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이 원조 수원국에서 공여국으로의 전환을 당당히 선포한 시기에 태어난 학생들은 구세군 냄비보다 아프리카 아동 후원 광고를 더 많이 보며 성장했다. 글로벌 이동은 확실히 가진 자들의 특권으로 남지도 않고, 난민과 이주노동자의 생존 전략으로 축소될 수도 없는 다양성을 내포했다. 태어나자마자 인터넷을 접한 디지털 세대에게 국경 너머의 삶은 친숙한 화제였다.(중략 )조기유학 어학연수, 배낭여행, 워킹홀리데이 등으로 장기간 해외에 체류하면서 한국 사회 청년으로서 기대되는 표준 생애 경로를 재고하거나 여기에서 이탈하는 청년도 제법 늘었다. - P192

"발전‘주의‘는 남았으되 발전의 전망도 동력도 불투명해진 시대에 성인이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중략)기술 발전이 노동을 대체하고, 더 싼 노동을 찾아 자본이 쉽게 이동하고, 가치 증식이 실물경제 활성화와 점점 무관해지는 금융자본주의 세계에 살면서도 학생들은 수백 통의 자소서(자기소개서)를 썼다. 부모 세대가 습관처럼 강조해온 안정된 정규직과 성공 신화를 버릴 수도, 현실화시킬 수도 없는 상황에서 그런 처지의 비참함을 호소했다. 그들은 밥숟가락을 뜨자마자 시작한 경쟁으로 일찌감치 심신이 피로해진 상태에서, (고도성장기를 거치며 교육을 통한 탈빈곤을 제 눈으로 확인한 부모들이 쏟아부은) 투자를 회수하지 못하리란 죄책감, 기를 쓰고 노력해도 부모보다 못한 삶을 살 것 같다는 좌절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명문대에 진학했지만, 대학이라는 최고봉에 올라서도 결정된 건 아무것도 없다는 상실감에 사로잡혔다. - P193

새천년개발목표를 중심으로 연결망을 구축한 행위자들이 공동으로 싸워야 할 적은 말라리아와 HIV/AIDS, 학교와 병원의 부재, 부패와 무기력으로 가시화되었다. 피식민지와 식민모국 사이의 부등가 교환이 낳은 체계적 착취, 채무국의 정부 지출을 줄이라는 IMF의 압력에 따른 보건·교육·복지 사업 축소, 식량·에너지 자원을 수탈하기 위해 강대국들이 마다치 않는 전쟁 등 불평등한 세계 체제를 낳은 구조적 얽힘을 곱씹게 할 행위자들은 글로벌 빈곤 레짐 주변부에 희미하게 흩어졌다. 구조적 폭력을 따지자면 마땅히 자본주의 발전 과정에서 입은 착취와 피해에 대해 정당한 보상을 요구해야 할 나라들이 주관적 폭력만 가시화된 전장에서는 원조와 차관, 봉사의 손길을 간절히 기다리는 수원국으로 전락했다. - P201

서구의 개발원조 프로젝트가 인적·물적 자원을 결집해내는 거대한 빈곤산업으로 성장하는 동안, 개발원조가 기존세계 체제의 불평등을 제거하기보다는 온존시킨다는 마르크스주의와 종속이론 진영의 비판은 주변부로 밀려났다. 이러한 빈곤산업은 빈자를 가시화할 뿐 아니라 국제기구와 각국 정부, NGO, 대학 등 공적개발원조라는 기치 아래 개발의 녹을 먹고 살아가는 수많은 전문가, 봉사자, 기관을 양성하는 바람에 개발원조의 반복된 실패가 오히려 당연한 규범이 되고, 정책의 설계-집행-평가로 이루어지는 개발 사이클의 한 고리로 정형화되는 현상이 벌어졌다. - P203

글로벌 외환위기를 거친 1990년대 말 이후 해외 봉사, 해외 문화탐방, 오지 탐험 관련 서적들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고용 없는 성장이 대세가 된 나라에서 자란 청년들이 떠올리는 ‘해외‘ 서사엔 봉사, 여행, 취업에 대한 요구가 모호하게 뒤섞였다. - P211

글로벌 빈곤 레짐은 일관된 구조를 갖는다기보다 지역적·상황적 실천과 개입에 열려 있다. 한국이 이 레짐과 접속하는 과정에서 특징적인 것은 원조 수원국에서 공여국으로 전환한 나라의 위상을 널리 알리겠다는 국가주의적 사고가 팽배하다는 점, 그리고 정부·대학·기업이 긴밀한 공조하에 (특히 대학생) 청년을 해외 자원봉사의 주요 주체로 구성해내면서 실업의 ‘위기‘를 글로벌 리더 창출이라는 ‘호기‘로 바꿔치기했다는 점이다. 저성장 시대에도 경쟁력만 부르짖는 환경에서 실존의 결핍을 호소해온 청년들이 열정 노동과 창의 노동을 불태우며 글로벌 빈곤 퇴치를 위해 싸우는 가장 역설적인 전사가 된 것이다. - P212

정부가 해외 봉사단을 설립하면서 "경력 개발을 지원하고, "글로벌 리더" "개발 전문인력"을 양성하며, 해당국 언어를 습득해 "본인 역량"을 개발하고 그 나라 경제사회 발전에 이바지하도록 돕겠다고 할 때, ‘해외 봉사‘와 ‘취업 컨설팅 · 인큐베이팅‘은 모호하게 뒤섞인다. 한국 정부의 제도적 장치를 거쳐 글로벌 빈곤 레짐과 접속한 젊은이들은 ‘88만원 세대‘ ‘N포세대‘와 같은 불안, 포기, 부정의 명명에서 벗어나 "구국과 진보, 사회적 생산과 재생산의 과업을 짊어진 주체로 ‘청년‘을 호명한 오랜 역사"를 계승할 것을 요구받았다. - P214

사업 비용을 줄이기위한 최적의 장소를 찾는 데 있어 그 어떤 행위자보다 더 탁월한 기업은, 다양한 (해외) 봉사활동 프로그램을 운영하면서 ‘프런티어‘ 청년 발굴에 앞장서왔다. 취업이란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기업과의 ‘라포‘가 중요한 (특히 대학생) 청년과 ‘윤리적‘ 자본주의라는 무대를 채워줄 젊은 인재가 필요한 기업이만나면서 가장 현실적인 고리를 가장 도덕적인 문법으로 재편해내는 게 가능해졌다. - P216

기업은 무자비한 이윤추구로 대학생들이 겪는 사회적 고통을 심화시킨 주범이 아니라 불안한 세대의 상처를 보듬고 희망을 되찾도록 이끌어주는 도덕적 멘토로, NGO나 사회적 기업의 적대자가 아니라 그들을 후원하고 이끄는 자비로운 중개자로 외투를 바꿔 입었다. "근본적으로 비도덕적"이라고 묘사되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핵심 리더가 "고도로 도덕화된 주체"로 등장한 것이다. - P217

반빈곤 활동에 참여하는 대학생 자원봉사자는 과거와 달리 공익을 버리고 사익만을 추구하는 게 아니다. 단 이때의 공익은 대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결연한 의지의 산물이 아니라 자기와 타인을 모두 이롭게 하는 공리적 즐거움의 표현으로 재해석되며, 이 공익을 실천하는 주체는 빈곤이라는 사회적 고통을 야기한 세계에 맞서는 전사라기보다는 그 세계 ‘내‘에서 찬란히 용트림하는 인재가 되어야 한다. - P221

한국의 대학생은 정의를 수호하고 공공의 가치를 대변하는 ‘지식인‘이 아닌, 글로벌 경쟁력을 강화하고 자기계발과 타인에 대한 봉사를 결합하는 ‘명품 인재‘가 될 것을 요청받는데, 여기서 현존하는 사회적 질서란 비판하고 저항할 대상이기보다는 졸업 후 성공적으로 진입해야 할 세계로 정형화된다. 대기업에서 주관하는 대학생 해외 자원봉사의 유행은 결국 대학생들의 커리어 구축 작업과 빈곤에 대한 ‘가벼운‘ 개입이 마주치는 가운데 출현한 문화적 현상이라 할 수 있다. - P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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