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울 때 옷 입는 것만큼 자연스러운 행동이 바로 의존이다. 건장한 성인이라고 의존에서 자유로울까? 그의 삶이 의존과 무관해 보인다면, 이는 살면서 의존할 기회와 자원이 누구보다 그에게 넉넉했음을 뜻한다. 그가 독립적이라 느낀다면, 자신의 의존 경험에 무심했던 까닭일 확률이 높다. 여성의 비가시적인 돌봄노동을 전제로 한 ‘자립‘ 개념에 대해 페미니스트들이 오랫동안 문제를 제기해온 이유다. - P64

노동 의지에 따라 다른 형태의 빈민 통치가 작동했다는 점은, 빈곤이 단순히 부에 대응하는 경제적 개념이 아니라 품행의 심사장이었음을 뜻한다. - P69

민주주의 혁명 이후 급부상한 시민권이 ‘독립‘과 동의어로 통용되면서, 한때 사회적 관계를 지칭하면서 중립적으로 쓰이던 의존은 도덕적·심리적 기록register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독립적인‘ 생계부양자 남성과 ‘의존적인‘ 피부양자 여성의 우열관계가 산업화 시기 이후 명확해졌다는 것이다. 의존성에 덧씌워진 여성성의 부정적 함의는 고용 불안정이 심해진 후기 산업화 시기에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남성의 경제적 독립을 상징하는 ‘가족임금의 이상이 붕괴되면서, 여성의 경제적 종속은 "명백히 적절한 성인 의존 상태"로 고려되지 않고 논쟁에 부쳐졌다. 특히 "복지 의존성" "약물 의존성"에서 보듯 기존 규범으로부터 일탈했거나 노동시장에 편입되지 못한 집단에 여성화된 의존성이 낙인처럼 씌워졌다. - P71

노동자들한테는 억울한 일이었다. 한때 너무나 당연했던 단위체제에 대한 의존이 ‘의존적인 품행으로 낙인의 대상이 되었는데, 정작 ‘자립‘을 증명할 만한 일자리는 별로 없었다. 세계의 공장 중국은 글로벌 정치경제 위기의 예외로 곧잘 언급되지만, 문화대혁명 등 일련의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교육 기회를 얻지 못한 저학력·저숙련 중년층은 새로운 중국이 필요로 하는 인적 자본으로서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다.
하지만 더 주목할 것은, 물질적 · 담론적으로 고립된 노동자들조차 이러한 비판에 휘둘렸다는 점이다. "중국이 성장하려면 우리 세대가 빨리 사라져야 한다"라는 자조적 목소리가 슬럼화된 공장지대에서 수시로 새어 나왔다. 국가의 부강에 반비례하는 개인적 추락의 경험은 국가의 운명과 개인의 운명을 단단히 묶는 게 곧 삶의 윤리였던 노동자들의 생활 세계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이들은 과거의 마오주의와 현재의 시장경제 양자에 모두 감정 이입했다. ‘자부심과 명예의 원천으로서 인민‘에 대한 노스탤지어가 ‘단순하고 무식한 인민‘에 대한 자기회의와 병존했다. ‘우리 노동자‘들이 사회주의국가를 건설하는 데 기여했다는 외침이 ‘우리 노동자들‘이 중국의 발전을 가로막았다는 자기비하와 나란히 등장했다. - P80

혁명에서 사회주의국가 건설까지, 중국이 대외적으로 고립됐던 시기에 줄곧 강조되어온 ‘자력갱생‘이데올로기는 ‘의존 대 자립‘의 이분법을 집단 심성으로 고착시켰다. - P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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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사회보장이 조세 부담을 높이면서 전 인구를 수혜자로 삼은 것과 달리, 한국의 자산 기반 복지는 저축과 소득공제를 실질적 복지 수단으로 삼은 까닭에 수혜 집단이 중산층과 고소득층에 집중되었다. 서구의 사회보장이 제도 시행 과정에서 먼저 포용했던 빈곤층과 노동계급은 한국의 사회보험제도에서는 거의 배제되었다. - P35

결국 ‘생산적 복지‘란 경제성장 중심의 정책 결정을 주도해온 행정 관료들이 복지를 국가 경쟁력 제고의 수단으로 길들이는 과정이기도 했던 것이다. - P37

국가의 공공부조가 보호에서 보장으로, 구호적 차원의 지원이 아닌 자활을 조건부로 한 생산적 지원으로 바뀌었다 해도, 국가 지원을 일방적 시혜적 복지의 틀 안에서 생각하는 관행은 변하지 않았다. 정부 정책이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밀가루가 쌀로, 다시 돈으로 바뀐 것일 뿐, 보호와 보장의 차이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이해 가능한 틀로 정리된 건 아니었다. - P45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일찌감치 가족관계가 소원해진 이가 태반인데도, 정부는 부부와 미성년 자녀로 구성되어 성역할을 분담하고 사회적 재생산을 책임지는 ‘정상 가족‘ 모델을 부양의무제라는 형태로 가난한 사람들한테 강요했다. - P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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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급이 빈곤 네트워크의 의무통과점이 되었다고 내가 생각하는 까닭은, 정부 정책뿐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의 자기 서사, 그리고 이들과 연대하는 사람들의 움직임 모두 수급(기초법)을 경유해 그 존재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이 공공부조의 수급자로 구획되면서 가난은 특정한 양식과 문법 안에 ‘고이고‘ 말았다. 빈곤을 우리 시대의 정치적 핵심 의제로 삼는 일은 그렇게 점차 요원해졌다. 빈곤이 ‘우리의 삶에서 저들의 문제‘로 고립되면서 취약계층에 대한 관심을 호소하는 메시지가 빈곤을 끝장내자는 결의를 압도해버렸다. - P27

중세 유럽을 연구한 학자들은 기독교의 등장이 빈곤과 자선에 종교적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인식의 전환을 가져왔지만, 이 시대에도 빈곤에 대한 시선은 이중적이었다고 말한다. 종교적 실천으로서의 빈곤은 찬양받았지만, 현실에서 어쩔 수 없이 겪는 빈곤은 죄의 대가이자 신의 처벌로 여겨졌다. - P28

사회보장 시스템은 빈곤을.실업, 질병, 노령화 등 노동능력 상실에 따른 문제로 파악하면서 ‘노동‘을 가치판단의 절대 기준으로 삼는다. 노동능력이 있다고 판단되는 빈민을 강제 노역으로 내몰았던 1600년대 영국 구빈법 체제와 비교했을 때, 이러한 제도가 사회연대에 기초해 빈곤 인구를 관리하고, 이들에게 실업 · 질병 · 주거급여, 노령연금 등 사회보장급여를 확대한 점은 역사의 분명한 진전이다. 그러나 노동을 통한 생계유지가 어려운 경우에만 사회부조가 제공되어야 한다는 논리는 가장 보편적인 복지 모델을 유지해온 스웨덴에서조차 그대로 유지되었고, 사회복지의 급여 수준이 노동시장의 최저임금 수준보다 더 낮아야 한다는 열등 처우의 원칙은 영국의 19세기 신구빈법 이래 사회복지의 상식으로 정착됐다. 노동능력의 결여를 수급의 조건으로 삼는 공공부조는 결과적으로 (2장에서 논할) 노동 대 빈곤, 노동자 대 빈자라는 이분법을 고착시키면서 후자의 열위를 정당화했다. - 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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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선별적 포섭, 보호, 배제를 제도화하면서 공공부조 수급자에서 난민·이주자에 이르기까지 빈자를 식별하고 등급화한다. 지구상의 공유부commons 를 상품화하고, 인간생명을 인적 자본으로 취급하며 경쟁을 독려해온 기업은 고도로산업화·전문화된 반빈곤 네트워크의 젖줄이 됐다. 이들은 사회공헌, 윤리적 자본주의, 임팩트 투자, 환경·사회·거버넌스ESG 등 시기별로 다양한 구호를 변해가면서 빈곤산업의 언어와 문법을 ‘혁신‘하고, 다수의 빈곤을 초래한 대가로 축적한 자본의 극히 일부를정부, 대학, 비영리재단, 시민단체에 세련된 퍼포먼스와 함께 재분배한다. - P5

숱한 제도적 · 실천적 개입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적 결핍이란 지워내야 할 불운, 수치, 숙명으로 남았다. 그런 점에서 빈곤은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다. - P6

6장은 한·중 대학생으로 구성된 한국 대기업 자원봉사단이 중국에서 벌인 활동에 관한 문화기술지다. 일방적인 선물을 거부하는 중국-국가, 전략적 이익에 몰두하는 기업, ‘진정성 게임‘을 반복하는 실무자, 타인의 빈곤보다는 자신의 불안을 치유하고 싶어하는 한국 학생, 빈곤산업의 내부고발자를 자처하는 중국 학생이 뒤엉킨 현장은 빈곤 레짐의 통치성에 대한 정돈된 비판을 거스른다. - P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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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 캐릭터는 또 다른 이유로도 유용할 수 있어요. 누가 맞춰보실까요?"
(중략)
"동물들은 쓰고 버릴 수 있으니까요." 나는 말한다. "작가들은 종종 긴장감을 자아내려고 동물들을 죽이죠. 인간을 죽이는 것만큼 중대하진 않지만 놀랄 정도로 동요를 일으킬 수 있으니까요." - P15

매일 써라, 내가 학생들에게 하는 말이었다. 영감을 기다리지 마라, 그건 끝까지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영감의 신은 늘 네가 쓰고 있을 때 찾아온다. 마음을 들여다보고 써라. 하지만 대부분의 선생처럼 나도 자신의 충고를 따르는 데는 별로 영민하지 못하다. - 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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