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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랑한 은둔자
캐럴라인 냅 지음, 김명남 옮김 / 바다출판사 / 2020년 9월
평점 :

발랄하게 우울하고싶다. 그런 소망을 품은 적 있다. 우울이란 감정은 내게 중하기에 이것을 차마 떼어놓을 생각을 하지 못하고 평생 이걸 안고 살아야하니 기왕이면 나는 발랄하게 우울하고싶다는 꿈을 품은 적 있다. 한창 우울했던 시절에. 고통은 수시로 어떤 형태를 지녔는지 알려주지도 않은 채 다가와 훅을 날린다. 버텨볼만큼 버텨보리라 하고 이를 악문다. 맞서면서도 감당하기 힘든 지옥불과 같은 고통이 언제 다가올지 모른다. 담대해지리라 하지만 순간 무릎이 꺾이고 땅바닥을 맨주먹으로 쳐서 손가락뼈가 으스러지는 순간이 분명 있으리라. 겪어본 적 없어 상상으로도 알 수 없으나 사지가 찢기는 고통. 이 생에 한 번은. 그럼에도 발랄할 수 있을지. 감히 발랄하고 더 발랄하게 인생을 즐기겠다는 무모한 말을 할 수 있을지. 그렇지만 나는 발랄하고싶다. 너털웃음이 나온다. 사지가 찢기워지는데 그 후에도 고통은 가시지 않는데 어떻게 발랄하겠단 말인가. 그게 인생에 가능하겠는가. 그리고 인생. 불가능에 가까운 일들을 가능하게 만드는 인생. 발랄한 고통은 극히 모순적이라 눈썹부터 찡그려진다. 아무에게도 말한 적 없지만 설령 내가 괴물이 된다고 해도 나는 발랄해지고 싶다. 누군가를 해치지 않고 그저 발랄하게 생의 템포를 마지막 멈춰지는 순간까지 이끌어나가고 싶다. 어떻게? 발랄하게.
캐럴라인 냅의 명랑한 은둔자를 완독했다. 마음으로는 별 다섯인데 아직은 별 다섯을 언니에게 주고싶지 않아요. 다른 책도 읽어보고 어제처럼 확 몰아치지 않고 느긋하게 재독하고 별 다섯을 드리고싶다. 차분하게 이지적으로 마주 앉아 나는 이런 이런 시간을 보냈어, 너는 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니? 봄바람이 이렇게 좋은데 (언니, 봄바람이 아니라 황사바람이에요, 황사바람) 너는 왜 우울하게 내 책을 읽고 있니. 세상에 얼마나 좋은 책이 많은데. 그리고 너 사페도 아직 완독하지 못했잖니. 친구들이 사페 읽는 동안 너 나 읽으면 너무 비겁한 거 아니니. 언니 사페가 제 생각만큼 재미있지 않아요. 그러니 잠깐만 언니 읽고 다시 사페로 돌아갈게요. 아니 언니 근데 왜 이렇게 글을 잘 쓰세요. 막 무너지네요 제가. 페이지를 넘기는 손가락이 딱 정지 상태로 있고 다른 일로 돌아가야 하는데 돌아가지지 않아요. 아니 언니 왜 이렇게 자신을 혹사시키셨어요. 내가 나를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이 말 모르세요? 똑똑한 언니가! 너무 이른 나이에 도착한 죽음. 더 살았다면 분명 번역가의 말처럼 오래오래 더 많이 좋은 글을 써서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했을 텐데. 고립과 고독, 중독에 대한 것들, 나쁜 연애, 사랑에 대한 열망, 완벽한 부모님의 무너져가는 모습을 마주하는 동안, 혼자 사는 여성의 고독, 우정, 개와의 사랑 등등에 대해서 캐럴라인이 하는 말들 주워담는 동안 반짝반짝 빛나는 구슬 하나 떠올랐다. 모든 것들이 끝났다고 여길 때 살그머니 떠오를 수 있는 마법 구슬 하나를 선물받은 느낌이다. 자신을 극단으로 몰고가는 사람들은 위험하다 분명. 곁의 이들까지 다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몸이 아파 술을 갑자기 확 끊고난 후에야 어느 정도로 엉망인 삶을 살았는지 깨달았다. 아직까지 중독은 아니지, 중독 직전까지 갔지. 하지만 지나고보니 중독이었다.
완벽하지 않은 인간이 자신에 대해서 이토록 명료하게 드러내보이기가 쉽겠는가. 다른 이들 눈살을 찌푸리지 않게 하면서도 읽는 동안 느낌과 생각하기를 동시에 하게 만들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안다. 캐럴라인 냅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제목이 좋았을 뿐이고 김명남 번역가가 번역했다고 해서 목을 길게 빼었을 뿐, 그중에 제일인 건 역시 표지였다. 정면을 응시하지 않고 허공을 바라보며 내 안에 있는 것들을 헤아리는 시간, 하얀 커피잔이 앞에 놓여져 있고 내가 나에게 혹은 사랑하는 이에게 그 안에 있는 것들을 내보이는 시간. 스스로 삶을 헤아리는 시간. 그런 것들이 담겨져 있어서 책이 나온 후 바로 사지도 않고 바로 읽지도 않고 그림을 한참 바라보고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나는 나에게 누구일까. 내 인생은 나를 어디로 데리고 갈까. 나는 이 인생으로 무엇을 할지 그런 것들을 중간 지점에서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표지 속의 여인은 내게 그러한 것들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딱 중간까지 살았는데 이쯤에서 내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분명 잘못하고 있는 일이 있을 텐데 어긋난 방향으로 나가고 있는 게 뜻하지 않게 때로는 뜻해서 있을 텐데 이 엉망으로 꼬인 것들을 어떻게 풀어나갈지 앞으로도 계속 이것들을 품고 나아가야 할지 아니면 아쉽지만 괴롭지만 이제는 이것들을 놓아주고 자유롭게 안온하게 생을 살아가도록 확 뒤집어엎어야 할지 그런 것들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여인. 그건 나이와 무관하다. 열심히 살아가면서도 한 번씩 멈춰서 내 인생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바라봐야하는 순간 있으니. 그림 속의 여인과 마찬가지로 캐럴라인 냅의 글 역시 너도 한번 체크해봐, 네 현재 인생을, 알려준다.
같은 맥락에서, 내가 더 애정에 굶주리고 불안정한 상태일 때는 그 갈망이 격화된다. 사랑받는 느낌이란-진정으로 사랑받는 느낌이란- 일종의 균형이 필요한 일이다. 그 느낌은 상대와 내게서 절반씩 생겨나야 한다. 사랑은 솟구쳤다가 가라앉았다가 하는 역동적인 감정이다. 가끔씩 밀려드는 의문과 실망과 애매함의 파도는 사랑의 자연스러운 물결에 반드시 있기 마련인 그 일부다. 이런 깨달음이 마냥 좋은 건 아니다. 나도 이런 현실이 싫고, 그래서 자주 맞서려고 한다. 아직도 나는 동화적인 환상, 어린 시절부터 뇌리에 새겨온 신념, 즉 언젠가 완벽한 사람이 나타나서 나를 사로잡아 모든 것이 분명하고 밝고 모호함 따위는 없는 미래로 데려갈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기가 끔찍이 어렵다. 하지만 나도 인간일 뿐인 것을 어쩌겠는가. 나는 사랑받고 싶다. 한없이 한없이 한없이. - P81
중독은 즐거움과 기쁨과 놀라움을 마비시킨다. 우리가 진정한 친밀감, 진짜 웃음, 진실된 통찰에 다가가지 못하도록 붙잡는다. 마취제를 버릴 때, 우리는 자신의 인간성에서 가장 의미 있는 측면들을 되찾을 기회를 스스로에게 주는 셈이다. 삶을 살 기회를 스스로에게 주는 셈이다. 그걸 상상해보라. - P225
겸손한 영혼을 갈망하는 마음, 당신의 기대를 감당 가능한 수준으로 낮춰줄 현실적 세계관을 갈망하는 마음이다. 쉬고 싶은 마음, 당신이 아닌 존재가 되려고 발버둥 치기를 그만두고 (이 대목에서 깊은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그냥 당신으로 존재하고 싶은 마음이다. - P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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