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연극』지 2월호에 기고한 글을 옮겨놓는다. 올해 이 연재를 청탁 받으면서 개인적으로 마음속에 품었던 글쓰기의 계획은 크게 두 가지 측면으로 나눠 생각해볼 수 있는데, 곧 주제의 측면과 문체의 측면이 바로 그것이다.

첫째, 주제에 관하여: 물론 연극과 음악의 관계에 관해서는 다양한 방식의 글쓰기가 가능할 것이다. 예를 들어 이와 관련해 우리가 흔히 쉽게 예상하고 착수할 수 있는 글쓰기의 형태는 특정 공연의 관극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그 연극 안에서 구체적으로 음악이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가, 또 그 음악이 어떻게 연극과 관계 맺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논하는 연극/음악 비평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정말 쓰고 싶었던 글은ㅡ그리고 이 지면을 통해 내가 계속해서 쓰려고 하는 글은ㅡ'연극음악의 존재론'에 관한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연극음악이 '연극음악'으로서 어떻게 존재할 수 있고 또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가의 문제, 곧 연극음악이 지닌 존재의 '가능성'과 연극음악이 품어야 할 실천의 '당위성'이라는 문제를 내 나름으로 정리하고 공유하는 글쓰기를 수행하고 싶은/싶었던 것. 또한 이는 개인적으로 연극음악에 관한 어떤 정치적이고 철학적인 '테제'들을 정립해보고 싶은 내 미학적 욕망이기도 하다. 특정한 하나의 연극 공연 안에 위치한 음악의 '정당성'과 '예술성'을 논하는 '미학-내적'이고 '예술-내적'인 문제 틀에서 벗어나 연극음악의 자리를 철학과 이론의 자리에 이질적으로ㅡ그리고 적극적으로ㅡ접합시켜 성찰해봄으로써, 음악이 연극 안에서 가질 수 있는 '정체성'의 문제를 보다 근본적으로ㅡ그리고 극단적으로ㅡ다뤄보고 싶은 것이다. 이러한 글쓰기의 '욕망'과 '전략'이 성공을 거둘지는 아직 미지수이지만, 이러한 문제들은 내게 개인적으로 [불가능성의] '음악미학'을 [가능하게] 정립하기 위한 중요한 선결요소의 위치를 점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과정에서도 현실적이고 전략적인 문제들은 남아 있다. 연극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겸비한 사려 깊은 비평을 기대하기도 어려운 연극비평계의 현상황에서ㅡ이는 지극히 내 '개인적인 견해'일 뿐이므로 이견을 제기할 분들은 변명이라도 좋으니 괜히 말 못하고 소화불량에 걸리는 일 없이 재빨리 이견을 제기하시는 게 건강에 더 이로울 것이다ㅡ연극음악에 대한 이러한 '형이상학적' 성찰이 자칫 연극음악을 독립적으로 다루고자 하는 비평의 자리마저도 부족하게 만들지 않을까 하는 기우 아닌 기우가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반복하자면, 내게 가장 시급하게 선결되어야 할 문제로 생각되는 것은 연극음악의 존재론적 테제들에 다름 아니다. 이것은 고색창연하고 시대착오적인 '형이상학적' 욕망일지도 모르겠지만, 내게는 바로 이것이ㅡ니체적인 의미에서ㅡ가장 '반시대적인(unzeitgemäß) 고찰'이기에 역설적으로 더욱 시급한 문제로 다가오는 것이다.

둘째, 문체에 관하여: 나는 언제나 글에서 '반말'을 선호해 왔다. 물론 이러한 어미에 대한 '자연스럽고 자동적인' 선택을 '선호'라는 의지적 언어로 규정할 수는 없을 텐데, 왜냐하면 언제나 '성문화(成文化)'되고 또 그렇게 '객관화'될 수밖에 없는 글의 특성에서 볼 때 이러한 반말의 어미들이 정말로 '반말'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이러한 '반말'은 읽기의 행위가 동반하는 심리적 과정 속에서 일종의 '중립적'인 지위를 부여받는다(지극히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논문, 공문, 기사 등의 공식적인 글의 형태가 '반말'의 어미를 채택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하지만 나는 이 연재의 언어로 '존댓말'을 선택한다. 이는 독자에게 더욱 '친근하게' 다가고자 하는 전략적 선택이 결코 아니다(존댓말로 말한다고 해서 내가 갑자기 '친절한 람혼씨'가 되는 것도 아니니까). 연극음악의 존재론을 논하고 건네려고 하는 나의 '생경한' 언어는, 그것이 객관적이고 중립적인ㅡ또는 그렇게 상정된ㅡ'반말'의 어미를 만났을 때 단순히 철학적이고 이론적인 글로서 '당연시'될 위험이 있다(나는 내 글이 그러한 방식으로 '소멸'될 위험을 경계하고 있는 것). 말하자면 이론이 이론으로 소화되고 말 뿐인, 아니 숫제 소화되지도 않고 꿀꺽 삼켜지고 말 뿐인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저 '자연스러운', 혹은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것으로 상정된 '반말'의 이론적 언어가 지니고 있는 어떤 위험성이다. 이러한 위험은 또한 '반말'의 이론적 언어가 자신의 외양적 객관성 뒤에 은폐해 놓고 있는 어떤 비가시적 '정치성'이기도 한 것. 말하자면 나는 나의 주제를 보다 효과적인 방식으로ㅡ따라서 가장 '생경하고 이질적인' 방식으로ㅡ드러낼 수 있는 문체를 원하는 것이고, 이 경우 바로 그러한 의도된 '불친절함'에 가장 잘 어울리는 어미는 역설적으로 '친절한' 존댓말일 수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문체와 어미에 대한 나의 전략은 전복적이다. 연극음악에 대한 현상적 비평이 아니라 그 존재론적 테제들을 정립하고자 하는 자리에서라면, 오히려 존댓말의 '친근하고 친절한' 어미가 반말이 지닌 저 '자연스러운' 이론성의 냄새를 위반하는 '낯선 불친절함'으로 기능할 수 있는 것이다. 편안하고 친절한 '편지'의 언어를 통해 가장 불편하고 불친절한 말들을 건네보는 것, 내가 원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지금으로부터 대략 10년 전쯤에 재즈 보컬리스트 정말로 누님과 함께 프로젝트 밴드를 만들어서 몇 번의 공연을 가진 적이 있었다. 그것은 말 그대로 순수한 '프로젝트'였지만, 내게는 여전히 소중한 경험이자 추억으로 남아 있다. 그때 그 밴드의 이름이 '대머리 여가수'였다는 여담 한 자락(그 작명의 이유는 나름대로 추측해보시라!), 지나가는 길에 남겨본다, 추억해본다. 역시나 오늘도 '글을 옮겨놓는다'는 저 시작의 언어가 무색할 정도로, 그렇게 시작이 길어졌다. 나의 지병은 계속되는 것이며 여기에 쓸 용한 약도 없는 것. 다만 조용히 반복할 뿐이다, 글을 옮겨놓을 뿐이라고: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Eugène Ionesco, La cantatrice chauve[version illustrée], Paris: Gallimard, 1964.
*) 니콜라 바타이유(Nicolas Bataille)가 연출한 장면들의 이미지와 함께 재구성된 텍스트.

 

<대머리 여가수>에 대머리 여가수는 나오지 않는다
— 조화와 불화 사이, ‘번역’으로서의 연극음악

최정우 (작곡가/번역가)

요즘은 그리 자주 상연되는 작품이 아닙니다만, 이오네스코(Ionesco)의 <대머리 여가수(La cantatrice chauve)>가 따로 첨언이 필요 없는 너무도 유명한 연극이라는 사실에는 아무도 토를 달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저 '부조리극의 대명사'라는 교과서적 명명에 따라붙는 이런저런 평가들에 관해서는, 그리고 돌출하는 무의미들에 '심오한' 의미를 부여하는 이런저런 담론들에 관해서는, 우리 잠시 동안만이라도 잊어보도록 하죠. 개인적인 생각은 이렇습니다, <대머리 여가수>가 유명해지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이 연극에 대머리 여가수가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 베케트(Beckett)의 <고도를 기다리며(En attendant Godot)>에 대해서도 나는 똑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만약 <고도를 기다리며>가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 앞에 고도를 등장시키면서 그 대미를 장식했더라면, 오히려 그간의 저 모든 '기다림'의 형식들은 그 자체로 참을 수 없이 지루한 것이 되어버렸을지도 모릅니다. 블랑쇼(Blanchot)와 데리다(Derrida)가 말했던 것처럼, 미래(avenir)의 도래(à venir)란 우리에게 그런 식으로 다가오는 것이며 또한 그렇게 와야 하는 것일 테니까요.

우리가 이오네스코 자신의 작가수첩(『노트와 반노트』)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바처럼, 그는 <대머리 여가수> 창작의 기원을 영어를 배우기 위해 공부했던 경험 안에서 찾고 있습니다(이 통통하고 귀여운 얼굴의 극작가가 외국어인 영어를 배우기 위해 끙끙대는 모습을 한 번 상상해봅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 연극이 '외국어의 번역'이라는 상황으로부터 탄생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일반적인 외국어 교재의 구성을 한 번 떠올려보죠. 사용되는 단어들과 간단한 문법에 대한 설명이 있은 후 다양한 문형들에 대한 예시와 그를 이용한 '등장인물'들의 대화가 이어집니다. '1주일은 7일로 되어 있다'거나 '마루는 밑에 있고 천장은 위에 있다'는 등의 말은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그러한 내용들이 외국어라는 형식의 옷을 입고 이오네스코에게 다가왔을 때 그 '사실'은 그가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새삼스러운 '진실'의 발견이 되었던 것입니다. 뒤집어 말해, 책상은 책상인 것처럼 말이죠. 그렇기에 이 경험은 익숙하기에 낯설고 낯설기에 익숙한 것입니다. <대머리 여가수>가 출발점으로 삼고 있는 '부조리한' 진리의 자리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대부분의 부조리극이 그러하듯, <대머리 여가수> 또한 바로 그러한 '진리'를 무대 위로 올려 그 작동 방식을 시험하고자 하는 것이죠. 그러므로 사람들이 흔히 말하듯 이 작품은 영국 부르주아 사회에 대한 풍자라는 '사회적' 의미를 갖기 이전에 먼저 번역과 소통이라는 상황 자체를 '낯설게 하기'라는 '언어적' 의미를 갖게 됩니다. 그리스 비극 이래로 현대의 연극이 다시 한 번 시(詩)의 세계와 적극적으로 관계 맺게 된 것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입니다. 

 

▷ 위의 책을 펴들고 있는 이오네스코의 저 귀여운 얼굴: 환상적입니다(fantastique)!

연극음악 또한 일종의 '번역'이자 '소통'입니다. 하지만 연극의 구체적 장면들과 정황들을 따라가며 그것을 '보조'하고 '설명'하는 역할에만 머무른다면 연극음악은 연극에 대한 일종의 '번안'이 되기 쉽습니다. 슬픈 장면에 따르는 슬픈 음악, 기쁜 장면에 따르는 기쁜 음악을 떠올려보면, 이는 어쩌면 자연스런 과정이나 당연한 사실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번역'은 이러한 번안과는 전혀 다릅니다. 흔히 우리는 번안이 일차적이고 축자적인 번역을 더욱 '현재화'하거나 '토착화'하는 이차적인 번역의 과정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대머리 여가수>에 나오는 'Bobby Watson'은 마치 교과서에서처럼 무엇보다 먼저 '철수'로 번안될 수 있을 겁니다(철수의 아버지 이름도 철수고 그 철수의 아버지 이름 또한 철수라는 식으로 말이죠). 하지만 'Bobby Watson'의 번역은 '바비 왓슨'이 될 뿐입니다(이것이 '음차'가 아니라 '번역'이라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외국어의 소통에서 무엇보다 일차적인 과정은 번안이며 번역은 오히려 이차적인 과정이라는 역설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러한 번역 과정에 느끼게 되는 어떤 '낯선 익숙함'이—이를 프로이트 식으로 말한다면 '운하임리히(unheimlich)'한 것이 될 텐데요—바로 'Bobby Watson'을 '바비 왓슨'이라고 옮기는 일견 당연하면서도 새삼스러운 진리로부터 발생한다는 사실이죠. 연극음악도 마찬가지입니다. 흔히 슬픈 장면을 슬프게, 기쁜 장면을 기쁘게 해석하고 설명하는 일차적 '번안'의 음악이 일견 조화로운 것처럼 보이지만, 연극음악의 '진리'는 연극의 언어와 몸짓을 '번역'해내는 이차적인 과정에 있는 것이며, 이러한 번역의 과정은 말하자면 '조화로운 불화'라는 역설을 동반하게 됩니다. 연극음악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조화의 문법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외국어를 번역하는 '생경함의 진리'로부터 출발해야 하는 것이죠. 이러한 '부조리한 조화', '불협화음의 화음'이라는 존재방식은 넓은 의미에서의 '부조리'가 무대음악에 가르쳐준 진리이기도 합니다. 연극음악이 연극에 대한 일차적이며 감정적인 설명자와 번안자의 위치에만 있다면 그 음악은 죽어 있는 음악일 겁니다. 연극음악은 연극적 상황에 대해 총체성과 징후성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하는데, 사소한 변화를 따라가지 않고 연극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결정짓는다는 점에서 음악은 '총체적'이어야 하며 또한 감정들의 자잘한 선을 따르지 않는 이면적 '불화의 조화'를 추구해야 한다는 점에서 음악은 또한 '징후적'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유행'이 한참 지난 부조리극에 관한 잡설을 통해, 그리고 번역에 대한 '반추'를 통해, 다시금 음악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대머리 여가수>에는 결코 대머리 여가수가 나오지 않습니다. 단지 소방대장이 대뜸 이렇게 물어볼 뿐이죠: "그런데, 그 대머리 여가수는요(A propos et la cantatrice chauve)?" 그리고 스미스 부인 또한 이렇게 대답할 뿐입니다: "그 여자 머리 손질하는 건 항상 같은 식이죠(Elle se coiffe toujours de la même façon)." 머리카락 없는 연극의 머리를 손질하는 작업, 음악은 이러한 역설적인 작업 안에서 '어울리지 않는' 노래를 부르며 스스로 여가수가 됩니다. 단, 그 불화의 노래를 '조화롭게' 부르면서 말이죠. 이 조화와 불화 사이의 갈등 안에 연극음악의 자리가 있습니다. 갈등의 요소들과 동요의 지점들을 떨리는 그대로 드러내는 이 '사이'에 존재하는 음악은 단순한 '번안'이 아니라 일종의 '번역'을 꿈꾸는 것, 그런 의미에서 연극음악은 언제나 '불가능한 가능성'의 작업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대머리 여가수나 고도는 아직 오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이미 언제나' 도착해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는 또한 음악이 연극 안으로 불가능하게 도래하는 어떤 가능성의 형식이기도 합니다.

ㅡ 襤魂, 合掌하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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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09-02-09 0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머리 여가수라는 작명의 이유는 대머리와 여가수가 만든 밴드였기 때문이 아닐까요?

저는 바로 위의 민음사판 [대머리 여가수]를 읽었는데 솔직히 잘 이해가 안되는 작품이었어요. 지금도 무슨 내용이었는지 기억조차 희미합니다. 어쩌면 저는 연극에 대해 전혀 아는게 없기 때문이었을까요?
위에 말씀하셨듯 그 작품 자체가 '번역과 소통이라는 상황자체를 낯설게하기' 때문이었을까요? 대머리 여가수는 제게 낯섦, 그 자체였거든요.

람혼 2009-02-09 11:02   좋아요 0 | URL
어려운 퀴즈 같은 문제는 아니었지만, 그렇게 적나라하게(?) 말씀하시니 머쓱해지는 건 어쩔 수 없군요.ㅎㅎㅎ ^^; 뭐, 어쨌든... <대머리 여가수>는 '이해'를 위한 텍스트는 아닌 것 같습니다. 덧붙여 말씀드리자면, 부조리극에 대하여 흔히들 쉽게 취하곤 하는 저 '이해'의 제스처들이 제게는 오히려 가장 '부조리한' 현상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얼마 전 산울림 소극장에서 '다시 한 번' 상연되었던 한명구, 박상종 주연의 <고도를 기다리며>의 무대 뒷편에서 만난 한 배우의 말이 생각납니다. 당신은 객석을 가득 메운 관객들의 저 '신나는' 웃음이 오히려 불편하게 느껴진다고 말씀하시더군요, 피식-거리는 헛웃음이 그립다고. 모든 것을 이해하는 양 터져 나오는 직선적인 웃음이 그 배우에게는 매우 불편하다는 것이죠. 우리가 흔히 '부조리극'이라고 부르는 연극적 현재 안에서는, 부조리성이라는 개념에 대한 '이해'에서 나오는 일차적인 웃음 또는 찰나적인 희극성이 빚어내는 상황에 대한 폭소가 아니라, 부조리한 감각에 대한 공감과 어긋남의 경험에서 나오는 냉소와 조소, 자기 자신을 향한 헛웃음이 오히려 그 배우에게 더욱 더 소중한 'reaction'이 아닐까 하는 말씀으로 새겨들었습니다. 낯선 체험 그 자체를 불편하면서도 신선한 경험으로 기억하고 계신 다락방님의 '감각'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지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다락방 2009-02-09 17:03   좋아요 0 | URL
하하하하. 그러게요. 제가 너무 거리낌없이(!)적나라하게(!!) 표현했군요. 다르게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곰곰 생각해봐도 답이 안나와요, 람혼님. 저란 인간을 어쩌면 좋죠? 하하하하

람혼 2009-02-10 02:25   좋아요 0 | URL
뭐 적나라한 것이 꼭 나쁜 것은 아니죠.^^ 지를 때는 또 질러주는 것이 신나는 세상을 여는 열쇠...

파란여우 2009-02-09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람혼님의 글을 읽다보면 殺靑님이 생각납니다. 뜬금없죠? 람혼님 글은 합장하고 읽게끔 만드시거든요. 가끔 구다보면서(람혼님도 가끔 글을 쓰시므로)고맙다는 인사는 이제서야 드립니다.

람혼 2009-02-09 12:23   좋아요 0 | URL
개인적인 연상작용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 것이니까요.^^ 저도 殺靑님 생각이 많이 나네요, 잘 지내고 계실지... 문득 문득 궁금하기도 하고 걱정되기도 하고 뵙고 싶기도 합니다. 합장의 마음을 받아주셔서 오히려 제가 파란여우님께 더 깊이 감사드리는 마음입니다.

2009-02-09 20: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10 02: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yoonta 2009-02-10 1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극음악'에 대한 고찰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음악연극'에 대한 고찰이네요. 연극의 부분집합으로서의 음악이 아닌 음악이 되어버리는 연극.

존댓말에 대한 님의 사유는 라캉의 수행적인 '말'(존댓말)을 '읽는'것에 내포된 무의식을 이야기한 <세미나>에서의 언급이 생각나게 하는군요. "읽을 수 없는" 에크리보다는 "읽을 수 있는" <세미나>에 이중적 의미를 부여한 것처럼 말이지요.

잘봤습니다.^^

람혼 2009-02-12 12:56   좋아요 0 | URL
yoonta님, 오랜만이네요, 반갑습니다! 말씀해주신 대로 어쩌면 저의 이런 작업은 연극[안]에서의 'pas-tout'에 천착하는 일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로서는 글쓰기 자체가 지닌 어떤 '수행성'에 민감하다 못해 신경이 곤두서 있는 편인데요, 읽는 행위 자체를 어떻게 향유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제게 실로 '고통의 쾌락'입니다.

yoonta 2009-02-12 2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글고보니 댓글다는게 오랜만이었군요. 글보러는 자주 왔어서 못느끼고 있었답니다.^^ 기회가 되면 람혼님 공연도 한번 보러가고 싶은데 어찌 영 시간이 안나네요.

람혼 2009-02-12 23:52   좋아요 0 | URL
바쁘고 알차게 지내신다니 저도 힘을 얻습니다. 자주 찾아주셔서 또한 감사하고요.^^ 공연은, 언제 한 번 꼭 오세요~!

[해이] 2009-02-13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뉴레프트리뷰에 번역하신 글이 있는거 보고 살짝 놀랐어요ㅋㅋㅋ잘 읽어보겠습니다. 앞으로의 활약 기대할게요^^

람혼 2009-02-15 04:26   좋아요 0 | URL
저로서는 왜 살짝 놀라셨는지가 더 궁금하군요. <뉴레프트리뷰>, 제가 번역에 참여했기 때문에 드리는 말씀이 아니라, 정말 더 많은 분들이 읽으셨으면 하는 잡지입니다. 일각에서는 <뉴레프트리뷰> 한국판의 '가능성'과 '영향력'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갖고 계신 분들도 있는 것 같은데, 득이냐 실이냐는 그 자체로서 미리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로부터 우리가 무엇을 취할 수 있고 또 어떤 사유와 실천의 동력을 끌어낼 수 있는가 하는 물음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 당연한 사실을 많은 분들이 간과하고 계신 것 같아요.

[해이] 2009-02-15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는 표지에 적혀있는 역자 이름에는 람혼님 이름이 안적혀 있었는데 안쪽에 보니 있어서반가워서요ㅎㅎ 발마스님 서재에 있는 독자들 반응을 보셨나보네요. 람혼님 말씀 잘 새겨 듣도록 할게요:D

람혼 2009-02-15 18:46   좋아요 0 | URL
반갑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개인적으로 실로 오랜만에 읽게 된 드브레의 글이라 저 또한 번역 과정이 즐거웠던 작업이었습니다. 이른바 '반응'에 대해서는 balmas님 서재 글도 물론 보았고 그 전에 다른 분들의 다른 공간에서도 몇몇 글을 접한 바 있어 개인적인 생각을 몇 글자 남겨보았습니다. 시작한다고 말씀하신 세미나는 잘 진행하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저 또한 응원을 보내드립니다.

2009-02-16 00: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16 03: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16 11: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16 23: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재灰 2009-02-17 2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의 글은 "(작곡가/번역가)"라는 표식들을 내걸고 있는 람혼님의 '자기정체성 탐구'에 바쳐지고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섬세한 의미들이 눈에 들어와 박혀 여러모로 생각하게 하는 글입니다. 글을 읽는 동안, 람혼님의 그 탐구가 이름(名)과 실재(實)의 괴리를 눈치채지 못하거나 사회적으로 부여받은 이름을 자기 이름으로 오인하고 있는 이들(예컨대, 여러 분야의 평론가들..)에게 어떤 '각성'의 계기가 될만하다는 생각이 퍼뜩 스쳐 지나기도 했습니다. 이후에 연재될 람혼님의 글들이 이름과 실재의 기계적인 일치를 거절하면서 그것들 사이의 간극을 '메워가는/넓혀가는' 탐구가 되었으면 하고 응원합니다.

람혼 2009-02-18 03:24   좋아요 0 | URL
內外님의 소중한 댓글에 합장하는 마음으로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지음(知音)'이라는 말은 어쩌면 이러한 현상과 반응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새삼 內外님의 말씀을 통해 다시금 되새기게 됩니다. 말씀하신 대로 이는 제게 개인적으로 스스로를 돌아보는 '자성적(自省的)'인 글쓰기임과 동시에 특정한 목표물을 향한 '공격적'인 글쓰기가 되고 있습니다. 특히나 후자의 부분만을 좀 더 자세히 말씀드리자면, 이 연재물이 품에 칼을 품듯 품은 주요한 의도 중의 하나는, 이른바 '연극평론가'라는 직함을 가진 이들이 품고 있는 어떤 '매너리즘'에 대한 공격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부정성의 작업을 어떻게 모종의 긍정성과 '평행하게'ㅡ스피노자적 의미에서ㅡ이끌어갈 수 있을까 하는 문제가, 아마도 이 글쓰기의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관건이 될 듯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비판적 작업은 또한 다시금 자성의 작업에 가닿게 되는 것이겠죠...
글쓰기의 작지만 큰 보람이란 것이 이런 데에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內外님 글에서 제가 큰 힘을 얻는 것을 보면요. 그래서 덕분에 더욱 치열하게 글을 써야겠다는 다짐을 스스로에게 두게 됩니다. 그 응원의 마음에 깊이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