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연극』지 2월호에 기고한 글을 옮겨놓는다. 올해 이 연재를 청탁 받으면서 개인적으로 마음속에 품었던 글쓰기의 계획은 크게 두 가지 측면으로 나눠 생각해볼 수 있는데, 곧 주제의 측면과 문체의 측면이 바로 그것이다.
첫째, 주제에 관하여: 물론 연극과 음악의 관계에 관해서는 다양한 방식의 글쓰기가 가능할 것이다. 예를 들어 이와 관련해 우리가 흔히 쉽게 예상하고 착수할 수 있는 글쓰기의 형태는 특정 공연의 관극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그 연극 안에서 구체적으로 음악이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가, 또 그 음악이 어떻게 연극과 관계 맺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논하는 연극/음악 비평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정말 쓰고 싶었던 글은ㅡ그리고 이 지면을 통해 내가 계속해서 쓰려고 하는 글은ㅡ'연극음악의 존재론'에 관한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연극음악이 '연극음악'으로서 어떻게 존재할 수 있고 또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가의 문제, 곧 연극음악이 지닌 존재의 '가능성'과 연극음악이 품어야 할 실천의 '당위성'이라는 문제를 내 나름으로 정리하고 공유하는 글쓰기를 수행하고 싶은/싶었던 것. 또한 이는 개인적으로 연극음악에 관한 어떤 정치적이고 철학적인 '테제'들을 정립해보고 싶은 내 미학적 욕망이기도 하다. 특정한 하나의 연극 공연 안에 위치한 음악의 '정당성'과 '예술성'을 논하는 '미학-내적'이고 '예술-내적'인 문제 틀에서 벗어나 연극음악의 자리를 철학과 이론의 자리에 이질적으로ㅡ그리고 적극적으로ㅡ접합시켜 성찰해봄으로써, 음악이 연극 안에서 가질 수 있는 '정체성'의 문제를 보다 근본적으로ㅡ그리고 극단적으로ㅡ다뤄보고 싶은 것이다. 이러한 글쓰기의 '욕망'과 '전략'이 성공을 거둘지는 아직 미지수이지만, 이러한 문제들은 내게 개인적으로 [불가능성의] '음악미학'을 [가능하게] 정립하기 위한 중요한 선결요소의 위치를 점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과정에서도 현실적이고 전략적인 문제들은 남아 있다. 연극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겸비한 사려 깊은 비평을 기대하기도 어려운 연극비평계의 현상황에서ㅡ이는 지극히 내 '개인적인 견해'일 뿐이므로 이견을 제기할 분들은 변명이라도 좋으니 괜히 말 못하고 소화불량에 걸리는 일 없이 재빨리 이견을 제기하시는 게 건강에 더 이로울 것이다ㅡ연극음악에 대한 이러한 '형이상학적' 성찰이 자칫 연극음악을 독립적으로 다루고자 하는 비평의 자리마저도 부족하게 만들지 않을까 하는 기우 아닌 기우가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반복하자면, 내게 가장 시급하게 선결되어야 할 문제로 생각되는 것은 연극음악의 존재론적 테제들에 다름 아니다. 이것은 고색창연하고 시대착오적인 '형이상학적' 욕망일지도 모르겠지만, 내게는 바로 이것이ㅡ니체적인 의미에서ㅡ가장 '반시대적인(unzeitgemäß) 고찰'이기에 역설적으로 더욱 시급한 문제로 다가오는 것이다.
둘째, 문체에 관하여: 나는 언제나 글에서 '반말'을 선호해 왔다. 물론 이러한 어미에 대한 '자연스럽고 자동적인' 선택을 '선호'라는 의지적 언어로 규정할 수는 없을 텐데, 왜냐하면 언제나 '성문화(成文化)'되고 또 그렇게 '객관화'될 수밖에 없는 글의 특성에서 볼 때 이러한 반말의 어미들이 정말로 '반말'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이러한 '반말'은 읽기의 행위가 동반하는 심리적 과정 속에서 일종의 '중립적'인 지위를 부여받는다(지극히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논문, 공문, 기사 등의 공식적인 글의 형태가 '반말'의 어미를 채택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하지만 나는 이 연재의 언어로 '존댓말'을 선택한다. 이는 독자에게 더욱 '친근하게' 다가고자 하는 전략적 선택이 결코 아니다(존댓말로 말한다고 해서 내가 갑자기 '친절한 람혼씨'가 되는 것도 아니니까). 연극음악의 존재론을 논하고 건네려고 하는 나의 '생경한' 언어는, 그것이 객관적이고 중립적인ㅡ또는 그렇게 상정된ㅡ'반말'의 어미를 만났을 때 단순히 철학적이고 이론적인 글로서 '당연시'될 위험이 있다(나는 내 글이 그러한 방식으로 '소멸'될 위험을 경계하고 있는 것). 말하자면 이론이 이론으로 소화되고 말 뿐인, 아니 숫제 소화되지도 않고 꿀꺽 삼켜지고 말 뿐인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저 '자연스러운', 혹은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것으로 상정된 '반말'의 이론적 언어가 지니고 있는 어떤 위험성이다. 이러한 위험은 또한 '반말'의 이론적 언어가 자신의 외양적 객관성 뒤에 은폐해 놓고 있는 어떤 비가시적 '정치성'이기도 한 것. 말하자면 나는 나의 주제를 보다 효과적인 방식으로ㅡ따라서 가장 '생경하고 이질적인' 방식으로ㅡ드러낼 수 있는 문체를 원하는 것이고, 이 경우 바로 그러한 의도된 '불친절함'에 가장 잘 어울리는 어미는 역설적으로 '친절한' 존댓말일 수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문체와 어미에 대한 나의 전략은 전복적이다. 연극음악에 대한 현상적 비평이 아니라 그 존재론적 테제들을 정립하고자 하는 자리에서라면, 오히려 존댓말의 '친근하고 친절한' 어미가 반말이 지닌 저 '자연스러운' 이론성의 냄새를 위반하는 '낯선 불친절함'으로 기능할 수 있는 것이다. 편안하고 친절한 '편지'의 언어를 통해 가장 불편하고 불친절한 말들을 건네보는 것, 내가 원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지금으로부터 대략 10년 전쯤에 재즈 보컬리스트 정말로 누님과 함께 프로젝트 밴드를 만들어서 몇 번의 공연을 가진 적이 있었다. 그것은 말 그대로 순수한 '프로젝트'였지만, 내게는 여전히 소중한 경험이자 추억으로 남아 있다. 그때 그 밴드의 이름이 '대머리 여가수'였다는 여담 한 자락(그 작명의 이유는 나름대로 추측해보시라!), 지나가는 길에 남겨본다, 추억해본다. 역시나 오늘도 '글을 옮겨놓는다'는 저 시작의 언어가 무색할 정도로, 그렇게 시작이 길어졌다. 나의 지병은 계속되는 것이며 여기에 쓸 용한 약도 없는 것. 다만 조용히 반복할 뿐이다, 글을 옮겨놓을 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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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ugène Ionesco, La cantatrice chauve[version illustrée], Paris: Gallimard, 1964.
*) 니콜라 바타이유(Nicolas Bataille)가 연출한 장면들의 이미지와 함께 재구성된 텍스트.
<대머리 여가수>에 대머리 여가수는 나오지 않는다
— 조화와 불화 사이, ‘번역’으로서의 연극음악
최정우 (작곡가/번역가)
요즘은 그리 자주 상연되는 작품이 아닙니다만, 이오네스코(Ionesco)의 <대머리 여가수(La cantatrice chauve)>가 따로 첨언이 필요 없는 너무도 유명한 연극이라는 사실에는 아무도 토를 달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저 '부조리극의 대명사'라는 교과서적 명명에 따라붙는 이런저런 평가들에 관해서는, 그리고 돌출하는 무의미들에 '심오한' 의미를 부여하는 이런저런 담론들에 관해서는, 우리 잠시 동안만이라도 잊어보도록 하죠. 개인적인 생각은 이렇습니다, <대머리 여가수>가 유명해지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이 연극에 대머리 여가수가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 베케트(Beckett)의 <고도를 기다리며(En attendant Godot)>에 대해서도 나는 똑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만약 <고도를 기다리며>가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 앞에 고도를 등장시키면서 그 대미를 장식했더라면, 오히려 그간의 저 모든 '기다림'의 형식들은 그 자체로 참을 수 없이 지루한 것이 되어버렸을지도 모릅니다. 블랑쇼(Blanchot)와 데리다(Derrida)가 말했던 것처럼, 미래(avenir)의 도래(à venir)란 우리에게 그런 식으로 다가오는 것이며 또한 그렇게 와야 하는 것일 테니까요.
우리가 이오네스코 자신의 작가수첩(『노트와 반노트』)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바처럼, 그는 <대머리 여가수> 창작의 기원을 영어를 배우기 위해 공부했던 경험 안에서 찾고 있습니다(이 통통하고 귀여운 얼굴의 극작가가 외국어인 영어를 배우기 위해 끙끙대는 모습을 한 번 상상해봅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 연극이 '외국어의 번역'이라는 상황으로부터 탄생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일반적인 외국어 교재의 구성을 한 번 떠올려보죠. 사용되는 단어들과 간단한 문법에 대한 설명이 있은 후 다양한 문형들에 대한 예시와 그를 이용한 '등장인물'들의 대화가 이어집니다. '1주일은 7일로 되어 있다'거나 '마루는 밑에 있고 천장은 위에 있다'는 등의 말은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그러한 내용들이 외국어라는 형식의 옷을 입고 이오네스코에게 다가왔을 때 그 '사실'은 그가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새삼스러운 '진실'의 발견이 되었던 것입니다. 뒤집어 말해, 책상은 책상인 것처럼 말이죠. 그렇기에 이 경험은 익숙하기에 낯설고 낯설기에 익숙한 것입니다. <대머리 여가수>가 출발점으로 삼고 있는 '부조리한' 진리의 자리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대부분의 부조리극이 그러하듯, <대머리 여가수> 또한 바로 그러한 '진리'를 무대 위로 올려 그 작동 방식을 시험하고자 하는 것이죠. 그러므로 사람들이 흔히 말하듯 이 작품은 영국 부르주아 사회에 대한 풍자라는 '사회적' 의미를 갖기 이전에 먼저 번역과 소통이라는 상황 자체를 '낯설게 하기'라는 '언어적' 의미를 갖게 됩니다. 그리스 비극 이래로 현대의 연극이 다시 한 번 시(詩)의 세계와 적극적으로 관계 맺게 된 것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입니다.
▷ 위의 책을 펴들고 있는 이오네스코의 저 귀여운 얼굴: 환상적입니다(fantastique)!
연극음악 또한 일종의 '번역'이자 '소통'입니다. 하지만 연극의 구체적 장면들과 정황들을 따라가며 그것을 '보조'하고 '설명'하는 역할에만 머무른다면 연극음악은 연극에 대한 일종의 '번안'이 되기 쉽습니다. 슬픈 장면에 따르는 슬픈 음악, 기쁜 장면에 따르는 기쁜 음악을 떠올려보면, 이는 어쩌면 자연스런 과정이나 당연한 사실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번역'은 이러한 번안과는 전혀 다릅니다. 흔히 우리는 번안이 일차적이고 축자적인 번역을 더욱 '현재화'하거나 '토착화'하는 이차적인 번역의 과정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대머리 여가수>에 나오는 'Bobby Watson'은 마치 교과서에서처럼 무엇보다 먼저 '철수'로 번안될 수 있을 겁니다(철수의 아버지 이름도 철수고 그 철수의 아버지 이름 또한 철수라는 식으로 말이죠). 하지만 'Bobby Watson'의 번역은 '바비 왓슨'이 될 뿐입니다(이것이 '음차'가 아니라 '번역'이라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외국어의 소통에서 무엇보다 일차적인 과정은 번안이며 번역은 오히려 이차적인 과정이라는 역설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러한 번역 과정에 느끼게 되는 어떤 '낯선 익숙함'이—이를 프로이트 식으로 말한다면 '운하임리히(unheimlich)'한 것이 될 텐데요—바로 'Bobby Watson'을 '바비 왓슨'이라고 옮기는 일견 당연하면서도 새삼스러운 진리로부터 발생한다는 사실이죠. 연극음악도 마찬가지입니다. 흔히 슬픈 장면을 슬프게, 기쁜 장면을 기쁘게 해석하고 설명하는 일차적 '번안'의 음악이 일견 조화로운 것처럼 보이지만, 연극음악의 '진리'는 연극의 언어와 몸짓을 '번역'해내는 이차적인 과정에 있는 것이며, 이러한 번역의 과정은 말하자면 '조화로운 불화'라는 역설을 동반하게 됩니다. 연극음악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조화의 문법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외국어를 번역하는 '생경함의 진리'로부터 출발해야 하는 것이죠. 이러한 '부조리한 조화', '불협화음의 화음'이라는 존재방식은 넓은 의미에서의 '부조리'가 무대음악에 가르쳐준 진리이기도 합니다. 연극음악이 연극에 대한 일차적이며 감정적인 설명자와 번안자의 위치에만 있다면 그 음악은 죽어 있는 음악일 겁니다. 연극음악은 연극적 상황에 대해 총체성과 징후성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하는데, 사소한 변화를 따라가지 않고 연극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결정짓는다는 점에서 음악은 '총체적'이어야 하며 또한 감정들의 자잘한 선을 따르지 않는 이면적 '불화의 조화'를 추구해야 한다는 점에서 음악은 또한 '징후적'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유행'이 한참 지난 부조리극에 관한 잡설을 통해, 그리고 번역에 대한 '반추'를 통해, 다시금 음악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대머리 여가수>에는 결코 대머리 여가수가 나오지 않습니다. 단지 소방대장이 대뜸 이렇게 물어볼 뿐이죠: "그런데, 그 대머리 여가수는요(A propos et la cantatrice chauve)?" 그리고 스미스 부인 또한 이렇게 대답할 뿐입니다: "그 여자 머리 손질하는 건 항상 같은 식이죠(Elle se coiffe toujours de la même façon)." 머리카락 없는 연극의 머리를 손질하는 작업, 음악은 이러한 역설적인 작업 안에서 '어울리지 않는' 노래를 부르며 스스로 여가수가 됩니다. 단, 그 불화의 노래를 '조화롭게' 부르면서 말이죠. 이 조화와 불화 사이의 갈등 안에 연극음악의 자리가 있습니다. 갈등의 요소들과 동요의 지점들을 떨리는 그대로 드러내는 이 '사이'에 존재하는 음악은 단순한 '번안'이 아니라 일종의 '번역'을 꿈꾸는 것, 그런 의미에서 연극음악은 언제나 '불가능한 가능성'의 작업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대머리 여가수나 고도는 아직 오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이미 언제나' 도착해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는 또한 음악이 연극 안으로 불가능하게 도래하는 어떤 가능성의 형식이기도 합니다.
ㅡ 襤魂, 合掌하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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