭력의 독점과 배제의 '야만성'과 '도착성'
그렇다면 '법치'란, 먼저 무엇보다 '당신들의' 환상이자 '우리들의' 환멸을 부르는 하나의 이름으로 나타나지 않는가? 폭력의 전근대성에 대한 법의 근대적 해결은, 바로 정당한 법집행으로서의 폭력의 독점과 정당하지 못한 수단으로서의 폭력의 배제라는 '근대적' 분류법으로 제시되고 있다. 가장 근본적인 층위에서, 국가의 존재 목적과 정당성은 바로 이러한 폭력의 독점과 배제, 곧 가장 큰 폭력의 '국유화'를 통해 다른 '불법적' 폭력을 막는다는, 일종의 합법화된 '소유 형태'에 기초하며 또한 그러한 '소유 형태'로서 출현한다. 폭력의 문제에 대한 홉스적 해결은 극명하다. 먼저 'nature'가 지닌 두 가지 의미에서 '자연' 혹은 '본성'에 호소하는 방법이 있을 수 있다(하지만 '자연스럽고 당연하게도' 이것만으로 폭력에 '대처'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 다음으로 여타의 폭력들을 제압할 수 있는 더 큰 폭력을 행사하는 방식이 있게 된다. 이 '가장 큰 폭력'의 정당한 행사는 바로 '법치'의 개념 안에서 구현된다. 그러나 이러한 분류법 자체는, 그 스스로 존재하기 위해서, 당연하게도 그 자신의 존재조건 자체에 눈멀어 있고 또 눈멀어 있어야 한다. 이러한 폭력의 독점이라는 문제는 필히 그 정당성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지만, 동시에 그 정당성의 '신비한 토대'는 망각되고 은폐되어야 한다는 어떤 '무의식적 당위' 자체가 역설적으로 이러한 독점적 체제의 근본적 기제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최근 우리는 국가폭력, 곧 이러한 '국유화'된 폭력의 형태가 과연 '정당한' 것인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하는 상황에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자주 노출되고 있다(촛불집회가 그랬고, 용산참사가 그랬으며, 미네르바의 구속이 그러했고, 또한 이길준 의경의 재판이 그러했다). 정당성에 대한 결정은 무엇보다 사후적으로(nachträglich) 온다. 하지만 이러한 사후성 자체를 거세하는 것, 사후적인 것을 오직 사전적인 것으로 치환하고 규정짓는 행위 속에 바로 독점적 폭력의 '심리적 기제'가 존재한다(그러므로 현실의 치안과 경찰은, 영화의 그것과는 정확히 반대되는 의미와 모습으로, 너무나 빨리, 너무나 신속하게, 그리고 너무나 잔혹하게 출현한다). 법치를 '사전적(事前的)'이다못해 '사전적(辭典的)'으로까지 만드는 것은 이러한 '폭력적' 법치의 절대화이다. 여기서 법은 지극히 '도착적'인 방식으로 스스로를 일종의 정언적 체계로 만든다. 사전(辭典)과 정전(正典, canon)으로서의 법치는 '총파업'과 '가두시위'라는 정치적인 전복의 요소들을 사전에 '불법화'함으로써 이를 철저히, 곧 '원천적'이고 '기원적'으로 차단한다. 곧 '총파업(grève générale)'이 지닌 '일반성(généralité)'과 '가두시위(street demonstration)'가 지닌 '논증(demonstration)'의 힘은, 바로 이러한 '법치' 안에서 상실되고 박제된다. 그렇다면 이렇게 '분에 넘치게' 정언명법으로 화한 법치라는 개념이 누구를 위해 봉사하고 있는가에 대한 대답은 지극히 자명해지지 않는가. 법치라고 하는 이 지극히 '근대적인' 도착성이 바로 그 법치와 치안의 폭력에 의해 희생된 이들의 장례라고 하는 '전근대적' 관습법의 실행을 가로막고 있는, 아직 끝나지 않은 용산참사의 이 '폭력적' 풍경 앞에서, 우리는 저 '근대적' 법치 체제의 가장 '야만적'인 성격을 목격한다. "카눈의 규정에 따르면, 두 남자가 총구를 들이대고 서로 상대방을 쏘았는데 한 명만 죽고 다른 한 명은 부상만 입었을 경우, 부상을 당한 측이 차액을 지불하지요. 일종의 피의 잉여금이라고나 할까요? 제가 처음에 지적했듯이, 반(半)신화적인 장치 아래에서 경제적인 측면을 찾아보아야 할 때가 왕왕 있습니다. 선생은 아마도 나를 추잡하다고 비난하실 테지요. 그러나 오늘날 피는 다른 모든 것들처럼 상품으로 변질됐습니다."(이스마일 카다레, 『부서진 사월』, 229쪽) 그렇다면 "피의 잉여금"을 지불하기는커녕—지극히 '역설적으로' 말하자면—피가 '정치적' 상품으로 '변질'되는 것조차 막고 있는 우리의 정부는, 그 스스로가 그렇게 목청 높여 외치는 '경제주의'에 얼마나 충실한가? 불에 타고 옥상에서 떨어져 죽은 시신들의 피는 누가 '보상'하고 누가 '회수'해주는가? 고로, 우리의 법치와 경찰은 저 '카눈'의 폭력에 비할 때 얼마나 더 '근대적'이며 얼마나 더 '선진화'되어 있는 것인가?
▷ 토마스 홉스 著, 『리바이어던』의 원서 표지.
그러나 무엇보다 법은 정언적 명령이 아니고 정언적 명령이 될 수도 없다(그러나 그것은 그렇게 되었고 또 그렇게 되고 있다!). 당연하게도, 그것은 조건적 명령의 체계, 상대적인 차이들의 구성물이다(하지만 그것은 또한 무조건적 당위의 체계, 절대적인 법치의 구성요소가 되었고 또 그렇게 되고 있다!). 사회적 관계 안에서 '합의'가 필요하게 되는 것이 이 때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반대로, 이를 넘어 '관계' 자체가 전제하는 것, '합의' 이전에 그 존재조건으로서 '불화'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은 근본적으로 바로 이러한 법의 성격 때문이다. 하지만 법이 '정언적' 명령이 된다면, 정언명법의 자리에 '법' 그 자체가 위치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는 이 시대에 창궐하고 있는 '법치주의의 유령' 안에서 그 효과와 결과의 일단을 발견할 수 있다. 법의 '정언적' 명령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법의 지배'라는 이상적 상태가 아니라 끔찍한 법치의 '창궐'이 된다. 이런 맥락에서 폭력이냐 비폭력이냐 하는 문제는 오히려 이차적인 것인데, 이러한 법치 자체가 일종의 '가장 큰' 폭력이 되기 때문이다. 법치라는 개념이 '목적의 왕국'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전가의 보도'처럼 쓰이고 휘둘릴 때, 그 법치를 보장하는 법은 바로 그 자신의 '목적성'이 지닌 '맹목적' 폭력의 성격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합리주의자 칸트는 다른 의미에서 마찬가지의 강도로 '합리적인' 사드가 될 수 있는 것, 아니 오히려 지젝이 말하는 것처럼, 칸트와 '함께' 사드를 읽어내는 라캉적 행위의 핵심은 칸트의 '진실'이 사드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바로 사드 자신이 지극히 '칸트적'이라는 사실에 있을 것이다.(Slavoj Žižek, Violence, p.195 참조) 법치는 이 도착적 진실에 눈을 감고 눈이 멀어 있다는 바로 그 지점에서 오히려 그 자신의 가장 도착적인 성격을 노출하지만, 또한 그러한 도착성이야말로 법치의 외면적 합목적성을 구성하는 필수적 존재조건이자 가능조건이기도 하다. 우리가 주목하고 천착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법치의 병리적 '합목적성', 그것의 야만성과 도착성이다.
▷ 칸트와 사드, 두 초상화 사이의 '은밀한' 차이.
법치 스스로가 자신의 '객관성'을 강변하면 할수록, 법치에 대한 이러한 광신적이고 절대적인 형식주의야말로 선진화를 부르짖는 이들의 가장 '후진' 조급함과 저급함임은 오히려 더욱 분명해진다. '법대로 하자'고 말하는 법치주의의 가장 극명하고도 단순한 어구 속에는 이미 폭력의 가장 '순수한' 원석이 들어 있는 것. 이 말이 지닌 수행성(遂行性)이 즉각적으로 불러일으키는 것은, 그 자신이 기대하고 예상한 법의 엄정한 객관성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주먹이 더 가깝다'고 말하는 약육강식의 폭력적 '관습법'이라는 이 역설적 효과를, 소위 저 '법치주의자'들은 제대로 이해하고 있을까? 물론이다, 그것도 아주 완벽하게. 그러기에 그들은 법대로 하자는 '당신들의 법치주의'를 마치 주먹 들이대듯 주먹구구식으로 들이대며 '법치'를 공포하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이러한 '법치주의자'들은 법의 폭력성을 바로 법 그 자체의 이름으로 '치환'할 줄 아는 데에 도가 통한 '법적 문학'의 정초자들이자 동시에 실행자들이기도 하다. 여기서 법치는 『부서진 사월』의 저 베시안이 맞닥뜨렸던 패착을 반복한다. 가장 근대적이고 현대적으로 '무장'한 법치의 개념이 가장 직접적이고 물질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바로 그 자체의 기원적 '전근대성'이라는 이 역설적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아니 어떻게 이해시켜야 하는가. 게다가 그것도, 알지 못하는 자들이 아니라 '알면서도 그렇게 행하는' 자들에게, 어떻게, 그리고 무엇을? 그러므로 아마도 이러한 걱정은 기우에 그칠 공산이 크며, 또한 바로 그것이 '기우'로 그칠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더 큰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따라서 다시 한 번 묻자면, 폭력은 '아는' 것인가, '알지 못하는' 것인가?
▷ 신영철 대법관, 우리 '법치주의'의 슈레버.
법치라는 폭력이 지닌 정당성과 객관성은 또한 그것이 지닌 임의성과 우연성을 통해서 가장 '적극적으로', 그리고 가장 '해체적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특정한 결과의 '출력'이 나올 수 있도록 '입력'을 특별하게 조종하는 일이 대법관이 하는/할 수 있는 '주요한' 업무라면, 과연 그 스스로가 주장하는 법치의 '객관성'이란 무엇이며 또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어쩌면 우리는 질문을 바꿔 달리 물어야 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한 대법관의 지극히 '폭력적'인 사건배당은 한 개인의 '도덕적 무능함'을 드러내준다기보다는, 오히려 법치라는 개념이 얼마나 임의적이고 우연적이며 자의적인가를 징후적으로 알려주는 하나의 임상적 증례이기 때문이다(그러므로 우리의 '대법관'은 또한 우리의 '환자', 우리의 '슈레버'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때에 우리는 우리 시대의 '오적(五賊)'이라도 다시 노래 부르고 흥얼거리기라도 해야 한단 말인가. 절대적 법치를 주장하는, 거의 '신화적'이기까지 한 이 '범법론자(汎法論者)'란, 같은 발음으로 다르게 말해서, 혹여 '범법자(犯法者)'의 다른 초상은 아니겠는가. 또는, '법 없이도 살 사람'이란 말은 이미 그 말 자체로 언제나 법의 '기원적' 폭력성을 가리키고 있는 것은 아닌가. 곧, 법을 집행하는 사법부와, 그 스스로 일종의 사법부이자 입법부의 위치에 오르고자 애쓰는 경찰이, '법 없이도 살 사람들'에게—더 정확히는, 그런 사람들에게만—언제나 법을 강요하고 강매까지 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따라서 법치가 가리키고 있는 어떤 '세련된 현대성'은 그 자체로 '원시적'이다. 세부적인 법조항들과 그에 대한 지식의 총체로 표상되고 재현되는 일종의 '지적 권력'은 그 자신의 '신비한 토대'에 관해서만은 기묘하리만치 어이없는 '무지'의 극치를 보여준다. 법의 전문성이라는 이름으로 대변되는 일종의 법적 '전문가주의(expertism)'란, 그 자체로 모든 이의 공적 논의의 대상이 되어야 할 법과 폭력과 정치의 문제를 원천적이고 기원적으로 차단하고 있는 하나의 배타적 카르텔이 아닌가. 그렇게 이해되고 실행되고 있는 법이란, '당신들의' 무기와 방패가 될지언정 '우리들의' 우산과 그늘이 되어주지는 못한다. 그렇다면 그러한 법의 통치가 오히려 가장 '적법하고 합법적으로' 유발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 법 자신이 '불법적'인 것이라 규정하는 하나의 폭력이 아니겠는가. 곧 법 자체가 가장 유력한 '폭력유발자'가 된다는 이 가장 역설적인 의미에서(예를 들자면, 스스로 '폭력유발자'임을 적극적으로 의식하고 인정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지극히 '예비적이고 예방적일' 뿐인 산성(山城) 하나를 하룻밤 사이에 그렇게 뚝딱 쌓을 수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이 경찰국가가 두려워하는 것은 오히려 바로 그 자신의 '야만적' 폭력성이 아니겠는가).
바로 이러한 법 자체의 정당성, '법치'라는 말로 상징되는 법 자체의 어떤 불가침성을 문제 삼는 두 개의 사유가 있다. 이 두 사유는 폭력을 가장 먼 곳으로 밀고나가 사유하고 또한 동시에 가장 가깝게 끌어안아 사유하려고 한다. 폭력을 하나의 '숭고'처럼, 하나의 '축복 같은 저주'처럼 가깝게 껴안는 폭력에 대한 예찬의 사유가 그 하나, 그리고 법 그 자체를 뛰어넘는, 법치라는 관념 자체에 하나의 계기이자 계시로서 충격을 주는 신적 폭력에 대한 머나먼 사유가 그 다른 하나이다. 우리는 아마도 폭력에 관한 이 두 사유의 '평행'하는 '대위법'을—하지만 동시에 서로 '병행'하고 있기도 한 이 두 사유의 '화성법'을—뛰어넘어서는 결코 폭력에 관한 사유의 가장 강력한 진폭을 경험할 수 없을 것이다. 폭력에 대한 '원근법적' 접근의 두 극단으로 나타나면서 동시에 극단적인 친근성 또한 드러내고 있는 이 두 사유는 폭력의 개념이 지닌 양가적 아포리아를 가장 적극적으로 끌어안고 표출하는 형식이기도 한데, 그 한쪽에는 바타이유의 사유가, 다른 한쪽에는 벤야민의 사유가 있다. 반복하자면, 극단은 서로 통하고 있는 것. 종교적이면서 또한 정치적인, 희랍적이면서 또한 유대적인 이 양가성의 폭력에 대한 두 사유를 점검해야 하는 이유이다.
5. 폭력에 매혹되다: 폭력에 의한 소통과 성스러움이 의미하는 것
"오늘날 하나의 철학이 만들어지고 있다고 나는 단언한다. 이 철학은 폭력의 옹호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조르주 소렐(Georges Sorel), 『폭력에 대한 성찰』, 이용재 옮김, 나남출판, 2007, 386쪽) 이러한 소렐의 '예언'과 어쩌면 동일한 지형에서, 그러나 또한 어쩌면 전혀 반대되는 맥락에서, 폭력에 관한 하나의 '절대적' 철학(들)이 등장한다. 우리가 먼저 살펴볼 것은 '근본적' 폭력에 대한 예찬의 형식들이다. 폭력은 어떤 관점에서 '이상화'되고 '추앙'될 수 있는가? 이 물음은, 많은 이들이 관념적으로 혹은 관습적으로 폭력 일반에 대해 갖고 있는 부정적 통념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며 폭력의 개념을 '이상성'의 관점에서 재정립한다는 의미에서, 폭력에 대해 말하고 쓰는 행위가 지닌 가장 중요한 논점들 중 하나이다.
▷ 도서관의 바타이유: 국립도서관의 사서라는 직업과 탕자라는 정체성 사이를 오가기.
바타이유에게서 폭력이란 먼저 '부당한 물리력의 행사'라기보다는 일종의 '원초적 힘'에 가까운 개념으로서 등장하고 있다. 바타이유는 『니체에 대하여』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만약 그들[신과 인간들]이 각자 그 자신들만의 완전성을 지켰다면, 곧 인간들이 죄를 저지르지 않았다면, 한쪽에는 신이, 또 다른 한쪽에는 인간들이, 그렇게 각각 끈질기게 자신들만의 고립을 유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창조주와 피조물들이 함께 피 흘리고 서로를 찢어발기며—수치심의 극단적 한계에 이르기까지—모든 부분을 서로 문제 삼았던 어느 죽음의 밤은 그들 사이의 합치(communion)에 있어서 필수적인 것이었다."(Georges Bataille, Sur Nietzsche. Œuvres complètes, tome VI, Paris: Gallimard, 1973, p.43) 곧, 바타이유가 말하는 '소통(communication)'이란 근본적으로 이러한 폭력과 상처, 또는 죄와 악을 그 필요조건으로 하여 가능해지는 어떤 인간적이고도 종교적인 합치(communion)의 경험이다. 이러한 소통이란 이성 또는 지성의 동질성에 기초한 어떤 안이한 '합의'의 과정과는 거리를 둔다. 바타이유가 말하는 소통과 폭력이란 오히려 그러한 합의의 허구가 폭로되는 지점에서 발생하는 무엇이다. 외부적이고 이질적인 존재로서의 타자가 가능하게 해주는 죽음과 연속성의 경험이 바로 이러한 소통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요소로 등장한다. 이 소통은 동질적 선(善)에 의한 합의가 아니라 이질적 악(惡)에 의한 균열과 불일치에 기초하는 관계방식이라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양가적인 경험이다. 따라서 이러한 폭력의 '소통'은 또한 역설적으로 일종의 '사랑'에 가닿는다. 그런데 이 사랑은 어떤 '더럽힘'을 통해서만 가능하게 되는 소통의 형식이기도 하다. 이어서 바타이유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이렇게 해서 '소통'은 죄에 의해 보장받게 되는 것인데, 그러한 소통이 없다면 우리에게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소통'은 사랑이며, 이 사랑은 바로 그 사랑에 의해 하나로 결합되는 자들을 더럽힌다."(같은 책, 같은 곳)
▷ Georges Bataille, Œuvres complètes, tome VI, Paris: Gallimard, 1973.
왜 '사랑'과 '합치'는 오직 이러한 폭력적 '훼손'을 통해서만 가능해지는가? 『문학과 악』에서 바타이유는 이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인간의 삶의 과정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안이한 견해에 얽매이게 된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분명하게 규정된 하나의 실체처럼 표상한다는 것. 우리에게는 사유의 기초가 되는 이 '나'라고 하는 것보다 더 확고한 것은 없어 보인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내'가 대상들을 포착한다는 것은 곧 그 대상들을 나의 용도에 맞게 변형시키기 위함이라는 것. 나는 내가 아닌 것과는 결코 같아질 수 없으므로. 유한한 존재인 우리들에 대해 외부적인 것은, 때로는 우리를 종속시키는 투과할 수 없는 무한이며, 때로는 우리가 조종하며 우리에게 종속되는 대상이다. 어떤 관점에서는 개인이, 이렇게 조종되는 사물에 동일시되면서, 그 개인을 광대함의 내부에 예속시키는 어떤 유한한 질서에 여전히 종속될 수 있다는 점을 덧붙여두자. 만약 그 개인이 이러한 상황으로부터 출발하여 이 광대함을 (세계와 유한한 사물들 사이에 등호(等號)라는 기호를 집어넣는) 과학법칙들 안에 예속시키고자 시도한다면, 그는 대상을 부수는 질서(대상을 부정하는, 즉 그 대상 안에서 유한하고 종속적인 사물과는 다른 성격의 것을 부정하는 질서) 안에 스스로 예속될 때에만 그 대상과 같아질 수 있다. 그의 능력 범위 안에서 이러한 다양한 한계들을 벗어나는 방법은 단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우리와 비슷한 존재를 파괴하는 것이다. (이러한 파괴 안에서 우리와 비슷한 것의 한계는 부정된다. 우리는 사실 생기 없는 대상을 파괴할 수는 없는데, 왜냐하면 그러한 대상은 변화하긴 하지만 사라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오직 우리와 비슷한 어떤 존재만이 죽음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우리와 비슷한 존재가 입은 폭력은 유한한, 경우에 따라서는 유용한 사물들의 질서를 벗어난다. 폭력은 이러한 질서를 광대함으로 되돌린다."(Georges Bataille, La littérature et le mal. Œuvres complètes, tome IX, Paris: Gallimard, 1979, p.255) 그러므로 여기서는 두 가지의 폭력이, 곧 폭력이라는 개념의 두 가지 다른 용법이, 다시 말해 두 종류의 폭력을 구분하는 하나의 분류법이 있게 된다. 우리는 "투과할 수 없는 무한"인 어떤 대상을 마치 "종속 가능한 대상"인 것처럼 여기면서 그 대상을 주체에 동일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착각과 자기기만의 기저를 이루고 있는 것이 바로 "과학법칙들"이겠지만(왜 이는 또한 과학의 '법칙'들로, 곧 하나의 '법(loi)'으로 불리는가), 흔히 객관적이라고 여겨지는 이러한 법칙들은 대상을 포착하고 주체와 동일화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 이미 오히려 "대상을 부수는" 법칙이 되고 만다(이것이 바로 폭력의 첫 번째 용법이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으로는 결코 주체와 대상은 서로 '같아질' 수 없다. 그렇다면 합치는 어떻게 가능해지는가? 근본적인 문제는 유한성과 논리성의 세계관이 그러한 세계관을 벗어나는 무한성과 광대함의 질서에 속한 사물과 현상들까지 자신의 문법 안으로 포착하려는 '폭력적' 시도에 있다. 바타이유가 말하는 소통과 합치의 폭력이란 이러한 유한성과 유용성의 폭력과 거리를 두는 개념이다(이것이 바타이유가 강조하며 천착하고 있는 폭력의 두 번째 용법이다).
▷ Georges Bataille, Œuvres complètes, tome IX, Paris: Gallimard, 1979.
바타이유는 형이상학적 폭력에 대하여 이질학적(hétérologique) 폭력이라는 또 다른 극(極)을 대립시키고, 또한 이성과 생산과 유용성이 지배하는 '유한한' 폭력의 질서에 대해 비지와 소비와 무용성이 넘치는 '무한한' 폭력의 질서를 대립시킨다. 그러므로 바타이유에게서 주체(동일자)와 대상(타자) 사이의 통일과 합일이란, 다시 말해 그들 사이의 어떤 '소통'이란, 결국 유한성과 유용성의 제한적인 질서를 벗어나 무한성과 무용성의 광대한 '일반적' (무)질서를 경험하는 체험 속에서밖에 이루어질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따라서 바로 이 지점에서 이러한 소통의 체험은 또한 기본적으로는 죽음이라는 폭력적 상황 속에서밖에 성립될 수 없는 것이라는 하나의 역설이 중요하게 부각된다. 그렇다면 죽음에 이르러서야 얻을 수 있을 이러한 '연속성'의 체험을 어떻게 삶 속에서 경험할 수 있을 것인가, 바로 이것이 바타이유적 '폭력'이 가리키는 핵심적 물음이 된다. 또한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인간의 대상 포착 혹은 타자 인식이 지닌 한계를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이 "우리와 비슷한 존재를 파괴(destruction)"하는 행위 안에 있다고 썼던 바타이유의 단언을 다시금 되새기게 된다(이러한 '파괴'란 또한 "대상을 부수는(écrase)" 형이상학적 폭력의 정확히 반대편에 있는 '소통'의 폭력, '이질학적' 폭력을 의미한다). 이러한 '연속성'의 경험은 역설적으로 단지 '순간'으로서만, 곧 타자의 죽음을 목격하고 그 희생제의에 참여하는 바로 그 한 '찰나'로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이러한 죽음과 폭력이 가능하게 하는 연속성의 순간은 에로티즘 안에서 핵심적인 개념의 지위를 차지한다. "희생물은 죽고, 그럼으로써 희생제의의 참가자들은 그 제물의 죽음이 계시해주는 하나의 요소를 공유하게 된다. 이 요소는 종교역사가들을 따라서 성스러움이라고 부를 수 있는 어떤 것이다. 이 성스러움이 바로 엄숙한 제의 안에서 한 불연속적 존재의 죽음에 주의를 집중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계시되는 존재의 연속성이다."(Georges Bataille, L'érotisme, 앞의 책, p.27) 이러한 연속성이 그것을 경험하는 자와 비슷한 한 불연속적인 개체의 죽음을 통해 계시된다는 것은 또 하나의 역설이다. 불연속적 개체로서의 존재는 또 다른 불연속적 존재의 희생과 죽음 속에서 비로소, 그것도 순간적으로, 연속성을 경험한다. 바타이유가 의미하는바 소통은 바로 이러한 폭력과 상처와 죽음을 통해 불연속적 존재들 사이에서 경험되는 연속성의 순간 속에서 비로소 가능해진다. 역설적이게도 인간은 이러한 일종의 '눈멂' 속에서 비로소 신, 타자, 성스러움의 질서와 '소통'이라는 방법에 '눈'을 뜨게 되는 것이다.[여기서 우리는 또한 성스러움과 폭력의 역설적 관계, 혹은 성스러움의 개념 안에서 폭력이 지니는 양가적인 의미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지라르는 프랑스어 'sacré'의 어원인 라틴어 'sacer'가 "때로는 '성스러운(sacré)'의 뜻으로 때로는 '저주받은(maudit)'의 뜻으로" 새길 수 있는 양가적인 단어였음을 설명하고 있다(René Girard, La violence et le sacré, Paris: Grasset, 1972, p.356 이하 참조). 이와 관련해 '속죄양'을 의미하는 '파르마콘(pharmakon)'이라는 개념 역시 이러한 양가적 의미를 갖고 있음을 언급해야 할 텐데, 내면과 동일성의 철학이 기반하고 있는 가능조건이 실제로는 '독'이면서 또한 동시에 '약'이 되는 '파르마콘'의 양가성에 있음을 밝히는 데리다의 논증이 이를 수행하고 있다(Jacques Derrida, La dissémination, Paris: Seuil, 1972, pp.143-144 참조). 또한 데리다는 '파르마콘'이 사람들의 마음을 "불안하게 하면서 동시에 달래주는(angoissant et apaisant)" 것, 혹은 "성스러우면서도 저주받은(sacré et maudit)" 것이라는 이중적 성격을 띠게 됨을 밝히고 있다(같은 책, p.153 참조). 속죄양이 기피의 대상이 됨과 동시에 숭배의 대상이 되는 역설적 이유가 바로 이러한 이중성 또는 양가성에 있는 것. 앞서 우리는 '빈사/술어 기능의 폭력성'과 관련하여 데리다의 이러한 이중적 성격의 논의를 폭력과 형이상학의 관계 안에서 이미 목격한 바 있다. 따라서 여기에는 폭력에 관한 하나의 철학적 '계보', 하나의 사상적 '핏줄'이 있지 않은가? 양가성의 아포리아를 파고들고 물고 늘어지는, 혹은 바로 그 아포리아의 내부에서 오히려 가장 전복적인 사유의 자리를 발견하는, 곧 폭력의 바깥이 아니라 오히려 폭력의 내부에서 그 폭력을 사유하고 비판하는 하나의 계보, 하나의 핏줄이.] 비지의 밤이 선사하는 '맹목적/눈먼(aveugle)' 어둠 속에서 오히려 일종의 '개안'을 겪게 되는 경험이 바로 바타이유가 말하는 폭력적 체험의 핵을 이룬다. 희생제의 안에서 우리와 비슷한 존재의 한계는 부정되며, 바로 그 희생제의 안에서 작용하는 폭력을 통해 불연속적인 존재는 순간적인 연속성을 체험한다. 우리는 언제나 타자와의 연속성을 희구하지만, 엄밀하게 말해서 존재의 완전한 연속성이란 오직 죽음에서밖에 발견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문제는 죽음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그런 '궁극적' 연속성이 아닌, 삶 속에서 체험할 수 있는 연속성, 곧 삶을 서술하는 술어 안에 이미 포함되어 있는 빈사로서의 죽음이다. 바타이유에게서 이러한 연속성은, 속(俗)의 세계에서 성(聖)의 세계로의 이행, 동물적일 뿐인 단순한 생식행위에서 지극히 '인간적인' 성행위인 에로티즘으로의 이행 안에 위치한다. 이러한 이행은 비가역적이며, 전도되거나 역전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폭력은 존재를 송두리째 파괴할 수 있는 무시무시한 것이지만, 반대로 동시에 죽음만이 줄 수 있는 존재의 연속성을 삶 속에서 만나게 해주는 유일한 역설적 수단이기도 하다(그러므로 이러한 폭력은 '존재'의 차원에 있다기보다는 '사건'의 차원에 있는 것이 아닌가). 폭력의 희생제의가 과잉의 행위가 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생산과 삶에의 욕구와는 다른 방향에서 일어나는 '순수한' 소진이자 탕진이기 때문인데, 이러한 '순수 소비'의 영역이 바로 바타이유가 의미하는바 '저주의 몫(part maudite)'이자 '이질성(hétérogénéité)'의 영역이 되고 있다.
▷ Georges Bataille, Œuvres complètes, tome VIII, Paris: Gallimard, 1976.
▷ Carl Schmitt, Politische Theologie, Berlin: Duncker & Humblot, 1922.
폭력은 희생제의 안에서 불연속적인 존재에게 존재의 연속성을 드러내주는 하나의 '필요악'이기도 하다. 여기서 필요악이란 차선과도 같은 차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필수불가결한 악'을 지칭하고 있다. "하지만 '소통'은 존재들에게 상처를 내거나 존재들을 더럽히지 않고서는 일어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은 그 자체로 죄악이다."(Georges Bataille, Sur Nietzsche, 앞의 책, p.43) 따라서 예수의 희생은 악의 또 다른 표현이며, 신과의 소통 또한 그러한 악의 존재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역설적인 성질의 것이다. 바로 이러한 희생에 의해서 인간은 그 자신이 불연속적인 존재로서 지니고 품을 수밖에 없는 어떤 심연을 순간적으로 벗어나서 연속성을 체험할 수 있게 된다. 폭력과 상처라는 '악'에 의해 비로소 우리는 타자와 조우하고 소통할 수 있다는 이 역설은 바타이유가 말하는 '내적 체험'의 핵심을 이룬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단언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예수의 희생만이 독특한 것이 아니라 희생은 일반적으로 말해 죄의 감정을 부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희생은 악의 편에 있는데, 그것은 선에 있어서 필수적인 악이다."(같은 책, p.44) 이러한 선과 악의 양가적이고도 역설적인 관계는, 일반경제의 관점에서는 생산의 영역과 그에 대비되는 소비의 영역 사이에서 반복되고 있으며, 또한 에로티즘의 관점에서는 개체와 사회를 보존하는 금기의 영역과 그러한 금기를 통과하여 완성시키는 위반의 영역 사이에서 공명하고 있다. 이로부터 바타이유적 '주권(souveraineté)'의 주제가 출현한다. "유용성 너머가 주권의 영역이다."(Georges Bataille, La souveraineté. Œuvres complètes, tome VIII, Paris: Gallimard, 1976, p.248) 이러한 주권이란 곧 바타이유가 말하는 '초도덕(hypermorale)'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곧 그것이 단순한 선과 악의 이분법을 넘어서 있다는 의미에서, 혹은 목적과 수단 관계하의 적법성과 정당성을 벗어나 있다는 의미에서, 그것은 일종의 '초-도덕'이며 그러한 상태를 지칭하는 "주권은 권력의 행사가 아니라 반란(révolte)"인 것이다.(Georges Bataille, Méthode de méditation, Œuvres complètes, tome V, Paris: Gallimard, 1973, p.221) "예외상태를 결정할 수 있는 자가 주권적이다"(Carl Schmitt, Politische Theologie, Berlin: Duncker & Humblot, 1922, p.13)라고 말하는 슈미트의 주권과 바타이유의 주권은 바로 이 지점에서 서로 공명하며 또한 충돌한다. 바타이유는 자신의 주권 개념이 국제법상의 국가적 주권 등의 개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오히려 인간의 삶과 관련해 노예적이고 종속적인 상태에 반대되는 측면을 뜻하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는데(Georges Bataille, La souveraineté, 앞의 책, p.247 참조), 그렇다면 여기서 다시 한 번 폭력의 문제는 적법한 국가권력의 '폭력적' 독점을 벗어나고 이탈한다. 우리는 이러한 '주권'의 개념을 품은 채로 벤야민으로 넘어가야 한다. 기능주의적 법치를 벗어나는, 그리고 노예적이고 예속적인 상태를 벗어나는 이러한 '주권적' 사유와 행위는 그 자체로 '통치하는' 폭력과 양가적인 대립 관계에 있지 않은가. 이는 우리가 벤야민이 말하는 법정초적/법보존적 폭력의 어떤 양가성을, 그리고 신화적 폭력과 신적 폭력 사이에서 드러나고 있는 어떤 아포리아를 살펴봐야 하는 이유가 된다.
6. 폭력을 비판하다: 신화적 폭력과 신적 폭력이 의미하는 것
폭력에 대한 벤야민의 비판은 언제나 폭력과 법의 관계 혹은 폭력과 국가와의 관계를 엇걸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비판'이라는 용어를 폭력에 대한 어떤 '단죄'나 '비난'의 의미가 아니라 무엇보다 칸트적 의미에서의 '비판(Kritik)'의 뜻으로 새겨야 한다(그리고 당연하게도 독일어 'Gewalt'가 지닌 양가적 의미에도 또한 주목해야 함은 물론이다). 이러한 의도와 기획 아래에서 벤야민은 폭력의 종류들을 구분하고 그러한 폭력들이 법 혹은 국가와 맺고 있는 어떤 '문제적' 관계를 규명하고자 한다. 따라서 폭력을 사유하고 비판하기 위해 우리는 언제나 이 벤야민의 텍스트로부터 출발하고 다시 그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 주지하다시피 벤야민은 두 가지 맥락에서 각각 두 가지의 폭력을 구분하고 있다. 법정초적 폭력과 법보존적 폭력을, 그리고 더 나아가 신화적 폭력과 신적 폭력을. 우리는 여기서 벤야민의 텍스트를 데리다의 텍스트와 '교차'시키고 '병치'시키면서 폭력과 법의 관계를 살펴봐야 할 텐데, 데리다의 텍스트가 벤야민이 제시하고 있는 동시에 그 스스로가 처해 있기도 한 폭력의 아포리아를 가장 '문제적'인 방식으로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 도서관의 벤야민: 문서고에서 꿈꿨던 하나의 '역사'철학.
이러한 폭력의 아포리아란 무엇인가? 먼저 법정초적 폭력과 법보존적 폭력이 일종의 순환적 '표리관계'를 이루고 있다는 인식이 이 아포리아의 첫 번째 얼굴을 이룬다. 그리고 이보다 더 '순수하고 극단적인' 아포리아, 곧 두 번째 아포리아의 얼굴은, 법정초적/법보존적 폭력으로서의 신화적 폭력에 '순수한' 신적 폭력을 대립시킴으로써 드러나게 되는 더욱 '극단적인' 것이다. 먼저 법정초적 폭력과 법보존적 폭력의 분류법이 그 자체로 양가적임을 지적해야 할 텐데, 여기서 폭력은 법을 정립하는 동시에 보존하기를 반복하는 하나의 기원, 하나의 가능조건이기 때문이다. 폭력은 이미 법의 기원 안에, 하나의 '유전자'처럼, 하나의 '카눈'으로, 각인되어 있다. "법을 위협하는 것은 이미 법에, 법의 법에, 법의 기원에 속해 있다."(Jacques Derrida, Force de loi, Paris: Galilée, 1994, p.87, 국역본은 『법의 힘』, 진태원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4, 83쪽) 이는 곧 법의 역설과 그 안에 깃든 폭력의 양가성을 설명하는 데리다적 해체의 첫 번째 정식이 된다. 법을 정립하고 정초하는 폭력이 바로 그 정립과 정초에 뒤이어 바로 그 법 자체를 보호하고 보존하고자 하는 폭력이 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법/폭력의 내재적 가능조건이자 동시에 가동조건이 되고 있는 것. 데리다는 이어 이렇게 쓰고 있다. "정립은 이미 되풀이 (불)가능성(itéralité)이며, 자기-보존적인 반복에 대한 요구이다. 자신이 정초한다고 주장하는 것을 보존할 수 있기 위해서 보존은 역으로 재(再)-정초적인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정립과 보존 사이에는 어떤 엄격한 대립도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내가 이 둘 사이의 차이[差移]적 오염(contamination différantielle)이라 부르려는 것(벤야민은 이름 붙이지 않았지만)만이, 그것이 유발할 수 있는 모든 역설들과 함께 존재할 뿐이다. […] 해체는 또한 이러한 차이적 오염의/에 대한 사유이며, 이러한 오염의 필연성 안에서 착상된 사유이다."(Jacques Derrida, Force de loi, p.94, 『법의 힘』, 90쪽, 번역은 일부 수정하였다) 벤야민이 이름 붙이지 않았던 어떤 것에 데리다는 "차이적 오염"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그것은 또한 벤야민이 그 스스로는 '이름 붙일 수 없었던' 것에 하나의 이름을 주는 방식이기도 하다. 왜 그런가? 법을 파괴('Destruktion' 혹은 'Zerstörung')하는 폭력에 대한 어떤 '종교적'이고 '정치적'인 요청이 예고되는 지점에서 데리다가 벤야민의 이러한 '이름 붙여지지 않은' 경향에 '해체(déconstruction)'라는 이름을 찾아주고 부여하고 있는 것은 이미 그 자체로 하나의 '해체'가 되는데, 왜냐하면 그러한 명명의 행위가 환기하는 것이 바로 벤야민이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아포리아(법정초적/법보존적 폭력의 양가성)와 암시적/수행적으로 드러내는 아포리아(신화적 폭력과 신적 폭력의 구분이라는 아포리아) 사이의 어떤 양가성, 곧 벤야민은 그로부터 빠져나오고자 했으나 그 스스로 그러지 못했거나 혹은 그러지 않았던 어떤 양가성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양가성은 그 자체로 폭력의 어떤 역설적 '문법 체계'를 이루지만, 그리고 또한 벤야민이 문제 삼고자 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법과 폭력의 양가적 관계였지만, 벤야민의 텍스트 안에서 이러한 폭력의 양가성은 모종의 '종교성'과 '역사성'과 섞이면서 동요하고 요동친다. 유대희랍은 희랍유대인가? 법정초적 폭력과 법보존적 폭력사이의 반복적 순환으로서의 신화적 폭력이 '거부'되어야 하는 것이라면, 신적 폭력은 언제, 어디로부터, 어떤 형태로 '도래'하게 되는가? 여기서 '신적' 폭력이란, 무엇보다 하나의 '불가능성'으로서 먼저 드러나지 않는가?
▷ Walter Benjamin, Gesammelte Schriften, Band II-1, Frankfurt am Main: Suhrkamp, 1991.
▷ Jacques Derrida, Force de loi, Paris: Galilée, 1994.
하지만 우리는 차근차근 짚어가야 한다. 그리고 또한 우리는 이 물음에 앞서, 우선 저 첫 번째 아포리아에 대한 분석 안에서, 근대적 법체계와 폭력의 어떤 '형식적' 정점인 경찰에 대해 먼저 말해야 한다. 데리다는 경찰에 대한 벤야민의 분석을 논하며 이렇게 쓰고 있다. "경찰은 법의 힘이며, 법의 힘을 갖고 있다. 경찰은 치욕스러운 것인데, 왜냐하면 경찰의 권위 안에서 '정초적 폭력과 보존적 폭력의 분리가 중지되기(또는 지양되기(aufgehoben))' 때문이다. 경찰 자체를 의미하는 이러한 지양(Aufhebung) 안에서, 법이 경찰에게 어떤 가능성을 허용할 정도로 불확정적일 때마다, 경찰은 법을 발명하고 스스로를 입법적인 것으로 만들며 법을 강탈한다[권리를 가로챈다]. 비록 경찰이 법을 공포하지는 않지만, 경찰은 근대의 입법자를 자처하지 않으면서도 마치 근대 안의 입법자인 것처럼 행동한다. 경찰이 존재하는 곳에서, 곧 도처에서, 심지어 이곳에서도, 우리는 보존적 폭력과 정초적 폭력이라는 두 가지 폭력을 구분할 수 없으며, 바로 여기에 치욕스럽고 추잡하며 불쾌하기 짝이 없는 애매성이 있다. 근대 경찰의 가능성, 곧 또한 근대 경찰의 불가피한 필연성은, 요컨대, 벤야민이 폭력의 새로운 비판이라 부르는 담론을 구조 짓는 두 가지 폭력 사이의 구별을 소멸시키고, 아마도 해체시킨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담론을 정초하거나 보존하려고 했겠지만, 그는 완전히 순수하게 이를 정초할 수도 보존할 수도 없다. 기껏해야 그는 이를 하나의 유령적 사건(un événement spectral)으로 서명할 수 있을 뿐이다. 텍스트와 서명은 유령들이다."(Jacques Derrida, Force de loi, pp.103-104, 『법의 힘』, 97-98쪽, 번역은 대폭 수정하였다) 폭력의 문제는 하나의 유령적 사건으로, 곧 그것이 '유령적'인 '사건'이라는 바로 그 '두 가지' 이유에서, 하나의 '결정적'인 결정불가능성의 이름으로 등장한다. 왜 그런가? 첫째, 그것이 바로 '유령적'이라는 의미에서. 곧 정초와 보존이라는 일차적 대립을 넘어 법의 그 양가성 자체가 하나의 '불가능성'을 가리키고 있다는 의미에서, 다시 말해, 법의 '존재론(ontologie)'을 구성하는 것은 다름 아닌 폭력의 '유령학(hantologie)'이라는 의미에서(벤야민은 또한 이러한 법정초적 폭력과 법보존적 폭력이 근대국가의 경찰 안에서 "마치 어떤 유령적인 혼합의 형태로(in einer gleichsam gespenstischen Vermischung)"(Walter Benjamin, "Zur Kritik der Gewalt", Gesammelte Schriften, Band II-1, Frankfurt am Main: Suhrkamp, 1991, p.189) 존재하고 있음을 본다). 둘째, 그것이 하나의 '사건'이라는 의미에서. 곧 '존재'의 차원에서 논의되는 법과 폭력에 대한 모든 담론들—법정초적 폭력과 법보존적 폭력, 그리고 이 둘을 아우르는 신화적 폭력에 대한 담론들—의 반대편에, 그것을 넘어, 일종의 '사건'의 차원에서 제기되고 드러나는 신적 폭력을 벤야민이 기대하며 요청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신화적 폭력을 '존재'의 질서에 속한 폭력으로, 신적 폭력을 '사건'의 질서에 속한 폭력으로 각각 파악하는 것은, 말하자면 바디우(Badiou)의 방식을 차용한 폭력의 분류법이 될 텐데, 이에 관해서는 Slavoj Žižek, Violence, p.200 참조.] 그조르그에게도 '카눈'적 폭력의 시작과 기원은 일종의 '유령적 사건'으로 각인되어 있다. "누군가 대문 앞에서 문을 두드렸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어린 그조르그는 그게 누구였어요? 라고 물었다. 그것은 그의 집안에서, 당시에, 그리고 그 이후로도, 수만 번도 더 묻고 또 되묻던 물음이었지만 아무도 그에 대해 대답할 수 없었다. 아무도 그 남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과거지사를 더듬고 있는 지금, 그조르그는 실제로 누군가 그의 집 대문을 두드리기는 한 건가 하고 의아해할 정도였다. 그에게 있어서 그 소리는 신원을 알 수 없는 무명의 길손이 냈다기보다는 차라리 유령이나 운명 자체가 낸 소리였다고 생각하는 편이 훨씬 수월했다."(이스마일 카다레, 『부서진 사월』, 34쪽)
▷ 만년의 데리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폭력의 두 번째 아포리아, 아마도 가장 결정적이며 가장 문제적일 하나의 아포리아 앞에 비로소 당도하게 된다. 따라서 왜 우리가 폭력의 이 두 번째 아포리아를 이야기하기 전에 저 첫 번째 아포리아의 대표적인 표상인 '경찰'의 문제로 우회해서 돌아와야 했는가 하는 이유가 여기에서 비로소 분명해지지 않는가? 그 이유는 벤야민의 텍스트가, 역설적이게도, 그 자신의 아포리아가 지닌 양가성의 문제를, 은연중에, 부지불식간에, 그 스스로 수행적으로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벤야민에게는 두 개의 폭력 사이의 결정적 구별이 가장 결정적인 문제가 된다. 데리다는 이를 이렇게 정리한다. "도식화하자면, 두 개의 폭력, 두 개의 경쟁적인 Gewalt가 존재한다. 한편에는 (정당하고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등의) 결정이, 곧 법과 국가를 넘어서지만 결정 가능한 인식이 없는 정의가 존재한다. 다른 한편에는 구조적으로 결정 불가능한 것으로 남아 있는 영역, 곧 신화적 법과 국가의 영역 안에서 결정 가능한 인식과 확실성이 존재한다. 한편에는 결정 가능한 확실성이 없는 결정이 존재하며, 다른 한편에는 결정이 없는 결정 불가능한 것의 확실성이 존재한다. 어쨌거나 양쪽 모두의 형식에서 각각 결정 불가능한 것이 존재하는 것인데, 이는 곧 인식이나 행위의 폭력적인 조건이다. 그러나 인식과 행위는 언제나 분리되어 있다."(Jacques Derrida, Force de loi, p.131, 『법의 힘』, 121-122쪽, 번역은 일부 수정하였다) 이러한 결정적 구분이 종국에 드러내는 것이 일종의 '결정적 결정불가능성'이라는 이유에서, 또한 데리다는 그 '해체'의 종국에 이르러 '해체의 해체불가능성'을 선언하듯 고백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나의' 해체가, 그 '최종심급'에서, 이 근대성의 한계와 경계 위에서, '해체의 해체불가능성'에 가닿게 되는 것은, 말하자면 최종의, 최고의 역설이다(그러므로 여기에서, 오히려 '해체'란 동시에 저 '역사의 종언'이라는 악명 높은 테제에 대한 가장 '열렬한' 적대와 환대의 주체이자 형식으로서 등장하고 있지 않은가). 데리다는 이러한 하나의 '곤궁'으로부터 어디로 나아가는가? '벤야민의 이름'을 향해, '고유하지 않은' 하나의 '고유명'을 향해, 곧 '주권적인 것'의 양가성을 드러내는 'Walter'라는 이름과 'walten'이라는 동사를 향해. 이는 결국 수수께끼와도 같은 벤야민의 마지막 문장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물음과도 직결된다. "신적 폭력은 범죄자에 대해 군중이 행하는 신의 재판에서와 꼭 마찬가지로 진정한 전쟁에서(im wahren Kriege)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신화적 폭력, 곧 통치하는(schaltende) 폭력이라고 부를 수 있을 법정초적(rechtsetzende) 폭력을 거부해야 한다. 우리는 또한 법보존적(rechtserhaltende) 폭력, 곧 통치하는 폭력에 봉사하는 관리적인(verwaltete) 폭력을 거부해야 한다. 신성한 집행의 징표이자 봉인이지만 결코 그러한 집행의 수단은 아닌 신적 폭력은, 주권적인(waltende) 폭력이라고 불릴 수 있을 것이다."(Walter Benjamin, "Zur Kritik der Gewalt", 앞의 책, p.203)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질문들을 던질 수 있다. "진정한 전쟁"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그 '진정한 전쟁' 안에서 나타날 수 있는 "신적 폭력"이란 무엇인가? 여기서 전쟁이란, 신적 폭력이란, 바타이유나 카이유와가 말했던 저 '일반경제적' 소진과 탕진, 곧 이질성의 어떤 '폭력적' 출현의 형식은 아닌가? 다시 말해서, 이들은 모두, 폭력의 '일반경제'라는 관점과 자장 안에서, 서로 공명하고 진동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신의 이름으로 자행되었고 자행되고 있는 우리 세계의 저 무수한 폭력과 전쟁들 앞에서, 이러한 '순수한' 신적 폭력을, 피 흘리지 않고 법을 무력화하고 무효화하는 이 신성하고 성스러운 폭력을, 그 자체로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또한, 신적 폭력의 어떤 '주권적' 성격을 담보하는 것은 무엇인가? 신화적 폭력과 신적 폭력은 또한, '마음대로 행동하는 것'을 의미하는 독일어 어구 'schalten und walten'의 대비적/보완적 문법 안에서, 지극히 언어적이지만 또한 지극히 수행적으로, 이러한 '주권적인 것'의 동요, 이러한 '폭력'의 진동, 이러한 '아포리아'의 양가성을 표현하고 있지 않은가?
▷ Martin Heidegger, Einfürung in die Metaphysik, Tübingen: Max Niemeyer, 1953.
바로 이러한 양가성 안에서 출현하고 제출되는 일종의 '해체-정치적' 범주인 '메시아적인 것(le messianique)'이란, 유대적인 것이 희랍적인 것 안에서 출현하는 하나의 폭력적 현현을, 희랍적인 것이 유대적인 것 안에서 머금는 하나의 양가적 존재방식을, 그 자체로 가리키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예를 들어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적인 것'이란, 바타이유 식으로 말하자면 '신성이 없는 성스러움'과 '무신론적 신학'의 어떤 형태와, 혹은 블랑쇼나 레비나스 식으로 말하자면 '관계가 없는 관계성'의 어떤 형태와, 서로 '공명'하고 '공모'하듯 호흡하고 있지 않은가(다시 묻자면, 유대희랍은, 정말 희랍유대인가)? 데리다가 "이러한 최초의 명명이 지닌 폭력적인 힘이 곧 주권적이다"라고 말하며 벤야민의 이름을 향해 나아갈 때(Jacques Derrida, Force de loi, p.135, 『법의 힘』, 125쪽, 번역은 수정하였다[원문은 "Souveraine est la puissance violente de cette appellation originaire"인데, 여기서 데리다는 주권을 정의하는 슈미트의 저 유명한 문장을, 곧 "Souverän ist, wer über den Ausnahmezustand entscheidet"라는 문장을 그 구조에서부터 '완벽하게' 패러디하여 차용하고 있다(Carl Schmitt, Politische Theologie, p.13 참조)]), 또한 「후기」에서 '궁극적 해결책(solution finale)'과 벤야민의 신적 폭력 사이에서 상상할 수 있는 어떤 '끔찍한' 친근성에 대해 언급할 때, 그리고 마지막으로 벤야민의 글이 '여전히 너무' 일종의 "메시아주의적-마르크스주의적(messianiste-marxiste)"인 텍스트이며 동시에 "시원-종말론적(archéo-eschatologique)"인 텍스트임을 지적할 때(Jacques Derrida, Force de loi, p.146, 『법의 힘』, 135쪽), 그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아마도 하이데거가 제시했고 동시에 그가 처하게 될 하나의 철학적이고 정치적인 맥락일 것이다. 따라서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Gewalt'의 문제에 대한 하이데거의 다음과 같은 문장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35년 프라이부르크 대학의 여름학기에 행한 강연 기록인 『형이상학 입문』에서 하이데거는 '압도적인 것(das Überwaltigende)'과 '폭력-행위적인 것(das Gewalt-tätige)'을 구분한 후, 곧 '디케(δίκη)로서의 데이논'과 '테크네(τέχνη)로서의 데이논'을 구분한 후, 폭력을 행하는 자와 그의 심연에 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그런데 하이데거는 그 스스로 이 희랍어 '데이논(δεινόν)'을 독일어 'unheimlich'로, 곧 '낯설고 두려운 것'으로 옮기고 있다). "폭력을 행하는 자, 곧 창조하는 자, 말해지지 않은 것 안에서 새로운 행을 시작하는 자, 생각되지 않은 것 안으로 깨고 들어오는 자,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건을 일어나도록 강제하고 아직 드러나지 않은 것을 나타나게 만드는 자, 이러한 폭력을 행하는 자는 언제나 모험/위험(Wagnis) 속에 놓여 있다. 이와 같이 그가 존재를 극복(Bewältigung)하고자 감행하는 모험/위험 속에서, 그는 존재하지 않는 것, 조각나 부서지는 것, 불안정성, 어울리지 않는 것(das Un-gefüge), 무질서(der Unfug) 등을 감내해야만 하는 것이다. 역사적 현존재의 산봉우리가 높게 솟아 있을수록, 심연이 더 크게 아가리를 벌리게 되는데, 이 심연은 다만 출구도 없고 처소도 없는 혼란으로 몰고 갈 뿐인 비역사적인 것(das Ungeschichtliche), 그것으로의 돌연한 추락을 향해 아가리를 벌리고 있다."(Martin Heidegger, Einführung in die Metaphysik, Tübingen: Max Niemeyer, 1953, p.123) 하이데거가 말하는 이러한 '비역사적인 것'의 심연과 벤야민이 말하는 저 신적 폭력이 지닌 어떤 '초월적 역사성' 사이에서, 폭력에 대한 하나의 '궁극적이고도 최종적인' 아포리아가, 말 그대로, 크게 자신의 아가리를 벌리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하이데거가 1935년에 행한 이 강연 이후에 일어날, 그리고 공식적으로는 그 십년 후인 1945년에 끝나게 될, 하이데거와 그의 '조국'이 겪은 어떤 '모험'과 '위험'과 '운명'을 알고 있다(그리고 우리는, 벤야민이 그 시간 사이에서, 그 심연의 커다란 아가리 안에서, 어떻게 살았고 어떻게 죽었는가를, 또한 알고 있다). 데리다가 벤야민의 이름을 경유해 『법의 힘』의 「후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신적 폭력의 저 '끔찍하리만치 치명적인' 매혹과 위험은, 또한 저 하이데거의 '폭력적인' 심연과 모험에 대한 일종의 전도된 거울상으로서 '제안'되며 동시에 '제한'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벤야민의 이름 'Walter'와 '주권적인 폭력(die waltende Gewalt)'을 연결시켰던 저 데리다의 방식을 따라, 만약 내가, 하이데거의 저 문장들에서 드러나고 있는 어떤 '위험(Wagnis)' 속에서, 또는 폭력을 행하는 자가 감행하게 되는 어떤 '모험(Wagnis)' 속에서, 또한 바그너(Wagner)의 이름을 발견한다면 어쩔 것인가? '진정한' 전쟁과 '극단적' 폭력, 그 심연과도 같은 모험/위험의 공간 위를 날아 크게 울려 퍼지는, 저 발퀴레(Walküre)의 기행(騎行/奇行)을 상상하고 또한 환기해본다면 어쩔 것인가?
▷ 바그너의 이름으로: 발퀴레의 기행, 브륀힐데의 최후(<니벨룽겐의 반지> 중에서).
이러한 '특수한' 고유명들 안에서, 혹은 그 고유명들과 일반명사들을 서로 잇고 있는 이러한 '특별한' 연쇄와 연상들 속에서, 폭력의 어떤 '보편적' 구조를 발견해내는 일은, 그래서 그 자체로 이미, 또 하나의 아포리아를 가리키고 있는 것은 아닌가? [덧붙이자면, 우리는 이러한 '궁극적' 아포리아와 관련하여 마지막으로 발리바르의 텍스트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내가 특히 주목하고자 하는 발리바르의 글은 「폭력: 이상성과 잔혹성」인데, 그가 여기서 '폭력'과 '이상성'의 문제에 덧붙여 '잔혹성(cruauté)'이라는 제3항을 개입시키고 있기에 더욱 그렇다. 물론 발리바르는 당연하게도 이미 벤야민과 데리다의 논의를 염두에 두고 있지만, 이러한 '잔혹성'과 '반폭력'에 관한 그의 담론을 가장 직접적으로 추동하며 동시에 동요시키고 있는 '은밀한' 핵은 바로 바타이유의 폭력론이다. 발리바르의 논의 안에서 이 문제가 실로 '문제적'이 되는 이유는, 기본적으로는 그가 폭력의 개념이 처할 수밖에 없는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아포리아를 그 자체로 제기하면서 바로 그로부터 직접적으로 폭력에 대한 사유를 작동시키고 있기 때문이지만, 더욱 특수하게는 그가 '어떤' 폭력에 대한 예찬의 형식들과 '어떤' 폭력에 대한 반대의 형식들 사이에서 가장 '근본적인' 아포리아를 발견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발리바르는 '잔혹성' 개념의 도입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다시금 여기서 우리는, 폭력과 이상성으로 이루어진 Gewalt의 변증법 안에서, 잔혹성으로 변모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가 파악한 심연이든 간과한 심연이든, 그 잔혹성의 심연들 위에 항상 매달려 있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 스스로에게 질문을 제기해야 한다."(Étienne Balibar, "Violence: idéalité et cruauté", La crainte des masses, Paris: Galilée, 1997, p.412, 『대중들의 공포』, 최원, 서관모 옮김, 도서출판 b, 2007, 498쪽, 번역은 일부 수정하였다)] 그조르그는 자신의 이름이 지니고 있는 이 '신비한 토대'를, 어쩌면 어렴풋하게나마 느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인간의 소리가 아닌 것만 같은 그 목소리는 순간 그를 무력감에서 빠져나오게 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이 자신의 몸으로부터, 가슴으로부터, 그리고 살갗으로부터 빠져나와 외부로 잔인하게 퍼져나가는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그런 느낌을 받기는 생전 처음이었다."(이스마일 카다레, 『부서진 사월』, 11쪽)
▷ Étienne Balibar, La crainte des masses, Paris: Galilée, 1997.
7. 다시 폭력을 생각하다: 폭력의 이데올로기 비판을 위하여
이 아포리아 안에서, 오히려 이 모든 아포리아들을 적극적으로 끌어안으며, 다시 폭력을 생각한다. 사실 우리의 상황은 그렇게 낙관적이지 못하다. 김진석의 표현을 적극 차용하자면, 우리는 "폭력과 싸우고 근본주의와도 싸우기"에도 모자라(김진석, 『폭력과 싸우고 근본주의와도 싸우기』, 나남출판, 2003) "우충좌돌"이라는 "기우뚱한 균형"까지 잡아야 할 판이다(김진석, 『기우뚱한 균형』, 개마고원, 2008). 이 지극히 어려운 난투극 안에서, 극도의 현기증을 몰고 오는 이 아슬아슬한 줄타기 안에서, 폭력의 자리는 과연 어디인가? 얼마 전 촛불이 만개했던 시기에도 '어떠한 경우에라도 폭력은 안 된다'는 식의 비폭력이 일종의 암묵적 원칙처럼 작용했다("비폭력! 비폭력!"이라는 '힘찬' 당위의 '무력한' 외침을 우리는 기억한다). 거기서 어떤 이들은 새로운 시대정신의 세련미를 목격했을 수도 있겠고(각목과 화염병이 난무했던 '과거의 시대' 대신, '우리의 시대'는 세련되게 촛불을 들어 비폭력을 외쳤다는 일종의 자긍심 내지는 자화자찬?), 또 어떤 이들은 어쩌면 국가의 폭력에 반대하는 대항폭력이 그러한 국가의 폭력이 지닌 성격을 답습하거나 모방하지 않고 바로 그 규칙 자체를 깨는 통쾌함을 느꼈을 수도 있을 것이다(동일한 순환 구조의 폭력적 문법에 빠지지 않고 오히려 그러한 문법을 비웃고 그로부터 벗어났다는 어떤 새로운 운동의 양상에서 느껴지는 일종의 '희망' 혹은 '낙관'?). 그러나 이러한 비폭력의 원칙에 대한 예찬은, 아쉽게도, 안타깝게도, 여전히, 근본적으로는 국가의 폭력과 동일한 순환 구조 속에 놓여 있다(혹은 최소한, 여전히 그러한 순환 구조 안으로 포섭될 수 있는 위험이 다분하다). '순수하던' 촛불이 '불법폭력시위'라는 '정치적' 형태로 '오염'되었다고 훈계했던 정부의 협박 섞인 우려 속에도 역시나 비폭력에 대한 거의 광신적인 믿음이 똑같이 존재하는 것이다. 비폭력이라는 '순수한' 의도는 폭력적인 이들의 손과 입에 의해 쉽게 더럽혀진다는 어떤 손쉬운 믿음과 순진한 신념. 그러나 이러한 '불순한' 조작을 타파한다고 해서 비폭력의 요구 자체가 순수해지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문제는 보다 구조적인 것이다.
▷ 폭력은 정말 우리 모두를 '멍들게' 하는 것일까? '비폭력'은 폭력에 대한 '최선'의 대항마인가?
국가와 공권력의 문장 속에는, 최소한 두 개의 이데올로기적 문법이 숨겨져 있다. 국가의 공권력이라는 공인된 폭력을 제외한 모든 시민불복종의 '폭력'을 '불법'과 동등한 것으로 치환하는 어떤 동일화의 문법('불법시위'와 '폭력시위'의 서로 다른 이미지들을 한곳에 중첩시키고 병치시키는 이데올로기적 조합), 그리고 '정치적'이라는 말을 '불순한' 또는 '순수하지 못한' 등의 수식어와 동등한 것으로 치환하는 어떤 세속화의 문법('정치적으로 변질되었다'는 일견 중립적인 진단이 내포하고 있는 극도의 '정치적' 편향성)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또한 국가와 정부는 이러한 기만적 치환의 대가(大家)이자 대가(代價)가 되고 있는 것. 이러한 문법들은 그 자체로 일종의 증상들을 이루는데, 첫째, '불법'과 '폭력'을 동일시함으로써 국가는 바로 그 시민들의 원리인 비폭력을 일종의 'predicament' 혹은 아포리아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며, 둘째, '정치'를 '불순한 것'으로 세속화함으로써 정부는 시민들의 '정치적' 행위를 더도 덜도 말고 딱 자신들이 이해하는 만큼의 '정치'로, 곧 그만큼 불순하고 더럽고 역겨운 수준의 정치로 '하향평준화'시키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법적 치환의 기술은 그 자체로 이중의 구속을 이루는데, 시민들의 '폭력'을 '불법'과 동일시함으로써 한쪽(시민)의 폭력을 세속화함과 동시에 다른 쪽(국가)의 폭력을 신성화하는 효과를 낳게 되고, 또한 '정치'를 '불순한 것'으로 세속화함으로써 '정치'를 모종의 '불능성'과 동일시하면서 정치 그 자체를 기원적이고 원천적으로 차단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이러한 기술보다 더 교묘하게 '폭력적'인 것이 또 있을까). 이는 또한 저항이 폭력에 대한 비폭력 혹은 대항폭력이라는 틀을 벗어나 반폭력이라고 하는 문제를 설정해야 하는 이유가 되고 있다. 대항폭력 자체가 폭력에 대해 어떤 '적대적 공범'의 성격을 띠게 됨은 말할 것도 없지만, 비폭력 또한 궁극적으로 폭력을 종식시키지 못한다는 사실 역시 자명하다. 비폭력에 대한 강박에 가까운 강조, 불복종하는 시민과 그에 대해 공권력의 행사를 남발하는 정부 모두 공히 지니고 있는 비폭력에 대한 이러한 광신에 가까운 믿음은, '폭력이 없는 평화의 시대' 같은 모종의 '이상성'을 예견하지도 못하고 개방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그러므로 '정치'를 그 스스로 '불순한 것'으로 퇴색시키는 정치가들의 세속화와 정확히 반대되는 지점에서, 비폭력에 대한 맹목적 순수화 역시나 정치 자체를 '불순한' 것으로 만들며 차단하고 있다). 그러므로 불순한 것을 창출하고 배제시키는 이 '창조적' 행위의 순수함은 그 자체로 가장 큰 폭력의 순환을 이루며 또한 예고하고 있지 않은가. 폭력의 문제가 구조적인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 김진석, 『 폭력과 싸우고 근본주의와도 싸우기 』, 나남출판, 2003.
▷ 김진석, 『 기우뚱한 균형 』, 개마고원, 2008.
이 순진하고 순수한 비폭력의 '유토피아적' 상상 앞에서 우리는 어떤 '폭력'을 사유하고 행사하며 또한 제한/제안해야 할 것인가. 비폭력의 '미학'보다는 반폭력의 '정치'를, 비폭력의 '윤리'보다는 반폭력의 '불가능성'을 우리가 더 깊이 사유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 물음 안에 존재하고 있다. '정의사회구현'이 지상명제였던 그리 멀지 않은 과거의 시간, 그러나 그 자체로서 '정의롭지' 못했던 저 지난날의 '폭력의 시대'를 우리가 현재 다시 떠올리게 되는 이유는, 바로 지금 여기라는 상황 속에서 우리가 느낄 수밖에 없는 어떤 '기시감(旣視感)' 때문일 것이다. 왜 이 시대는 저 시대에 대한 일종의 기시감으로, 곧 하나의 반복되는 거울로서 경험되고 작용하게 되는 것인가(이 '수치스러운' 질문을 제기할 수 있는 것은 우리지만, 그 대답에 대한 일차적이고 법적인 '수치'의 책임 또한 과연 우리의 것일까). '법치'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폭력에 대해 비폭력이라는 무응답 혹은 동문서답이 아니라 반폭력이라는 일종의 응답성/책임성(respons-abilité)으로 답하는 일, 아마도 이 가장 시급하고 결정적인 과제 안에 우리가 폭력에 관해 쓰고 또 쓰게 되는 이유와 동기가 있을 것이다. 환대의 주제를 '국민화합'이라는 역겨운 언어로 포장된 무차별적 화해나 용서로 이해하지 않는 것, 윤리라는 문제의식을 도덕적 편견들을 확인(사살)하는 차원이 아니라 하나의 정치를 잉태하고 탄생시키는 과정으로 인식하는 것이 중요해지는 이유이다. 바로 이러한 폭력의 문제 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혁명과 해방이 다시금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하는 물음, 곧 혁명과 해방은 어떤 '가능한' 형태로 다시금 도래할 수 있는가 하는 '불가능성'의 물음이 된다. 일견 지극히 '진부하게' 들리는 이 물음을 어떤 '진부하지 않은' 방식으로 되물을 것인가. 바로 이 질문 안에서 우리는 저 '환대'의 주제를 다시 상기해야 한다.
▷ Jacques Derrida, Anne Dufourmantelle, De l'hospitalité, Paris: Calmann-Lévy, 1997.
▷ Jacques Derrida, Donner la mort, Paris: Galilée, 1999.
이 환대는 또한 어떤 '용서'에 연결된다. 용서의 주제에 익숙할 것으로 생각되는 기독교도들의 어떤 착각을 피하려는 '선의'의 마음에서, 다소 과장된 문법을 차용해 실로 '기독교적으로' 말해보자. 법치와 기독교의 수호자들이여, 이 용서를 오해하지 말지어다, 그것도 두 가지 의미에서. 이 용서란 그대들이 베풀 수도 없고 베풀 수 있는 자격도 없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그리고 그 용서란 그대들이 말하는 '국민적 화합'이나 '사회적 통합' 또는 '경제 발전의 동력'을 위하는 그 거국적 충정의 형태로써는 결코 이루어지지도 않고 이루어질 수도 없다는 의미에서. 데리다의 말처럼,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어떻게 용서하는가? 그러나 그것 외에 다른 무엇을 용서할 것인가?"(Jacques Derrida, De l'hospitalité, Paris: Calmann-Lévy, 1997, p.41) 내가 이 글을 통해 지극히 수행적(遂行的)으로 수행하고자 하는 어떤 '폭력'의 형태 혹은 '환대법'의 형태란 아마도 바로 이러한 '용서'일 것이다. 그러므로 말하건대, 나는 용서할 수 없는 당신들을 '용서'한다(그렇다면 이러한 용서란 실로 '웃음'과 '눈물'이 함께 하는 한 편의 '휴먼 드라마'일 것인가). 이 용서가 '반폭력'의 한 형태일 수 있을까, 아니, 일종의 '신적 폭력'이 될 수 있을까? 피를 보지 않고, 법을 파괴하는,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이 자체가 '신화적' 폭력의 또 다른 형태라고 느껴질 수도 있을, 그런 반폭력과 신적 폭력. 언어의 차원에서, 마치 삶이 죽음이라는 술어와 빈사를 갖듯이, 유대적인 것과 희랍적인 것이 모종의 '폭력적' 계사로 연결되고 있듯이, 그렇게 행할 수 있는 하나의 '폭력'을 나는 내 나름으로, 어쩌면 지극히 '부정신학적'으로 정식화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내가 저들에게 '돌려주고자' 하는 말은 바로 이것이다. "Christ is anti-christ." [그러나 우리는 또한 여기서 이러한 '동어반복'의 가장 '극명한' 사례인 데리다의 한 문장, 곧 "Tout autre est tout autre"를 함께 떠올려야 할 것이다. Jacques Derrida, Donner la mort, Paris: Galilée, 1999, pp.114-157 참조.] 그러나, '저들'이라니? '기독교도-보수주의자-경제제일주의자'로서의 일종의 '군산복합체'? 또는, 하나의 '경찰국가'? 그러므로 또 다시 당연하게도, 하나의 '법치국가'? 그러므로 다시 묻자면, 윤리인가 불가능성인가? 이는 곧, 타자에 대한 다원주의적이고 상대주의적이며 호혜주의적인 상투적 윤리성과 정치적 올바름으로 '전락'하지 않을 어떤 책임과 응답의 윤리성에 대해, 그리고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고 '양립할 수 없는 것을 양립'하게 하는 폭력의 양가적 아포리아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어떤 사유의 불가능성에 대해, 하나의 물음을 던지고 있지 않은가? '환대'라는 말로 대변되는 어떤 '윤리'는, 그것이 단순한 '차이의 철학' 내지는 순진한 '다자간의 관용(tolérance)'을 상찬할 뿐인 지극히 속류정치학적으로 이해된 '우정의 정치학'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에서, 다시 말해 그것이 폭력의 문제가 제기하는 이론적/실천적 아포리아를 온전히 껴안고 그 역설의 내부에 거주하면서 동시에 그 역설의 바깥을 사유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언제나 모종의 '불가능성'을 수반하고 동반하는 윤리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또한, 일종의 '병리학적' 노파심으로 첨언하자면, 이러한 해체적 윤리 혹은 불가능성의 정치는, 그 자체로 근대적/탈근대적인 하나의 '당위'가 되고 있지는 않은가? 따라서 윤리인가 불가능성인가 하는 어떤 '선택'의 외양을 갖는 물음은, 특정한 아포리아를 개방하고 열어젖힘과 동시에, 반대로, 또한 특정한 아포리아를 은폐하며 닫고 있기도 하지 않은가?] 칸트의 말을 비틀어 차용하자면, 윤리 없는 불가능성은 공허하지만, 반대로 불가능성 없는 윤리는 맹목적이다. 근본적인, 따라서 어쩌면 비관적이기까지 할 하나의 문제는, 폭력의 이 최종적 아포리아를 해결하거나 해소할 가능성이 과연 있는가 하는 물음일 뿐만 아니라, 그러한 아포리아를 제거하는 것이 과연 하나의 '유토피아'를 열어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물음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는 '기원적'이고 '원천적'으로, 일종의 '불가능'에 대한 물음이다. 따라서 우리가 우회해왔던 이 모든 폭력에 대한 아포리아들은, 사실 '실천'에 대한 아포리아를 넘어서, 동시에 이러한 아포리아들에 '대한' 모종의 실천을 종용하고 요청하고 있지 않은가? 이 아포리아에 대한 사유 속에서, 하나의 대답이 아니라 우선 하나의 질문으로 주어지는 것이, 또한 저 '반폭력'의 의제 설정이 되고 있지 않은가?
▷ Louis Althusser, Solitude de Machiavel, Paris: PUF, 1998.
▷ 도미야마 이치로, 『 폭력의 예감 』(손지연, 김우자, 송석원 옮김), 그린비, 2009.
내가 여기서 다시금 불러내고자 하는 '유령'은 어쩌면 또 하나의 '소렐'일지도 모른다. 단, 그 이름이 지닌 이론적/역사적/실천적 한계를 넘어서, 단지 그 고유명의 유령으로서만. ['유령'과 '유령학'에 관한 기존의 모든 철학과 수사학이 '무의식적으로' 간과하고 있는 것은 사실, 역설적이게도, 어쩌면 그 '유령' 자체의 가장 근본적인 내용과 가장 기본적인 용법일지 모른다. 『공산당선언』 안에서 부르주아지에게 '공산주의'가 하나의 '유령'이었고 '유령'일 수 있었던 이유와 '상동적'인 의미에서, 우리의 맥락과 시간 안에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폭력'이 더도 덜도 아닌 그러한 '유령'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규정되며 비난받고 불법화되어 사라지고 있지 않은가. 마치 하나의 유령처럼. '민주주의'가 그 기원에서 하나의 '욕설'이었듯이, 여기서는 '폭력'이 그러한 '욕설'과 '비하'와 '저주'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바로 그런 의미에서 '폭력'은 하나의 '유령'이 되는 것이다. 법치국가와 경찰국가 안에서 하나의 유령이 배회하고 있으며, 그 유령은 이제 '폭력'이라는 일반명사를 일종의 고유명처럼 갖게 되는 것. 그러므로 또한 폭력에 대한 어떤 사유와 실천은, 바로 이러한 폭력의 '본래적' 유령성을 직시하는 데서부터 시작될 수 있지 않을까?] 여기서 문제는 다시금 하나의 이름, 폭력의 이름이 된다. 하여, 소렐의 똑같은 말을, 전혀 다른 시간에, 전혀 다른 맥락과 형태로, 전혀 다른 힘으로, 다시금 반복해보자. "오늘날 하나의 철학이 만들어지고 있다고 나는 단언한다. 이 철학은 폭력의 옹호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렇다면 폭력에 대한 말을 하나 더 더하기 위해 펼쳐졌던 이 모든 이론적이고 문학적인 '여담'들이 가리키고 있는 것은, 새로운 폭력의 이론이라기보다는 폭력의 새로운 실천이지 않겠는가. [여기서 나는 알튀세르가 「레닌과 철학」에서 제시했던 저 유명한 정식을, 곧 "마르크스주의는 실천에 대한 어떤 (새로운) 철학이 아니라, 철학에 대한 어떤 (새로운) 실천이다"라는 문장을, 두 번 비튼다. 먼저 '철학'이라는 단어를 '폭력'이라는 단어로, 그리고 '실천'이라는 공통어를 '이론'과 '실천'이라는 대조군과 실험군으로. Louis Althusser, "Lénine et la philosophie", Solitude de Machiavel, Paris: PUF, 1998, p.136 참조.] 『부서진 사월』의 마지막 장들은 그조르그를 쫓아다녔던 복수의 총알이 결국에 그의 목숨을 회수하고야마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자신의 가족을 위한 복수로 그조르그를 살해하는 사람에게는 이름이 없다(그는 아마도 그조르그가 형의 복수를 위해 살해했던 자의 가족 중 누군가일 테지만, 그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하지만 그는 그조르그를 죽임으로써 하나의 고유명을, 곧 자신의 이름이자 동시에 자신의 이름이 아니었던 하나의 고유한 이름을 부여받을 것이다. 그의 이름 없던 삶은 죽음의 표식이 그에게 붙여진 그 즉시 하나의 '이름'을 얻게 될 것이다. 그 이름을 다시, '그조르그'라고 하자. 마치 "나를 이스마엘이라고 불러다오(Call me Ismael)"라고 말하며 시작하는 저 '유명한', 하지만 동시에 '이름 없는' 어느 선원의 이야기처럼. 그리고 다시 이스마일 카다레의 소설이 처음 시작되었던 곳으로 되돌아가보자. 그렇게 되돌아간 그 첫 장들에서, '카눈'의 경제는, 그 복수의 폭력적 순환은, 말하자면, '영원회귀'하고 있지 않은가. 임박한 죽음의 시간을 앞둔 채로, 그조르그는 생각한다. "그는 다시 한 번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아 있었다. 베사가 끝나면, 그는 카눈의 시간을 벗어날 것이었다. 시간을 벗어난다, 라고 그는 되뇌었다. 사람이 그처럼 자신의 시간으로부터 휴가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그로서는 낯설게 느껴졌다. 아직은 조금 남았군, 하늘을 향해 고개를 쳐들고서 그는 다시 되뇌었다. 구름층의 으깨어진 장미들은 이제 약간 어두워져 있었다. 그조르그는 쓴 미소를 지었다. 그는 마치 이렇게 말하려는 듯했다. 어쩔 것인가, 하는 수 없지!"(이스마일 카다레, 『부서진 사월』, 245쪽) 아마도 우리는 폭력에 관한 이러한 일종의 체념, 혹은 폭력에 대한 이러한 일종의 허무주의로부터 출발해야 할 것인가? 하지만 또한 우리는 저 '카눈'의 시간을 벗어날 것이었다. 시간을 벗어난다, 라고 나는 되뇌어본다. '탈구된 시간'이라는 이 근대적/전근대적/탈근대적 중첩의 시간성 속에서, 우리는 이 시간성을, 이 폭력성을, 우리 쪽에서 먼저, 탈구시킬 수 있을까? 하지만 또 다시, 어떤 '폭력'으로? 폭력의 '불가능성'을 가리키는 이 물음은, 폭력의 계속되는 '카눈'적 순환 속에서, 폭력과 비폭력과 대항폭력의 투쟁들 사이에서, 그리고 이어 어렵게나마 어렴풋이 더듬게 된 어떤 반폭력의 길 위에서, 우리의 대답을 요구한다. 이 요구에 응답할 수 있을 것인가. 이 또 하나의 물음은 아마도 폭력의 문제가 촉발시키는 환대와 응답성과 책임성에 대한 직접적인 질문이 될 것이다. 살의와 호의를 동시에 포함하는, 적대와 환대가 동시에 공존하는, 하나의 양가적이고 역설적인 예감이 인다. 폭력의 예감, 그것은 도미야마 이치로가 말하는 것처럼 기본적으로 '겁쟁이들'의 지각이자 예감이겠지만(도미야마 이치로(富山一郞), 『폭력의 예감』, 손지연, 김우자, 송석원 옮김, 그린비, 2009 참조), 또한, 바로 그렇기에,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이러한 절체절명의 예감 속에서, 도래할(à venir) 폭력의 미래(avenir)는, 법의 안과 밖으로, 번뜩인다, 명멸한다.
ㅡ 襤魂, 合掌하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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