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급이 빈곤 네트워크의 의무통과점이 되었다고 내가 생각하는 까닭은, 정부 정책뿐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의 자기 서사, 그리고 이들과 연대하는 사람들의 움직임 모두 수급(기초법)을 경유해 그 존재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이 공공부조의 수급자로 구획되면서 가난은 특정한 양식과 문법 안에 ‘고이고‘ 말았다. 빈곤을 우리 시대의 정치적 핵심 의제로 삼는 일은 그렇게 점차 요원해졌다. 빈곤이 ‘우리의 삶에서 저들의 문제‘로 고립되면서 취약계층에 대한 관심을 호소하는 메시지가 빈곤을 끝장내자는 결의를 압도해버렸다. - P27

중세 유럽을 연구한 학자들은 기독교의 등장이 빈곤과 자선에 종교적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인식의 전환을 가져왔지만, 이 시대에도 빈곤에 대한 시선은 이중적이었다고 말한다. 종교적 실천으로서의 빈곤은 찬양받았지만, 현실에서 어쩔 수 없이 겪는 빈곤은 죄의 대가이자 신의 처벌로 여겨졌다. - P28

사회보장 시스템은 빈곤을.실업, 질병, 노령화 등 노동능력 상실에 따른 문제로 파악하면서 ‘노동‘을 가치판단의 절대 기준으로 삼는다. 노동능력이 있다고 판단되는 빈민을 강제 노역으로 내몰았던 1600년대 영국 구빈법 체제와 비교했을 때, 이러한 제도가 사회연대에 기초해 빈곤 인구를 관리하고, 이들에게 실업 · 질병 · 주거급여, 노령연금 등 사회보장급여를 확대한 점은 역사의 분명한 진전이다. 그러나 노동을 통한 생계유지가 어려운 경우에만 사회부조가 제공되어야 한다는 논리는 가장 보편적인 복지 모델을 유지해온 스웨덴에서조차 그대로 유지되었고, 사회복지의 급여 수준이 노동시장의 최저임금 수준보다 더 낮아야 한다는 열등 처우의 원칙은 영국의 19세기 신구빈법 이래 사회복지의 상식으로 정착됐다. 노동능력의 결여를 수급의 조건으로 삼는 공공부조는 결과적으로 (2장에서 논할) 노동 대 빈곤, 노동자 대 빈자라는 이분법을 고착시키면서 후자의 열위를 정당화했다. - 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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