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산이자 상품으로서의 집을 중심으로 거래자들이 끈끈하게 결속된 세계에는 집이 생명, 생존, 기본의 자리로서 들어설 틈이 없었다. 이 세계에서는 경제적 능력이 거주할 자격을 논하고 집을 획득할 유일무이한 기준이 됐다. - P148

2021년 2월 5일 국토교통부가 서울시 동자동 쪽방촌 일대를 공공주택지구로 조성하는 사업을 발표하고, 공공임대 아파트를 지어 쪽방 주민이 대다수인 세입자를 수용하기로 발표하자, 온라인 부동산 커뮤니티는 조롱과 분노로 들끓었다. "열심히 노력해서 일군 재산을 노숙인 집 지어준다고 강탈"당했다며 소유주들의 연대를 호소하는 글이 빼곡했다. 온라인 채팅에 참여하는 투자자들이 곧잘 언급하는 ‘노력‘ ‘땀‘ ‘성실‘ ‘기여‘ ‘공정‘ 같은 수사는 최종 도달점이 자산일 때라야 도덕적 인정을 획득했다. 사유재산을 지키고 불리기 위해 결집된 세상엔 인간으로서 자고, 먹고, 쉴 수 있는 자리가 기본으로 제공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틈입할 여지가 없다. - P150

노동자와 농민이라는, 신중국 성립 후 중화인민공화국에서 대표적 ‘인민‘으로 호명된 두 계급이 도시와 농촌에서 분리된 삶을 살다 ‘빈민‘으로 서로를 마주하게 된 풍경은 어떠할까? 슬럼화된 도시 변두리에 거주하며 경제적 어려움과 사회적 낙인을 공유하면서도, 이들은 서로를 같은 부류의 빈민으로 생각하지 않았다.(중략)중국 당-국가는 도시 중화학공업을 생산력 발전의 핵심 동력으로 삼고, (서구처럼) 자국 바깥으로 눈을 돌리기보다 그 내부의 농촌을 부를 전유하고 자국 경제의 모순을 전가할 식민지로 삼았다. 이렇게 도시민과 농민을 사회적 신분으로 위계화한 역사는 국가와 인민의 관계를 차별과 혐오의 풍경에 틈입시켰다. 실업자가 된 도시 노동자는ㅡ당-국가가 한때 그들을 호명했던ㅡ‘인민‘이라는 수사를 적극적으로 동원하면서 제도적 보호를 요구했지만(2장 참조), 이데올로기적 찬양에 걸맞은 실질적 지원을 받아본 적이 없는 농민들, 그리고 농민공이란 이름으로 일감을 찾아 도시를 배회하는 그 자식들은 인민이란 명명 자체를 낯설어했다. - P157

분노를 느끼지 않고, 체념하고, 반항하지 않는 태도는 박탈당한 사람들이 "순전히 생존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빈곤한 상황에 순응하는 경향"이기도 하다. 아마르티아 쿠마르 센이 빈곤을 단순히 낮은 수준의 소득이 아닌 "기본적 역량"의 박탈로 정의한 이유다.(중략)물어볼 엄두가 안 나고, 아무 분노도 느끼지 못하고, 고등학교 졸업했으니 어쩔 수 없다는 마음은 태생적인 게 아니라, 묻고 따지고 소리지를 자격을 박탈당하는 경험이 오랫동안 계속되고 누적된 결과다. - P185

쑨위편의 여정에 동행하면서, 한때 나는 그의 ‘집‘이 계속 헷갈렸다. 태어난 고향인가, 시댁이 있는 빈현인가, 아니면 친정 식구가 모인 하얼빈인가? 지척에 농사지을 땅이 있는 가옥인가, 편리하고 현대적인 아파트인가? 쑨위펀은 토지를 찾으러 빈현에 갈 때도 "집에 돌아가고 싶다"더니, 토지를 포기하고 다시 하얼빈으로 떠날 때도 "집에 돌아가자" 했다. 집은 결국 특정 장소로 가리킬 만한 ‘어디‘도, 건조물로 지칭할 만한 ‘무엇‘도 아니라, 세계 속 자기 ‘자리‘를만드는 부단한 과정이었던 셈이다. - P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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