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직장의 창립기념일이었다. 천금과 같은 평일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한참을 고민했다. 첫째 어린이집 함께 가서 30분간 놀아주다 몰래 도망 나오고(아빠 가는거 알면 우니깐), 둘째 낳은 여동생에게 애들 옷 우편 등기로 보내고, 새똥이 덕지덕지 붙은 차 청소하고, 못쓰는 가방 이웃 아파트 재활용품 박스에 넣고 오고, 은행가서 그동안 모은 10원짜리 동전 187개 큰 돈으로 교환하고도 시간이 많이 남는다.
들뜬 마음으로 버스타고 한강다리를 건넜다. 신촌으로 향했다. 언젠가 한번 가봐야지 했던 '숨어있는 책'에 드디어 도착했다. 헌책방에 가본 지가 너무 오래되어 떨리기까지 했다. 예전에 다니던 고등학교 아랫동네가 그 유명한 '보수동 책방골목'이었는데 그땐 그 헌책방들이 지니고 있는 가치를 몰랐다. 그저 참고서 팔아치우거나 싼 값에 사는 곳으로 생각했을 뿐이다.
'춘아 춘아 옥단춘아'에 멋지게 나오시는 사장님은 예의 그 얼굴로 지하 책방 책상에 앉아 계셨다. 하얀 고무신을 신고... 얼떨결에 인사를 꾸벅했다. 주인에게 인사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지만, 여느 주인이라 인사한 것이 아니라 유명인이라 떨리는 마음으로 아는 척 했다는 것을 그 분은 아실까? 내가 알라딘에 오게된 경위가 사실 잘 생각이 나지 않지만, 아마도 그 책의 영향이 크지 않았을까 싶다. 결국은 알라딘에 몸을 맡겼고, 드디어 숨어있는 책에 발을 디뎠다.
1층엔 소설이나 실용서적이 많이 자리잡고 있었다. 대부분의 고객은 역시 고리타분하게 생긴 얼굴과 공부 잘하게 생긴 옷차림을 하고 있었지만, 21세기가 원하는 세련되고 므흣한 차림의 20대 초반 여학생 몇몇도 있더라. '난 워낙 책을 안봐서 말이지...' 라고 말하는 것을 보니, 여기 자주 오지는 않는 모양이다. 그래도 이런 서점이 옆에 있다는 것 자체가 그들에게 얼마나 큰 축복이고 행운인지 알까..
지하로 내려갔다. 사회과학 서적이 자리잡고 있다. 막상 읽어내기는 쉽지 않아 내가 이거 왜 샀나 항상 생각하지만, 이상하게 내 눈은 사회과학 서적으로 향한다. 지하층엔 2000년대 이후의 책들이 그리 많은 편은 아니다. 살까 말까 망설였던 몇몇의 책들은 꽤 여러 권이 진열되어 있다. 헌책방에 재고가 많은 책들은 책으로서 인기가 많아서 비디오가게처럼 몇 권씩 진열되어 있는 것일까, 아니면 인기가 없기 때문에 주인으로부터 버림받고 이 곳에서도 아직 새 주인을 못 만나고 헤매고 있는 것일까?
2004년 말에 출간된 어떤 책은 선배가 후배에게 선물한 것이었다. '노동조합에 대한 이야기지만 우리에게도 꼭 필요할 것 같다, 열심히 하자'는 내용이 앞쪽에 써있었다. 그런데, 후배는 1년이 채 되기도 전에 이 책을 헌책방에 다시 팔고 만다. 저자 증정도 아니고, 억지로 강매한 책도 아니고, 선후배의 이름이 또렷이 박혀있는 이 책을 팔고 싶을까? 최소한 그 부분은 찢고 팔아야 하는게 아닌가? 하긴, 그런 글씨가 써있는 것이 후대가 보면 살아있는 역사로 보이긴 하지.
자기 이름으로 된 논문을 사람들에게 돌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공감할 것인데... 가장 비참할 때가 자기가 증정한 논문이 어느날 재활용 폐지에 분류되어 버려져 있거나, 누군가의 심부름 커피 받침대로 쓰일 때...
잡소리 끝내고 이날 산 책 소개..
1. 대한민국 학교대사전 : 가장 최근에 발간된 책. '학교대사전 편찬위원회'라는 거창한 곳에서 만들었지만, 알고 보면 고등학생들이 저자. 얼마전에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고 신문에도 나왔던 이 사전이 책으로 발행되었던 알만한 사람은 아는 책. 학교에 대한 풍자가 가득하다. 글 솜씨도 남다르고. 집으로 오는 지하철에서 킥킥 거리며 웃느라 내릴 역을 놓칠 뻔 했다... 나중에 제대로 한번 소개하련다.
2. 로쟈 룩셈부르크를 산 이유 : 이거 읽으면 알라딘의 로쟈님처럼 유식하게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말도 안되는 생각에서...
3. 음식문화의 수수께끼 : 나름대로 인류학에서 유명한 책... 이걸 교육인류학적으로 해석하여 교사들의 문화를 이해하고 분석하는데 이용되기도 하더군. 부분적으로 복사해서 봤었는데, 하드 커버를 발견하고 냉큼 장바구니에 쏙. (그런데, 이 책만 해도 지하 공간에 4권이나 있었다...)
4. 도대체 사람이란 무엇일까? : 책 제목도 궁금증을 유발하고, 저자들의 면면도 구매욕구를 땡기게 하지만 무엇보다도 '뿌리깊은 나무'라는 출판사가 나의 지갑을 열게 하였다. 아, 나는 '뿌리깊은 나무' 출판사에 대한 무한한 애정이 있나봐... 나만의 로망인가봐.
5. 교육이론과 저항 : Giroux 를 어떻게 발음할까? 민망하게도 '지루'라고 읽는다. 왜 민망하냐고? 그냥. 앞으로 정독할 일은 거의 없다고 보지만 내가 산 이유는? 나름대로 전공서이기 때문이다... 이런 책들은 더이상 발간되지 않으며, 큰 서점에도 이제 몇권 안남았을거다. 보이는 족족 사재기 해야 한다.. 나를 위해서도 그렇지만, 내 후배들을 위해서. 물론 후배들에겐 원서로 보라고 윽박지를테지만..
6. 교육과 사회구조 : 이 또한 전공서적이라 사재기. 그렇지만 사재기란 말이 무색할 정도로 3권이 더 있더군. 알라딘에 '절판'이라고 나오는 다른 책들과 달리, 아예 책 자체가 검색되지도 않는다. 그렇지만 무시하지 마시라... 세계적 석학 우리 전공교수님이 대학원 수업 첫 시간마다 학생들에게 읽히게 하는 것이 바로 이 책의 첫 장이다. (물론 원서로..) 1970년대 책이지만, 아직까지도 유효하다. 너무 구닥다리이지 않을까 생각할 수 있지만, 기원전 인물인 소크라테스가 쓴 책도 읽지 않는가? 70년대 책이면 청년이다.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사회과학 전문 서점으로 자리매김했던 우리 학교앞 서점은 지금은 변모하여 지역사회 주민들을 위한 거의 유일한 문화공간이 되었다. 한때 서점의 모든 공간을 차지했던 사회과학 서적은 이제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 구석으로 내몰렸다. 그래도, 서점 자체가 없어지곤 하는 이 시대에 지역사회에 없어서는 안될 존재로 환골탈태한 그 서점에 무한한 애정을 보내고 싶다.
숨어있는 책도 마찬가지.. 천수만수 누리시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안타까운 사실. 지하에서 '헬리코박터를 위한 변명'을 발견했다는 것.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앞에 말 그림이 그려져 있지 않다는 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