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를 가르치는 게 가능한가요? 라는 질문에 토니 언니 왈, 일부를 가르치는 건 가능하죠. 비전이나 재능은 불가해도, 허나 글쓰기를 '편안하게 느끼도록'. 여기에 밑줄 그었다. 고등학교 다닐 때, 베프가 글쓰기 부탁을 한 적이 있다. 단칼에 거절했다. 그건 네 이름으로 나가야 하는 글이고 네 시선으로 네 생각이 들어야 하는 글인데 그걸 내가 쓰고 네 이름으로 나간다?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라고 화를 내지 않고 이야기했다. 글을 쓰지 못하는 것도 아닌데 왜 그걸 내게 부탁하느냐 했을 때 내가 3시간 걸려 할 일을 너는 30분 만에 끝낼 수 있잖아, 라고 했다. 그건 내 재능이다. 그러면 선생님께 가서 이야기해. 내가 써줄게, 대신 내 이름으로 내. 나는 네가 아니다. 내 글은 나만의 것이고. 물론 지나고보니 너무 차가웠던가 싶지만 한 시간 넘게 징징거리며 부탁하니 어느 순간 짜증이 확 일었고 있는 그대로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 일이 있고난 후 베프라고 여겼던 그 친구는 나를 칼같이 끊었다. 솔직히 그런 생각을 가진 이를 내 베프라고 여겼던 나 스스로가 한심해서 절연에 대한 슬픔이나 고통 같은 건 느낄 수도 없었다. 모범생이요, 착하고 다정해서 많은 아이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친구였다. 하지만 그 친구와 절연한 순간 완벽한 인간이란 존재하지 않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친구를 이용하기도 하는구나 그게 바로 인간이구나 하고 깨닫기도 했다. 고등학교 시절에 만난 문학과 선생님들과 대학교 시절 내 은사들이 아니었다면 나는 쓰기를 편안하게 여기지 못했을 것이다. 그건 모조리 그들 덕분이었다. 네 혀는 네 열 손가락 끝에 달려 있구나, 라고 선생님은 코멘트를 달았다. 토니 모리슨을 읽다가 이 문장을 읽고 그렇지, 만일 선생님의 그 코멘트가 아니었더라면, 그 선생님들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그 수많은 내 선생들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아마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이게 내 한계라는 걸 물론 알고 있고. 공간은 널찍하고 난방기가 강하게 돌아가지 않아서 공기는 좀 썰렁한 편이다. 뜨거운 커피는 차가운 공기로 인해서 금방 식어버렸다. 글쓰기가 편안하게 느껴지면 좋은 생의 이점들은 무엇이 있을까. 뭐가 있으려나. 작년에 열심히 쓴 편지들을 읽어보았다. 완전 미친년이 따로 없었구나 알았다. 아침을 먹으면서 아이에게도 이야기했다. 그랬더니 엄마는 그때 미쳤고 그게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았다고 했다. 다 삭제할까 하다가 아니다, 그때 미쳤던 나도 나였다 싶어서 정말 이건 못보겠다 싶은 것들만 삭제했다. 메모를 하고 정리를 하고 그 안으로 어떤 것들을 쏟아부을 수 있을까 글쎄, 그건 가봐야 알 일이겠지. 요즘 들어 슬슬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알았다. 집중력을 도둑맞았던 거로구먼, 라는 걸. 그 집중력을 너무 다른 곳으로 쏟아부어서. 그렇다고 해서 그 리비도를 다른 식의 활동에 쏟아부을 생각을 하지 못했던 걸 보면 결이 다른 리비도가 아닌가 싶기도. 그 리비도와 이 리비도에 경계가 있고 그걸 뒤섞을 생각이 나는 없다, 여전히 그러하고. 존경도 없고 폄하도 없다. 정도껏의 애정과 정도껏의 무관심일뿐. 내 안에는 특유의 스토이시즘이 있는데 이 뷰포인트가 나를 제3자로 만들어주는구나 알았다. 잘 쓰고 잘 읽는 이들은 깔렸다. 단순히 그 행위를 잘 한다고 해서 호기심이 일지도 않고 애정이 지속되지도 않는다. 글 잘 쓰는 친구 하나가 있는데 더 이상 그 친구에게 일절 애정이 가지 않는 걸 보고 또 알았다. 잣대를 어디에 두었는지 알겠더라. 베셀 작가가 되면 좀 다시 애정이 생기려나 싶기는 한데 베셀 작가가 되어도 애정은 일어나지 않을듯 하다. 친구였을 때는 너와 나의 결이 같다,는 말이나 그 애인이 제일 닮았다는 소리를 들려줬을 때 아 뭔가 기쁘군 했으나 친구가 아니라고 여겨진 순간부터는 너와 나는 다른 결이다, 비슷한 관계를 가졌다 해서 같은 종족으로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라고 거리를 두는 나를 보고 또 알았고. 눈발이 날렸다가 멈췄다가 한다. 가치를 어디에 지니는지 알 거 같네. 깨끗하다고 여겨지는 면모와 더럽다고 여겨서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것들. 업보라는 게 있다면 그걸 주관할 이는 내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내 업보는 내가 알아서 한다. 그러니 제발 관심도 없는데 내 업보를 갖고 왈가왈부 하지 마. 한 녀석은 장자를 갖고 그렇게나 깨닫는 척을 하더니만 또 한 녀석은 붓다 말씀 연이어 계속. 아 머리 아파. 라는 소리가 나오기도 나왔다. 딸아이가 같이 커피를 마실 나이가 되었다는 게 신기하긴 신기하군. 낯선 말로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고스란히 쓰지 못할 때의 답답함과 갑갑증을 얼마나 느껴야 하나. 언니 시나리오 작품 엎어졌다. 세상이 날 억까해, 라면서 5키로 빠졌다고. 술 마시지 말고 담배 태우지 말고 억까 한두 번 당하나, 우리 나이에, 밥 챙겨 먹어, 잠 잘 자고. 했다. 세상이 날 억까해, 이럴 때는 스토아주의로 나가는 게 제일 마음 편함. 문장을 직조할 때, 그 직조 과정을 배우는 게 나는 좋은 거로구나 그것도 이번 기회에 새삼 알았다. 문장의 구조를 알고 낯선 말을 익숙한 말로 바꾸고 익숙한 말이 낯선 음향으로 같은 의미를 지닐 때. 눈이 하염없이 내리는 걸 창 밖으로 마주본다. 1년 전에는 눈도 좋았고 눈 설 그 글자도 좋아했다. 1년이 흘렀고 눈은 여전히 좋지만 눈 설 그 글자는 이제 싫어한다. 함께 사는 동안에는 스트레스를 매일 받아서 어쩔 줄 몰라 했는데 헤어지고난 후 완벽한 타인의 자리에서 서로를 마주할 때는 더할 나위 없이 친절하다. 인간 대 인간으로서. 이건 참 낯설면서도 신기한 경험이군. 거리감을 두고 서로를 완벽한 타인으로 대한다는 것. 인간이 실패를 두려워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 실패로 인해서 얼마나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 미리 헤아린다고 해서 딱 그 헤아린 만큼의 고통을 당하는 것도 아니기에. 하지만 확실한 건 실패를 한 인간은 한 번 더, 그러니까 실패를 다시 맛보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거다. 어느 정도 내가 모럴을 갖고 있는 인간이라고 칠 때, 내 모럴의 기준은 이거라는 걸 올해 1월 알았고.
