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래지어만 입고 찍은 셀피를 카톡 프로필로 설정할까봐 엄마가 두려워하는 걸 보는데 웃음이 키득키득 나와버렸다. 전애인에게 보여주고 싶어서 어제 포스팅에 올렸다가 내렸다. 만일 봤으면 지난 밤에 그가 다 봤을 테고 보지 않았다면 뭐 그러려니 하고 패스하면 그만이니까. 태어나서 처음으로 딸아이가 아침을 차려주었다. 아주 심플한 아침 식사였지만 나는 만족스러웠다. 한석봉 어미를 흉내내어 아이에게 말했다.

이 어미는 글을 쓸 터이니 너는 앞으로 공부를 하는 틈틈이 살림을 하도록 하렴, 딸아.

딸아이도 그게 더 나은 길일지도 모른다. 우리의 인생을 봐서는. 이라고 했다. 간단하게 여행 관련 후기를 대화로 공유하는 동안 아이도 비슷한 걸 느꼈구나 싶어서 응응 고개를 끄덕거렸다. 비비언 고닉을 다 읽었다. 이토록 가슴 벅찬 걸 어떻게 문장으로 화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멍때리고 있던 중 엄마가 와서 엄마랑 대화를 나누다가 서로 급발진하는 바람에 또 싸울 뻔 했다. 엄마는 이야기했다. 이혼한 년이 제일 상팔자고 다들 일하느라 뼈 빠지게 고생하고 다른 내 딸들은...... 거기 일말의 부끄러움을 느껴야 하는가 싶었으나 느껴지지 않아 그러니까 말야, 제일 놀순이인지라 계속 놀기만 하네...... 했다. 죽을 때까지 철들기는 글렀다.

설거지를 하는 틈틈이 만일 내가 해리였다면 나는 그렇게 어설프게 모든 걸 드러내지 않았을 텐데_ 라는 생각을 했다. 조급함이 언제나 문제인 거다. 그 조급함이 모든 과정을 어긋나게 만든다는 사실을 그는 대체 왜 몰랐을까 싶었다. 꾼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어설프구나 아가야, 라고 나도 모르게 이야기했다. 꾼에게도 진심이 없다는 말은 아니지만 만일에 정말 그가 꾼이었다면 그리고 내가 만일 꾼이라면 그렇게 성급하게 굴지 않았을 텐데_라는 생각을 할 수 있는 건 전애인과 주고받은 대화들이 마치 매트릭스처럼 쫘악 내 뇌 스크린에 펼쳐졌기 때문이다. 오, 해리, 가슴이 아프구나, 나도 모르게 그렇게 워딩을 하고 있었는데 그건 내 진심이었기 때문이다. 사랑을 위해서는 두 눈알을 뽑아주고 내 코를 쓱싹 베어서 내줄 수도 있고 내 혓바닥을 싹둑 잘라 어여쁘게 리본을 묶어 바칠 수도 있건만 남자들은 그 조급함으로 너무 자신의 패를 성급하게 드러내 보여준다. 물론 이건 성별과 무관하지만. 까닭은 무엇인가. 인식의 놀라움. 이른 새벽, 딸아이의 꿈을 방해할까봐 살며시 일어나 티셔츠를 걸치고 바지춤을 추켜세우고 화장실로 가 물을 빼고 양치질을 하고 머리를 틀어올려 세수를 하고 로션과 선크림을 바로 바른 후 물을 마시고 커피를 내리면서 비비언 고닉을 펼쳤다. 호텔에 있는 동안 제일 하고 싶었던 건 내내 비비언 고닉을 읽는 거였다. 하지만 나는 엄마로서의 역할과 친구로서의 역할과 딸아이 친구 엄마로서의 역할도 수행해야 했기에 비비언 고닉을 들추는 일은 잠깐씩만. 엄마, 엄마, 내 배가 수영장 바닥에 닿았어! 아이가 소리를 질러서 페이지를 접고 손을 흔들어주고 아이를 응원해주고 사진을 찍어주고 접었던 페이지를 펼치고 다시 한 페이지 읽으니 내 옆 썬베드에 누워있던 새로 사귄 친구가 책이 그리 좋나? 물어봐서 좋긴 좋은데 이혼하느라 연애질하느라 제대로 읽지 못한 게 어느덧 1년이 흘렀다. 이제 막 다시 읽는 거다_ 말하니 책을 그리 사랑했으면 인기가 어마무시했겠네, 라고 해서 책 읽는 게 인기랑 무슨 상관인데? 어이가 없어서 웃다가 또 읽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와 며칠 동안 묵혀있던 답답한 공기를 내보내느라 창문이란 창문은 모조리 열고 청소를 하고 걸레질을 하고 버려야 할 물건들을 버리다가 유물 발견, 그러니까 그런 시절이 내게도 있었는데 곧 완경이라니, 결혼할 때 예물로 받았던 진주 반지와 진주 목걸이를 우연히 유물과 함께 찾았다. 딸아이와 내 손가락에 똑같이 들어갔다. 엄마가 조금 더 끼고 줄게 이것들은_ 했다. 예물로 받았던 것들 중에 가장 마음에 들어했던 것들인지라. 저녁은 들기름막국수 해달라고 하니 유부초밥 만들어서 해줄까 했으나 딸아, 네가 나보다 더 맛있게 할 거 같으니 네가 다 해보아라, 미션을 줄까 생각중.







인간의 고독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성차별주의의 강력한 동기가 된다는 인식이, 근원적 이유를 사유하는 데 관심을 가졌던 우리 사이에서 득세하기 시작했다. - P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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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4-05-19 20: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밑줄 올리신 부분까지 전 아직은 읽지 못했어요. 너무 좋네요. 인간의 고독과 성차별주의에 대해 고민 좀 해봐야겠습니다.
낮이 길어졌으니까요. 고닉을, 실비아를 읽는 날들이 더 길어지시길 바랍니다.

수이 2024-05-20 09:59   좋아요 2 | URL
제 친구들이 인간의 고독과 성차별주의에 대해서 그리고 한국 정치에 대해서 이런저런 생각들을 나누는 동안 저는 한심하게도 상호모순적인 연애질을 실컷 하다가 이제 뻐끔뻐끔 다시 책을 읽어볼까나 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비비언 언니 책 읽는 동안. 낮이 길어졌고 그러니 한낮에 불타는 사랑을 해야 마땅한 게 아닌가 몸이 다 타버릴 정도로_ 라고 해뤼가 그랬는데 아 보고싶다 우리 해뤼..... 설이랑 해뤼 생각은 잠깐씩만 하고 고닉을 실비아를 읽도록 하겠습니다, 영어는? 영어는? 어쩔 거야? 대체....... 라고 하시기 전에 영어도 하겠습니다 오바

공쟝쟝 2024-05-20 13: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가 수이님을 위해 선택한 문장은 ˝(43) 정념, 정념, 정념. 견고하고 비열하고 파괴적인 정념. 관능적이지도 낭만적이지도 않고. 그저 끓어오를 뿐인. 이걸 내가 어떻게 잊을 수 있었을까. 사랑보다 전쟁에 가까운 정념. 성적 황홀경에 대한 갈망 배후에 도사린 날것의 야성. 그 번민의 깊이. 파멸의 두려움,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결과.˝ ㅋㅋㅋ
수이님의 알라딘 서재 이름은 무엇이다? ˝정념 일기˝이시다. 하.... ㅋㅋㅋ 읽는 문장들 마다 공감가기도 하고 또 사람들이 생각나서. 넘 조음...ㅋㅋ
고닉은 정말... 좋아요...ㅜㅜ

수이 2024-05-20 16:16   좋아요 0 | URL
고닉 읽고 올게요, 좋은 거 알아보는 재능 넘쳐나시는 그대. 일하고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