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발에서 활동, 평가에 이르는 전 과정에 걸쳐 봉사단에서는 진정성 게임이 펼쳐졌다. 기업이 일자리 대신 스펙 쌓기에 최적화된 대외활동을 조립하고, 실무자는 스펙을 쌓으려고 캠프에 지원한 학생의 진정성을 나무란다. 참가 학생은 (앞서 영석처럼) 자신과 "취업을 위한 스펙 쌓기"로 지원한 다른 학생들을 구분하거나, "봉사도 하고 스펙도 쌓으니 일석이조란 생각에" 덤볐는데 "그 이상의 것을 배웠다"며 진정성의 버전을 업그레이드한다. 실제 활동에서 순수한 봉사와 불순한 봉사가 명확히 구분되지 않고 실무자든 학생들이든 이를 어느 정도 간파하고 있음에도, 한쪽이 진실이고 다른 한쪽이 거짓인 양 가정하는 자의적 이분법은 프로그램 전 과정을 통해 재생산된다. - P239

참가자들의 공식적인 평가, 활동 수기, 경험담으로 쉽게 정리될 만한 자족적 에피소드가 구성되려면, 봉사는 ‘유연한 외피를 갖추고, ‘문제 해결식‘의 간명한 테크닉을 취하며, 과도한 개입이나 희생을 요구하지 않는 ‘적당함‘을 지녀야 했다. - P253

참가 학생들을 인터뷰하면서 느낀 것은 대기업의 해외 자원봉사를 비롯해 대학생을 대상으로 한 각종 대외활동이 단순히 스펙을 쌓기 위한 용도도, "자신들을 도덕적 인재, 공감 능력과 책임감을 지닌인재로 계발하기 위한 자기의 테크놀로지"에 국한된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내가 심층 인터뷰를 진행한 열 명 중 무려 절반이 휴학하고 고시나 각종 자격증 시험을 준비한 경험이 있었는데, 이들에게 봉사단은 일종의 심리 치료제, 심지어 한 학생의 말을 빌리면 "암흑 속에 살던 내가 만난 새로운 희망"이었다. - P257

한국 학생들은 도농이원구조에 따른 중국의 지역 격차나 농민공의 삶에 관해 잘 몰랐다. 물리적 환경만 보고 가난하다는 인상을 받을 뿐, 자신이 봉사자로서 대면하는 빈곤에 대한 구체적 이해나 관심이 상대적으로 부족했다. 봉사를 통해 ‘나‘의 결핍을 어떻게 메울 것인지가 더 중차대한 문제였다. - P259

단기간의 해외 자원봉사 프로그램을 통해 정부와 기업은 청년 실업과 고용 불안을 초래한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를 ‘글로벌 인재 양성‘이라는 긍정적 화두로, 시대적 책무로 전환했다. 이 위기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대학생 청년들에게 대기업에서 비용일체를 부담하는 글로벌 캠프는 자신의 커리어 경쟁력을 높이는 대외활동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이렇게 범람하는 의례는 참가자들이 ‘글로벌 인재‘라는 요구에 기꺼이 퍼포먼스로 화답하는 장인 동시에 오랜 기간 쌓아온 마음의 결핍을 일시적으로 메우는 기회였다. 해외 자원봉사가 타국의 경제적 빈곤에 대한 적극적 개입이라기보다는 신자유주의 시대 실존의 빈곤을 보듬는 ‘치유‘ 기제가 된 것이다. 자족적·단편적 · 분절적인 에피소드식 활동의 연쇄 속에서, 사회적 관계의 부재에 따른 불안은 일시적으로만 봉합되었고, 만족의 유예는 학생들로 하여금 또 다른 에피소드, 혹은 더 나은 에피소드를 찾아 동분서주하게 했다. - P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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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이 원조 수원국에서 공여국으로의 전환을 당당히 선포한 시기에 태어난 학생들은 구세군 냄비보다 아프리카 아동 후원 광고를 더 많이 보며 성장했다. 글로벌 이동은 확실히 가진 자들의 특권으로 남지도 않고, 난민과 이주노동자의 생존 전략으로 축소될 수도 없는 다양성을 내포했다. 태어나자마자 인터넷을 접한 디지털 세대에게 국경 너머의 삶은 친숙한 화제였다.(중략 )조기유학 어학연수, 배낭여행, 워킹홀리데이 등으로 장기간 해외에 체류하면서 한국 사회 청년으로서 기대되는 표준 생애 경로를 재고하거나 여기에서 이탈하는 청년도 제법 늘었다. - P192

"발전‘주의‘는 남았으되 발전의 전망도 동력도 불투명해진 시대에 성인이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중략)기술 발전이 노동을 대체하고, 더 싼 노동을 찾아 자본이 쉽게 이동하고, 가치 증식이 실물경제 활성화와 점점 무관해지는 금융자본주의 세계에 살면서도 학생들은 수백 통의 자소서(자기소개서)를 썼다. 부모 세대가 습관처럼 강조해온 안정된 정규직과 성공 신화를 버릴 수도, 현실화시킬 수도 없는 상황에서 그런 처지의 비참함을 호소했다. 그들은 밥숟가락을 뜨자마자 시작한 경쟁으로 일찌감치 심신이 피로해진 상태에서, (고도성장기를 거치며 교육을 통한 탈빈곤을 제 눈으로 확인한 부모들이 쏟아부은) 투자를 회수하지 못하리란 죄책감, 기를 쓰고 노력해도 부모보다 못한 삶을 살 것 같다는 좌절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명문대에 진학했지만, 대학이라는 최고봉에 올라서도 결정된 건 아무것도 없다는 상실감에 사로잡혔다. - P193

새천년개발목표를 중심으로 연결망을 구축한 행위자들이 공동으로 싸워야 할 적은 말라리아와 HIV/AIDS, 학교와 병원의 부재, 부패와 무기력으로 가시화되었다. 피식민지와 식민모국 사이의 부등가 교환이 낳은 체계적 착취, 채무국의 정부 지출을 줄이라는 IMF의 압력에 따른 보건·교육·복지 사업 축소, 식량·에너지 자원을 수탈하기 위해 강대국들이 마다치 않는 전쟁 등 불평등한 세계 체제를 낳은 구조적 얽힘을 곱씹게 할 행위자들은 글로벌 빈곤 레짐 주변부에 희미하게 흩어졌다. 구조적 폭력을 따지자면 마땅히 자본주의 발전 과정에서 입은 착취와 피해에 대해 정당한 보상을 요구해야 할 나라들이 주관적 폭력만 가시화된 전장에서는 원조와 차관, 봉사의 손길을 간절히 기다리는 수원국으로 전락했다. - P201

서구의 개발원조 프로젝트가 인적·물적 자원을 결집해내는 거대한 빈곤산업으로 성장하는 동안, 개발원조가 기존세계 체제의 불평등을 제거하기보다는 온존시킨다는 마르크스주의와 종속이론 진영의 비판은 주변부로 밀려났다. 이러한 빈곤산업은 빈자를 가시화할 뿐 아니라 국제기구와 각국 정부, NGO, 대학 등 공적개발원조라는 기치 아래 개발의 녹을 먹고 살아가는 수많은 전문가, 봉사자, 기관을 양성하는 바람에 개발원조의 반복된 실패가 오히려 당연한 규범이 되고, 정책의 설계-집행-평가로 이루어지는 개발 사이클의 한 고리로 정형화되는 현상이 벌어졌다. - P203

글로벌 외환위기를 거친 1990년대 말 이후 해외 봉사, 해외 문화탐방, 오지 탐험 관련 서적들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고용 없는 성장이 대세가 된 나라에서 자란 청년들이 떠올리는 ‘해외‘ 서사엔 봉사, 여행, 취업에 대한 요구가 모호하게 뒤섞였다. - P211

글로벌 빈곤 레짐은 일관된 구조를 갖는다기보다 지역적·상황적 실천과 개입에 열려 있다. 한국이 이 레짐과 접속하는 과정에서 특징적인 것은 원조 수원국에서 공여국으로 전환한 나라의 위상을 널리 알리겠다는 국가주의적 사고가 팽배하다는 점, 그리고 정부·대학·기업이 긴밀한 공조하에 (특히 대학생) 청년을 해외 자원봉사의 주요 주체로 구성해내면서 실업의 ‘위기‘를 글로벌 리더 창출이라는 ‘호기‘로 바꿔치기했다는 점이다. 저성장 시대에도 경쟁력만 부르짖는 환경에서 실존의 결핍을 호소해온 청년들이 열정 노동과 창의 노동을 불태우며 글로벌 빈곤 퇴치를 위해 싸우는 가장 역설적인 전사가 된 것이다. - P212

정부가 해외 봉사단을 설립하면서 "경력 개발을 지원하고, "글로벌 리더" "개발 전문인력"을 양성하며, 해당국 언어를 습득해 "본인 역량"을 개발하고 그 나라 경제사회 발전에 이바지하도록 돕겠다고 할 때, ‘해외 봉사‘와 ‘취업 컨설팅 · 인큐베이팅‘은 모호하게 뒤섞인다. 한국 정부의 제도적 장치를 거쳐 글로벌 빈곤 레짐과 접속한 젊은이들은 ‘88만원 세대‘ ‘N포세대‘와 같은 불안, 포기, 부정의 명명에서 벗어나 "구국과 진보, 사회적 생산과 재생산의 과업을 짊어진 주체로 ‘청년‘을 호명한 오랜 역사"를 계승할 것을 요구받았다. - P214

사업 비용을 줄이기위한 최적의 장소를 찾는 데 있어 그 어떤 행위자보다 더 탁월한 기업은, 다양한 (해외) 봉사활동 프로그램을 운영하면서 ‘프런티어‘ 청년 발굴에 앞장서왔다. 취업이란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기업과의 ‘라포‘가 중요한 (특히 대학생) 청년과 ‘윤리적‘ 자본주의라는 무대를 채워줄 젊은 인재가 필요한 기업이만나면서 가장 현실적인 고리를 가장 도덕적인 문법으로 재편해내는 게 가능해졌다. - P216

기업은 무자비한 이윤추구로 대학생들이 겪는 사회적 고통을 심화시킨 주범이 아니라 불안한 세대의 상처를 보듬고 희망을 되찾도록 이끌어주는 도덕적 멘토로, NGO나 사회적 기업의 적대자가 아니라 그들을 후원하고 이끄는 자비로운 중개자로 외투를 바꿔 입었다. "근본적으로 비도덕적"이라고 묘사되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핵심 리더가 "고도로 도덕화된 주체"로 등장한 것이다. - P217

반빈곤 활동에 참여하는 대학생 자원봉사자는 과거와 달리 공익을 버리고 사익만을 추구하는 게 아니다. 단 이때의 공익은 대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결연한 의지의 산물이 아니라 자기와 타인을 모두 이롭게 하는 공리적 즐거움의 표현으로 재해석되며, 이 공익을 실천하는 주체는 빈곤이라는 사회적 고통을 야기한 세계에 맞서는 전사라기보다는 그 세계 ‘내‘에서 찬란히 용트림하는 인재가 되어야 한다. - P221

한국의 대학생은 정의를 수호하고 공공의 가치를 대변하는 ‘지식인‘이 아닌, 글로벌 경쟁력을 강화하고 자기계발과 타인에 대한 봉사를 결합하는 ‘명품 인재‘가 될 것을 요청받는데, 여기서 현존하는 사회적 질서란 비판하고 저항할 대상이기보다는 졸업 후 성공적으로 진입해야 할 세계로 정형화된다. 대기업에서 주관하는 대학생 해외 자원봉사의 유행은 결국 대학생들의 커리어 구축 작업과 빈곤에 대한 ‘가벼운‘ 개입이 마주치는 가운데 출현한 문화적 현상이라 할 수 있다. - P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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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산이자 상품으로서의 집을 중심으로 거래자들이 끈끈하게 결속된 세계에는 집이 생명, 생존, 기본의 자리로서 들어설 틈이 없었다. 이 세계에서는 경제적 능력이 거주할 자격을 논하고 집을 획득할 유일무이한 기준이 됐다. - P148

2021년 2월 5일 국토교통부가 서울시 동자동 쪽방촌 일대를 공공주택지구로 조성하는 사업을 발표하고, 공공임대 아파트를 지어 쪽방 주민이 대다수인 세입자를 수용하기로 발표하자, 온라인 부동산 커뮤니티는 조롱과 분노로 들끓었다. "열심히 노력해서 일군 재산을 노숙인 집 지어준다고 강탈"당했다며 소유주들의 연대를 호소하는 글이 빼곡했다. 온라인 채팅에 참여하는 투자자들이 곧잘 언급하는 ‘노력‘ ‘땀‘ ‘성실‘ ‘기여‘ ‘공정‘ 같은 수사는 최종 도달점이 자산일 때라야 도덕적 인정을 획득했다. 사유재산을 지키고 불리기 위해 결집된 세상엔 인간으로서 자고, 먹고, 쉴 수 있는 자리가 기본으로 제공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틈입할 여지가 없다. - P150

노동자와 농민이라는, 신중국 성립 후 중화인민공화국에서 대표적 ‘인민‘으로 호명된 두 계급이 도시와 농촌에서 분리된 삶을 살다 ‘빈민‘으로 서로를 마주하게 된 풍경은 어떠할까? 슬럼화된 도시 변두리에 거주하며 경제적 어려움과 사회적 낙인을 공유하면서도, 이들은 서로를 같은 부류의 빈민으로 생각하지 않았다.(중략)중국 당-국가는 도시 중화학공업을 생산력 발전의 핵심 동력으로 삼고, (서구처럼) 자국 바깥으로 눈을 돌리기보다 그 내부의 농촌을 부를 전유하고 자국 경제의 모순을 전가할 식민지로 삼았다. 이렇게 도시민과 농민을 사회적 신분으로 위계화한 역사는 국가와 인민의 관계를 차별과 혐오의 풍경에 틈입시켰다. 실업자가 된 도시 노동자는ㅡ당-국가가 한때 그들을 호명했던ㅡ‘인민‘이라는 수사를 적극적으로 동원하면서 제도적 보호를 요구했지만(2장 참조), 이데올로기적 찬양에 걸맞은 실질적 지원을 받아본 적이 없는 농민들, 그리고 농민공이란 이름으로 일감을 찾아 도시를 배회하는 그 자식들은 인민이란 명명 자체를 낯설어했다. - P157

분노를 느끼지 않고, 체념하고, 반항하지 않는 태도는 박탈당한 사람들이 "순전히 생존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빈곤한 상황에 순응하는 경향"이기도 하다. 아마르티아 쿠마르 센이 빈곤을 단순히 낮은 수준의 소득이 아닌 "기본적 역량"의 박탈로 정의한 이유다.(중략)물어볼 엄두가 안 나고, 아무 분노도 느끼지 못하고, 고등학교 졸업했으니 어쩔 수 없다는 마음은 태생적인 게 아니라, 묻고 따지고 소리지를 자격을 박탈당하는 경험이 오랫동안 계속되고 누적된 결과다. - P185

쑨위편의 여정에 동행하면서, 한때 나는 그의 ‘집‘이 계속 헷갈렸다. 태어난 고향인가, 시댁이 있는 빈현인가, 아니면 친정 식구가 모인 하얼빈인가? 지척에 농사지을 땅이 있는 가옥인가, 편리하고 현대적인 아파트인가? 쑨위펀은 토지를 찾으러 빈현에 갈 때도 "집에 돌아가고 싶다"더니, 토지를 포기하고 다시 하얼빈으로 떠날 때도 "집에 돌아가자" 했다. 집은 결국 특정 장소로 가리킬 만한 ‘어디‘도, 건조물로 지칭할 만한 ‘무엇‘도 아니라, 세계 속 자기 ‘자리‘를만드는 부단한 과정이었던 셈이다. - P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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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의 불안정성이 심화되고, 금융의 일상화로 투자가 주업이 된 사람들이 허다하고, 기술이 인간 노동을 대체하는 속도가 빨라지면서 임금노동의 비중은 계속 줄고 있지만, 빈곤 통치에서 임금노동이 갖는 위상은 여전히 견고하다. 노동이라는 기준이야말로 근대 빈곤 통치의 기본적인 작동 원리이기 때문이다. 강제노역에서 근로연계복지에 이르기까지, 빈곤 통치의 역사는 인간에게 노동을 강제하기 위한 일련의 지식과 제도를 구축해온 과정이다. - P105

공익 활동은 학계와 언론, 노동운동계가 농민공 문제에 대해 부단히 제기해온 정치적·경제적·사회적 권리의 박탈 문제를 미봉할 뿐 아니라, 지역 내 위계 관계를 묘하게 비틀었다. 노동자의 장시간 저임금 노동에 기생하는 폭스콘, 지역 경제 활성화를 이유로 폭스콘의 온갖 편의를 봐준 정부, 금방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건물을 짓고 외지 청년들로부터 꼬박꼬박 임대료를 챙겨온 지역 소유주까지, 폭스콘의 지역 생태계에서 한자리를 차지한 관계자들이 센터 활동의 후원자를 자처했다. 이들은 붉은 행사 현수막을 배경 삼아 자원봉사자 조끼를 입은 폭스콘 노동자들과 기념사진을 찍고, 이를 정부나 기업의 민생 업적으로 ‘스펙화하기 바빴다. 어찌 보면 이는 폭스콘기업이 노동자 자살 방지를 위해 기숙사 창문에 창살을 설치하고그 아래 그물을 깔아두는 행태보다 더 잔인했다. 자원봉사자로 호명된 노동자가 자신을 철저히 소외시킨 공공의 ‘사회‘까지 돌봐야 하는 상황이 됐다. - P115

쭤메이가 돌봄노동을 ‘자유‘로 번역하면서 노동 유연화를 자발적으로 실천하는 모습은, 가정에서 노동력 재생산이 비가시화되고 심지어 ‘여성 노동‘으로 오독된 데 대한 페미니즘의 비판을 상기하면 자못 당황스럽다. 이 풍경은 가난한 농촌여성이 가정에서의 전통적인 성 역할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 결과라기보다, 도시에서 열정을 부추겼던 일들이 실패를 거듭하면서 결혼이 유일한 돌파구가 되어버린 절벽 상태를 비춘다. 결혼은 어느새 절박하게 성취해내야 할 목표가 됐다. - P132

‘사회적 공장‘은 노동자들을 단순히 기계, 노예, 짐승으로 억압하는 대신 이들의 열망을 한껏 부추기는 방식으로 가치를 수탈한다. - P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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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민운동의 역사에서 ‘자립‘ 또는 ‘자활‘은 알아서 살아남기를 강요당했던 시대에 가난한 사람들이 의존의 그물망을 함께 새로 짜는 실천이었다. 재산, 소득, 인맥, 학력, 기술 등 의존할 만한 자원이 턱없이 부족하고 부실한 사람들이 나눔을 통해, 외부자원과의 연결을 통해 상호의존의 지평을 넓히는 과정이었다. 자금과 경험이 부족하고, 공동체에 대한 이해와 지향도 달랐던 까닭에 대부분 오래 버티지 못하고 사업을 접었지만, 참여자들은 협동의 즐거움, 노동에 대한 자부심, 숙명처럼 여겼던 가난을 함께 헤쳐나간 보람을 기억했다. - P93

과거의 생산공동체운동이나 다양한 협동조합에서와 달리, 자활사업 참여자는 처음부터 자기결정권을 박탈당한 채 호명된다. 병원 진단서, 진료기록부 사본, 소견서를 통한 의학적 평가와 국민연금공단의 활동 능력 평가를 거쳐 ‘조건부 수급자‘로 범주화되면, 그에게 남은 선택의 자유란 수급을 유지하기 위해 이 범주에 요구되는 기능을 수행할지, 수급을 포기할지 둘 중 하나뿐이다. - P96

시작부터, 자활은 주민들에게 겹겹이 덧씌워진 가난의 상처를 치유하고 당당한 인간으로서 존립하기 위한 대안이라기보다, "놀고먹는" 사람들을 작업장으로 내몰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등장했다. - P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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