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하게도 중국어에서도 ‘듣다‘와 ‘냄새를 맡다‘ 라는 두 가지 뜻으로 闻이라는 같은 글자를 쓴다.

이탈리아어에서는 ‘듣다sentire‘와 ‘느끼다sentire‘를 따로 구분해서 쓰지 않는다. - 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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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작가 장 지오노는 이런 말을 했다.
"신은 향기를 창조했다. 그리고 인간은 향수를 만들었다. 맨몸의 연약한 인간에게는 자신을 꾸며줄 무엇인가가 있어야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향수 Perfume는 향기와 인간이 더해진 결과물이다."" - P9

냄새가 원래 그리 좋지 않은 재료라고 해도 조향사들은 결국에는 좋은 향기를 뽑아낼 수 있다. 생각지도 못한 냄새가 간혹 좋은 향수를 만드는 데 사용되기도 한다.
조향사들은 향기가 천 가지의 말을 품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귀를 기울여 각 향기가 전하려는 말을 이해한 후에야 핵심에 다가간다. 향기는 복잡하고 신비로워서 사랑받는다는 확신이 들지 않으면 절대로 자신을 내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 P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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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요즘은 중국보단 미국이 낫다고 생각하는데... 정말 많은 생각이 들게 하는 대목이네...ㅎ

장제스 또한 태평양에서의 힘의 향방이 바뀌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 대화에서 그는 "우리는 미국이 동아시아에서 지배세력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을 두려워한다"라고 말했다. 만약 이곳에서 장차 패권국이 생겨난다면 일본과 소련, 영국보다는 그나마 미국이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 P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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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국민당의 법폐를 지니고 있던 사람들은 국민당이 지배하는 지역에서 사용할 방법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대량의 지폐가 그곳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국민당에게는) 설상가상으로 자유중국의 보급로가 하나둘 끊어지면서 식량 부족에 허덕이는 시점이었다. 물가가 치솟기 시작했다. - P326

장제스는 허난성의 곡물 할당량을 줄이겠다고 발표했지만 실제로는 허난성 곡물 징발 책임자가 요구된 할당량보다 훨씬 많은 양을 징발했다. 굶주림이 허난성을 휩쓸기 시작했을 때 부패한 관료들은 자연재해를 인공 재해로 바꾸어놓았다. - P328

재정 위기를 피할 수 있었던 사람들에 대한 분노가 커졌다. 장제스에 대해서 사치스럽다고 비난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아내의 방탕함을 거론하는 이야기들은 넘쳐났다. 현지 미국 기자들은 부패하고 열의를 찾아볼 수 없는 이 동맹국에 대해 점점 환멸을 느꼈다. 그들은 국민정부가 안고있는 광범위한 문제의 상징으로서 쑹메이링의 행동을 가십거리로 삼았다. - P340

전시 중국이라는 실존적인 위협은 경쟁자들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상호간에 위협과 폭력을 저지르면서도 상대의 비판에 대해서는 모르쇠로 일관할 수 있는 완벽한 핑계거리가 되어주었다. 어느 쪽이건 앞에서는 쑨원에게 경외감을 표하면서 뒤로는 스탈린식의 사고와 행동방식을 추구했다. - P347

중국의 병폐에 대항해 지하운동에 가담하고 옌안으로 피신하던 낭만적인 시대는 끝났다. 대신, 당원들은 중국을 지배하기 위한 부품이 되어야 했다. - P359

1966년 문화대혁명이 일어났을 때, 많은 외부 관찰자는 홍위병들이 그들의 계급적인 적들을 박해하고 고문하는 현상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반세기 전 정풍운동은 이미 그들의 명확한 계획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것은 마오의 중국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 P363

장제스와 마오쩌둥 모두 궁극적으로는 일당독재의 현대적인 중국을 꿈꾸었다. 이것은 진정한 다원주의와는 양립할 수 없는 목표였다. 국민당에게도 공산당에게도 근대 국가와 자유주의 국가는 서로 별개의 얘기였다. 실제로는 그 반대였다. 레닌을 통해 영감을 얻었던 두 정당 모두 통치 구조의 일부로서 공포의 사용을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전쟁의 재앙과 중국 내에서 갈수록 커지는 사회적 위기는 양쪽정권에서 기술적이고 관용적인 부분을 점차 벗겨냈다. 또한 폭력과 강압을 선호했던 사람들이 권력을 장악해나갔다. - P3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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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12월 8일까지 중국에서의 전쟁은 미국과 영국에게는 먼 나라의 얘기에 지나지 않았다. 본국은 대공황과 뒤이어 발발한 유럽 전쟁으로 정신이 없었다. 1937년 이후에도 중국에 체류 중이던 많은 서구인에게 전쟁은 늘 겪는 현실이면서도 외국 중립국 국민으로서 신분 보장은 그러한 현실에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게 해주었다. 이 점은 일본 점령지에 거주하는 외국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그들은 적성국민으로 전락했다. 중국 동부 전역에서 미국인과 영국인들이 붙들려 억류되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도시 한가운데에서 오랫동안 오아시스처럼 남아 있었던 상하이의 국제 공공 조계는 일본의 지배에 들어갔다. 도시에서 연합국의 국적을 가진 수천여 명의 외국인들이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다. - P289

중국에 많은 이점을 가져다 준 것과는 별개로, 미국의 존재는 본질적으로 영국,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제국주의 열강의 하나였다. 미국인들은 아편 밀매에 열을 올렸으며 중국 내에서 치외법권의 특혜를 누렸다. 하지만 1941년 12월 7일 오전 7시 30분, 하와이의 항구에서 미함대가 괴멸함과 동시에 그 세계 또한 사라졌다. - P290

한 세기 동안 중국에서 미국인들은 제국주의의 한 축이었다. 그들은 때로는 자비로웠고 때로는 폭력적이었다. 언제나 중국은 궁극적으로는 서구의 지배 아래에 있었다. 이제는 새로운 제국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 P291

비록 루스벨트가 장제스를 실망시켰지만, 그가 한층 비난을 쏟아낸 상대는 또 다른 동맹국인 영국이었다. "영국은 우리를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다."
장제스는 이렇게 썼다. "후대는 앞선 세대가 과거의 수치심을 딛고 이 나라를 세우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알아야 할 것이다." 그는 중국에 닥친 재난의 화근이 단순히 일본에만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영국이 그동안 중국에서 저질렀던 오랜 제국주의 역사를 기억에서 지울 생각 또한 없었다. - P293

문제는 중국과 서구가 서로 전혀 다른 관점에서 중국의 처지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서구 연합국들이 보기에 중국은 일본군에게 온갖 괴롭힘을 당하는 동안 미국과 영국이 나타나 자신들을 만행으로부터 구해주기만을 무릎 꿇고 간절히 기다리는 애처로운 나라였다. 반면, 장제스와 대다수 중국인의 생각은 자신들이야말로 추축국의 침략에 맞서 처음부터 끝까지 흔들림 없이 싸워온 수였다. 전쟁을 그만둘 기회가 수없이 있었지만 중국은 외부의 개입 가능성이 제로인 절망적인 순간에도 포기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제는 그들과 동등한 열강으로 대접받을 자격이 충분하다고 여겼다. 미국은 영국보다는 좀더 중국이라는 동맹국에 대해 호의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비록 일부 영국인들이 중국을 동정하기는 했지만 대체적으로 이들은 은근한 무심함과 노골적인 경멸감 사이에서 오락가락했다. (중략) 영국과 미국인들은 실질적인 협력 관계에 노력하기보다는 그저 (말로만) 중국이 자신들에게 중요한동맹국의 하나라고 여길 뿐이었고, 결국 장제스는 서양 연합국들에 대해 자신의 가치를 과대평가하는 결과가 되었다. - P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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